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알몸 노출에 대한 낭월생각

작성일
1999-12-21 00:00
조회
5855
 

 


[37] 알몸 노출에 대한 낭월생각



신문을 보니까 누드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만들어 보려고
시도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또 문득 한 생각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목을 그럴싸하게 적어 놓고서 공상에 잠긴다.



1. 용어에 대한 정의 - '알몸'



누드의 용어는 영어인 모양이다. 어쩌면 불어일까? 그래서
간단하게 알몸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순수한 우리말이기도 하고, 또 달리 해석이
될 여지도 만들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 누드라는 용어가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는지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될 일이다. 알몸이라고 하니까 원래의 의미가 손상된다고
생각되시는 벗님은 또 나름대로 생각하시기 바란다. 여하튼 낭월이는 그렇게 이름을
정의하고 좀더 생각을 해볼 참이다.



2. 알몸과 안 알몸의 차이



간단한 이야기이다. 옷을 입었느냐 마느냐 하는 차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왜 이러한 이야기를 공식적으로 꺼내놓고 논쟁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마도 살아오면서 길들여진 습관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알몸으로
태어났으니 원래가 알몸이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할 적에도 이 말을 인용한다.
'일점의 의혹도 없이 적나라(赤裸裸)하게...' 여기에서 적나라가 바로 알몸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적나라는 황인종에게 해당하는 말이라고 하는 사설을 달아야 할지는
모르겠다. 그렇다면 백인에게는 백나라(白裸裸)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그렇게 일점의 실오라기도 걸치지않고 완전히 홀딱 벗은 것에 대해서 부여하는 이름이다.
그렇다면 옷이라는 그 자체가 이미 진실이 아니라는 말일까? 허위와 위선에 가득한
옷들이 부여되면서 인간의 삶이 속임수와 위세로 발전하게 된 것은 아닐까? 일단
옷이 시작되기 전에는 모두 벌거숭이였을 것이고, 그대로 누드였을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옷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벗은 몸과 입은 몸으로 구분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1) 벗은 몸



이 몸뚱아리는 원래 주어진 것이다. 자연의 상태라고 해도
좋겠다. 신이 만들어준 것이라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태어날 적에 그렇게 발가벗고
태어났다면 이것은 아무런 범죄가 아니다. 자연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린아이가
발가벗고 노는 것에 대해서 뭐라고 말을 하지 않는 것도 이러한 것을 묵인하는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참 그러고 보니 누드에 대한 이야기가 한 토막 전해진다. 함께 생각을
해보도록 하자.



경허스님이 도인이 되어서 명성을 세상에 드날리게 되었다.
조선말의 선승(禪僧)으로써, 또는 괴승(怪僧)으로써 한 시대의 불교사를 풍미했던
도인이었다. 그가 어느 날은 어머님이 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고 휴식을 취하던 경허스님은 갑자기 옷을 홀랑 벗어버리고
어머니에게로 달려갔다. 그러자 혼비백산을 한 어머니왈,



"아니 스님 이게 무슨 짓이오?"


"어머니 아들입니다."


"압니다. 근데 왜 이래요?"


"어머니께 안기고 싶어요."


"망칙스러우니 어서 옷을 입으시오 스님!"


"......슬프네요...."


"뭐가요?"


"어머니가 업어주신 경허가 아닌가요?"


"맞습니다. 틀림없이 내 아들이지요."


"그리고 똥을 싸면 닦아주기도 하셨던가요?"


"그랬지요. 이 두 손으로.."


"또 쉬~ 를 하라고 고추도 만져 주셨던가요?"


"그랬지요..."


"예전의 그 어머니와 아들이 맞나요?"


"틀림없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해주지 않으시나요?"



더 이상의 대화를 추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이 정도로
줄인다. 둘 사이에 뭔가 달라진 것이 있는 모양이다. 아마도 어머니도 불자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들이 고승이 되었으므로 말을 공경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불교식이다.
몰라도 그만이지만 어머니와 아들의 대화가 이상했다면 혹 참고하시라고 드리는 설명이다.



경허스님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갑자기 여자가 생각나고
오랜 수도생활에서 여인의 향기가 그리워져서 어머니를 보다가 갑자기 여자로 보여서
발가벗고 성관계를 갖으려고 달려들었던 것은 아닐까? 혹 그럴 수도 있겠다. 사람의
마음에는 객관적인 관계와 감정적인 주관적인 관계가 있을 수 있겠고, 어머니나 누이나
또는 다른 관계라도 단지 상황에 따라서는 남자와 여자로만 인식이 될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낮술에 취하면 장모도 몰라본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항상 생각하지만 본인만이 정답을 갖고 있다. 그것을 인정하고
낭월이의 이야기를 읽어 주시는 것이 가장 편할 것으로 본다. 다만 낭월이는 이렇게
생각이 된다는 것으로 참고하시면 되겠고, 또 그에 대해서 벗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느냐는
반문도 포함이 되어있다고 생각하시면 더 좋겠다. 각설하고.



낭월이 생각에는, 경허스님은 자연의 상태로 돌아가고 싶었지
않았을까를 생각한다. 남들은 큰스님 고승 도인 선사 등등의 참으로 거창한 이름을
달아줬는데, 자신은 그러한 것이 역겨웠을지도 모르겠다. 오로지 원래의 어릴적 어머니
품에서 젖을 만지면서 행복했던 그 순진무구의 상태가 그리웠을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어머니를 보면서 예전의 그 행복했던 아무런 가식이 없었던 원래 그대로였던
자연이 그리웠을 것이다. 그 마음이 이해가 된다.


그러니까 안아달라고 했는데, 어머니는 극히 상식적인 사람이었다고
봐서 무리가 없겠다. 상식이란 일반적으로 길이 들여져 있는 상태일 것이다. 그래서
놀라서 기절초풍을 하였을 것이다. 역시 그 그림이 떠오른다. 얼마나 황당했을까.....
하하하~


그래서 서로 궁합이 맞지 않았다고 해야 할 모양이다. 어머니가
아들의 마음을 헤아려 줄 수가 있었다면 아마도 반가운 마음으로 안아줬을 것이다.
그도 또한 아름다운 일화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상식적인 사람이고 아들은 이미 비상식적(또는
超상식적)인 사람이었으니 두 사람의 궁합이 맞을 리가 없었겠다. 그래서 실패를
하고 말았다. 여하튼 참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과연 이 말에서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 벗님은 뭘 느끼실까?
그냥 재미있다고 하셔도 상관없다. 다만 경허스님의 그 행동이 과연 음란했느냐는
생각을 해보자. 음란은 알몸일 때만 발생하는 것인가? 요즘 소란을 피우는 것도 바로
'알몸=성행위=음란=비도덕.'으로 연결을 지어 가는 상식 아닌 상식으로 인해서라고
생각이 된다. 알몸이면 음란하고 옷을 입으면 음란하지 않다는 것은 그야말로 흑백논리로써
가장 천박한 생각이라고 생각이 된다. 실로 음란을 하기로 든다면 옷이 무슨 상관이랴...
알몸은 음란과는 별 상관이 없다고 하겠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입은 몸을 생각해 보자.



2) 입은 몸



알몸일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던 내용들이 마구 불거져
나오기 시작하는 것은 입고 나서 부터다. 우선 태초전에 나오는 에덴의 동산에서도
그렇다. 그냥 벗고 살았더라면 쫓겨나지도 않았을 것인데, 비록 나뭇잎일망정 옷이라고
하는 것을 걸쳤으니 그 자리에서 쫓겨 나버린 것을 보라. 얼마나 큰 문제인가. 아마도
살아갈 터전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대단히 큰 비극인데, 단순이 나뭇잎을 걸쳤다는
것으로 인해서 그러한 큰 일이 발생했다는 것은 뭣을 의미하는가....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을 하도록 만드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신이 박정해서가 아니다. 이미 자연을 즐길 자격이 없기 때문에 아마도 신이
나가라고 하지 않았더라도 스스로 나가야 했을 것이다. 아마도 신이 쫓아냈다는 것도
어쩌면 간악한 인간의, 변명하기 좋아하는 핑계일지도 모른다. 설마하니 신이 참말로
그랬을까 싶다. 항상 인간은 남의 탓으로 돌리기를 좋아하는 습관이 있으니까 말이다.
스스로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겠는데, 참 맘대로 되지 않는다.



시작이 그렇게 환영을 받지 못한 옷이니 끝인들 좋을 이유가
없다. 잘입었다는 것과 못 입었다는 것으로써 일단 사람의 경제적인 상황을 평가하게
된다. 실로 옷에 대한 집착력도 대단하다고 해야 하겠다. 동대문시장이니 남대문시장이니
하는 것은 뭘 의미하는가? 옷으로 인한 시장일 뿐이다. 보다 나은 옷으로 입고 싶어한다.
보다 비싼 옷을 찾는 마음도 여기에 연결이 되어있다. 그리고 보다 새로운 옷을 입고
싶어하는 마음도 끼여든다. 그래서 또 많은 사람이 먹고산다.


마침 요즘 옷타령이 엄청 쏟아진다. 여인 몇이서 만든 비싼
옷의 이야기는 이제 지겨워서 신물이 나는데 에도 여전히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방송국인들 재미가 있어서 하겠는가 싶기는 하다.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니까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음... 그러고 보니 방송국도 남의 타령을 하고
있군. 쯧~!


낭월이 생각으로는 저녁 9시의 시간이라면 많은 사람이
보고 있는 시간이므로 시시한 호랑이껍질무늬의 옷 타령보다는 도올 김용옥 선생님의
노자 이야기를 방영하는 것이 훨씬 좋지 않을까 싶다. 만약에 낭월이가 방송국장이라면
옷타령은 집어치우고 노자이야기나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방송국은 다르지만
그야 뭐가 문제겠는가 싶다. 제작비를 지원하거나 아니면 교육방송국에서 일을 하는데
국영방송국에서 못할 이유는 없겠기 때문이다. 여하튼 참 따분한 초저녁이다. 반면에
밤중에 방송을 보려니까 또 잠농사가 문제이다. 여하튼 이래저래 불만이 있는 것을
보면 역시 낭월이도 남타령의 핑계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쯧~!



옷으로 인해서 문제가 발생할 일이 원래는 없어야 한다.
옷이란 사전적으로 보면 뭘까? 추위와 더위를 막고 자연의 환경에서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는 모두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고 해야
하겠다. 우선 옷으로 권위를 표시하게 되면서부터 문제는 더 커지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가령 판사는 판사의 옷을 입고 판정에 임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곳은 권위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절대로 함부로 행동하고 말하면 안 된다. 이렇게 옷의 위엄이 대단한
곳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믿는다. 사람을 믿어야 하는데 옷을 믿게 된다.
여기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뭐 남의 이야기를 할 것도 없다. 스님들은 어떤가? 역시
옷이 별나다. 도를 닦는 사람의 옷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승복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두 경의를 표할 것이다. 실제로 태국에서는 오렌지색 가사를 입은 스님들에게는
접촉을 하면 안 된단다. 엄숙하게 대우를 해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옷을 입은 사람도
옷값을 하려고 노력을 한다. 그런데 이 옷을 입고 야구방망이나 빗자루를 들고 서로
머리 터지게 싸우고 있으니 이제 이 옷은 비난의 옷이 되어 가는 느낌이다. 성스러운
수도인의 옷이 아니라 권력에 눈이 멀어서 막무가내로 떼거지를 쓰는 깡패의 일종이라고
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많다고 하니까 아마도 크게 틀리지 않은 내용일 것이다.


여하튼 권위는 구겨지기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해도 되지 않겠느냐는 역설적인 생각이 문득 든다. 그리고 옷을 입어야먄 권위가 선다고 하는 사람들 때문에 벌어지는 온갖 이야기들은 참 일일이 열거를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다만 한가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 나라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옷을 벗을수록 존경을 받는 집단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다. 인토의 자이나교라고 하는 종교에서는 성자가 되지 않으면 옷을 벗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벗는 것이 소원인 사람들이다. 그래서 벗는 것과 입는 것의 관계에서 절대적인 무슨 관계는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 든다.


   3. 벗으려는 노력?

그렇다. 아마도 요즘에 문제가 된다고 하는 것 이 부분일 것이다. 그 동안 잘 순응을 해 오다가 갑자기 훌렁훌렁 벗어버리려고 하니까 세상의 제도권에서는 이거 보통 일이 아니라고 하는 비상이 걸린 모양이다. 그러나 그 본질을 본다면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고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하면 스님이 못할 말이 없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낭월이는 이렇게 말을 하고 싶다.

"벗든 입든 그들의 자유다."
다만 벗고 이 추운데 돌아다니려면 감기라도 조심해야 할거라는 정도이다. 그 이상이야 자신의 의지대로 살게 하는 것이 좋다고 하겠다. 스스로 자연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에 대해서 달리 시비를 할 필요가 뭐 있겠느냐고 하는 생각은 전혀 고칠 생각이 없다. 혹 예쁜 처녀가 벗고 다닌다면 보기에도 과히 나쁘지 않을 상 싶다.(흐흐~ 나쁜게 아니라 좋겠지..)
그리고 벗은 처녀로 인해서 강간사건이 대책 없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신다면 참 걱정도 팔자시라고 해야 할 모양이다. 낭월이가 팔자 전문이기 때문에 팔자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말이 있다. 실제로 팔자를 보면 괜히 걱정이 많은 '걱정팔자격'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대책이 없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최선이다. 스스로 걱정을 하게 말이다.
그리고 곰곰 생각해 보실 것도 없다. 간단히 생각을 해봐도 강간은 벗고 사는 곳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입고 사는 곳에서 발생한다. 그러니까 얼마나 쓸데없는 걱정들을 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실제로 옷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단지 한서를 감당하는 원초적인 용도로만 쓰인다면 아마도 많은 부조리가 줄어들지도 모르겠다. 권위의 상징이 되지 않는다면 옷으로 인한 지출도 많이 줄어들 것이다. 그 돈은 생산적인 곳으로 투자가 될 수도 있겠다. 옷으로 인해서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국회의원이나 특별검사들도 다른 범죄자들을 추적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그리고 지구의 환경도 그만큼 깨끗해질 것이 틀림없다. 수돗물을 오염시키는 옷감염색폐수가 얼마나 큰 문제인가? 매일 세탁기에서 돌아가는 옷의 비누거품은 또 어디로 가는가? 일일이 말도 하지 모할 지경이다.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말이다.

4. 벗는 데에 따른 부작용?

여하튼 벗는다는 그 자체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부작용을 생각하게 되면서 연결을 시키는데 이것이 실로 문제라고 생각을 한다. 즉 알몸이 되는데 대한 이야기를 한 신문의 기사에서는 왜 O양이니 서갑숙씨가 연결되어 나와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연결이 되니까 일반 독자들은 아무래도 옷을 벗게 되면 이러한 문제가 발생할 암시가 있다는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으라는 보장이 있겠느냔 말이다.
그리고 서갑숙씨만 해도 그렇다. 낭월이도 그 '나도 때론 포르노그래피의 주인공이고 싶다' 라는 긴 제목의 책을 봤지만 별로 비난을 할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솔직한 글을 썼다고 오히려 격려를 해줘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남들이 다 알지도 모르지만 남편조차도 모모씨로 했더라면 그래도 약간이지만 배려가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은 들었지만 없는 것을 쓴 것은 아니므로 그런 문제로 비난을 할 일은 아니라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서점에서는 비닐로 포장까지 해서 무슨 대단한 음란물의 취급을 받는 것 같아서 오히려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솔직함은 매도되고 위선은 찬사를 받는 세상?

이런 세상은 망할 세상일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서갑숙씨의 책을 보면서 잘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솔직하게 외로움을 타는 부부들에게 어쩌면 행복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시도한 글이라고 봐서는 수고했다고 하는 말을 해드리고 싶다. 실은 그보다 더한 위선에 쌓인 채로 그렇게 부도덕한 행동을 하는 의젓하고 고상한 척 하시는 신사들이 얼마나 많을까... 싶기 때문이다. 이거 말이 길어지니 이쯤에서 생략해야 하겠다. 다만 누드에 대한 기사에서 그의 누드집이 나온다고 하는 말과 연관시켜서 어쩌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여인이 또 누드집을 냈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걱정이 된다. 미야자와 리에가 낸 누드집도 있을 텐데 말이다...

이런저런 걱정으로 알몸에 대한 염려를 많이 하시는 것은 아닌가 싶다. 물론 나름대로 이유야 있겠지만 자연의 눈으로 본다면 전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는 결론을 내리고 싶다. 적어도 산고랑에 박혀서 살고 있는 낭월이의 생각으로는 그렇다.

5. 벗는 사람은 누구일까?

일단 벗어도 좋다고 했다고 치자. 그러면 누가 벗을까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다. 아무래도 국회의원이나 종교인들은 벗기가 어려울 것이다. 나름대로 권위의 위선이 많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학교 선생님들은 잘 벗을까 하면 그렇지도 못할 것이다. 일단 교육자라고 하는 신분이 있어서 옷을 벗고 덜렁덩렁하면서 강의를 하는 것이 참 코믹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싶다. 법관도 벗고서 심판의 망치를 잡기가 꺼려질지 모르겠다. 그 옷을 입기 위해서 한 고생이 그대로 날아갈지도 모르겠기 때문이다. 더 우스운 것은 경찰관이다. 호루라기를 불면서 뛰어가는 누드경찰을 생각해보자. 왠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물론 늘 보다보면 그런 대로 볼만하겠지만 위험한 일을 하시는 분들은 안전을 위해서 옷을 입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편하게 벗고 싶은 사람은 10대와 20대의 젊은이들일 것이다. 벌써 머리누드가 가끔 발생하고 있음을 본다. 홍석천씨도 그렇고 또 다른 사람들도 머리누드는 즐겨서 하는 듯 싶어서 말이다. 스님들의 전용물로 존재하는 머리누드를 일반대중도 즐기는 것은 흑인들의 스타들이 시작을 한 듯 싶다. 그러다 보니까 스님인지 아닌지 머리만 봐서는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 중에서도 권위에 대해서 별로 비중이 없는 사람들이 옷을 벗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럼 낭월이는 언제 벗을 건가...? 아마도 중간쯤에서 벗을 것 같다. (원체 용기가 없어서... 흐흐~)

사주로 봐서는 보여주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벗지 않을까 싶다. 우선 최우선으로 떠오르는 성분은 상관(傷官)성분이다. 남에게 보여주고 전통체제를 깨어버리고 자유를 선언하는 성분이다. 여기에서 상관이 어떤 구조냐고 물으신다면 내가 생조하는 성분 중에서 음양이 다른 것이라고만 할 참이다. 그리고 그들의 벗은 모습이 아름다워서 점차로 따라서 벗을 사람은 재성에 해당하는 사람일거고 또 비겁도 제멋에 겨워서 사는 성분이라고 봐서 뒤를 따를 듯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성과 관살이 옷을 벗겠지만 그들은 아무래도 만 나중까지 버티고 있지 않을까 싶다. 아무래도 권위적인 부분에 다소 집착을 보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사주로 봐서는 옷을 벗어도 점차로 순서가 정해질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해봤다.

근데 어디에서 보니까 이 몸도 하나의 옷이라고 하두만....
그나저나 쌀랑~한 것이, 산책을 가려면 누더기를 걸쳐야 하겠군...

동지 전날에 망상에 젖은 낭월 두손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