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 사주쟁이의 가위 바위 보

작성일
2004-05-29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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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9화] 사주쟁이의 가위 바위 보




초파일을 보낸다고 분주한 것은 해마다 겪는 일이다. 이제 가장 큰 행사를 보내고 조금 한가해진 틈을 타서 이야기나 한 편 올려 드리려고 일찍 잠이 깬 틈을 이용하려고 한다. 어제는 종일 추적추적 내리는 비 속에서 분주한 중에서도 잠깐씩 생각을 하면서 아이들이 노는 모양을 보다가 문득 생각을 해보게 된 가위 바위 보의 이야기를 해 드려볼 요량이다. 말이 되면 더 좋고, 함께 생각을 해보시는 것도 좋겠다.




1. 서양 아이들도 이렇게 노나요?




영화나 텔레비전을 봐서는 서양 아이들이 가위 바위 보를 하고 노는 것을 보지 못한 것 같은데, 실제로 아이들이 그렇게 하고 노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중국이나 일본의 아이들은 당연히 그렇게 노는 것으로 확인을 했는데, 서양에서는 아마도 그렇게 놀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동양사상에 가위 바위 보를 넣어도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봤다. 그리고 아이들이 노는 모습에서 곰곰 생각을 하면 의외로 재미있는 발상을 할 꺼리도 적지 않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문득 여기에 대해서 한번 생각을 해봤었던 점을 이야기 해보기로 한다. 하나의 손에서 나온 결과지만 차이가 뚜렷하다는 점에서 묘미가 있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간단하다는 것이 더욱 흥미롭다. 그리고 혼자서 놀기에도 좋은 것이다. 손이 두 개이기 때문이다.




2. 목을 닮은 가위




가위의 모습은 어떻게 생겼는지 음미를 해 보게 된다. 손가락 두 개가 쓰인다. 혹자는 엄지와 검지를 쓰기도 하고, 혹자는 검지와 중지를 사용하기도 한다. 물론 어느 것이나 모두 유효한 것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가지가 벋은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면 그렇다고 하시리라고 본다. 그리고 가지가 벋은 모습이라고 하는 것에 동의를 한다면 가위는 오행에서 목의 형상을 하고 있는 나무를 닮았다고 하는 점에서 크게 이의가 없겠다.




가위의 의미는 찢는다는 것이다. 자른다는 것도 포함을 한다. 나누는 것도 의미하며, 그래서 흑과 백을 구분하고 선과 악을 분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혹 오행에서 목이 하는 역할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보게 된다. 또 십성으로 대입을 한다면, 목의 역할은 식신이나 상관의 역할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여하튼 목을 놓고 가위와 닮았다고 보는 것은 크게 무리가 없으리라고 봐서 여기에 동의하실 것이라고 혼자 생각하면서 생각의 실마리는 참으로 간단한 것에서부터 발생한다는 점도 늘 생각하게 되는데, 성현들의 말씀에서도 늘 나타나듯이 가까이는 몸에서 진리의 힌트를 찾고(近取身), 멀리는 주변의 사물에서 진리의 힌트를 찾으라(遠取物)는 말이다. 그러니까 몸에서도 도의 힌트를 찾을 수가 있어야 하고, 사물에서도 도의 근원을 볼 수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분명하다고 하겠는데, 그렇게 되면 점차로 자연의 이치를 파고 들어가서 하나가 될 것이라는 의미로 봐서 무리가 없을 것이다.




가위는 식상과 닮아서 분석하고 찢고 분리한다. 이러한 것이 발달한 지역은 서양일 것이고 현대로 갈수록 더욱 세분화로 변해가는 것이기도 하다. 점점 나눠지는 세상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가위의 만능시대가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하다못해 사주해석의 분야만 해도 예전에는 모두를 다 사주쟁이가 책임져야 했는데, 이제는 사주를 풀이하고 분석하는 것에서도 전공분야로 구분이 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시대가 멀지 않아서 다가온다는 것을 점점 느끼고 있는 낭월이다. 그리고 세상의 모습이 복잡해지는 만큼의 명리학 대입도 달리지고 세분화 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우야던둥 가위를 보면서 이렇게 생각해 봤다는 말씀을 드리면 벌써 가위의 기질이 있으신 벗님들은 다시 확장해서 다른 기호에 대해서도 궁리를 하시기 시작한다는 것이 보인다. 이것이 가위의 모습이다. 그리고 동물에서는 새의 부리를 생각하기도 한다. 쪼고 쪼아서 남겨두는 것이 없는 모습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위는 문명발전의 모습을 하게 된다고 이해를 하게 된다.




3. 금을 닮은 바위




그렇다면 바위는 뭘 닮았느냐고 하는 말은 하실 필요가 없겠다. 이미 그대로 닮은 물상이 있으니 말이다. 암석의 바위와 주먹의 바위는 같은 어원이고 같은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태여 설명이 필요 없겠는데, 과연 이것을 오행으로 본다면 금으로 대입을 해서 무리가 없겠다. 물론 바위로 내려 치면 가위가 부서진다는 설명은 아마도 처음에 이 게임의 법칙을 배우게 되면서 들으셨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러고 보니 이미 어려서부터 오행의 법칙에 대해서 교육을 받은 셈이기도 하다고 해야 할 모양이다.




바위에서는 취할 것은 ‘정리하는 의미’로 보게 된다. 가위가 갈라놓은 것을 모두 뭉뚱거려서 하나로 만들어 버린다. 이것이 바위의 역할이다. 그렇다면 십성으로는 하나로 합치는 성분이라고 하겠고, 중심을 잡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자신의 생각대로 밀고 나가는 우직함을 생각하면서 비겁(比劫)의 성분으로 대입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하건충 선생님도 비겁을 금으로 대입했는데, 매우 타당하다고 보는 것에서 연결을 시켜봤다. 또 나아가서는 지식분자는 가위에 해당하는 성분이라고 봐서 이러한 것을 한 모습으로 뭉치는 큰 지혜를 바위로 보자는 것까지 생각을 한다고 해도 너무 비약저이라고 하지 않으시리라고 본다.




그러니까 분석하고 나누는 지식도 결국은 하나로 뭉쳐버리는 지혜 앞에서는 아무런 맥을 쓰지 못하는 것으로 보게 된다. 문득 떠오르는 불교의 고사가 한편 있다. 세기의 라이벌인 신수대사와 혜능대사의 일전을 생각하였던 것이다. 간략히 말씀드리면 신수대사는 가위를 내었는데, 혜능대사의 주먹에 넉다운이 되었다는 말씀인데, 저간의 사정은 육조단경에 상세하므로 혹 관심이 있으신 벗님은 서점에 가시거든 한번 살펴보시라고 말씀 드린다.




바위는 지혜이며, 중심이다. 우주의 중심이기도 하고 그래서 만고불변의 이치라고 말을 할 수도 있겠다. 이러한 것을 불교적으로 본다면 비로자나불이다. 이 부처는 청정법신이어서 분석하고 나눌 의미가 없는 우주본연의 진리 실체라고 하는 것에서 주먹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봤다. 그리고 더욱 재미있는 것은 비로자나 부처님은 주먹을 포개어서 쥐고 있다는 것이다. 주먹과 지혜와 바위와 중심은 모두 서로 닮은 모습을 하고 있다. 벗님의 주먹은 있으신지 생각해 보실 일이다. 혹여 가위만 있고, 주먹은 아직 만들지 못하셨다면 이것은 누구에게서나 이내 바닥을 드러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게임에서는 이미 패배를 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을 생각한다고 보면 틀림이 없겠다. 그래서 늘 낭월도 지혜의 중심에 대해서 생각하곤 한다. 자신의 내부에 금강과도 같은 바위가 하나 없다면 아마도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는 바람개비의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생각을 해보면 입은 가위를 닮았고, 이미 부리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중국 사람은 사람의 입도 부리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 의미가 크다고 하는 점을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입만 살아있고 생각이 중심을 잡지 않으면 주둥이만 영글다고 하는데, 이러한 것도 당연히 내공이 없는 초식에 비유를 할 수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입만 살아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겠는데, 실로 가위만 있어서는 모든 삼라만상을 나누고 분석할 뿐이지 하나로 만들 재간은 없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특히 영화 ‘가위손’을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가위손은 여하튼 자르는 것만 가능하다.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가위를 부숴버리는 노력이 필요하고, 벗님이 이미 오행을 연구하시는 관점이라고 본다면 더욱 이러하 지혜와 지식의 융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으리라고 본다. 정진하셔서 가위와 바위의 사이에서 자유로우시기를 기원드린다.




지식분자들은 도인을 만나면 한 방에 본전이 거덜 나고 만다. 그런데 무지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지식분자들이 가장 큰 대우를 받는 것도 사실이다. 현재로 봐도 지식분자들인 교수님 급의 학자들이 비교적 대우를 받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분자들의 활갯짓도 불타의 지혜 등불 한 방이면 그대로 무너져 내린다고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소동파와 고승의 대화를 통해서 그러한 장면은 여실히 드러나게 된다는 점도 낭월의 책을 애독하신 벗님이라면 바로 무슨 말씀인지 파악이 되실 것으로 본다. 그리고 게임의 룰에서는 서로 대립을 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보완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게임으로 시작해서 진리로 이동하는 과정이라고 봐도 되겠다. 가위로 분석을 할 것은 분석하고, 분석을 한 다음에는 다시 중심으로 모아서 나의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수행이라고 낭월은 생각하고 있다.




4. 토를 닮은 보




보를 보면서 토를 생각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이제부터 벗님의 설명을 기다린다. 여기에 대한 여러 이유와 타당성에 대해서 낭월에게 메일을 주신다면 이 글의 부록으로 붙여서 함께 음미하면서 나누도록 할 참이다. 글을 작성하셔서 메일로 보내주시면 살펴보고 당선되신 내용을 공개하며 상품으로 낭월의 적천수강의 한 권을 선물해 드리고자 한다. 소위 말하는 경품이다. 아니면 다른 책도 좋다. 원하는 책을 한권 선물로 드리겠으니 곰곰 생각해 보시고, 응모해 보시기 바란다. 단 기한은 6월 30일까지이다.




           2004년 5월 29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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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편] 보에 대한 생각 (2004년 7월 1일)




경품까지 걸고 고견을 청했는데, 이제 그 기한이 다 되어서 마무리를 해야 할 시점이 되었나 보다.




보는 토를 닮았다. 찢으러 달려들면 그냥 찢기우고, 파러 달려들면 패이고... 나무가 오면 뿌리 내릴 자리를 내어주고, 바위가 박히면 뿌리를 잡아준다. 그리고 폭염(暴炎)을 방사하면 흡수하여 보관하기도 한다. 물론 장마비가 내려도 흡수를 한다. 한결같이 모든 것을 거둬주는 모습이다. 어루만져 준다고 봐도 좋겠다. 도인(주먹)과 속인(가위)이 모두 어우러지도록 자리를 깔아주는 모습이라고 해야 하겠다.




가령 자리를 가르키면서 ‘앉으세요’를 한다고 보자. 가위는 가위를 내밀면서 앉으세요를 할 것이다. 아마도 기분이 더러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번 옆에 사림에게 시켜보시기 바란다. 여기 앉으세요를 하면서 가위의 표시로 지시를 해보는 모습....... 짐작이 된다. 그렇다면 주먹을 쥐고 해보면 어떨까? 원래 도인의 말과 행동은 아리송하다. 어디에 앉으라는 말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름대로 생각하고 응하게 되는 모양이다. 주먹을 쥐고 의자 두 개를 놓은 다음에 앉으세요를 해보시면 짐작이 되실게다. 그래서 도인의 생각은 알 수가 없다. 늘 안개 속이다. 그 말은 분명하지 않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주먹은 그렇게 남에게 방향을 지시하기에는 어색하다. 그렇다면 보는 어떤가? 매우 공손해 보인다. 손바닥을 펴서 앉으세요라고 하는 말만 들어도 보는 사람은 큰 대우를 받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니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하는 가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분위기이다. 그래서 모든 만물을 감싸주는 것이 토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토는 넓기 때문이다.




넓은 보와 넓은 토를 생각하면서 보를 잘 내는 사람은 있는대로 다 보여주는 사람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가위를 잘 내는 사람은 남의 험을 찾아내어서 찟고 발기는 것을 잘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먹을 내는 사람은? 아무래도 내면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뭉뚱거리는 음흉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우야든둥 벗님은 이러한 관찰을 하면서 친구들과 가위바위보를 할 기회를 만들어 보시기 바란다. 각기 어떤 특징이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간단하다. 술을 한잔 부어 놓고 누가 먼저 먹나 가위바위보를 하자고 해도 된다. 무심코 내미는 것에서 한번 생각의 흔적을 찾아보는 노력을 해보시는 재미를 찾으시라고 권해 드린다.




“그럼 모두다 보만 내면 어쩌지?”




그렇다 그게 걱정이다. 그렇게 된다면 참으로 게임은 재미가 없게 되어버린다. 그러면 이미 재미는 저리 가고 그냥 서로 마주보고 웃으면 된다. 게임은 해서 뭘 하고 이기면 뭘 하며 지면 뭘 하나, 모두 보를 내고 서로 쳐다보면서 미소를 머금으면 되지. 하하하~




가위의 중생과 주먹의 부처들 사이에서 길을 터주는 사람을 일러서 보살이라고 이름 한다. 그러한 보살은 지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보를 내고 그래서 철없는 중생에게는 엄마의 노릇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공부하는 도인들에게는 매서운 호통이 날아든다. 언제나 웃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중생에게는 약하고 도인에게는 강한 것이 보이다. 도인은 중생에게는 강하고 보살에게는 약하다고 한다면 궤변이라고 하실지도 모르겠다. 지혜만 있어서는 무슨 의미가 있겠는지를 늘 생각하는 낭월이다. 지혜만으로 뭘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지혜와 행위가 서로 얽혀서야 비로소 뭔가 진행이 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래서 알기만 하고 행하지 못하는 경우와, 생각없이 행하는 경우를 비교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 둘을 잘 해야 진정한 앎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부처가 된 다음에 보살이 되는 것이 순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가위바위보라는 순서는 뭘 의미할까?




가위-중생의 모습 (잘잘못에 비중을 두고 살핀다.)


바위-수행자의 모습 (금강같은 마음으로 지혜를 연마한다.)


보-보살의 모습 (생긴대로 원하는대로 감싸주고 경책한다.)




그렇게 생각을 해본다. 어째 이름도 보란 말인가.... 그 참 오묘하네요. 그리고 보살이 되어야만 비로소 가위의 의미를 알게 되고, 중생이 부처가 되는 소식도 자연스럽게 접수가 되는 것은 아닐지 싶기도 하다. 물론 희망사항은 늘 보살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속인에게 위로를 할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도인에게 호통을 칠 자신이 없다. 그래서 아직은 머리보살(생각으로만 보살)이라고 해야 할 모양이다.




“할~~!!”




이것은 도인들이 중생들을 호통 치는 모습이다. 그리고 영락없는 주먹으로 내려치는 모습이다. 그리고 앞에 거리적 거리는 것은 모두 쳐 없애겠다는 의지도 보인다. 물론 대단하고 멋지다. 세속의 잡다한 사연들을 할 한방으로 모두 날려버릴 수가 있는 힘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공력을 기르면서 수행을 한 다음에서야 비로소 가능하다. 물론 원숭이들이 이러한 흉내를 내기도 한다. 자칭 정도령이니 미륵불이니 하면서 말이다. 그냥 웃는 사람도 있고, 심각하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도 있겠지만, 문제는 중생들이 그러한 원숭이를 가려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눈을 부릅뜨고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도 이렇게 원숭이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라고 봐도 되겠다. 물론 그러노라면 어느 사이에 자신이 도인이 되어 있음을 알게 되실게다.




[마무리]




토의 이치와 보살의 모습을 연결시켜서 생각해 봤다. 말없는 모습이 늘 매력적이다. 그래서 산을 찾는 사람이 어질다는 말이 나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 한 달 동안에 세 분의 벗님이 의견을 보내 주셨다. 잠시나마 함께 생각을 해주신 벗님들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더 많은 벗님들은 메일을 보내기는 번거롭지만 생각은 함께 해 주셨으리라고 생각된다. 처음 약속대로 메일을 보내 주신 벗님들께는 작은 선물을 보내 드릴 참이다. 다만 내용은 그냥 낭월만 알고 있을까 싶다. 생각을 할 수가 있는 시간을 가져 봤다는 것도 중요하다. 오늘도 보다 자유로운 내일을 위해서 생각해 보시도록 하자.




(동참을 해주신 벗님들께 감사 드립니다.)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