[230] 기둥과 울타리

작성일
2004-06-10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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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0화] 기둥과 울타리




날이 더워지면서 점차로 상담의 스타일은 부부문제로 부각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원래 상담실의 여름철은 흔히 하는 말로 비수기에 해당한다는 것인데, 그러다보니 문제가 심각하지 않으면 상담실을 찾지 않는다는 의미도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다가 보니까 상담실에서 의뢰하는 경우에도 가정 문제가 심각하게 거론이 되고 있는 것도 어쩔 수가 없는 현실이라고 해야 하겠다. 벗님의 가정은 더운 날씨에 안녕하시겠으나 상당수의 가정에서는 얼키고 설킨 사연들이 더운 날의 火를 감당하지 못하고 마구 폭발을 파는 것으로 생각을 해 봤다.




1. 남편의 마음




상담실을 통해서 여러 가지의 상황들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 중에는 이혼을 하게 되면 처가로부터 위자료를 얼마나 받아 낼 수가 있겠느냐는 것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그런 사람은 극소수라고 하겠고, 대다수의 남편들은 아마도 자유를 호소하는가 싶다. 다수의 남자들은 자신의 아내에게 원하는 것이 울타리가 되어 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내가 울타리를 지키지 않고 밖으로 나돌아 다니게 되어서 얻어지는 스트레스가 상당히 크다고 하겠고, 나돌아 다니게 되면서 가정의 형상이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된다고 하는 현실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모양이다.




1) 활동적인 아내를 둔 입장




날이 갈수록 점점 여성의 활동 영역이 넓어지면서 이러한 현상은 날이 갈수록 구체적으로 다양하게 나타날 것이라는 것도 현 사회의 구조에서 능히 읽을 수가 있다고 하겠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묘안이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어차피 각자의 생각대로 그렇게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이미 활동의 맛을 느낀 아내는 도저히 가정에서 자신의 남은 삶을 낭비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녀평등의 시대임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일을 가정보다도 더 소중하다고 하다가 보니까 이 과정에서 남편의 마음은 갈등에 휩싸이는 모양이다.




한편 백수의 기질이 있는 남편이라면 오히려 환영을 할 것이다. 종일 만화책이나 뒤적이면서 리모컨과 벗을 삼아서 하루를 시작하고 마치는 삶이라고 한다면 아내의 출근과 함께 자신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도 없다고는 못하겠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이 서로 만나게 된다면 그야말로 궁합의 천생연분이라고 해야 하겠는데, 세상은 그렇게 공평하지가 못한 모양이다. 그래서 그야말로 편리 위주로만 생각한다면 시험 삼아서 십년 정도 살아보고 그 다음에 결정을 하는 시험결혼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싶기도 하지만, 그것도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이야기일 게다. 그래서 많은 가정에서는 갈등을 일으키게 되고, 그 과정에서 아내와 살지 못하겠는데, 좋은 방법이 없겠느냐는 것을 상담실에 의뢰하게 되는데, 너무도 간단한 결론이 있지만, 실로 더욱 어려운 것은 결론대로만 추진을 하기도 어렵다는 것이 문제이다.




2) 비활동적인 아내를 둔 입장




아내는 가정에서 살림을 돌보고 남편은 밖에서 활동을 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은 어쩌면 가장 한국적인 역할분담이라고 해도 되겠다. 이러한 경우에는 아내에게 울타리가 될 것을 요구한다. 삽작문(혹은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 집에서 배웅을 하고, 문을 열고 귀가하면 웃으면서 반겨주는 아내를 원하게 될 것으로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아내는 가정의 살림에 알뜰하게 생활을 하게 된다면 아마도 자신의 적성대로 자신의 일을 하게 되는 가정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그럼 되었지 뭐가 문제냐고 질문을 하신다면 더욱 눈치가 밝으신 벗님이다. 그리고 무엇이 문제인지도 이미 파악을 하셨다면 이미 세상을 절반 이상은 살았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 왜냐면 직접 살아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는 지혜도 있다고 봐야 할 것이고, 그래서 지식으로만 답이 나오지 않는 것도 수두룩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까닭이다.




여기에서의 문제는 아내가 집안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족쇄가 되어서 따라 다닌다는 것이다. 집안에 있어도 마음은 온통 남편의 뒤를 추적한다. 여기에 식신이 추가되기라도 한다면 더욱 왕성한 상상력까지 동원해서 소설을 쓰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는 드라마에서 항상 보여주는 바깥에서의 남자가 하는 일들에 대해서 얻은 상식도 한 몫 할 것은 틀림이 없다고 하겠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독립을 할 능력이 되지 않는 것은 불안할 것이다. 그러다가 보니, 남편이 엇길로 가게 된다면 자신은 그대로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질 가능성에 대해서 불안해하게 되고, 그래서 더욱 남편을 압박하고 조여들게 되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고 보겠는데, 이렇게 되면 남편의 마음이 또한 원하는 바가 아니라고 하는 점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상담실의 결론은 아내의 의부증으로 인해서 생활을 하는데 장애가 발생하여 일을 할 수가 없을 정도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주를 보게 되면 물론 사주에서 서로 불화가 발생할 여지에 대해서 이해를 할 수도 있겠는데, 주로 아내의 사주가 신약할 경우에 이러한 현상이 좀 더 발생할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여하튼 남자도 사람이고 또 생물학적으로는 수컷이니 언제라도 실수를 할 가능성이 있다고 해야 하겠는데, 혹시라도 한번 그러한 실수의 과오를 범하게 되는 남편이라고 한다면 그의 아내는 모든 상상력은 그와 연결되게 된다는 것은 아마도 당연할 것이라고 봐야 하겠다.




남편의 입장에서야 과거의 허물이 있어 더욱 열심히 아내에게 잘 했다고 해도 언젠가 세월이 흘러가면 다시 자유로운 나날을 얻게 되리라는 기대감으로 인내심을 발휘했었다면 이것이 바로 문제의 2차전이 된다는 것이다. 아내는 절대로 발목을 놓아 줄 의사가 없는 것이고, 오히려 움켜쥔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게 되는 것은 아내의 입장에서도 남편을 떠나서는 독립을 할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며, 이러한 것은 나이를 먹어 갈수록 더욱 커진다는 것이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3) 남편들의 해결책은?




“하하~”




이렇게 웃는다. ‘세상의 모든 남자들아, 여기에는 해결책이 없느니라’의 의미이다. 참으로 해결책은 없다. 다만 궁합적으로 이해를 할 수가 있고, 사주적으로 각자의 타고 난 천성을 설명해주는 것이 상담실에서 할 수가 있는 대안이라고 하는 점을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고도 본다. 부처의 말에 ‘사랑하는 사람을 두지 말라, 못 만나 괴롭다.’ 했다는데, 실은 못 만나 괴로운 것도 그렇겠지만, 너무 집착을 받아서 괴로운 것도 분명 여기에 첨부시켜야 할 것이다. 아내가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았다고 한다면, 결론은 두 가지 중에 하나로 날 수 밖에 없다. 그 하나는 이해하고 살아가는 것이고, 그 둘은 각자 자신의 길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말은 쉬워도 실행은 그리 만만치가 않은 것이 문제라면 문제이다. 왜냐면 그 사이에 살아오면서 많은 사연들이 얽히고 설켜있는 까닭이다. 서로 뭉치면 물건이 되었다가는 분해를 하게 되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는 ‘레고블럭’이 아니라는 것이다.




2. 여편의 마음




낭월은 남자이기 때문에 여편의 마음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만 여러 경로를 통해서 얻어 들은 지식을 종합해서 생각해 볼 뿐이다. 크게 벗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1) 의지력이 약한 남편을 둔 입장




남자가 남자답지 못하면 웃음거리가 된다. 여기에서 남자다움이라는 것은 가정을 유지할 재물을 벌어 와야 하는 것이 대표적일 것이다. 처자식을 벌어 먹이지 못하면 남자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되기 어렵다고 하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남편이 그와 같이 중심이 없이 주변의 말이나 아내의 결론에 따라서 우왕좌왕하게 되면 여자는 아마도 그렇게 생각을 할 것이다. ‘남편이 저래서야 일생을 의탁할만 하겠는가?’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야 마음을 놓을 수가 있지 않을까 싶은 의구심이 자꾸만 들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아무리 밖으로 나가서 돈을 좀 벌어보라고 해도, 요지부동이다. 세상에서 적응하는 힘이 떨어지는 남편도 의외로 많다는 것을 상담실을 통해서 발견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 여성의 입장에서는 갈등을 하게 된다. 그리고 급기야 헤어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면 이런 여성이 상담실에서 문의하는 것은 앞으로 남편의 운이 좋아지거나 활동력이 생길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답을 뻔히 알고 있는 낭월의 관점에서 남편의 사주를 보면서 입맛을 다시게 된다면 아마도 사주도 무력하고 운도 없다는 의미 일게다. 그리고 그 동안에는 운이 무력했지만 앞으로는 활동력이 생길 사주와 운이 있다고 한다면 또한 기대를 해보라고 권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천성적으로 수컷은 게으른 것이 자연의 한 모양새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니까 아내가 일을 하게 되면 남편은 빈둥거리게 될 가능성이 많은 부부를 보게 되기도 하는 것이리라. 셔터맨이라는 말은 있어도 서터우먼이라는 말은 없는 것만 봐도 남자는 그렇게 빈둥거릴 가능성이 많은 본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해 봤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여성이라면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스스로 독립을 위해서 뭔가 준비를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무슨 일이 자신에게 잘 어울릴지를 묻고자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이른바 ‘남편을 버리는 아내’가 된다고 할까? 아마도 결혼의 인연도 멋진 모습에 취해서 능력을 소홀하게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원인의 단서를 아무리 살펴본들 이미 지나간 이야기이니 소용이 없다고 하겠고, 혹 아직 미혼의 여성이 이 글을 보신다면 정말로 일생을 의지할 만 한 것인지를 냉정히 따져봐야 이러한 고민에 빠지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시기 바란다. 남자의 생활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고 해야 할 모양이다. ‘설마.... 나에게 다가올 일은 아니겠지....’ 라는 생각은 여하튼 아무도 책임을 져주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시면 되겠다.




2) 활동적인 남편을 둔 아내의 입장




일단 가장 이상적인 가정이다. 아내는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면서 살림을 하고, 남편은 밖에서 돈을 벌어온다. 그러면 뭐가 문제냐고 하겠는데, 이것이 바로 서로의 생각에 대한 차이라는 것이다. 남편이 활동적이다가 보니까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 과정에서 혹시라도 맘에 드는 여성을 접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라마와 연결이 되는 것이다. 혹 그러한 조짐이 나타난다면 이것은 조각배가 풍랑의 한 복판으로 나가게 되는 결과라고 하는 위기감이 고조될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남편이야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가정을 버리지 않는다고 서약을 하고 각서를 쓰겠지만, 그것도 한 마음이 돌아서면 모두 휴지조각일 뿐이라고 하는 점에서 남편 한 사람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아내의 입장에서는 그대로 공중분해가 될 가능성에 대해서 심히 두려울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래서 남편이 아무리 족쇄를 채우지 말라고 비명을 질러도 아무런 감응이 없다. 집을 나서면 휴대폰을 먼저 챙겨주고, 집을 나온지 서너 시간이 지나면 전화를 해주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단다. 왜냐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또 언제 가정은 풍비박산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남편에게 집착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가장 큰 문제는 스스로 독립을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독립을 할 능력이 되었다면 진즉에 자신의 길을 갔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와서 아이들 다 키워놓고 나니까 자신은 어느 사이에 초로의 나이가 되고, 의지한 것이라고는 남편 한 사람 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서 스스로 자신의 목표가 상실되는 느낌으로 흔히 ‘갱년기 우울증’에 빠져드는 코스가 발생하는 것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




남자들은 자신의 생각만으로 세상을 만들어 가고, 그래서 아내가 바깥일에 간섭을 한다고 하는 하소연도 하겠지만, 아내가 보기에는 바람을 피울 구실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서 갈등이 고조된 아내가 상담실을 찾게 된다. 과연 그대로 둬야 할 것인지 아니면 이혼을 해야 할 것인지, 그러나 여기에서 이혼에 대해서는 크게 고려하지 않는다. 이혼은 스스로 자신이 서야 할 자리를 내어주는 결과만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보다는 남편의 바람을 방지할 조치로 부적이나 푸닥거리를 의뢰하는 경우도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활동적인 남편을 둔 여인은 여인대로 자신의 고통이 발생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면 인생살이는 아무렇게 되어도 결국은 고통스럽게 돌아간다고 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야말로 ‘苦海’라고 하니 말이다.




3. 영원히 고쳐지지 않을 본성(本性)




늘 상담실에서 만나는 이야기이지만, 실로 세월이 흘러가도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사람의 본성은 참으로 변하기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낭월 자신도 방랑적인 기질을 갖고 있다가 보니 남자들의 하소연에는 공감을 갖게 되기도 한다. 자신의 나이도 어느 사이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왔으니 그야말로 학문에 취해서 오행의 유희를 즐기는 정신적인 삶과 함께, 또한 현실적으로 한 사람의 가장으로 자신의 역할을 완수하기 위해서 앞만 보고서 달려온 세월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노라면 문득 잊혀졌던 방랑기가 슬그머니 머리를 내미는 모양이다. 실로 요즘 낭월은 고노무 방랑기질 때문에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지는 마음을 다스리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자신도 변하기 어려우면서 남들에게 ‘변하는 것은 자신만이 가능하다고 하는 말을 할 자격이 없다’고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냉큼 포기가 되지 않는다.




이렇게 40대의 방문자들에 대한 애환을 듣게 되면, 인생을 살면서 배우는 교훈은 너무도 크다고 해야 할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다가 보니 문득 지금 낭월이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60대의 ‘황혼이혼’을 생각해 보면, 아마도 완전한 그들의 입장을 이해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짐작도 해보게 된다. 왜냐면 그 나이가 되면 배우자의 존재가 더욱 커질 것이고, 그래서 이혼을 생각하는 것은 더욱 어려울 것으로 짐작이 되는데, 과연 어떤 어려움이 있기에 이혼을 생각하게 되는지 아무리 이해를 한다고 해도 완전한 이해가 되려면 또한 그 만큼의 연륜이 지난 다음에서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도 문득 해보게 된다.




아내는 자신의 남편이 언제나 우뚝한 기둥이 되어서 한 평생 아무런 변함이 없이 자신만을 지켜주기 바라는 마음일 것이고, 남편은 아내가 울타리가 되어서 자신이 나가면 가정을 지켜주고 자신이 돌아오면 반겨 맞아주기를 바라는 것이 대다수의 남녀 마음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대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적에 서로는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고 하고, 그래서 뭔가 자신의 희망대로 실현을 시키고자 노력하는 마음이 발생할 것이라고 생각을 해 본다. 그야말로 상대방에게 원하는 희생과 봉사라고나 할까.....




4. 상담실을 찾기 전에......




인생은 결국 자신이 혼자서 자신의 짐을 짊어지고 가는 나그네라는 것을 생각하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이미 답이 뻔히 보이는 질문을 하러 먼 걸음을 하게 되는 중년의 남녀를 상담하면서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참 약한 것이라고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스스로 이미 답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시행을 못하고는 여기저기에 질문을 하여 답을 구하지만, 그렇게 구해진 답도 또한 이미 자신이 알고 있던 한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면 허망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엊그제도 하루 동안에 한 남편과 한 아내가 상담실을 방문 했다. 물론 사주의 배합은 도저히 더 살아보라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구조였다. 재미있는 것은 두 사람이 모두 그렇더라는 것이다. 아내가 남편을 극하거나, 남편이 아내를 극하거나 하고 있는 모습에서 가정 내에서의 그림들이 떠오르곤 한다. 사주가 보이면 그 사주를 통해서 주인의 마음도 보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가정의 그림도 보이고, 그렇게 되면 결과도 빤하다고 하겠는데, 그래도 미련과 아쉬움과 원망의 마음들로 얼룩이 져서는 하소연을 하는 마음을 위로해야 하는 것이니, 여성에게는 독립을 준비하기 위해서 능력을 기르라고 해주고, 남편에게는 사주의 암시를 고려해서 참고 살거나 정리하게 되면 그냥 혼자 살라는 말을 해주기도 하는데, 사주의 암시를 벗어나기가 왜 그렇게도 어렵냐는 것이다. 참으로 인생의 길은 길고도 험한 모양이다.




‘아침이슬과 같은 생명’이라는 말이 귀에 들어오면 공감이 되시는지 모르겠다. 만약 이 말이 귀를 거쳐서 가슴까지 들어온다면 아마도 50고개를 넘어서 60문턱을 거닐고 계실 것으로 짐작을 한다. 어느 사이에 낭월도 ‘초로(草露)같은 인생’이라는 말이 공감이 되니 말이다. 그래서 나이가 60을 넘어 70을 바라보게 되면 그 흔해 빠진 회심곡(回心曲)에 마음이 감전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생의 삶이라는 것이 그야말로 ‘내쉰 숨을 들이쉬지 못하면’ 죽었다고 판정하고, 불에 넣으면 재 한주먹, 땅에 묻으면 흙 한 주먹......




천하를 다 줘도 부족할 듯이 헐떡이는 마음으로 세계를 주유하던 호걸들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차로 무력하게 변하면서 나중에는 양지쪽에서 손자들이 뛰노는 모습을 보면서 빙긋이 웃거나, 혹은 나비가 꽃을 희롱하는 것을 보면서 회상에 잠기는 정도로 변하게 되는 것도 아마 자연의 모습일 것이다. 또한 세상의 덧없음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벗님이나 낭월이나, 아마도 또 몇 십 년이 지나고 나서 자신을 돌이켜 보면 그렇게 삶의 굴레를 팔자대로 살아온 자신의 흔적을 보면서 빙그레 미소를 지으려나....




           2004년 6월 10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