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난강망(欄江網)의 단면

작성일
2000-11-26 00:00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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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화 - 난강망(欄江網)의 단면... (2000.11.26)


 


 

자명명리학을 연구 하시는 벗님 중에서는 난강망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에 대해서 많은 궁금증을 갖고 있으신 것으로 의견이 왕래하는가 보다. 낭월인들 고전을 모두 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한 단면이나마 설명을 드리게 됨으로 해서 이 책이 어떤 형상을 포함하고 있는지 약간의 도움을 드리고자 한다. 낭월이 이해하고 있는 것이 혹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가차없이 낭월이 메일로 가르침을 주시면 감사하겠다는 말씀을 겸해서 드리게 된다. 잘못된 안내는 없느니만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 소견(所見)대로 말씀드리도록 한다.


 

1. 난강망은 어떤 책인가?


참고로 난강망을 서낙오 선생이 평주를 하면서 궁통보감(窮通寶鑑)이라고 새로 명명을 하였고, 다시 다른 이름으로는 조화원약(造化元?)이라고도 하였는데 모두 같은 자료에 대해서 다른 이름이라고 하는 것을 참고로 알아두시면 되겠다.


우선 제목을 해석해보면 '눈이 듬성듬성한 그물'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그러니까 새우나 멸치를 잡는 그물이 아니고 꽃게나 참치를 잡는 그물이라고 이해를 하면 되겠다. 이 말에서 풍기는 것은 세밀하게 대입을 하는 것은 책임을 지지 못하겠지만 대략적인 것을 이해하는 용도로는 충분히 그 가치가 있다고 하는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내용을 보면 실제로 그러한 구조로 되어 있음을 헤아리게 되는데, 일일이 다 설명을 드릴 수는 없지만, 다음과 같은 인용을 통해서 간략히나마 이해를 할 수가 있겠다.


[未月丁火의 경우]


透甲會木支藏水 文章驚人
多水弱火柱無木 終身庸碌


투갑회목지장수 문장경인
다수약화주무목 종신용록


갑목이 투출하여 목을 만나고 지지의 장간에 수가 있다면
문장으로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나,
물이 많아 불이 약한데 주중에 목이 없다면
늙어 죽을 때까지 별 볼일이 없다.


이상이 미월의 정화에 대한 난강망의 전문이다. 이 내용은 四明丁丑版欄江網의 내용이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 미월에 태어난 정화는 일단 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미월의 화가 퇴기하는 계절임을 고려해야 하겠고, 목이 있으면 다시 지장간에는 수가 있어서 목의 기운을 돋궈주게 되면 문장으로 출세한다는 것이고, 미월정화가 수가 너무 많아서 신약하여 목이 절대로 필요하겠는데 만약 사주에 목이 없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으로 해석을 할 수가 있겠다. 뒷 부분의 내용은 억부법으로도 이해가 되는 대목이므로 구태여 난강망이어서 그렇게 된다고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싶다.


이와 같은 내용을 보면서 생각을 해 볼 것은 과연 그렇겠느냐는 확인이 될 것이다. 실제로 미월에 태어난 정화로써 문장으로 이름을 날릴 사람도 있겠고, 사업으로 출세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이렇게 되지 못하는 사주라고 한다면 과연 별 볼일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봐야 하는데, 아쉽게도 난강망에는 그러한 방면에서 설명이 없다는 것이다. 책이름이 왜 난강망인지는 충분히 짐작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겠다.


2. 난강망의 적절한 용도


이 책을 과연 어디에 활용을 해야 좋겠느냐는 점에 대해서 낭월이 생각을 많이 해 봤는데, 이 책만 갖고서 세상의 모든 사람의 사주를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생각했다. 이 책의 용도는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한참 늦게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는데, 그 용도는 많은 사람 중에서 재목을 찾는 용도로 활용이 되겠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생각을 해 보시면 알 일이다.


백 명의 사주를 놓고서 그 중에서 재상을 시킬 재목을 찾게 된다면 어떤 규칙이 필요할 것이고, 그러한 규칙으로 난강망은 멋진 역할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왜냐면 잔챙이와 피라미는 모두 걸러버리고 큰 고기만 잡는 것으로 멋진 도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멸치를 잡는 것에 목적이 아니고 큰 고기를 잡으려고 한다면 난강망으로도 충분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에 무리가 없다. 그런 용도로써의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하겠고, 만약에 제후가 되어서 인재를 찾아야 할 시점이라고 한다면 이 책은 나름대로 그 가능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3. 난강망의 적절하지 못한 용도


그런데 실제로 세상은 어떤가? 과연 그렇게 큰 재목을 찾는 용도로만 가능성이 보이는 난강망으로 멸치와 꽁치를 모두 잡으려고 달려들어서야 될 일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꽁치까지 다 잡으려고 한다면 이 그물은 포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저 어쩌다가 필요할 경우에 한번 꺼내어서 휘둘러보는 정도로 충분하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든다. 몇 년 전인가 어느 통신 회원을 만난 적이 있었다. 낭월이 사주를 놓고서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자꾸만 갑목이 용신이라고 떼를 쓰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지 않는 것으로 본다고 하니까 구태여 고집을 부리기에 도대체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느냐고 하니까 자신의 사부님이 난강망을 통달한 도인인데, 그렇게 본다고 하는 것이었다. 대구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래서 직접 한번 뵙게 연결을 해 달라고 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는데, 난강망으로 사주를 본다는 것이 이렇게 문제를 많이 내포할 수가 있다고 하는 점을 벗님들께 알려드림으로써 하나의 참고가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다.


時 日 月 年
癸 己 甲 丁
酉 未 辰 酉


이 것이 낭월이의 못난 사주이다. 갑목이 용신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도 강력하게 떼를 쓰기에 그럼 경자대운은 어떻게 해석을 할 것이냐고 했더니 경금이 들어오면 갑목이 상하므로 어렵겠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당연한 이야기라고 해야 하겠다. 만약 갑목이 용신이라면 어려울 것은 당연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경금대운이 되어서야 낭월이는 겨우 자신의 집을 마련하고 강호에 이름을 내밀게 되었으니 경금으로 인해서 곤란을 겪게 될 것이라는 예측은 전혀 빗나가고 말았다고 해야 할 모양이다. 중요한 것은 논리가 아니고 현실이라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 부합되면서 논리적이기도 하다면 더 바랄 것이 없고, 명리학자는 그러한 목표를 향해서 최상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사명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적당하지 못한 논리를 갖고서 전체를 포용하는 용도로 쓰겠다고 달려드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하기 쉽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누가 이러한 낭월이의 좁은 소견을 확 틔게 해준다면 그보다 고마울 일이 없겠다.


4. 또 하나의 예문


時 日 月 年
辛 丁 癸 乙
丑 酉 未 卯


난강망의 규칙에 의한다면 앞의 예로 든 원문에서 설명이 되어 있는 대로 갑목을 용신으로 해야 하겠는데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다. 용신도표를 보면 갑목을 용신으로 하고 임수를 보좌로 한다고 했는데, 이 사주는 갑목도 없고 임수도 없으니 과연 버린 사주라고 밖에 해석을 할 수가 없다고 해야 할 모양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실제로 부귀를 함께 누린 사람이라고 하니 과연 어디에서 그 사람의 부귀함을 읽어야 하겠느냔 말이다. 참으로 믿기 어려운 난강망의 설명이라고 밖에 할 수가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본다면 신약용인격으로 을목을 의지하게 되는데, 을목은 뿌리를 강하게 얻고 있으면서 계수도 생조를 해주고 있으니 운만 만난다면 목적을 이룰 수가 있다는 정도의 해석은 벗님도 하실 수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 사람의 운은 남을 거쳐서 동으로 향하니 출세를 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느 해석이 타당한지도 겸해서 생각 해보시기 바란다.


5. 난강망의 오류


글쎄다. 학문의 연구가 깊지 못한 낭월의 소견이 정답이 될 수는 없지만 아쉬운 점은 모든 것을 조후의 개념으로 파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치우쳤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고 하는 것에서 조화를 이루는 중화(中和)의 개념이 빠져있다고 하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될 사주와 망할 사주'에 대해서는 잘 설명을 하는데 그 외에 중간의 사람에 대한 설명은 상당히 결여되어 있다고 해야 할 모양이다. 물론 지혜롭게 활용을 해서 자신의 공부에 응용을 하시는 정도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난강망에만 빠져서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 생겨서는 곤란하겠다는 정도의 염려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행의 생극제화에 대한 이치를 궁구하고 혹 참고용 정도로 난강망을 이해한다면 그리 큰 문제는 없으리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즉 활용의 가치는 있지만 전적으로 매달릴 교재는 아니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6. 학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난강망은 참고서로써의 가치가 충분한 교재라고 생각을 하시면 되겠다. 즉 겨울에 태어난 경우나 여름에 태어난 경우에는 충분히 검토를 할 수가 있겠지만 그 외의 경우에는 아마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낭월의 생각으로는 그렇다는 말씀인데, 아마도 크게 잘못되지 않았을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난강망을 전혀 몰라도 오행의 생극제화(生剋制化)만 잘 이해한다면 운명의 길흉을 보는 것에 그렇게 큰 불편은 없으리라고 생각도 하게 된다. 그 예로 적천수에서는 한난조습(寒煖燥濕) 정도에서 조후를 고려하면 되는 것으로 설명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낭월도 자평을 연구하는 학자일 뿐이고 어느 책에 대해서 신봉하고 그래서 다른 책은 따르면 반역죄를 범한다는 식의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리고 삼명통회도 봤고, 연해자평도 봤지만 중요한 것은 남의 운명을 논함에 있어서 가장 올바른 방법이 무엇이냐는 점에서는 모두 오류를 많이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7. 백번 천번 읽으면.....


대개 공부를 많이 했다는 것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말을 한다. 그 말의 근원은 '백번 읽으면 뜻이 저절로 나온다'는 어느 경전의 말에서 연유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된다. 그렇다면 이 방법으로 한다면 과연 어떤 효력이 있을까를 생각 해본다.


한 권의 책을 백번이나 천번 읽으면 내용을 다 깨닫게 되고 소위 말하는 도를 통하는 경지에 도달한다는 말에 사람들이 아무도 그렇게 할 자신이 없으므로 그만 반박을 할 말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두어 번 읽어보라고 하는 말이라면 또 모르지만 백 번 읽어보라고 한다면 참 난처한 문제이다. 이 말은 마치 죽어보면 그 경지를 안다고 하는 말과도 서로 통한다고 하겠다. 여하튼 그렇더라도 과연 백번을 읽어서 오행의 이치를 통할 가능성이 있겠느냐는 점에서는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깨닫는 장면은 글의 뜻을 깨닫는 것이 아니고 삼매의 경지에서 큰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누구는 금강경을 읽다가 세상의 이치를 알았다고 하기도 하고, 또 누구는 화엄경을 보다가 삼매에 들어서 우주의 실상을 깨우쳤다고 하는 것과 서로 통한다고 하겠다. 물론 어떤 사람은 책은 그만두고 오로지 옴마니반메훔만 일생동안 염하여 도를 통할 수도 있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를 한다면 무리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학문의 경지와는 다른 상황이라는 점을 간과하면 큰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이 것은 도와 학의 차이라고 할 정도이다. 그러니까 학문적인 차원에서는 천번 만번을 읽어도 깨달을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다만 도의 경지에서는 구태여 난강망이 아니라도 상관이 없고 심지어는 오행의 이치를 깨닫기를 간구하면서 천수경을 읽는다고 해도 그 이치를 깨닫게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난강망이어야 하고 적천수가 되면 안 된다는 것은 성립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점에서 착오가 없기를 바란다. 도를 추구하는 벗님이라면 몰라도 그냥 학문을 하는 벗님은 아예 그렇게 무리한 방법에는 그냥 고개만 돌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8. 결론


낭월은 늘 그렇게 생각한다. 올바른 이치가 있고 그 이치를 배우는 과정에서 깊이 사색을 하면서 자연의 질서를 익혀간다면 충분하지 않은가 싶은 생각을 늘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는 구태여 어느 책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필요가 없고 오히려 고정관념은 오히려 장애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하겠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난강망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얻게 될 수도 있겠다. 다만 낭월이 드리고 싶은 말씀은 난강망만 위대하고 그 나머지는 사소하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편견은 늘 많은 것을 놓치게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벗님이 오행의 이치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늘 깨여있는 마음으로 자연에 가까워질 방법을 찾아가시지 않으면 언제 함정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조심성도 함께 필요하다고 생각이 된다.


백천번을 읽는 것은 자유에 해당하지만 만약에 그렇게 해서도 오행의 이치를 모를 경우에는 누가 그 시간을 보상하겠느냐는 점에 대해서도 충분히 생각을 해보고 나서 달려들어도 늦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느 분은 삼명통회를 20년 읽으면 알 게 된다고 하는 말도 하였는데, 20년이 지난 다음에도 깨닫지 못하면 또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답이 없다는 것이 마음을 답답하게 만든다. 줄잡아서 약 1년만 투자를 하라고 한다면 그래도 설득력이 있는 말이라고 할 지도 모르겠다. 낭월이 적천수징의를 보는데 1년을 정독하는데 4번밖에 읽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속에서 많은 깨달음이 있었다고 생각이 되기도 한다. 수십년을 매달려서 하는 것이 과연 현명하다고만 하기도 여렵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신은 근기가 높아서 실행을 할 수가 있을지 몰라도 남에게 권할 적에는 그에 대한 책임도 생각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약간의 참고가 되셨기 바란다.



                  2000년 11월 26일 비내리는 계룡산에서 낭월 두손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