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선생과 스승 & 학생과 제자

작성일
1999-12-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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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선생과 스승 & 학생과 제자



낭월이가 생각하기에 세상의 모든 삼라만상이 다 내 스승이라고
생각을 하고 공부를 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책에서도 그렇게 나와 있고 해서 당연히
그렇게 모든 것을 스승으로 삼고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인 줄로 알게 되었고,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는 것같다. 유식한 말로 할 적에는 '善惡而皆吾師(선약이개오사)'라고
해서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 다 내 스승이라고 하는 말로 하기도 하는데, 뜻은 완전히
같은 것이므로 달리 이견이 없다. 늘 그렇게 공부를 해 가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낭월이에게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늘어가게 됨을 문득 느끼면서 이제는 입장이 바뀌어 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늘
남을 스승으로 삼고 공부를 했는데 이제는 남들이 낭월이를 의지해서 공부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이 바뀐 입장의 사이에서 느끼는 묘한 감정을 벗님은 이해가 되실지 모르겠다.
아마도 사람을 가르쳐보신 경험이 있다면 충분히 이해가 되시리라고 보지만 그런
경험이 없으시다면 아마도 정확하게 느끼시기에는 무리가 있으리라고 미뤄서 짐작이
된다. 왜냐면 경험을 해본 것과 미뤄서 짐작을 해본 것의 차이는 대단히 크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이 배우는 마음과 가르치는 마음에 대해서 한번
생각을 해보고 싶어서 생각을 가다듬어본다.



1. 배우는 입장



배운다는 것은 생이지지(生而知之)가 아닌  바에는
도리 없이 거쳐야 한다. 그 내용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더불어 사람의  행색을
하고 살기 위해서는 뭔가를 배우지 않을 수는 없는 셈이다.


가장 원초적으로 배워야 할 것은 대소변을 가리는 것부터
해야 할 일이다. 젖을 먹는 방법은 배우지 않아도 된다. 그야말로 생이지지의 일종이라고
하겠다. 나면서부터 자동으로 알게 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컴퓨터로 생각을 해보니까
롬바이오스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기본적인 생존문제는 자동으로 해결이 되도록
시스템이 되어 있는 모양이다. 그 다음으로 사람처럼 살기 위해서는 말도 배워야
하고, 여기에서 한국 사람과 미국 사람이 구분되는 시작이다.


그 외에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차로 배우는 것도 많아지는
것은 이미 알고 계신 내용이므로 더 이상 군소리를 하는 것은 시간낭비이므로 생략을
하거니와 그렇게 배우는 데에는 항상 가르쳐 주는 선생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하겠다. 처음에는 어머니에게 배우고 또 아버지에게 배우고 형제들이나 이웃에게
배우면서 늘 그 가르침을 주는 선생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에게 '선생님'이라고
하는 말을 쓰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 주목을 해주시기 바란다. 선생님이라고
하는 말은 일단 교육기관에 들어가서 공부가 시작되면서 사용하게 되는 호칭이다.


그렇게 인연이 되기 시작한 선생님은 죽기 전까지 늘 존재할
가능성이 있겠다. 여하튼 사람인 이상 언젠가 선생님과 만나야 할 숙명을 안고 있다고
해도 되겠다. 그래서 배우는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배우고는 또 다 배우면
떠나가는 것이다. 초등학교에서 배워야 할 것을 다 배우면 떠나간다. 중학교로 가거나
형편이 여의치 못하면 생활전선으로 떠나가게 된다. 그리고 공부를 더 한다면 계속해서
또 다른 선생에게 공부를 하고 또 다 배운 다음에는 떠나가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둘 사이에는 거래의 관계가 끝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서로 계약관계에서 필요한
만큼만 배우고는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게 되면 그대로 떠나가는 것이 선생을 찾아
배우는 자의 목적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한 법칙으로써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2. 가르치는 입장



이 점에 대해서는 근래에 들어오면서 가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어느 사이에 가르치는 입장도 생각을 하게 되는 위치가 되었나보다. 그리고
기왕이면 선생다운 선생이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선생다운 선생의 조건에
뭐가 있을지는 각자 생각을 할 나름이겠지만 낭월이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다.



1) 알고 있는 것을 가장 빨리 가장 쉽게



우선 선생이라고 하면 자신이 아는 것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서 가장 알기 쉬운 언어를 이용해서 가장 빨리 습득을 하도록
일러줘야 한다고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자신도 항상 새로운 이치를 터득하기 위해서
늘 정진을 해야 할 것은 당연한 책임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깨달은 것은 또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공부하는 학생에게 일러줘야 할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선생은
보살과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보살은 그렇게 자신이 깨달아 가면서 모르는 사람에게는
깨달은 것을 가르쳐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2)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고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자신은 만능이 아니다. 잘 하는 것은
세상의 삼라만상 중에서 기껏 한두 가지일 뿐이다. 그 외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해야 정상일 것이다. 그러니까 모르는 것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모른다고 해야 하는
것이 가르치는 입장에서의 최대한의 예의일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자신의 엄마는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는 자신의 부모도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대로 선생의 대상을 옮겨가게 된다. 그리고 그 부분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자신이 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하는 사람이 간혹 있어서 자식을 그르치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



가령 얼마 전에 방송에서 보니까 신이 고쳐줄 것이라면서
뱃속에 암의 덩어리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상황에서도 만사태평인 부모를 봤다.
여하튼 신이 도왔는지 그 아이는 수술을 받게 되었다고 했는데, 이러한 부모의 경우가
그야말로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한 셈이 되는 월권을 저지른 것이다. 그냥 자신의 월권이야
자존심으로 그렇게 했거나 나름대로의 신념으로 그렇게 했다고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가르침으로 인해서 그 아이는 죽어가고 있었으니 결국은 사람을 잡았을 것이
틀림없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만약에 그 부모가 모르는 것을 의사에게 물었더라면
아마도 그 지경까지 되지는 않고 아이를 고생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3) 수업료를 늘리려고...



그런 선생도 있을 것이다. 가령 3개월이면 모두 일러 줄
수가 있는 내용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3개월 내에 일러줘야 한다. 그리고 10년이 걸려야
알 수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내용은 10년이 걸려서 전달을 해 줘야 한다. 적어도
돈을 좀더 받으려고 3개월에 가르칠 것을 1년 동안 지연시킨다면 이미 자격은 상실되었다고
해도 되겠다. 선생의 입장이라면 적어도 3개월이 걸릴 내용이라면 어떻게 하면 2개월을
투자해서 전달을 해 줄 수가 있겠는가에 대해서 고민을 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4) 속임수를 쓸 수도....



물론 상상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그런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다. 자신도 모르고 있는 상황을 알려준다고 하고 학생을 모은 다음에 엉뚱한
소리로 수업료만 따먹고는 나중에는 '너의 능력이 부족하니 다음에 와라'는 식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그리고 실제로 명리학의 선생 중에서 일부 사기꾼은 1개월만에 영업을
할 수가 있도록 지도를 해준다고 광고를 낸단다. 그리고 수업료는 수백 만원을 요구한단다.
그 말을 보고서 얼른 배워서 영업을 하면 돈을 벌게 되므로 결국은 비싼 것이 아니라는
영리한 계산과 맞아 떨어져서는 서로의 계약이 성립하는 것이다.


물론 그 기간에 알려주는 것은 명리학이라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기술과 눈치보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한 달이 되면 가서 영업을
하라고 한다. 혹 학생이 아직 자신이 없다고 한다면 그때는 모른다고 딱 잡아 땐다.
'그야 니 사정이지 나는 벌어먹도록 일러 줬으니까....' 이렇게 하고서 다시 광고를
한단다. 물론 낭월이가 겪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하지는 않지만 전해들은 이야기로
봐서는 백주 대낮에 벌어지고 있는 속임수임은 틀림없는 모양이다. 이렇게 단언을
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학문은 문외한이 단 1개월을 투자해서 영업을 할 정도가 될
수는 도저히 없는 성질의 것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학생과 영악한 선생은 서로 자신에게 속고 남을 속이면서 오늘도
계약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이런 선생에게 속아서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것도
역시 자신의 팔자라고 해야 할 모양이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일이다. 왜냐면
그 선생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말이다. 속은 자와 속인자의 죄의 무게는 동격이다.
똑같다고 보는 것이다. 예전에 전해 내려오는 말에는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한다지만 낭월이가 생각하기에는 천만의 말씀이다. 모르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죄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앞에 예로 든 아이의 부모를 생각해 보시라. 과연 죄가
되지 않겠는지....



3. 계약이 끝나면 서로 헤어진다.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렇게 해서 각자 필요한 것을 배우고
가르쳤으면 이제 헤어지는 것만 남는다. 그래서 '잘 배웠습니다.' 하고 '계속 발전하시게'
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그리고 낭월이도 이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또 떠나 보내고 있다. 마치 물위를 배가 지나가는 것처럼 그렇게
서로는 의지를 했지만 또한 일을 다 본 화장실처럼 그렇게 기분 좋게 떠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배우는 입장과 가르치는 입장의 가장 좋은 상황이 아닌가 싶다.



4. 제자라고 하는 의미...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게 처음에는 가볍게 공부를
하려고 서로 만났는데, 하루 이들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이 제자라고 하는 말을 하는
것이다. 제자의 의미를 과연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여하는 그렇게 제자라고
하는 말을 하게 된다. 그러면 선생과 제자라는 말은 서로 연결이 어색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당연히 스승과 제자라는 말로 연결을 지어 가는 법칙이 발생하게 되는
것에서부터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弟子라는 말은 자식과 같음을 의미한다. 자식과 같음은
거래관계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거래관계는 상관이 없는 인연이 되어버린
것이 제자인 것인데, 과연 이 말을 함부로 해서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제자라고 하는 것은 스승의 길을 따르겠다는 의미도 포함이 되지 않을까 싶다. 여기에서
심사숙고를 해봐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진다.


그리고 스승에게는 '사부님'이라고 하는 호칭도 쉽게 할
수가 있겠다. 사부는 무엇인가? 師父의 말은 부모처럼 생각하겠다는 말이다. 과연
자신에게 공부를 하던 학생이 어느 날 문득 '사부님'이라고 했을 때 그 기분이 좋지
않을 리가 있겠느냐는 말은 하나 마나이다. 그리고 더욱 친밀하게 자신이 필요한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은 선생과 학생과의 느낌보다는 상당히 의미가 큰 관계이기 때문일
것도 같다.



1) 진정으로 존경한다면 무방하다.



그럴 것이다. 과연 부모와 같은 기분으로 그의 가르침을
배우고 싶다면 자연스럽게 사부라고 하는 말이 나오게 될 것이고, 서로에게 더욱
친밀감을 갖게 될 것이니 나쁠 이유가 없다고 하겠다. 그리고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라는
것도 아마 결국은 이러한 관계가 성립하는 것이 좋다고 하겠다. 선생과 학생과는
공식적인 내용을 거래하겠지만 스승과 제자는 사적인 내용도 거래를 하게 될 수가
있겠다. 덜 공식적이라고 하더라도 공부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제공을 할 수가
있지 않을까 싶다. 좋은 인연이다. 그리고 낭월이에게 이렇게 부르는 사람이 적지
않음도 사실이다. 그래서 늘 죄송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도 또한 현실적으로 아직은
세상의 앎이 부족한 자신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고마운 것은 사실이다.



2) 또 다른 계산이 있는 제자?



글쎄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가끔은 이러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눈치가 빠르신 벗님이라면 뭔 의미인지 감을 잡으실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참으로 선생을 존경해서 사부라고 했는지 아니면 자신의 목적을 빨리 이루기
위해서 그야말로 작전상 부른 말인지 혼란이 발생할 때가 있다. 비록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이러한 씁쓰레한 경험을 한 적이 몇 차례 있었기에 드릴 수가 있는 말씀이다. 직접
그러한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흔히 하는 말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선생에게
사부님이라고 하면 혹 사탕이라도 한 개 더 얻어먹으려나 싶어서 잔꾀를 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러한 기분이 들면 완전히 사기를 당한 기분이 발생한다.
배신을 당했다는 말의 의미를 여기에서 느끼게 되는 것이다. 비록 심리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한번 그런 기분이 들면 그 사람에 대해서는 여간해서 용납이 되지 않는 것은
낭월이가 옹색해서인지 아니면 사람은 원래 그런 것인지 잘 모르겠다.



3) 속았을 수도 있겠다.



비록 선생이 속일 생각은 없었는데, 처음에는 스승깜이라고
생각을 하고 따르다가 어느 날인가 그 선생의 본전이 보여서 떠나버리고 싶은 경우도
있겠다. 그리고 처음에는 몰랐고 후에 알게 됨으로 해서 처음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등을 지게 되는 경우도 충분히 있을 수가 있겠다. 이러한 경우에는 여하튼 뒷맛은
개운치 않지만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아마도 씁쓰레한 기분이 들겠다. 즉 이 부분의
문제는 학생이 스스로에게 속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하튼 일단 사람이 싫어지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그래서 또한 헤어지는데, 이 기분이 선생과 학생의 헤어짐과는
상당히 다른 기분이 들더라는 것이다. 그래도 어쩌는 수가 없겠다. 이 상황에서는
학생을 탓할 수도 없는 일이니 말이다. 부디 새로운 좋은 스승을 만나서 자신의  학문을
완성시켜 가시기를 기원하는 것이 보내는 사람의 최선일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해 보시라. 볼 때마다 '사부님. 사부님'
하던 왕년의 제자가 어느 날에 갑자기 고개만 까딱하고 인사를 했을 적에 느끼는
감정.... 하하하~ (물론 쓴웃음이다)



5. 스승이라고 하는 의미



명색이 스승이라는 말을 들으려면 적어도 학문만이 아닌
영혼을 가르치는 지위에 있어야 감당을 할 수가 있는 호칭이 아닌가 싶다. 그 외에는
스스로 자신을 스승이라고 말하는 것은 직권남용이거나 무례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
모양이다. 별 의미 없이 하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다시 의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그러니까 혹 이 글을 보시는 낭월의 학생들께서는 앞으로 다시는 스승이라고 부르지
말라는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분수에 어울리지도 않은 사부님의 호칭을 듣고
좋아한 죄로 후에 배반을 당한 것처럼 씁쓰레한 기분의 대가를 지불하기에는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이다. 그리고 다른 선생님들에게도
함부로 사부님이라고 하는 호칭을 사용하지 말라고 권하고 싶기도 하다.


실로 낭월이는 선생님에게 한번도 사부님이라고 해본 적이
없다. 그 마음의 표시는 마음으로만 품고 있으면 될 일이다. 말로해서 맛이라고 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보면 편안한 그런 기분이
오히려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말로는 선생이고
마음으로는 사부님인 사람이 더러 있는 법이다. 얼마나 편한지 모른다. 그리고 자신도
그러한 사람으로 남는 것이 최대의 희망이기도 하다.



6. 가장 바람직한 관계.



결론 삼아 생각을 해본다. 과연 어떤 관계가 가장 바람직할까...
그리고 해답은 금새 얻을 수가 있다. 마음으로는 '학생은 제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선생은 스승의 이름을 생각하고 정진'한다면 또한 행복한 인연이 되지 않을까 싶다.
말로만 제자이고 입으로만 스승이어서야 참으로 공허할 뿐이 아닐까 싶다. 오늘도
스승을 찾아서 두리번거리고 있는 낭월이지만 또한 어떤 사람들은 낭월이를 만나려고
기회를 보고 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각자 자신의 길을 가게 되겠지만
낭월이의 생각에는 이렇게 정리가 된다.



1) 배우는 입장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배우고, 그렇게 배운 것은 임상하고
활용하면서 소화시켜나간다. 그리고 배운 것 중에서 활용이 되지 않는 것은 자신이
노력을 해서 스스로 깨달아 가면 되겠고 또한 다른 선생이 있다면 그를 향해서 새로운
배움의 길을 가면 될 것이다. 혹 낭월이에게 와서 예전의 사부님이 어떻더라고 하면서
비난을 하는 사람을 본다. 그러면 참 소름이 돋는다. 그가 또 다른 사람에게 가서는
또 그렇게 내 험담을 하겠지... 세상에 허물이 없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래서 때로는 선생과 학생의 관계도 포기하고 싶은 기분이 들 때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섣불리 사부님이니 스승님이니 하는 말은 삼가는
것이 좋겠다.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면 사람도 실속이 없어 보일 뿐더러 이제는 오히려
경계의 마음이 먼저 든다는 것을 아마도 본인들은 모를 것이기에 이렇게 한가하게
헛소리를 하는 공간에서나마 한마디 도와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판단으로
진정 스승이라고 판단을 했다면 후에 빗나가더라도 비난은 하지 말자. 자신의 눈이
어두운 탓오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낭월이에게 와서 선생의 흉을 보는 제자는 그대로
야단을 한다. 스스로 어리석음이지 누굴 탓하느냐고 말이다.



2) 가르치는 입장



자신이 아는 것은 모두 가르쳐야 할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물론 낭월이는 그렇게 행동도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낭월이가 좋은 선생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여하튼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깨우친 바를 전달해 드리려고 노력하는
것은 틀림이 없다. 물론 모르는 것은 할 수가 없는 일이다. 만약 공부를 하는 많은
사람들이 진실로 솔직한 선생을 만나서 공부를 한다면 많은 의미에서 경제적이 되지
않을까 싶다. 대우는 선생의 대우를 받고 마음은 스승의 마음으로 모두를 전달해
주려고 노력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관계가 오래도록 유지되겠느냐는 생각을 해본다.


어떤 선생님은 '요기서 요기까지만 배워라.' '그 나머지는
비법이므로 특별히 전수한다.' 는 식의 운영을 하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물론
여기에서 특별히 전수하는 것은 별도의 많은 돈을 내면 일러주겠다는 의미임은 두
말을 할 나위도 없다. 이렇게 되면 일단 장사꾼에 불과하다고 하는 말을 해도 되겠다.
장사꾼이라고 하는 것은 선생의 자격이 없다는 말이다. 여하튼 배우기도 어렵지만
가르치기도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닌 모양이다.



7. 어찌 사주공부 뿐이랴...



비록 낭월이가 관계하고 있는 부분에서 말씀을 드렸지만
아마도 세상의 모든 과정에서도 두루 통하는 생각일 것이라고 믿는다. 언제나 배움은
필요하고 또 가르치는 일도 필요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러한 점에 대해서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생각을 해봐야 할 부분이 아닐까 싶어서 생각을 정리해 봤다. 물론 이 말은
낭월이에게 꾸짖는 말이기도 하다. 배울 때는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배우고 가르칠
때에는 또한 그렇게 사심 없이 최선 다해서 가르치자는 생각에 채찍질을 해보는 것이다.
학교의 존립에 대해서 우려를 하는 시대적인 분위기를 생각해 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1999년 마지막 날에
낭월 두손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