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화장터

작성일
2001-01-07 00:00
조회
6281
火葬터


제91화
-
화장(火葬) 터
(2001.1.7)




1. 단서(端緖)


어제는 목포에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상담을 신청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처럼 생년월일시를 적었다. 그리고 명식을 뽑아 놓고 다음
질문을 하시라고 했는데, 그의 질문은 부친에 대한 것이었다.


"스님, 부친이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러시군요. 병환이 있으셨나요?"


"일년 전부터 속이 나쁘다고 하시더니 위암이랍니다."


"사주로 위암을 읽을 수는 없겠지만 형상은 좀 어려워 보이네요."


"부친이 돌아가시겠습니까?"


"돌아가시는 것까지는 모르지만 사주의 흐름은 부담이 많이 됩니다. 돌아가신다는 말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야기가 이쯤 나오면 벗님은 사주가 등장할 때가 되었다고 잔뜩 기대를 하실 것이다. 물론 당연히 사주는 보여드린다. 다만 사주가 되지
못하고 삼주로 만족을 해야 하는 것은 당시의 출생상황을 전달해줄 사람이 없었던 모양임을 헤아려 주시기 바란다.


   時 日 月 年

미 乙 庚 庚

상 未 辰 午


67 57 47 37 27 17 07

丁 丙 乙 甲 癸 壬 辛

亥 戌 酉 申 未 午 巳


사주의 형상을 보면 辰月이라고는 하지만 庚辰월이면 이미 금의 뿌리 역할을 하고 있는 진토라고 해야 하겠다. 다시 년주도 金火로 별 도움이
되지 못하겠고, 日支에 未土와 더불어 고민을 해야 할 것은 과연 종을 하겠느냐 그냥 버티겠느냐는 점인데, 물론 을경합이 되어 있거나 말거나 미토
속에 뿌리를 의지하고 인성이 오기를 기다린다고 해석을 할 참이다. 운으로 판단을 하려고 해도 어느 운이 특별히 도움이 된다고 해석을 할 정도로
모여있는 운도 아니고 산지사방으로 흩어져서 들어오는 운이니 대입도 어려울 것이고 더구나 지금의 질문 내용은 별로 운에 대해서 큰 비중이 있는
것도 아니므로 쓸데없는 고민은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일단 이 사주를 신약용인격으로 보고 인성이 필요한 것으로 해석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어쩌면 위암이라고 하는 것도 목이 기신이라서 발생한 것으로 해석을 해도 되겠다는 나름대로의 합리화를 시키면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스님, 부친이 돌아가시면 화장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매장을 해야 할까요?"


이런 질문이 나올 즈음이면 이미 희망은 없다고 봐도 되겠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기는 것은 이런 질문은 처음 받아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주만 놓고서 답변을 하기는 난해한 질문이라는 것도 순간적으로 감을 잡는다. 그러니까 항상 질문을 접하면서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 질문이 자평명리로 답이 나오는 질문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먼저 가리는 것이 습관처럼 몸에 배여 있는 모양이다. 화장이 좋은지 매장이
좋은지를 자평명리로 구분할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는데, 그보다도 더욱 궁금한 것은 왜 그런 질문을 하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그렇게 질문을 하는 이유가 있겠네요. 그 설명을 좀 들읍시다."


"예 저는 매장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누가 반대를 하는가 보군요?"


"실은 모친께서 그러시는데 부친이 자신은 화장을 해 달라고 했답니다."


"왜 그러셨다던가요?"


"부친의 고향은 함경도입니다. 자신을 화장해서 고향에 가거든 묻어주거나 뿌려달라고 하시고 만약 여의치 못할 경우에는 그냥 뿌려달라는 말을
하셨다고 합니다."


"음.... 이해가 되네요. 그렇다면 답은 이미 나왔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당연히 화장을 해야지요."


"근데 그게 과연 부친이 자신의 사후를 생각해서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인지 아니면 자식들이 돈을 많이 쓸까봐 형편을 봐서 말씀하신 것인지를
몰라서 과연 자식의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상담을 청하는 것이랍니다. 과연 어느 쪽일까요?"


"그런 생각은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혹시라도 자식들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화장을 하라는 말을 하셨다고 해도 그렇게 해
드리는 것이 고인을 편안하게 모시는 방법이랍니다. 그리고 절약은 아무리 강조해도 나쁠 이유가 없지요. 보아하니 선산이 준비된 것도 아닌 듯한데
부친이 유언에 따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면 화장을 해서 어떻게 하지요?"


"납골당에 안치했다가 북한의 부친 고향에 가시거든 뒷동산에 묻어 드리세요. 물론 여의치 않으면 고향 산천에 뿌려드리는 것만으로도 영혼은
편안하실 겁니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아버님의 사주를 보니까 땅이 모두 남의 땅이네요. 그러니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가능하겠습니다."


"납골당은 또 뭐지요?"


"유골을 화장해서 뿌리지 않고 봉안하는 곳입니다. 요즘 절에서도 납골당을 만들고 있으므로 부근에 사찰에다 알아보세요."


"그럼 스님 말씀대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효도를 다 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게 하세요."


"고맙습니다. 또 시간이 나면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세요."


이렇게 상담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시 곰곰 생각에 잠겼다. 그 죽음에 대해서 또 습관처럼 골몰해지기 때문이다. 죽음......
언젠가는 다가올 죽음인데 어째서 수시로 망각을 하고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만 생각을 하게 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죽음에 대해서 빠져들기
시작한다.


2. 탐색(探索)


(1) 장자(莊子)식 죽음


죽음에 대해서는 여기 저기 많은 자료가 나타나고 있다. 우선 애독하는 책에는 장자가 있는데, 그 곳에는 몇 가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을 한다. 그 중에서도 대종사편에는 자상호가 죽었을 때의 장면이 있어 인상적이다. 다음은 내용의 대강이다.


'(자상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장사를 지내기 전에 공자는 제자 자공을 시켜서 문상을 가도록 했다는데 물론 이러한 이야기는 모두 꾸며낸
우화라고 일단 생각을 하는 것이 좋겠다. 내용을 보면 공자에 대해서 늘 형편없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봐서 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야기는 이렇다. 그래서 분부를 받은 자공이 문상을 갔다. 그리고 호상소에 도착했을 때의 장면은 다음과 같았다.


(자상호의 친구였던) 맹자반과 자금장 두 사람이 하나는 누에 채반을 엮고 또 하나는 거문고를 뜯으면서 목소리를 맞춰 노래하고 있는 장면이
들어온 것이다. 그 노래는 다음과 같은 뜻이었다.


"아 상호여, 아, 상호여, 그대는 이미 그대의 근본인 허무의 진실로 돌아갔는데, 우리만 아직 그대로 사람이구나."


이 노래를 듣고 난 자공이 종종걸음으로 나아가서 두 사람에게 물었다.


"좀 물어 봅시다. 주검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예의입니까?"


이 말을 듣고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면서 싱긋 웃으며 말했더란다.


"이 친구가 어찌 예의를 알겠나."


물러 나온 자공이 아무리 생각해도 그 두 사람이 제 정신이 아닌 것으로 보여서 스승이신 공자에게 돌아가서 있었던 이야기를 보고했다.



"선생님,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예절 바른 행동은 전혀 없고, 자기 몸 따위는 도외시한 채 주검 앞에서 노래를 부르며 얼굴빛조차도
변하지 않으니,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들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요?"


"그 들은 이 세상 밖에서 노니는 사람들이고, 나는 이 세상 안에서 노니는 사람이다. 이 세상 밖과 안은 서로 미치지 못하는 영역인데, 난
자네를 문상하러 보냈으니 내 생각이 모자랐던 모양이군."


"............"


"그들은 이제부터 주물자가 되어서 천지의 기운과도 하나가 되었으니 그들은 삶을 군살이나 혹이 달라붙고 매달린 것처럼 생각하며, 죽음을
상처가 곪아터진 것쯤으로 생각하니 대체 이런 인물들이 어찌 죽음과 삶의 관계를 염두에 두겠느냔 말이다. 갖가지 형상을 잠시 빌려서 사람이
되어서는 죽음과 삶을 무수히 되풀이하면서 언제 시작이 되었고 언제 끝이 날 것인지도 관심에 없으면서 유유히 자연을 만끽하고 노닐고 있으니 그들이
어찌 귀찮기만 한 세속의 잡다한 예의를 따라 하면서 남의 눈치를 보겠느냐...."


대략 이 정도에서 줄인다. 내용에서는 공자를 예의만 따진다고 비웃으면서 자신들이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의미는 보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죽음에 대한 생각은 충분히 느껴진다고 하겠다. 그리고 장자에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자신의 부인이 죽었을 적에
죽은 부인의 머리를 두드리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노자가 죽어서 문상을 갔던 이야기도 나온다. 한 마디만 들려드린다면....


노자가 죽었을 적에 진일이라는 친구가 문상을 가서 형식적으로 곡을 세 번만 하고 나와 버리자 제자가 이상히 생각하고 물었다.


"그 분은 선생님의 친구가 아닌가요?"


"그렇지."


"그렇다면 그런 문상으로 괜찮을까요?"


"괜찮아, 처음 나는 그를 인물이라고 봤네만 지금은 달라. 아까 내가 들어가 문상을 할 때, 늙은이는 자기 자식이 죽은 듯이 슬퍼하고,
젊은이는 제 부모라도 돌아가신 것처럼 곡을 하더군 노자가 사람들을 모은 것은 반드시 요구는 하지 않았더라도 슬픔을 말하고 곡을 하도록 은연중
시킨바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것은 태어나고 죽음에 대해서 자연스럽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은 허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 만약 그가 진정으로
무위자연을 깨닫게 했더라면 그 들이 그렇게 슬퍼했겠느냔 말일세. 그가 어쩌다가 이 땅에 태어났고 또 어쩌다가 죽음을 맞이한 것도 죽을 운명을
따라서 편안하게 죽은 것뿐이지. 이러한 것을 고인들은 '집착으로부터의 자유'라고 말을 했다네."


이야기를 읽으면서 과연 의미심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앞의 자상호 문상과 노자의 문상에서의 차이점이 뭔지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석가모니가 죽었을 적에도 모든 무리들이 슬퍼한 것을 보면 아무리 생전에 무위자연과 업연과 해탈을 이야기했더라도 슬퍼하는 것은 자신들의 입장에서
하는 것이므로 진일의 이야기는 일리는 있으나 모두 타당하다고는 하기 어렵겠다. 만약 문상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노자와 같은 레벨의
정신수준이었다면 또한 앞의 자상호 친구들처럼 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진일은 문상객들이 그렇게 슬퍼하는 것이 시샘이라도 났는지 모를
일이다. 이야기의 내용에서는 그런 기분도 약간 든다.


(2) 티베트 사자(死者)의 서(書)


이 책은 한참 전에 읽었던 책이고 그래서 지금 갖고 있지는 않으니 구체적으로 예문을 들어 드릴 수는 없지만, 역시 죽음에 대한 정황들을,
죽은 자가 다시 말을 하는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죽은 자가 어떻게 글을 남겼는지는 모르겠는데, 내용을 보면 과연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죽음의 순간에 육신으로부터 이탈이 되어서 허공 중으로 떠돌다가 자신의 업연에 따라서 갈 곳으로 이끌려 간다는 이야기는 영화
'사랑과 영혼'의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어쩌면 사랑과 영혼에서 영혼에 연관된 부분은 이 책을 참고하였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느끼는 소감은 주로 빛이 사후의 세계를 통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색의 찬란한 빛이라거나 거무칙칙한 빛이 등장을 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죽음은 욕계(欲界)가 아닌 색계(色界)가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빛을 따라가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면
자신이 생전의 행위에 따라서 돼지의 뱃속이 되기도 하고 왕후의 자궁 속이 되기도 한다는 것으로 봐서 어디로 달아날 방법이 없음을 암시하기도 하는
듯하다. 마음대로 선택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 숨이 가빠짐을 느끼기도 한다. 과연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저승이라면 생전의 업보를 어떻게
누가 어떤 방식으로 저울질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그저 신비롭기만 하고, 또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다. 아마도 그 심판자는 밖에 있는 자가 아닌
자신의 내면에 있는 심판자일 것이라는 생각이 요즘은 강하게 든다.


심리학에서는 '자기처벌'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스스로 지은 죄에 대해서 스스로 처벌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다면 죽은 이후의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처벌을 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미뤄서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그렇다면 그 양심이 거리끼지 않는 일만
하면 죽어서도 악연이 남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러다가 또, 만약 온갖 악행을 자행해도 그 마음에 앙금이 남지 않는다면 즉, 마음에 얽매임이 없다면 죽어서도 그 죄보를 받지 않을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만 된다면 선행을 하려고 노력을 할 것이 아니라 마음에 남기지 않으려고 노력을 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도 드는데, 그래서 결국은 선악의 개념보다는 자신의 내면에서 어떻게 집착을 하지 않느냐는 점이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먼저 들기도
하는 것이다. 이 책도 그래서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었던 기억이 난다.


(3) 갠지스 강가의 풍경들


아직 인도를 가보지 않았다. 언제 죽음에 대해서 준비를 할 때가 오면 반드시 한번 들려볼 생각을 하고 있는데, 쉽사리 준비가 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아직 결실의 시기가 아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대신 미리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나마 통해서 읽으면서 짐작을 하게
되는데, 나름대로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홍신자 님의 '자유를 위한 변명'에 등장하는 죽음의 풍경이다.


'내가 즐겨 찾았던 곳은 주로 갠지스 강변의 화장장이었다. 그 성스러운 갠지스 강가에서 나는 밤새도록 웃었던 별난 경험을 갖고 있다.
강지스 강은 인도 사람들이 죽음의 시간을 맞이하기 위해서 몰려드는 곳이다. 강변으로는 화장장이 즐비하여 방금 죽음을 맞이한 알몸의 시체들이
장작더미 위에서 불꽃에 휩싸여 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다. 그 타는 연기가 강변을 자욱하게 만든다. (영화 리틀부타에도 근사하게 나온다)


자신의 죽음이 가까웠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죽기 전에 써야 할, 그리고 화장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돈만을 마련하여 단촐한 마지막 행장을
꾸려 이곳으로 찾아든다. 그러나 준비한 마지막 밑천이 바닥나도록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그곳에서 아직 죽지 못한
육신을 끌고 다니며, 더러 거지가 되고, 더러 도둑이 도고, 더러 강도가 되고, 급기야는 화장되지 못하는(장작을 살 돈이 없어서) 시체가 된다.


그곳엔 죽음을 맞이한 육신이 기화(氣化)되는 성스러움이 있지만, 또한 세속의 온갖 비천함이 함께 있는 것이다. 시체 타는 연기 사이로는
음식을 만들어 먹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한편에는 쭈그리고 앉아 용변을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한편에는 열심히 경을 읽으며
그것을 강의하고 풀이하는 사람이 있다.


그 묘하고도 꿈속 같은 강변. 구도의 길에서 우연히 만나 일행이 된 나와 몇 명의 수행자는 저녁나절 그 강변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모여
앉아서 누군가의 화두에 촉발되어 크게 웃기 시작했다.


지극히 성스럽고도 비속한, 지극히 정결하고도 추잡한, 지극히 고요하고도 북적대는 이곳, 극과 극이 서로를 간지럽히는 이 강변, 우리 세상,
우리 인생이 너무 우습지 않은가. 우리, 새벽의 마지막 별이 사리질 때까지 웃기만 하면 도통할 수 있으리라.....'


이러한 풍경의 장면을 읽으면서 낭월은 마치 그 현장에 스스로 동참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죽음에 대해서 이보다 구체적이고
적나라한 현장묘사는 흔하지 않다고 하겠다. 그리고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도 일일이 헤아려 보고 싶기도 하다. 죽음을 기다리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지.... 과연 그들의 다음 생은 어떻게 진행이 될 것인지도 이 어린 철학자의 시선에는 궁금하기만 하다.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그 현장에서
직접 그 모습을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요즘의 형편은 당시에 책을 읽을 때보다는 좀 나은 편이므로 어쩌면 2001년에는 인도로
여행을 떠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마음을 먹으니 내일이라도 준비를 해서 떠나보고 싶어진다. 죽음의 준비를 하는 이들을 만나서 그 들의 표정을 보고
싶어서이다. 벗님도 혹 죽음에 대해서 간접으로나마 느껴보시고 싶다면 위의 책을 한번 읽어보시라고 권한다. 홍신자 선생의 경험을 통한 수행은
참으로 값진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그의 라즈니쉬와 만남에 대해서도 언급이 되어 있는데, 또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이야기들이다.


(4) 불가(佛家)의 도인들


불교에서는 죽음에 대해서 무수히 많은 화두를 던지고 있다. 어떻게 죽을 것이냐는 점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토론이 전개되고 있으며 이미
살인주문도 경전에서 등장을 하고 있음을 보면 참 놀라운 일이며 근래에 돈을 받고 살인을 해준 이야기도 오늘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불교인들은 다 알고 있다고 하겠다.


부처님이 어느 날 기원정사에서 삶의 무상함에 대해서 설법을 마치고 죽림정사로 돌아가셨다. 그때 그 설법을 들었던 많은 비구들은 삶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끼고는 죽음을 좋은 것으로 동경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주변의 벗에게 자신을 죽여주고 그 대가로 누더기를 가지라고 했고,
그래서 서로서로 도움을 주는 차원에서 죽여주기를 했고, 그래서 최후의 몇 사람만 남아서 먼저 죽은 자의 시신을 화장하고 자신들도 죽으려고 준비를
하는 단계에서 어느 세속의 신자가 그 장면을 보고는 참혹함에 기가 막혀서 죽림정사로 달려가 부처님께 이 정황을 보고했다는 글이 어딘가에 전한다.
그로 인해서 서로 부탁을 받고 죽여주는 것도 살생이라고 하는 계율이 다시 추가되었겠지만 이러한 죽음은 참으로 처절한 죽음이라고 해야 하겠다.



'방거사'라는 세속의 불자가 있었다. 그 가족들도 모두 도인의 경지에서 생사일여(生死一如) 즉,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라는 경지에 노닐었던
모양이다. 어느 봄날에 방거사는 그만 세상을 떠나고 싶어져서 토굴에 마지막 자리를 마련하고 유언을 남긴 다음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밖의 딸에게
이야기를 걸었다.


"딸래미야, 이따가 해가 중천에 당도하걸랑 이야기 해줘라이."


"그럴께요 아부지."


한참 후에 오시가 되어온다고 생각한 방거사.


"시간이 어떻게 되었냐?"


"오시가 되었는데, 일식을 하는디요? 구경하고 가세요."


"그래? 일식은 흔한 구경이 아닌디 그럼 보고 갈까...."


"밖에 나오니 과연 일식을 하고 있었다. 구경을 다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려니까 이미 자신의 자리에는 딸년이 앉아서 죽어 있었다. 속았다고
생각을 한 방거사는 딸의 옆에 앉아서 나란히 생을 마쳤다. 그러자 방거사 부인이 투덜대면서 기름을 붙고 토굴에 불을 지른 다음에 자신도 어디론가
떠나갔다.


이런 이야기가 또 어딘가에 전한다. 참 드라마틱한 이야기라고 해야 하겠다. 과연 죽음은 어떤 마음으로 맞이를 해야 할까.....??????



3. 준비(準備)


언제 다가올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반드시 다가온다는 것이다. 벗님은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으신가? 생명보험을 들어 놨다고? 그
정도라도 훌륭하다고 하겠다. 죽고 난 다음에 가족들이 삶의 현실에서 궁핍하지 않으려면 그 정도의 배려는 할만 하다고 하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이 육신이 그 용도가 다 했을 적에 이로 인연한 모든 이들, 특히 가족들은, 갑자기 준비가 없이 당황이 될 것은 뻔하다고 하겠다. 자신이야
공부를 많이 해서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고 좋아하겠지만, 남아 있는 가족들도 그러한 준비가 되어 있다고는 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그러한 준비를
조금이라도 해 둔다면 또한 미련하지만은 않다고 해야 하겠다.


(1) 청산가리(砒霜)를 품고


이런 준비도 더러 있다. 잠시 고통은 되겠지만 확실하게 죽을 수가 있는 방법은 청산가리를 먹는 것이다. 흔히 비상이라고 하고 정식 명칭은
비소(砒素)의 성분으로 되어 있는 비산(砒酸)이라고도 하는데 정확한지는 모르겠고 그것은 아무래도 좋겠다. 여하튼 예전에 소요산 자재암에 머물
때에 같이 계셨던 노장이 계신데, 그의 품에는 늘 비닐봉지로 단단히 싸맨 청산가리가 있었다. 아무에게나 보여주는 것은 아닌데 왜 그것을 갖고
다니느냐고 물으니 그게 있어야 마음이 편안하다고 한다. 능력이 없어서 주지(住持)도 못하고, 결혼을 하지 않아서 가족도 없으니 혹 중풍이라도
들어서 자신의 몸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지경이 되면 바로 털어 넣고 삶을 마치려고 한다는 것이다. 혹 벗님이 이 이야기를 듣고서 그가
비관주의자가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하셨다면 물론 착오이다. 그는 매우 낙천적인 스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방법이 현명하다고는 하기 어렵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자연스럽게 독약을 이용하지 않은 죽음일 것이다. 그러나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겠느냐는 점을 이해한다면 헤아리고도 남는다고 하겠다. 이마도 이런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해보지 않으셨다면 지금 새로운 경험이 되실
것이며 이러한 삶의 기준도 있음을 헤아려 주시기 바란다. 참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고 하는 말이 헛말이 아닌 모양이다. 아마도 연세로
봐서 지금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리라고 생각이 된다. 그의 마지막 길에 그 약이 도움이 되었는지 아닌지는 모를 일이다. 여하튼 이것도 준비는
준비이다.


(2) 죽기 싫은 사람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아마도 역사적으로 보면 진시황일 것이다. 그의 불사약과 불노초 구입의 노력은 눈물이 겨울 지경이라고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세상에는 많은 생명체들이 있으며 그 들은 나름대로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데, 유독 인간이라는 동물은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글을 어디에선가 읽었던 것 같다


죽음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에 대한 마음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렇게도 분명한 것을 부정하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만 '나중의
일'로 미루려는 정도는 이해가 된다. '나도 언젠가 죽기는 하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하는 정도일 것이다. 그 정도까지도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사실 부처님의 말씀을 보면 '무상살귀(無常殺鬼)는 순간순간 엄습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내일의 삶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본다. 벗님은 내일 살아있을 것이라는 확실한 보장이 있으신가? 물론 없다고 해야 정답일 것이다.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이렇게 명확하지만 참 사람의 기억력은 묘하게도 잊어버리고 내일 하자는 말로 넘어가곤 한다.


가장 대표적인 어리석은 말이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마지막 말이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는 주인공의 말은 내일이 그렇게
확고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로 내일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오로지 지금 여기만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말을 한 것은 많은 성자들이 있지만 특히 라즈니쉬께서 많이도 강조하셨던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죽고 싶은 것도 문제는 문제이다. 왜냐면 죽음은 삶이 그렇듯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봐야 하기 때문이며 오로지 자연에
의해서 결정이 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라고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물론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온갖 문명의 이기들로 인해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도 많으니까 그것조차도 자연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를 일이지만 여하튼 스스로 계획해서 죽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물론 자살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로 자살도 낭월이 생각하기에는 환경이 그를 죽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괜히 자살을 할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하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4. 회고(回顧)


자신을 돌아다보고 싶어진다. 과연 낭월은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자꾸만 물어보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실로 죽음이
두렵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부정을 할 수도 없으니 수용을 하자는 생각이 기본이라고 해야 하겠다. 그렇다면 가장 염려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역시 가족의 생존에 대한 부담이 가장 크다고 하겠다. 실로 아둥바둥 100년을 살고자 하는 마음은 솔직히 없다. 그러나 가족들을 보니 다소
염려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지금 해야 할 일이 많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오늘을 열심히 살아갈 뿐이라고 하겠는데, 그래도 가끔은 갑자기 죽음이 찾아 왔을
적에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늘 생각을 해보고 있는 셈이다.


특히, 이 홈페이지는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구에게 맡겨서 계속 삶에 지친 나그네를 맞이해야 할까.....


혹 책을 보다가 궁금해서 낭월에게 전화를 하신 벗님이 있다고 치자.


"여보세요 낭월스님과 통화를 하고 싶습니다."
"낭월 스님은 죽었습니다."


(하하하~ 왜 이렇게 갑자기 통쾌하다는 생각이 들지....??)


 실로 예전에 팔자심리학을
보다가 대만으로 하건충 선생님을 찾아갔을 적에 그가 죽었다는 정보를 듣고 참 황당했는데,
그 후에 생각해보니 과연 그는 낭월이를 보면서 혼자 깔깔대며 웃지 않았을까를 생각해본다.


온갖 삶의 너울가지(앗, 너울가지... 잘 있을까.....?)들을 훨훨 벗어버리고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닌 그 모두를 포함한 그 곳에서 토정
선생님과 법담이나 나누고 싶은 마음...... 벗님은 아실까 몰라.... 하하~


뭔가 뒷 날을 생각해서 준비하는일들이
모두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베푼다는 생각도 망상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모두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은가 싶은 생각도
하게 된다. 내가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노력을 하더라도 그 일이 일을
줄이는 것만 못하겠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아마도 심경에 변화가 생긴 모양이다.


사람은 모두 다 각자의
인연을 따라서 공부도 하고 명예도 탐하고 그렇게 살아갈 것을...... 십이운성을 쓰거나 말거나, 신살이 가치가 있다고 떠들거나 말거나 일을
마친 자신의 여유로움을 생각하면서, 일을 줄여야 하겠다는 생각이 나이 한 살 더 먹으면서 점차로 구체화 되어가고 있다. 이제
비록 희망사항이기는 하지만 나중에 화장터에서 아름다운
불꽃에 휩싸인 자신의 육신을 바라보면서 빙그레 미소를 짓고 싶다는 망상을 끝으로
다시 오늘에 충실하자는 결론을 내려야 할 모양이다........


진눈깨비 내리는 계룡산 자락에서 낭월 두손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