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감각불신시대(感覺不信時代)

작성일
2000-12-19 00:00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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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감각불신시대




서버를이전한답시고 분주한 사이에 낭월한담에 글을 올린지가 열흘이 넘었다고 독촉을 하는 벗님들의 성화에 못이겨서 또 한가닥 망상을 잡고 흔들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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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感覺)을 믿을 수가 없는 시대를 살면서....


 


예전에는 흔히 그렇게들 말했을 것이다. 눈으로 직접 보지 않은 것은 믿지 말라는 말 정도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이 당연한 진리라고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세월이 조금 더 흐른 지금에 와서 이 말을 곰곰 생각해보면 과연 이치에도 타당하지 않을뿐더러
현실적으로도 부합이 되지 않는 면이 많음을 생각하고 낙엽이 뒹구는 감로사 마당을 바라다보면서 곰곰 생각에 잠겨 본다.


 



1. 感覺이란 무엇인가.


 


우선 이 단어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이 좋겠다. 감각은 그대로 느끼는 감정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느끼는
것은 그럼 무엇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약간 불교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되더라도 양해 바란다. 불교에서 말하는 감각의 의미가 그런대로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싶어서 잠깐 생각을 해보려고 한다.


 


1)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는 감각 기관이다.


 


쉽게 말하면 눈, 귀, 코, 혀, 몸, 생각 등이라고 하면 되겠다. 이것을 육근(六根)이라고도 부르며 감각기관의
뿌리라고 이해를 하면 무난하지 않은가 싶다. 이 감각기관을 통해서 느끼게 된다고 하는 것은 두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하겠는데, 그래도
좀더 생각을 해본다.


 


2)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은 감각의 기능이다.


 


육근이 느끼는 기능은 이렇게 정해져 있다고 해야 하겠다. 풀어서 말하면 다음과 같은 연결을 하게 되는데, 너무도
간단한 이야기이다. 이것을 일명 육경(六境)이라고도 한다. 그러니까 여섯 가지의 경계를 육근이 알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를 하면
되겠다.


 


눈-색, 귀-소리, 코-향기, 혀-맛, 몸-촉감, 생각-분별


 


그런데 여기에서 좀 특별한 기관은 意가 되겠다. 이것은 어찌 보면 오감을 총괄하는 대표자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좀 다른 대우를 하기도 하는데, 결국 크게 보면 같은 부류로 집어넣고 보는 것인데, 그 문제는 벗님이 나름대로 생각을 해보시는
것도 좋겠다. 여하튼 좀 특별하지만 모두 같은 감각기관으로 작용을 한다고 이해를 하게 되는 것으로 보고 생각을 하도록 한다. 이렇게 감각이라고 하는 것의 의미를 생각했으면 이제 조금 더 파고 들어가(?) 보도록 할 참이다.


 



2. 색깔이 있어 눈이 본다.


 


참, '눈이 있어서 색깔을 보는 것일까요?' 아니면 '색깔이 있어서 눈이 보는 것일까요?' 라고 질문을 드린다면 벗님은 어떻게 답을 하실지 모르겠다. 여하튼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한다면 물론 크게 틀린 말씀은 아니겠지만 낭월은 아무래도 색깔이 있어서 눈이
본다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 그러냐고 따진다면 아무리 눈이 있어도 색깔이 없는 것은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눈이 있거나 말거나 색깔은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이 의미는 적지 않다고 해야 하겠기에 기왕이면 분별을 해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물론 아무리 색깔이 있어도 눈이 없으면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신다면 말은 되지만 그래도 의미는 다르다. 즉 눈이 없다고 해서 색깔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은 벗님이 지금 이렇게 낭월한담의 글을 읽으시는 것도 색깔이 있어서 눈으로 보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셔야 하겠다.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는다면 눈이 없으면 색깔도 없다고 하겠지만 실은 눈을 감거나 뜨거나 글은 그렇게 색깔로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1) 보이는 것은 사실인가?


 


이렇게 질문을 던져본다. 과연 눈에 보이는 것은 사실인가? '눈은 있는 그대로를 본다. 그래서 눈이 본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라고 한다면 물론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고 할 참이다. 그리고 벗님도 낭월이 이렇게 나올 줄은 이미 제목을 보시면서 짐작을 하셨으리라고 생각이 되기도 한다. 보통은 어린아이의 눈이 진실하다고 말을 한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보는 것은 모두 그대로 왜곡이 없이 수용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를 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눈의 작용에 대해서 다시 곰곰 생각을 해보도록 한다.


 


재판장에서는 범죄를 다스릴 적에는 항상 목격자를 찾는다. 그 일이 무엇보다도 해결의 실마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목격자는 또 자신이 본 대로 말을 해서 원만한 결과가 되도록 노력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말이다. 과연 그 목격자의 말은 100% 정확한 것일까에 대해서 생각을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봤다. 아마도 다 믿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이 본다는 감각이 그렇게 허술할 수가 없다는 점을 떠올리면서이다. 즉 보이는 것은 사실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지금 생각을 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2) 한 장의 사진


 


사진을 한 장 구했다. 그 사진에는 친구의 여행 모습이 들어 있었고, 그 배경에는 에펠탑이 있는 장면에서 온갖 폼을 다 잡고 찍은 사진이었다. 그래서 낭월은 생각했다. '음 이 친구가 형편이 어렵다고 하더니 언제 파리는 다녀왔지....? 나보다 더 나은 친구네...' 그런데 그 친구는 말했다.


 


"부러워 할 것도 없다네, 이 사진은 가짜거든. 사진관에서 만들었어. 어때 감쪽같지?"


 


그 말을 듣고서 과연 눈을 어떻게 믿어야 할 것이냐는 생각을 했다. 참으로 눈을 속이는 기술이 대단히 크게 발전을 한 것인 모양이다. 적어도 그림은 못 믿어도 사진은 믿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아마도 구시대의 사람이라고 해야 할 모양이다. 이제는 사진도 믿을 수가 없다고 해야 할 모양이기 때문이다. 어디 그 뿐이랴......


 


3) 눈에 속지 않으려는 노력은 하지만....


 


사물(事物)이 눈에 들어온다. 시장에 가면 온갖 먹거리들이 화려하게 시선을 이끌고 있다. 그리고 제일감으로 생각하는 것은 '신선한 것을 골라야지....' 하는 생각일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에 스스로 속게 될 가능성도 상당히 많다는 것을 생각할 때쯤이면 이미 늦었다고 해야 할 모양이다. 싱싱한 생선은 아가미를 들여다보면 선홍빛이 난다고 하는 상식이 언젠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말도 믿을 수가 없는 말이 되어버렸다. 언젠가 아가미에 공업용 색소로 염색을 해서 사람의 눈을 속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이 언론에 보도가 되면서는 아무도 신선한 생선을 아가미로 구분하려고 하지 않았다. 즉 눈을 믿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시장에서 파는 물건과 백화점에서 파는 물건이 같은 모양에 같은 상표를 달고 있는데, 가격은 수십 배의 차이가 난다고 생각을 해보자. 그 결과를 놓고 어떻게 생각을 하실 참인가? 아마도 '그래도 뭔가 다른 것이 있겠지...' 하는 경우도 가능하겠고, '같은 물건이 자리 값을 하느라고 비싼 거야' 라는 생각도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 둘 중에서 어느 것이 옳은 지는 장사하는 사람만 알 것이다.
여하튼 늘 의심에 찬 눈초리로 세상 만사를 바라다보게 되는 수밖에 없으니 그래서 제목에도 밝혔듯이 감각불신시대(感覺不信時代)인 것이다. 그 중에서도 시각불신시대라고 해야 하겠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다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는 말을 하지 않고서는 그대로 바보가 되어버리는 것도 간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산 고사리와 한국산 고사리를 구분해야 하고, 영광굴비와 중국산 굴비를 구분하려고 혈안이다. 언젠가는 검은 깨를 중국에서 수입했는데, 실은 하얀 깨에 유독성의 염료로 까맣게 염색을 했다는 결과가 나온 뒤로는 한과에 들어있는 흑임자 강정을 괜히 먹기가 께름찌익 했던 생각도 난다. 그러니 어찌 눈을 믿고 세상에 살아가겠는가 말이다. 이제부터는 눈은 믿지 말라는 말을 해야 할 참이다. 여하튼 이 정도로 하고 넘어간다.


 



3. 소리가 있어 귀가 듣는다.


 


어려서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시절에 학교에 다녀오면 으레 지게를 짊어지고 나무를 하러 산을 오르곤 했다. 그리고 친구 삼아서 라디오를 늘 지고 다녔는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나훈아 노래도 노래지만 연속극을 들으면서 생생한 효과음들에 그대로 빠져들었던 생각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소리도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에 소리가 있어서 메아리가 있는 것이니 반드시 이치에 합당하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모든 효과음이 가짜라고 하는 것을 알고 나서는 또 한번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즘은 온갖 기술로 가짜 소리를 실제보다 더 멋지게(?) 만들어 낸다고 하니까 그 혼동은 더 말을 할 필요도 없다고 하겠는데, 문제는 이 귀를 의지해서 들리는 소리를 모두 다 믿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결론은 또한 그 소리들이 실제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고, 그러니까 소리도 불신을 해야 한다는 당연한(!)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1) 소리 중에서도 의심을 해야 하는 것은 사람의 말이다.


 


말은 그 힘이 상당한 영향을 발휘하게 되는데, 그 소리는 과연 진위의 여부를 떠나서 조심을 하지 않으면 낭패를 당하게 될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이 늘 조심스럽게 만든다. 그리고 어쩌면 보고 듣는 두 가지 감각기능이면 대략 외부로부터 입수하는 정보의 90%는
해결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러한 정보기관을 의심에 가득한 마음으로 수용을 해야 하는 것이 얼마나 피곤하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방문자들이 먼 길에 고생한다고 전화로 상담을 하라고 하는 방법을 동원했는데, 전화를 통해서 상담을 하는 경우에는 그대로 들리는 것에만 의지를 해야 하는 입장이 된다. 그리고 대개의 상담자는 다시 눈으로도 보고 싶어서 메일로 보낼 수가 없느냐고 하기에
냉정하게 잘라버린다. 그렇게 하면 전화 상담의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말만 들어서는 왠지 입력이 잘 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서 시각적인 정보가 그만큼 중요한 모양인데, 그렇다고 모든 소원을 달 이뤄줄 수는 없는 일이다. 각설하고. 


 


들리는 것이 서로 충돌을 일으킬 때는 또 어떻게 할 것이냐는 생각도 해봐야 하겠다. 그러니까 어떤 선생은 올해 운이 좋다고 하고, 어떤 선생은 나쁘다고 할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을 거듭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마음으로 결정을 해야 하겠는데, 그 결정의 기준이 없으니 또한 문제라는 것이다. 그제서야 차라리 묻지를 말 것을 그랬다고 후회도 하지만 이미 귀에 들어간 정보는 다시 나오지 않는다. 귀는 들어가기만 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듣는 감각도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참으로 복잡하기 짝이 없다고 하겠고, 더구나 잘못 혹세무민을 하는 조언(굿을 하라는 둥)을 듣기라도 하면 반드시 중화제를 뿌려야 하는데, 주로 낭월이 하는 일이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어제는 누가 전화를 했는데, 상담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미 상담료를 입금시키고 건 전화였다. 하도 다급하게 하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辛巳(2001)년 2월에 자신이 죽는다는 점을 봤는데, 과연 죽겠느냐고 하는 것이 그렇게도 급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독한(!) 병에는 처방도 독해야 효과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내년에는 운이 좋은데 아마도 잘못 본 모양이라고 딱 잘라서 조언을 해준다. 그렇게 죽는다고 날짜까지 받아주면 실제로 죽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에 중화제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물론 실제로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그때 가서 할 일이다. 미리부터 걱정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어느 도인의 말도 있지 않은가. '내일 죽어도 오늘 나무 하나 심을란다.'하는 것
말이다. 그가 바로 도인인데, 중생은 내일 죽을까봐 걱정이 태산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노려서 독약처방을 하여 돈을 울궈내는 장사치도 적지 않으니 참으로 잘 다스려야 할 것이고 귀에 들린다고 해서 다 믿지 말라는 말을 다시 해야 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 여인도 절대로 죽을 리가 없다는 낭월의 중화제를 듣고서야 안심이 된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그래도 아마 여운을 생각하며 실제로 2월이 넘어야
마음이 편해질 것을 생각하면 역시 귀가 열려 있는 것이 유감이고 과연 어떻게 귀를 다스려야 할지는 또한 고민스러운 일이다.


 



4. 향기가 있어 코가 냄새를 맡는다.


 


코에 대해서도 참 생각을 해볼 것이 많다고 해야 하겠는데, 특히 향과 연관해서 생각을 해보면 지금은 가짜 향이 너무 많아서 벌과 나비도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지경이 도달하게 되었다고 해야 하겠다. 그 중에서도 귀는 눈과 연결이 많이 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이 된다면 코는 입과 연관이 많이 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 음식에서 인스탄트를 자연스럽게 포장하는 과정에서 바로 코를 속이는 향료가 들어가는 것이 문제라고 해야 할 모양이다. 특별히 개 코라고 장담을 할 것도 아니다. 애초에 향기 자체가 조작이 되어 가는 상황에서 오히려 개 코는 더욱 혼란스러울 뿐이기 때문이다. 긴 이야기를 줄여도 되지 않을까 싶다.


 



5. 맛이 있어서 혀가 맛을 느낀다.


 


혀는 생명을 주관하는 기관이면서 땅의 기운을 흡수하여 생존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코는 천기를 흡수하여 생명을 유지하게 되는 기관이라고 할 수가 있겠으니 눈과 귀는 생명에는 별로 지장이 없는데 코와 입은 생명과 직결이 되어버린다. 과연 서로 연관이 있다고 해야 할 모양이다. 그리고 코의 천기는 일단 무료로 얻을 수가 있으니까 별 문제가 없다고 하겠지만 입의 지기는 적어도 상당한 노력과 댓가를 지불해야 얻어지는 것이니 이 문제도 결코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1) 혀를 위해 살 것인가. 몸을 위해 살 것인가.


 


늘 이것이 문제이다. 우리는 어느 사이에 몸에 좋은 것을 찾는 것에 비례해서 혀에 좋은 것에도 깊이 중독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겠는데, 잠시만 생각을 해보면 이내 판단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혀의 기능을 잘못 이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공식품의 포장지에는 어느 사이 무슨무슨맛이라고 해서 맛이라고 하는 글자가 자주 눈에 띈다. 그러니까 실제는 아니지만 맛은 같다는 것으로 사용하는 의미인 모양인데, 순진해서 그런지 덜 떨어져서 그런지는 몰라도 낭월이 처음에 바나나 우유를 먹으면서 그 속에는 적어도 1%라도 바나나와 연관된 무엇이 있지 않을까를 생각해 봤는데, 그것도 오산이었다는 것을 후에 누군가에게 들었다. 그 뿐인가. 딸기우유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딸기우유'라고 했다가 식품법에 위반이라고 해서 '딸기맛우유'라고 하는 표시를 해야 한다는 판결도 받았다고 하는 말이 생각나기도 한다. 혹 이 글을 보신 관계자 분이 계시면 혹 낭월이 잘못 알고 있다면 바로잡아 주시기 바란다.


 


2) 혀의 마비에 공헌한 인공조미료


 


혀에는 즐거움을 주고 몸에는 해로움을 준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을 한다면 당연히 몸을 위해서 선택을 해야 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어느 사이에 혀의 선택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스스로 화들짝 놀라고 있는 낭월이기도 하다. 가령 술을 두고 생각을 해봐도 말이다. 한 병에 1만원짜리 술이나 2천원짜리 술이나 취하는 것은 다 같은데,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단서가 붙어 있다면 아마도 혀를 위해서 1만원짜리 술병으로 손이 가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장담을 못하겠다는 말이다. 그래도 이런 경우는 몸에 해롭거나 이로운 정도가 비슷하므로 별 문제는 없다고 하겠다. 맛의 감각에 속임수를 쓰기 시작한 원흉은 낭월이 알기에는 인공조미료가 아닌가 싶다. 처음에는 아지노모도라고도 하고, 미원이라고도 하고 맛나니라고도 했는데, 이놈이 들어가면 혀의 감각 기관을 마비시켜버리고 마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물론 그 용도를 쌉쌀한 맛을 제거하는 정도로 사용하라고 처음에는 만들었겠지만 노벨과 화약처럼 이용하는 사람들이 미각마비용으로 사용을 하게 되면서 부작용이 커지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 후로 미각의 위력에 다들 놀라면서 지금은 거의 위조된 맛으로 혀를 속이고 있지 않은가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참 무서운 일이다.


 


여기에서 무섭다고 하는 것은 인공적인 맛이 결국은 분별력을 잃게 만들므로 혀의 기관은 몸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장사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되어버리면 어떻게 하느냐는 염려가 되어서이다. 그야말로 노예가 되는 것이다.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란다.


 



6. 경계에 따라서 뜻으로 구분을 하여 분별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들어왔다. 사실 앞의 기관들은 그냥 본대로 들리는 대로 정보만 전달해주는 자라고 한다면 별로 탓을 할 것은 없다고 하겠다. 눈이 화면의 그래픽을 사실로 보거나 거짓으로 구분하지는 않는다. 그냥 보이는 대로 입력을 시키기만 할 뿐이다. 마치 스케너와 같다고 하겠다. 판에 놓여진 대로 뭐든지 수용을 하기만 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림을 잘못 읽었다면 그것은 스케너의 탓이 아니고 메모리의 탓이거나 프로그램의 탓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옛날에 어떤 사람은 사람을 잘못보고 자신의 중요한 일을 맡겼다가 악용을 당하고 나서는 자신의 눈에게 형벌을 가해서 눈을 뽑아 버렸다고 하는 말이 어딘가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그렇게 한 기분이야 이해를 하지만 과연 눈이 잘못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자신의 욕심이 그렇게 결정을 내려놓고서는 괜히 눈만 탓하게 되니 또한 어리석은 사람일뿐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아마도 사진이 잘못 읽혀졌다고 해서 스케너를 때려부술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니 그냥 실소(失笑)를 금하기 어렵다. 이러한 착오는 구체적인 기관에 대해서 잘못 이해를 한 때문이라고 해야 하겠고 그러한 분별을 해야 하는 의식작용은 더욱 의미가 크다고 하겠고, 앞으로 날이 갈수록 더욱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이라고 장담을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이제 가상현실로 들어가 버리게 되면 어느 것이 현실이고 가상인지 구분도 하지 못할 지경이 될 가능성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7. 마무리 겸해서 생각 한 도막....


 


감각불신시대를 살아가는 동료 벗님들께 참으로 주의하시라는 말씀을 드려야 하겠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자신의 중심을 잡지 않으면 아무도 대신 책임을 져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을 탓하고 있어서 될 일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벗님은 어떻게 할 참인가? 이 시대 이 시점에서 말이다. 참 간단한 일이 아닌 것은 틀림이 없다.


 


1) 거짓으로 뭉쳐진 세상에서


 


그렇다. 조작된 영상과 조작된 소리(왜 문득 립싱크를 하는 가수들 모양이 떠오르지...?) 그리고 조작된 냄새와 조작된 맛에, 의식은 자신도 모르게 중심을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그러니 스스로 속지 않으려면 자신이 진실해야 된다는 것을 충분히 헤아리고도
남는다고 하겠다.


 


※ 질문 - 사기꾼에게 속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가) 나는 더 높은 단수의 사기꾼이 되는 것이다.


나) 아예 만나지를 않으면 된다.


다) 내가 진실해져야 바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라) 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다.


 


여기에서 4번은 논하지 않아야 하겠다. 아마도 도인이거나 아니면 바보라고 결론을 내려야 하겠기 때문이다. 그 외에는 다소 고민이 따르겠지만 낭월은 다)로 정답을 삼고 싶은 것이다. 속지 않으려면 바로 보는 것(正見)이 최선이고 그 이상의 좋은 처방은 없다고 봐야 정상이겠다. 그리고 바로 보는 방법을 잘 설명해 둔 것이 있으니 흔히 말하는 반야심경이 바로 그것이며 그 반야심경은 이 시대에 세상의 혼란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명 처방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무안계(無眼界)


내지무의식계(乃至無意識界)




눈귀코혀몸과 뜻이 없으니


색과 소리 향과 맛 감촉과 이치가 없다.


눈에 보이는 경계가 없으며


나아가서 의식의 경계조차도 없나니...


 

 


               2000년 12월 19일 늘 바로 보는 것이 고민스러운 낭월 두손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