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그 운과 이 운은 다르지.

작성일
2004-05-14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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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8화] 그 운과 이 운은 다르지.




올 봄은 비가 잦은 해인가 보다. 그 바람에 논농사 하시는 분들은 물걱정 하지 않고 논바닥에 넉넉하게 물을 잡아 놓은 모습들이 지나가며서 봐도 넉넉해 보인다. 지하수를 끌어올려서 하는 것은 왠지 감질이 나서 아무래도 천수(天水)가 내려줘야 농토의 모습이 여유로워 보이는 것은 자연과 하나나 되는 경로로 가장 익숙한 모습이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올 봄의 농부님네들은 운이 좋은 것일까?




1. 운의 두 가지 종류




사주를 풀이하다가 보면 늘 ‘운(運)’이라는 말을 달고 살게 된다. 물론 찾아오는 방문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운이 좋은지 운이 나쁜지로 시작해서 언제쯤이면 좋은 운이 오는지도 물어야 하고, 또 답을 해야 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네들이 원하는 답은 좋은 운이 마구 쏟아지기 시작한다는 것일테지만 그럴 수가 없는 경우에는 또 말을 하면서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프로의 직업병도 있는 셈이다. 무슨 직업병까지나 생각하느냐고 하겠지만, 그래도 실로 운이 좋은 사람은 매우 적게 찾아오고 대체로 운이 불리한 사람이 많이 찾아오는 점을 감안한다면 원하는 마음과 답하는 고충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래서 상담실을 벗어나서 멀리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는 마음이니 이것도 병이라면 병이라고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여기에서 참 난감한 부분이 있다고 한다면, 방문자들의 상당수는 운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운의 길흉을 묻기는 한데, 상담을 해주는 입장에서는 그것을 구분해서 설명 해주느라고 또 상당한 시간을 허비해야 한다는 점이 늘 답답하다고 하는 점이다. 찾아오는 사람들의 희망이 운과 연관된 모든 용어를 다 얻고 싶어 한다는 점으로 인해서인데, 오늘은 이 점에 대해서 구분을 해 드리고자 한다.




1. 사주의 운




사주팔자에서 말하는 운은 자동차가 길을 운행(運行)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를 들면 적당할 것이다. 지나온 길을 살피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점검하는 것으로 생각을 할 수가 있겠는데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원국의 사주와 그 용신을 차량으로 비유를 할 수가 있겠고, 다시 대운은 그 사주의 자동차가 운행을 해야 할 구간이다. 그러니까 사주의 구조에 따라서 경부고속철도가 되기도 하고, 오대산오프로드가 되기도 한다. 혹 주행하는 구간이 30년 정도의 악천후라고 한다면 ‘지옥의렐리’가 될 수도 있다. 지옥의 렐리는 지프차들이 경주를 벌리는 사막의 경기이름인 모양인데 오래 전에 책에서 봐서 정확한 이름인지는 잘 모르겠다. 차가 죽지 않으면 성공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되겠으니 이러한 운을 만나게 된다면 그야말로 ‘生不如死’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보면 되겠다. 그리고 세운(歲運)의 상황에 따라서 잠시 오아시스를 지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혹 오아시스가 길어진다면 좋겠지만, 아마도 그렇게 된다면 애초에 그 이름에 ‘지옥’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을 리가 없다고 해야 하겠다.




이러한 대입으로 이해를 하는 것이 사주학에서 말하는 운이다. 대운의 흐름과 세운의 흐름이 맞물리면서 사주의 원국과 서로 인연관계를 유지하면서 진행하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면 무리가 없다고 하겠다. 그러니까 길 건너에 멋진 오아시스가 있다고 해도 내 길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운이 정해진 대로 가면서 스스로 준비하고 조심하고 다시 점검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도 뭔가 운의 대입을 통해서 어느 정도의 결과를 예상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벗님은 어떠신지 모르겠다. 과연 자신의 운을 살펴서 조심하고 주의하는 마음으로 진행을 할 의사가 충분히 되어 있으신가? 그렇다면 지혜로운 벗님이시다. 막무가내로 길 건너 멋진 고속도로로 뛰어 들겠다고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미 숙명은 숙명이고 노력은 노력이라는 정도의 철은 아는(節有知<->철부지) 사람이 된다고 하는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철부지들은 그러한 것을 모른다. 그냥 길이면 다 같은 길이라고 생각을 해서 털털거리고 달리다가 길옆으로 고속도로가 진행하고 있으면 그 곳으로 뛰어 들겠다고 허둥대는 모습들이다. 그러다가 더 잘 달리는 고속철도가 머리위로 지나가면 이번에는 그 길로 가겠다고 버리둥거린다. 이것이 철없는 인생의 살아가는 모습이다. 운의 의미를 이해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는 모습이다. 그래서 늘 삶의 여정대로 그렇게 휩쓸려 가는 나날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는 점을 생각하기도 한다.




문제는 그러한 마음을 상담실에서 내어 놓으면서 자신의 뜻에 동의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보여서 힘들다는 것이다. 뻔히 뭘 원하는지 보이는데, 운의 길은 어떻게 진행이 될지, 그 또한 빤한데 그 중간에서 묻는 자의 말에 답을 하려니까 고충이라면 고충인 것이다. 그리고 올바르게 읽어 주면 잘 볼줄 모른다고 핀잔이라도 하는 것을 볼라치면 혹시라도 잘 살아보라는 마음으로 위로를 해주다가도 ‘에라 모르겠다. 니 맘대로 하세요.’가 되어버리곤 하는 것이다. 이것이 상담실에서 늘 벌어지는 장면이다. 그래도 적지 않은 방문자들은 자신의 운을 대략 감지하고 찾아오기 때문에 조금의 이야기로도 능히 마음의 준비를 하는 지혜를 보여주기 때문에 상담실도 지킬 만 하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희망이라면 희망이다. 많이 좋아진 방문자들의 수준에 기대를 걸어본다. 적어도 그들은 보다 나은 내일을 준비할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낭월의 희망사항이다.




2. 또 다른 운의 의미




그런데 사주의 운과는 전혀 무관한 의미로 쓰이는 운(運)이 또 있다. 그리고 일반의 중생(衆生-주어진 대로 아등바등 살아가는 생명)은 잘 구분을 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물론 현명하신 벗님이야 잘 아시겠지만, 혹 주변의 벗들이 잘못 이해를 하고 있으시거든 설명을 해주시라는 권유를 드리고자 한다. 그래도 물론 못 알아들을 가능성은 다분히 있겠지만, 만약에 가르치는 입장에서 모두를 다 수용하기 바란다면 그것보다 더 큰 욕심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시는 것이 좋겠다. 아무리 가르치고 이야기해도, 결국 자신의 그릇만큼 이상은 수용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 수년간의 제자들을 지도하면서 얻어진 결과라고 해도 틀림이 없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그릇이 큰 사람은 수용을 잘 하고 지혜로 연결을 시키지만, 그릇이 작은 사람은 자칫하면 오해나 하고,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비방이나 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것을 보면서 타고나면서 상당부분 정해진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릇이 크고 작은 것은 어떻게 알 수가 있는지를 물으시고 싶으실 수도 있겠다.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다. 그리고 사람을 향해서




“그대는 그릇이 작소~!”


“그대는 그릇이 크오~!”




이렇게 말을 확실하게 할 수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릇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소인배들이야 말을 할 수가 있겠지만 말이라고 해서 모두 말은 아니라고 하는 것 정도는 벗님도 헤아리실 것이다. 비록 그가 도인이라고 해도 그렇게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다만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을 보고서 판단을 하는 것은 아마도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니까 사주만으로 그릇이 큰지 작은지를 구분하는 법은 없다는 점을 말씀드리는 것이다. 혹자는 낭월의 사주연구 능력이 떨어져서 그렇다고 생각을 하실 수도 있겠다. 뭐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는 일지지만 낭월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다. 왜냐면 인간은 참으로 변하기 어려운 존재이지만, 또 자신이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변화를 할 수도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낭월은 믿고 있다. 다만 스스로 변화를 거부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다. 그리고 수행을 이야기한 부처의 마음도 아마 그렇지 않았을까를 생각해 보기도 한다. 여하튼......




또 다른 하나의 운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기로 했는데, 말이 엉뚱한 곳으로 튀어가고 있는 모양이다. 늘 이 모양인 낭월이다. 그럼....




일반 사람들이 혼동하고 있는 것은 운과 운이다. 앞의 운은 사주에서 말하는 운이고, 뒤의 운은 요행(僥倖)을 말하는 운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요행을 바라는 운인가?




1) 돼지꿈을 꿨으니 오늘 운이 좋을 게다.




이것도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운은 실로 사주에서 말하는 운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사주의 운과 요행의 운을 구분하게 된다면 크게 무리는 없을 것으로 본다. 꿈이 좋았다고 해도 꿈은 꿈일 뿐이다. 흔히 돼지꿈은 돈이 되는 것으로 풀이를 한다. 그렇다면 낭월은 돼지꿈은 돈이 나가는 꿈이라고 해석을 해야 하겠다. 왜냐면 사람들은 돼지꿈만 꾸면 복권을 사러가기 때문이다. 물론 지혜로운 사람은 빼고 하는 말이다.




2) 돈을 딸 운이 있겠소?




이 운도 마찬가지로 요행을 바라는 운이다. 왜냐면 전후의 과정이 없이 단지 남들이 돈을 벌었다고 하니까 자신도 돈을 벌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이고, 그래서 벼락부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에 놀음판으로 달려가면서 묻는 말이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사주쟁이는 그러한 운을 풀이할 방법이 없다. 왜냐면 전후의 인과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알기 어려운 질문을 하는 것도 큰일이지만, 질문을 받았다고 해서 아무런 연관도 없는 용신을 찾고 기신을 찾아서 답을 해주려고 안달을 하는 어설픈 철학자를 보면 가련하기조차 하다.




3) 운이 좋으면 죽지 않겠지.




이것도 마찬가지이다. 사주에서 말하는 운은 죽음을 관장하지 않는다. 죽음은 선천적인 유전인자와 후천적인 관리능력에 달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참으로 많은 방문자들은 자신의 수명을 물어본다. 만약 그렇게 질문을 받았을 경우에 철이 든 상담가라면 참으로 물을 것이 많을 게다.




부모는 장수 하셨느냐?


현재 종합검진은 받아 봤느냐?


하는 일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일이냐?


술은 얼마나 먹느냐?


담배는 피우느냐 마느냐?


일찍 잠은 자느냐?


밥은 잘 먹느냐?


고기만 찾지는 않느냐?




등등 물어봐야 할 말들이 너무도 많다. 그래서 아예 간단하게 처리한다. 수명은 사주로 알 수가 없다는 말로 해결이 되기 때문이다. 혹 직무유기라고 하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르시는 말씀이다. 답을 할 수가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혹 그렇게 탓을 하실 수도 있겠지만, 답을 할 수가 없는 것을 놓고, 답을 할 수가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 어찌 직무유기란 말이냐는 항의를 해야 할 모양이다. 그리고 위와 같이 시시콜콜하게 질문을 했더라도 정확한 답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혹 최첨단의 의료장비를 갖고 인간의 질병과 싸우고 있는 의사에게 물어보시면 어떨까? 자신의 잔여 수명이 얼마나 되는지? 누가 알 수가 있을까? 참으로 조금만 지혜롭다면 능히 알 수가 있는 것을 그렇게 어리석은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이렇게 한마디 하고 싶어진다.




“이보쇼 얼른 나가쇼. 나도 잠이나 자야 하겠소~!”




4) 운이 좋으니 뇌물을 먹어도 안 걸릴껄.....




흐흐~ 참으로 사람 죽이는 생각이다. 정말 하늘이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할 생각이 아닌가 싶다. 요즘 어떤 대장이 돈을 먹었느니 말았느니 하고 시비가 있더구먼시나, 그게 사주에서의 운과는 무관하게 요행일 뿐이다. 그러니까 걸리지 않은 것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고 요행일 뿐이다. 그러니까 운이 나빠도 걸리지 않을 수도 있고, 운이 좋아도 걸릴 수가 있는 것이다. 다만 남들은 다 걸려도 자신은 걸리지 말기를 바라고 싶은 요행심(僥倖心)이겠지. 그것을 사주쟁이가 증명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이해가 되지만 어림도 없는 이야기이다. 어느 사주쟁이가 뇌물을 먹어도 탈이 나지 않는 운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대략 이러한 의미로 생각을 해 봤다. 능히 짐작을 하셨을게다. 요행수와 운은 이렇게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시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자 하는 것이 그야말로 도로 상황을 살피는 운을 알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요행수를 바라다보고 있는 것인지를 스스로 잘 판단해서 결정하면 되겠고, 사주무지인들이 하는 말로




‘자신이 노력은 하지 않고 운이 좋은지나 사주쟁이에게 물어보면서 요행수를 바라고 있는데 그들의 요구에 부합해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넘들이 사주쟁이들이다.’




는 말을 들을 때면 분노를 하기 보다는 참으로 답답하다. 무지한 자들의 결론이 언뜻 들으면 그럴싸하지만 실은 자신은 사주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말을 앞에 붙였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갖게 되는 것은 아마도 낭월만의 생각은 아닐게다. 오늘도 지혜로움이 가득한 하루가 되시기를 기원드린다.




          2004년 5월 14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