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경험보다 더 좋은 스승이 있을까....

작성일
1999-1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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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경험(經驗)보다 더 좋은 스승이 있을까.....



경험(經驗)이라는 말은 경(經)의 도로라는 의미와 험(驗)의
증거라는 글자의 결합이다. 그래서 경험이라는 말은 살아가면서 겪어보고 알게 된다는
의미가 아닐까하고 해석을 해보는데, 우리 인생의 길도 또한 무수히 많은 경험을
통해서 꾸려 가는 길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은 각자
다를 수밖에 없는데, 그 다른 정도가 같은 일을 동시에 하면서도 느끼는 것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 참 묘한 일이다. 그래서인지 경험보다 더 좋은 스승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말에 대해서 실감이 나는 것이 이제 40고개를 갓 넘은 경험으로써는 다소
부족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생각을 해본 것에 대해서 한번 정리를 해보고
싶어진다. 계절의 탓인지도 모르겠다.



1. 경험의 종류라면....



무지하게 다양해서 일일이 뭐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문득 떠오르는 종류에도.



사업경험, 공부경험, 질병경험, 실패경험, 군대경험, 남자경험,
여자경험, 출산경험, 결혼경험, 이혼경험, 사별경험 여행경험, 글을 써본 경험, 바둑을
둬본 경험, 일을 해본 경험, 남에게 맞아본 경험, 반대로 두들겨 패본 경험, 고기를
잡아본 경험, 이런저런 경험을 뭉뚱거려서 인생경험,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는 죽는
경험까지.....



일일이 경험이 아닌 것이 없다고 해야 하겠고, 그래서 사람들은
제각기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자신의 인생관을 형성하고 그렇게 관조하는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그렇게 겪은
경험을 놓고서 '좋은 경험'과 '나쁜 경험'으로 구분을 하는 것까지 포함이 된다.
그리고 '쓸모 없는 경험'이라는 등등의, 이른바 경험에 대한 평가라고 해야 하는
것까지 포함이 되는 모양이다. 그리고 낭월이가 살아오면서 해본 경험에 대해서 생각
나는 대로 언급을 해본다.



2. 낭월이가 겪어 본 경험들.....



어린 시절에는 타향객지에서의 서러움을 겪어봤다. 고향에서라면
있을 수가 없는 일들이 객지에서는 얼마든지 발생할 수가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이른바 경상도 말을 하는 놈이 되어버린 것은 안면도로 이사를 했기 때문에 얻어진
경험이라고 해야 하겠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왕따가 되어버렸는데, 그래선지 지금은
왕따에 대해서는 전혀 겁나지 않는다. 왜냐면 어려서의 왕따로 인해서(8~9세였으니까)
혼자서도 얼마든지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왕따를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경험하지 못할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마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왕따를 경험하는 것도 인생에서는 별로 나쁘지 않다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그러한 시간들로 인해서 자신의 내면세계를 더욱 구체적으로 그려갈 수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가난으로 인해서 돈이 없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절절히 느껴야 하는 경험도 했다. 내 맘대로 선택이 되지는 않았지만, 가난이 주어지는
것으로 통해서 느껴본 것 중에는 중학교를 포기하고 기술을 배우러 가야 하겠다고
생각을 한 것도 어쩌면 재운(사주에서 재성의 운)이 들어와서이기도 했겠지만, 실은
가난으로 인해서 돈이 없다는 것에 신물이 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가난을 면해
보겠다고 애를 썼을 것이고 이러한 노력은 가난하지 않았더라면 또한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가난한 환경에 대해서는 전혀 두렵지
않다. 실제로 후에 가족을 거느리고 떠돌아다니면서도 의연하게(좋게 말해서 그렇고
남이 보면 무능하게~) 버틸 수가 있었던 것도 아마 이러한 가난에서 배운 경험이
바탕으로 깔려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이들과 아내를 데리고 단돈
1만원도 없는 상태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돈을 벌어보려고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17세 무렵이었다. 돈은 사장이나 벌지 애초에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모두 속임수에 불과할 뿐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쥐꼬리만한
월급과 사장의 부유함이 자주 비교되면서 얻어진 경험이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러던 차제에 물질적인 삶과 정신적인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산골 스님의 이야기가 그대로 기슴에 사무치면서 그 즉시에
세상을 떠나서 통도사로 입산을 하게 되었고 역시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결론을 내리는 것에서도 전혀 망실일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산중에서는 없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없이 자유와 자연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들이 늘 행복했던 것은 아마도 길지는 않지만 세상의 경험을
통해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에서 생고생을 하느니보다는 마음대로 할 수가 있는
절간에서 자유롭게 사는 것이 훨씬 행복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오늘도 인생의 길에서 온갖 경험에 대해서
실패를 하고 쓴잔을 마시고는 상담실을 찾아오는 벗님들에게 자신의 씁쓰레했던 경험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게 되는 것도 어쩌면 나름대로 경험에서 얻은 것이 많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특히 결혼생활에서 고통을 하소연하는 방문자가 적지 않음을 보면서
낭월이는 스스로 얼마나 다행인지를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면 만약 결혼생활을
해보는 경험이 없었다면 그들의 고민을 어떻게 절절한 것까지 이해를 하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경험은 직접 경험을 통해서 느껴질 적에 그 핵심을 얻게
되는 것이다. 간접적으로 남의 경험을 의지해서 이해를 하는 것은 짐작일 뿐이다.
그 이상의 짜릿한 느낌은 오로지 스스로 겪어 봐야만 가능하다는 것이 참으로 묘한
관계이다. 다만 이혼을 하고 겪는 고통에 대해서는 아직 경험이 없다. 그래서 올바르게
상담을 해주기 위해서라면 이러한 경험도 해봐야 하겠는데, 아직은 자신이 없다.
왜냐면 이혼에 대해서는 경험이 없기 때문에 불안해서이다. 만약 이혼에 대해서도
경험이 있다면 더욱 명확하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가 있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때로는 죄송할 때가 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 중에서도 직접경험과
간접경험은 천지차이라고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너무나 큰 차이가 난다.



2. 직접경험과 간접경험의 차이



불가에서는 도를 통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스스로
도를 통한 경험을 시로써 표현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러한 시를 오도송(悟道頌)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이야말로 경험의 극치에서 얻어지는 깨달음의 환희라고 해야 하겠다.
그리고 그 시를 통해서 그 본인이 느낀 기분을 대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나가는
길에 오도송을 한 수 음미해 보도록 하는 것도 좋겠다.



효봉스님의 오도송



바다아래의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불 속의 거미집에서는 물고기가 차를 달이네


이 집의 참 소식을 뉘라서 능히 알랴


흰구름이 서쪽으로 날아가니 달은 동으로 달린다.



海底燕巢鹿抱卵 (해저연소녹포란)


火裡蛛室魚煎茶 (화리주시어전다)


此家消息雖能識 (차가소식수능식)


白雲西飛月東走 (백운서비월동주)



이러한 시를 읊으셨다고 하는데, 뜻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거나 말리지 않을 작정이다. 여하튼 스스로 깨달은 경지를 이러한 시로써
표현했다고 하는데, 낭월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과연 이 시에 대해서 그 뜻을 모두
알았다고 해서 진정으로 효봉스님이 깨달은 것과 같겠느냐는 생각을 해본다. 즉 직접경험과
간접경험의 사이에는 전혀 다른 커다란 벽이 있지 않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부산을 펴봤다.



중요한 것은 가능하면 직접 경험을 해보는 것이 최선이다.
그리고 비록 그 결과에 대해서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되어가더라도 그것도
또한 하나의 새로운 경험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이혼에 대한 경험은 하기 어려우므로 남의 이혼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간접적으로
이해를 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만약 이혼을 직접 경험하게 된다면 그때에 가서 울고불고
하지 말고 냉정하게 그 상황의 구조를 잘 수용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이야기이다.
배반을 당했다고 할 것이 아니라 세상의 구조에는 그러한 배반의 구조도 있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이야기이다. 어느 선배님은 그런 말을 한다.



"세상에서 이혼이라고 하는 말이 있다면 이혼은 자연히
발생하게 되는 것이여. 다만 그 일이 그대 자신에게 생겼을 뿐이지. 그리고 바람이라고
하는 말이 있다면 그 말은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 배우자간에도 바람을 일으키게
되는 것일 뿐이여. 그러니까 왜 자신에게만 그러한 일이 일어났느냐고 하는 말을
하는 것은 멍충이여."



대략 이런 의미의 이야기를 하셨는데, 내용은 짜임새가
없을지 몰라도 전달되는 느낌은 충분히 된다고 하겠다.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인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흔히 삼류소설이라고 하는 말을 한다. 애정과 분란과 이별과 슬픔 등등으로
얼룩지는 이야기를 보면서 하는 평가라고 한다면 그러한 삼류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계속 그러한 일은 반복이 되는 것일까? 그리고 그냥 지겨운 노랫말이라고 생각되었던
'사랑은 눈물의 씨앗'도 나중에는 자신의 심경을 읊은 것으로 생각이 될 때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되는 나이쯤이면 이제 어느 정도 성숙을 했다고
하게 된다. 그러니까 유행가의 가사가 이해되는 정도라고 한다면 이미 좋은 시절은
다 갔다고 해도 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니까 결국 인생의 경험은 거기에서 거기라는 이야기인데,
그러면서도 늘 반복이 되는 것을 보면 직접 경험을 해봐야만 진정으로 그 아픔이든
기쁨이든 다가온다는 것을 의미하는 모양이다. 특히 여자는 아이를 낳아봐야 진정한
여인이 된다는 말을 하는데, 이것도 아마 남의 아이를 데려다가 키우는 것과 비교해서
그만큼의 큰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역시 경험이 이해보다 더 (그것도
월등히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 중에 하나라고 봐도 되겠다. 다만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 경험을 하기 어려운 것이 적지 않다. 가령 교도소를 가본다거나, 앞에서
언급한대로 이혼을 해본다거나, 또는 바람을 피워 본다거나 하는 등등의 일들 그리고
달리는 차에 깔려 보는 것도 아마 경험을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경우에는
간접경험으로 만족을 하는 수밖에 없겠지만 그 외에 주어진 경험에 대해서는 수긍을
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3. 경험이 없는 일의 두려움



직접 겪어 본 일이야 그 속을 잘 알고 있으니까 두려울
일이 없다고 하겠지만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여하튼 두려움이 없다고 못할
일이다. 그리고 특히 남의 운명에 대해서 미리 예측을 해야 하는 일이야 그 중에서도
상등 스트레스라고 해도 될 정도로 대단히 비중이 있는 고통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흔히 상담실을 노크하는 방문자의 입장에서야 간단하게
상담이나 받아보자고 약간의 상담료를 버릴 요량으로 시도를 할 수도 있겠지만 해주는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다. 이미 겪은 경험에 대해서야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있겠는데,
책에서만 보고 이론적으로만 생각을 하였을 뿐이고 실제로 구체적인 삶의 실전에서
확인이 되지 않은 무수히 많은 상황들에 대해서는 늘 부담스러운 것이 당연하지 않다면
어찌 책임 있는 사람이라고 하겠느냐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다가 한술 더 떠서



"장을 지져~!"



라는 식으로 호언장담을 하는 선생님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과연 그렇게 큰 소리를 쳐야 자신의 명예가 유지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것이 빗나가기라도 한다면 뭐라고 얼버무려야 할 것인지가 또 걱정이다. 어차피
호언장담을 하는 사람은 끝까지 그렇게 한다. 그래서 두 번째에는 뭐라고 또 둘러
붙여야 하고, 그 다음에는 또 다른 말로 얼버무려야 한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 되어버리고 말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백발백중(百發百中)이
없는 법이다. 혹중혹부중(或中或不中)이 정답일 것이다. '혹은 맞기도 하고 혹은
틀리기도 한다'는 말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서 좋고, 방문자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아서 실망을 할 일도 없다. 물론 대다수는 맞을 가능성도 있으므로
후에 살아보고 나서 그 정확성을 인정받는다면 더욱 모양이 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령 수학(數學)은 셈을 하는 것에는 대단히 뛰어난 학문이지만
이야기를 꾸미는 것으로는 도무지 어색해서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문학(文學)은 글을 통해서 말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는 대단히 뛰어나지만
셈을 하는데는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서로는 그렇게 자신만의 장점을 갖고있는
것이다. 그리고 관상(觀相)은 생년월일시를 전혀 몰라도 얼굴을 쳐다보고 예언을
하는 것에는 상당히 좋은 방법이라고 하겠지만 얼굴이 없는 상태에서는 뭐라고 할
말이 없는 것이 당연하고, 또 사주학은 얼굴을 보지 않아도 생년월일시만 있으면
뭐든지 물어서 답을 찾는다고 큰소리를 치지만 생일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관상보다도
못한 학문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도 있는 법이다. 이렇게 학문도 각자의 경험이 다르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 학문도 하나의 생명체로써 경험을 쌓아가고 있는 유기체라고
하는 기분이 자주 든다.



그럼에도 다소 생각이 깊지 않은 오행의 학자는 사주공부를
해본 경험으로 관상까지 보려고 덤비는 수가 있는 것을 본다. 그리고 자신의 견해를
호언장담까지 하기도 한다. 그런 말은 대체로 이렇게 나타난다.



"사주를 보니까 이 여자 인물하나는 끝내 주는구만
상관이 천간에 나와있으니 말이야.~!"



이런 말을 들으면 낭월이는 빙긋이 웃는다. 속으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계시는군...' 하면서 말이다. 왜냐면 경험을 해보니까 그것(얼굴이
이쁜것)과 상관(傷官)과는 별로 상관이 없더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사가 뒤틀리면 지지리도 볼품이 없는 여인의 사주에 상관이 있는 것을 골라서 보여준다.
이 여자는 인물이 어떠냐고 말이다. 그러면 방금 전에 한 말이 있어서 변경도 하지
못하고 또 그냥 가려니까 보나마나 못생긴 여인을 들고 나와서 물을텐데 그대로 밀고
가지도 못하는 자신의 올가미에서 곤경에 처하는 것을 보게 된다.



직접경험을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차라리 모른다고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러한 선배를 볼 적에 드는 생각이다.
이것은 간접경험도 통하지 않은 경지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모르는 일에는 아예
모른다고 손을 빼는 것이 현명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근래에 홈페이지에서 사람이
죽을 것을 몰라서야 무슨 명리학자냐고 큰 소리를 친 방문자가 있었는데, 실제로
자신도 그것을 모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낭월이다. 이것도 또한 아직까지의
임상 경험을 통해서 자평명리학으로는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직접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명확하게 말씀을 드리게 되는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은 하지만, 혹 만에 하나라도 실제로
그가 사람이 죽을 것을 알아내는 곳까지 통달을 했다면 낭월이의 사람이 죽을 것은
모르겠더라는 말에 대해서 연민심으로 이해를 해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면 자신이
얼마나 그 속에서 고뇌를 하다가 그 소식을 깨달았겠느냐는 생각을 해보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 그곳까지는 깨닫지 못했구나...' 하고 자신의 경험을 생각할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아마도 '사주공부를 해서 그것도 모르느냐고 하시는 분의
생각이 어디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 사람이 아니므로) 아마도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일 가능성이 더 많지 않은가 싶은 생각을 해본다. 실제로 경험을 해봤다면
그렇게 확신에 찬 말을 할 수가 없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물론 혹은 정확하게
알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확신감으로 말을 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짐작컨데 남의 이야기에 면박을 주는 사람 치고 올바르게 알고 있는
사람이 흔치 않더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름대로 판단을 해봤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역시 어리석은
백성은 속일지 몰라도 도를 깨달은 도인은 속을 수가 없다는 말이 사실이라고 믿어지는
것이다. 이미 가본 사람은 속지 않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을 경험해보신 분은
잘도 아실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해보자.



"태국으로 여행을 갔더니 마침 눈이 내려서 산 속의
사원이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는데 너무 볼만하더라~!"



이렇게 말을 했다고 치자. 태국을 가보지 않은 사람은 그런가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자신은 경험이 없기 때문에 경험이 있는 사람의 말에
대해서 정면으로 부정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국을 가봤던 경험이 있는
사람은 대번에 웬 헛소리냐고 공격을 받을 것이다. 열대지방에서 무슨 눈이 오느냐고
진정으로 태국에 가본 것이 맞느냐고 따질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가보지 않은
사람은 상당히 혼란스럽게 된다. 그야말로 어떤 놈의 말을 믿어야 할지를 모르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그 차이는 뚜렷해진다. 태국에 사는 사람이
태국을 가장 잘 안다는 것이다. 관광객은 어차피 자신이 본 것에 대해서만 경험을
이야기 할 수가 있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태국 사람에게 물어보자.



"~#$$@%&$%&^&#@#@##" 음.... 번역을
해야 하겠군....



"둘 다 맞는 말이네요. 방콕이나 아유타야의 절에서는
눈이 오지 않으니까 그 말도 맞고요. 북부의 치앙마이나 치앙라이 지역에서는 겨울이
되면 눈이 많이 내리니까 북부로 여행을 했다면 그 말도 맞는 말이거든요."



경험을 해본다는 것도 이렇게 그 속에서 녹아서 하나가
되어버린 것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 또한 삶인가보다. 그래서 아무리 경험을 많이
해봐도 그 속에서 빠져버린 사람에게는 당하지 못하는 것으로 봐야 할 모양이다.
여기에서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를 생각하게 된다. 뭔가 다르기는 다르다.



4. 알고 있는 자의 행복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정리를 해보자. 일단 경험이 있는
것에는 나름대로 확신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니까 경험을 통해서
깨달아 가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하는 말을 하게된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경험을
할 수가 없는 일이라면 간접으로라도 이해를 하는 것도 또한 좋겠다. 직접 경험을
해본 사람을 통해서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그렇게라도
알고 있는 것이 전혀 모르고 있는 것에 비해서 훨씬 우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이든 간접이든 알고 있는 것이 행복한 법이다. 그러니까 회사에 취직이라도 하려고
하면 '경력자 우대'라고 하는 글귀를 접하게 되는 모양이다.


전혀 모르고서는 안다고 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잘 모르는 일을 잘 아는 것인 양하고 떠버리게 되면 결국은 스스로를 얽어매게
되는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모른다고 하고 한 수 배우기를 청하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당연히 잘 아는 사람은 배우기를 청하는
겸허한 사람에게는 비난을 하지 않는다. 스스로 겪은 일에 대해서는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남이 알고자 한다면 오히려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지는 것이다. 낭월이가
오행에 대해서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를 할
수가 있겠다. 알고자 한다면 귀를 기울이고 눈을 모아 보시라고 말씀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관심이 없다면 물론 그냥 스쳐 지나가면 그만이다.



낭월이는 아는 것은 알아서 즐겁고 모르는 것은 배워서
즐겁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새롭고 신선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보는 것 하나 하나에도
어제 보던 것과 또 다른 것이 보여서 다시 관찰을 하노라면 어느 사이에 예쁜 돌을
주워서 즐거워하는 해변가의 어린아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또한 너무나
행복하다. 기왕에 있는 것이지만 다시 발견하는 새로움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는
새로운 기쁨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새로운 경험을 할 기회는 주어지는 것인가 싶다.
스스로 발견을 하고 못하는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이 된다.


그리고 그 경험들은 또 다른 경험으로 이어지는 시작도
된다. 그래서 늘 공부를 하는 마음으로 관찰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오늘도 어떤 경험이 기다리고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설레이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래서 행복하다.



       저물어 가는
기묘년을 바라보면서 낭월 두손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