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 생생지도(生生之道)의 의미

작성일
2004-02-26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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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8화] 생생지도(生生之道)의 의미




사주를 연구하면서 늘 사람의 적성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야 다들 아시는 것이지만, 오늘은 강의 중에 한 학생이 질문을 하여 이에 대한 의견을 설명드리게 되면서 오늘 아침에 생각을 정리를 해서 낭월학당을 찾아주시는 벗님들의 연구에 약간의 참고를 드리고자 하는 생각이 들어서 준비를 하게 되는 내용이다. 참고 되시기 바라는 마음으로.....




1. 생생지도(生生之道)는 식상과 관살이다.




식상(食傷)을 보지 못하면 생생지도가 없다고 해석을 하게 된다. 사주에서 그 사람의 적성을 보게 될 경우에 최우선으로 관찰하는 것이 식상이다. 이것은 낭월만의 습관인지 명리학자는 모두 그렇게 관찰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임상을 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버릇이 생긴 모양이다. 사주에서 식상이 없으면 다른 성분을 찾게 되지만 우선 일간(日干)의 주변에 식신(食神)이나 상관(傷官)이 있는지를 관찰하게 되는 것이 거의 100%이다. 그러면서 어느 사이에 이러한 습관이 생겼는지를 생각하다가 문득 종진첨(鍾進添)선생의 생생지도가 생각이 났다. 엇 저녁에 대전학당에서 강의를 하면서이다. 한 연구생께서 질문을 했다.




“스님, 사람의 적성을 일목요연하게 볼 방법이 없겠습니까?”




당연히 이해가 되고도 남는 질문이다. 그 다양한 사회성을 관찰하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없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야 공부하는 사람이 늘 근심하고 희망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방법은 없다고 해야 하겠는데, 그래도 선생이 된 입장에서 뭔가 설명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생각이 나서 잠시 떠올려본 것이 생생지도라고 하는 것이다.




(1) 식신과 상관은 미래적 생생지도




식상과 관살을 생생지도라고 했지만, 그래도 서로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 차이가 뭘까를 생각해 봤다. 그리고 실제로 발생하는 차이는 미래에 대한 생생으로 불식(不息)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겠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그러니까 일간이 식상을 생조하고 식상은 다시 재성을 생조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미래적인 생생의 길을 가는 것이 식상이라고 생각을 해 봤다.




그러니까 사주에서 일간 주변에 식상이 있는 사람은 일단 미래적인 부분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고 대입을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 식상이 재성을 보고 있다면 이번에는 다시 식상이 식상을 본 것이니 생생지도는 더욱 길게 이어진다고 대입을 하면 되겠다. 그렇다면 재성이 다시 관살을 생조하게 된다면 더욱 길게 되겠다. 그런 경우는 흔치 않으니 미리부터 고민을 할 필요는 없겠지만 이치적으로 본다면 타당하다고 해야 하겠다.




(2) 식상은 이기적인 생생지도




미래적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이기적(利己的)이라는 것도 생각을 해야 한다. 식상은 자신의 능력을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소득을 얻게 되는 것이 식상의 능력이고 특성이다. 공욕적인 희망 보다는 사욕(私慾)적인 마음이 더 강한 것이 식상이다. 그래서 식상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이기적인 마음들로 모여서 세상을 만든다. 그러다보니 자신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다. 남이야 되거나 말거나 그리 관심이 없는 것으로 생각이 돌아가는 것이 어쩌면 본능이라고 해야 할 모양이다. 이것은 ‘좋다’ ‘나쁘다’의 차원이 아니고 본능적인 부분으로 대입을 해야 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왜냐면 인생은 결국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결국은 이웃과 국민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기도 한 까닭이다.




(3) 관살은 과거적인 생생지도




이것이 식상과의 차이라고 생각을 해 봤다. 관살은 미래적인 것에는 둔하다. 그보다 과거적인 부분에 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관살은 그렇게 지난 것에 대해서 정보를 찾게 되는 성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참고하게 되니까 참으로 생생지도의 음양이 되고도 남겠다는 힌트가 발생하게 된다. 그렇게 되니까  식상은 양의 생생지도이고, 관살은 음의 생생지도가 되는 셈이다.




과거를 생각하는 것이 무슨 생생지도가 되겠느냐는 말을 하게 될 수도 있겠다. 왜냐면 생은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면 과거의 생생도 가능하겠다고 본다. 왜냐면 서점을 보게 되면 과거의 책들이 너무도 많다. 논어나 불경이나 성경도 모두 과거의 생생지도이다.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가는 것이 군자이다’는 등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모두 관살이다. 인간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 가운데에서 삶의 지혜를 배우게 되므로 누구나 귀를 기울이게 된다. 다만 세상을 한 40여년 살아본 다음에 비로소 과거의 생생지도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이 재미있다면 재미있을 것이다.




심심하신 벗님이라면 큼직한 서점에서 시간을 좀 보내보시기 바란다. 그 과정에서 고전의 코너를 기웃거리는 독자와, 마래의 이야기가 있는 코너를 기웃거리는 사람을 찾아본다면 아마도 젊은 사람은 미래의 서적에, 중년의 사람은 과거의 서적에 관심을 보이지 않겠느냐는 짐작이 들어서이다. 왜냐면 세상을 한 40년은 살아야 과거의 지혜가 어떻게 자신의 삶에 도움을 주게 될 것인지를 생각할 지혜가 생기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봐서이다.




그리고 운명학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과거적인 생생지도라고 해도 되겠다. 고인의 지혜가 모여 있는 보물 덩어리를 보면서 즐거워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이미 그만큼 삶을 영위하면서 깨달은 바가 많아서 비로소 과거의 생생지도를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젊은 사람은 과거에 댛래서는 답답하기만 할 것이다. 미래의 화려한 전망이 담겨진 책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관심이 갈 것이기 때문이다.




(4) 관살은 이타적인 생생지도




식상과 대비를 하게 되니까 이렇게 제목을 써야 하겠다. 그리고 실제로 관살은 남들의 삶을 안내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봐서 공욕이라고 하는 말을 해도 되지 않겠는가를 생각한다. 이타적(利他的)이라는 말은 그래서 가능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더 살펴보게 되면 그 고전도 그 당시에는 식상적인 생생지도였다는 것을 떠올리게 된다. 자신의 삶을 위해서 설명한 책이므로 식상이라고 하겠는데, 오랜 시간이 흘러가게 되니까 이제는 많은 사람에게 지혜를 주는 공익의 서적이 된 것이라고 이해를 해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2. 직업은 과거형과 미래형이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보니까 관살의 생생지도와 식상의 생생지도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래서 사주의 일간 주변에 관살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성분으로 세상의 직업을 얻을 것이라는 방향으로 생각을 하면 되겠다. 관살의 성분으로 된 사주는 공무원이나 교육자나 종교인 등으로 방향을 잡을 수가 있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를 살려서 생각하게 되면 어렵지 않게 나오는 답이라고 하겠는데, 실제로 심리분석에서도 그렇게 나타나는 것을 보면 과연 무리한 대입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식상이 둘러싸고 있는 경우라고 한다면 사신이 타고난 능력을 발휘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한다는 것이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외국어나 사업이나 경영 등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 또한 식상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심리적인 분석이라고 하겠다.




3. 식상과 관살로 직업방향 결정




물론 참고용이라는 점을 늘 생각하시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써놓으면 또 방문하시는 벗님께서는 임상을 하시면서 참고를 하시는 것이 좋겠는데, 관살적인 심리를 갖으신 벗님은 이것을 그대로 외워서 바로 적용을 시키려고 하게 된다면 또한 걱정이 되기도 한다. 왜냐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 다시 기타의 성분이 작용을 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크게 방향을 잡는다고 하게 되면 이와 같은 방향으로 생각을 해보시는 것이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의 힌트를 드리는 것이라는 점도 참고하시고 연구하시기 바란다. 뭔가 참고가 되시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글을 쓰다가 보니까 그렇다면 식상과 관살을 빼고 다른 것이 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하실 벗님도 당연히 계실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러한 질문을 위해서 다시 한담을 한편 더 써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강의시간이 다 되었다는 말씀으로 얼버무리고 달아나는 낭월이다.





           2004년 2월 26일 아침에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