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내가 언제 죽겠수?

작성일
1999-1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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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내가 언제 죽곘수?



살아서 겪을 일도 다 알기 어려운데 죽을 것에 대해서도
참 많이 들 궁금해  한다. 그리고 그렇게 궁금한 것은 자연히 운명 학자에게
질문이 되어서 돌아온다. 실제로 상담실에 앉아서 방문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가끔은 황당한 질문을 받을 경우가 있다. 아마도 그러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사주공부를 하고 상담을 해준다고 하면 뭐든지 답이 마련되어 있고 그래서 묻기만
하면 정확한 답을 얻을 수가 있다고 생각들을 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이 질문 '내가 언제 죽을지 알아봐 줘~!' 라는 물음도 할 말이 없는 질문 중에 하나이다.
왜 이러한 질문을 하시는지는 능히 짐작이 된다. 그러한 심리를 한번 생각해 봤다.



1. 자신의 삶의 길이를 알아야 계획을 세운다.



참 잘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미리 시간표에 맞춰서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결국 현명하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그리고 사주에서 정재(正財)가 있을 경우에 특히 이렇게 시간의 알뜰 개념이 발동을
하게 되므로 더 비중을 많이 둔다고 하겠다. 정재는 생명과 같은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참, 정재가 뭔 말인지 모르시는 벗님도 계신다면 간단히 그 구조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야 하겠다.



● 정재(正財)는 생명이다.



일간(日干)이 갑목(甲木)이라고 할 경우에는 정재는 기토(己土)가
되고 지지(地支)에서는 축토(丑土)와 미토(未土)도 역시 같은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일간이 신금(辛金)이라고 한다면 정재는 다시 갑목(甲木)이나 인목(寅木)이 해당하는
것으로 보면 되겠다. 이보다 더 상세한 것을 알고 싶다면 물론 낭월명리학당의 공부방에서
원고를 읽어보시라고 할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분이 사주에서 가까이 있을수록
더욱 더 생명의 길이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는 것을 살펴보게 된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이것이 사주에서 보이지 않는다면 아마도 자신의 생명의 길이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을 것이다. 특히 정재를 깨어버리는 겁재(劫財)라도 있다면 더욱 그렇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러한 것은 개인적인 차이가 많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데, 여기에서는 그렇게 질문을 했을 적에 얻어지는 답이 어떻겠느냐는
것을 생각 해보자는 것이다.



2. 죽고 싶지 않아서 불안한 사람



이렇게 죽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자신의 삶에 대해서 알고
싶어한다. 물론 그 답은 간단하다. 오래오래 잘 살겠다고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미 답변이 마련된 질문을 할 경우에는 그보다 편한 일이 없다는 것이 참 편하다.
그리고 그 전에 죽으면서도 낭월이가 거짓말을 했다고 탓을 하실지는 모르지만 어쩌겠는가
말이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 동안에 행복하신 것이 더 나을 것으로
판단을 하고 이미 정해진 답을 물을 적에는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기도 한다.



3. 생명보험에 들어야 하기 때문에...



글세, 얼마 짜리 보험을 들어야 가장 현명하다는 말을 들을까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다. 즉 10년 짜리 보험을 들어야 할지 아니면 30년
짜리를 들어야 할지를 생각하자는 것이다. 물론 너무 계산적이어서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도무지 매력이 없다. 그래서 답변을 하기도 싫은데, 고객이 묻는다고 하는
유형을 보면 자신의 재태크에 대해서 대입을 시키려고 묻는 경우도 있더라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다.



4. 맞추나 못 맞추나 보자고....



이런 경우가 가끔 있다. 이미 죽은 사람의 사주를 놓고서
언제 죽겠느냐고 물어보는 능청스러운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과연 자신의
명대로 죽었는지 또는 비명에 횡사를 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은 아쉬움으로
질문을 할 수가 있으므로 구태여 밉다고 할 것도 아니다. 여하튼 이렇게 여러 가지
생각을 갖고 있다고는 하지만 물어보는 결론은 똑 같다.



"언제 죽을 팔자요?"



5. 죽는 시간을 찾으려고 했지만...



그렇다면 과연 사주를 풀어서 언제 죽을 것인지를 알아낼
수가 있느냐고 하는 점이 우선 사주쟁이의 몫이다. 그래서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려고
이런저런 상황들을 대입해서 다각적으로 임상을 해보고 이미 죽은 사람들의 사주를
놓고서 죽은 나이를 찍어서 실제 상황과 대입해 보기를 수백 차례.... 그렇게 하면서
공부는 확인이 되면서 정착이 될 것이다. 그런데 낭월이를 실망시키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과연 죽을 사람의 나이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방법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결론은 그러한 방법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말씀을 드리면
혹 그러실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그렇지... 낭월이 공부가 더 이상 뭘 알겠어~!'



이러한 말씀을 하셔도 더 할 말씀이 없다. 실제로 명리공부를
하는 이면에서는 이러한 것까지 알아야 한다고 하시는 의미는 충분히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으로 죄송스럽게도(실은 죄송하지는 않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는
별로 신통한 답변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제부터 여기에 대한 변명을 해볼 참이기도
하다. 살펴보시고 과연 낭월이 말이 이치에 타당한지 자신의 구구한 변명에 불과한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이렇게 당연히 답변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면에는 어떤 이유로 해서 발생하였을까를 생각해본다. 명리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죽을 시간도 모른다면 되겠느냐는 생각이 나온 배경 말이다.



6. 남의 죽음을 예언하는 선배님들...



실제로 (예언하시는)선배님들 때문에 못산다. 아무리 대입을
해봐도 명확하게 알 수가 없는데, 선배님들은 늠름하게 언제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잘도 하고 계시니 참 답답하다고 해야 할지... 자신의 무능을 느낀다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영향력이 있는 유명인사의 죽음을 예언했다고 해서 각자 자신의
예언성에 대해서 홍보를 한 글귀를 책에서나 광고에서 접하게 되면서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는 '공부가 많은 선생은 그 정도는 누워서 떡 먹기로 찍어낸다'고 생각을
하시는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까 무수히 많은 학문성 명리학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황당하고 무시당하는 결과가 발생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만약에 이 글을 보신 (예언가 적인 기질이 있으신) 선배님이
비위가 상해서 100%에 도전을 하겠다고 하신다면 당장 죽은 사람 사주 10개를 공개적으로
올려 드리도록 하겠다. 과연 그 사람은 언제 죽었는지를 공개적으로 확인해 주신다면
이 글은 당장에 고치도록 할 용의가 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실제로 공부를
하는 것과 예언을 하는 것과의 차이가 크게 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무당과 학자의 구분도 좀 해 달라는 말씀도 속에 품고 있다.


예언은 무당이 더 어울리고 논리적인 설명은 학자가 더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당은 맞았느냐 틀렸느냐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면 되지만
학자는 논리적으로 보다 합당하냐는 것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러한 선배님들로 인해서 명리학의 위상이 올라간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물론 여기에서 논하는 학문은 오로지 자평명리학(子平命理學)에
국한해서이다. 자미두수(紫微斗數)나 기문둔갑(奇門遁甲)의 학문에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낭월이는 모를 일이다.



예언을 펑펑 하는 것은 자칫하면 무당의 대접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이러한 푸념이 어쩌면 자신의 학문적인 연구가 부족해서
그러한 것을 알아내지 못하고서는 엉뚱한 사람들에게 원망을 한다고 생각을 하셔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만약 이러한 낭월이의 말에 불만이 있으신 자평명리학자가
계신다면 차제에 게시판으로 글이라도 주신다면 그야말로 이미 죽은 사람의 사주를
열 개만 보여 드리고 각기 죽은 시기를 찾아보라고 할 참이다. 물론 그 중에는 죽지
않은 사람도 두어 명 넣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죽지 않은 사람을 넣었다는 것도
알아내도록 하고 싶다. 그리고 과연 그것이 학문적으로 가능한지에 대해서도 능력을
음미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맞춘 것은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도록 하자. 과연 학자가 어떤 사람의 죽음을 사주를 통해서 100% 알 수가 있느냐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인 낭월이다. 다만 어쩌다가 맞을 수도 있다고 하는
것에는 그럴 수가 있다고 하겠다. '소발에 쥐잡기로 맞췄다'고 하기보다는 어쩌다가
맞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여하튼 나름대로 궁리를 해서 내린 답이 맞았기 때문에
우연히 맞았다고는 할 수가 없겠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는 그렇게 해서 모두 대입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낭월이는 무슨 생각이 있어서 이렇게 확실하게
장담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 궁금증이 발생하실 벗님이 계시지 않을까 싶다. 물론
스스로 그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봤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기에 이런 기회에 한번
언급을 드려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낭월이의 생각을 읽어보시고 판단을
내려보시기 바란다.



7. 죽음을 간섭하는 요인들



사람이 세상을 살다가 떠나게 되는 것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운명적인 것일 수도 있고, 또 운명과는 별개로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운명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중상과 사망의 차이에는 별다른
연결고리를 찾기가 어렵다고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운명적인 것은 그렇다고
치고 과연 비 운명적인 요인은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고 넘어가도록
한다.



1) 환경의 요인



언젠가 뉴스를 통해서 본 내용 중에 고압송전탑의 부근에
사는 사람들이 농성을 벌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들은 모두 고압선으로 인해서
질병에 시달리고 암으로 죽는 사람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렇다면
참으로 대단한 영향력이다. 환경이 나쁘다면 사람의 수명에도 당연히 영향을 미칠
것이다. 혹 지독한 운명론자는 이런 말을 할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병들어 죽을 팔자를 가진 사람이 그 곳에서
살고 있을 것이고 운이 좋은 사람은 다른 곳으로 떠나갈 것이다."


라고 말을 할 수도 있겠다. 이렇게 말씀을 하신다면 낭월이는
이런 제안을 하고 싶다. 과연 그렇다면 운이 좋은 사람에게 그 곳에서 살게 해도
운이 좋으므로 죽지 않을 것이라는 것에 동의를 하겠느냐고 말이다. 물론 결과는
아무도 예측을 할 수가 없는 일이다. 실은 송전탑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피해가 맞느냐는
점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답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혹은 아는 사람만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도록 '쉬쉬'를 하고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여하는 뭔가 하는
일들이 그렇게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중요한 것은 생명을 관여하는
것에는 환경의 요인이 운명과 상관없이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2) 화재(火災) 수재(水災) 등의 재난



이러한 일로 죽는 사람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불타서
죽고 물에 빠져 죽고 방사능에 노출이 되어서 죽는다. 물론 대단위로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발생되는 여러 가지 요인들은 역시 운명(자평명리학적 해석인)과 상관없이
그렇게 주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대만이나 터키의 지진에 의해서도 그렇게
죽어간다. 그러한 사람들의 죽음도 역시 사주팔자로써 해답을 명쾌하게 찾아내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여하튼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서
죽어 가는 것에는 일단 손을 들자고 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속이 편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3) 극히 제한된 죽음의 경우



자연사(自然死)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본다. 수명대로 살다가
기운이 다해서죽는 것은 자연사이다. 그리고 병으로 죽는 것은 자연사라고 하기 어렵다.
다만 개념으로 봐서는 강제로 죽지 않고 병으로 죽은 것까지를 자연사라고 하는 것인가
싶다. 자살이나 타살이나 환경사가 아닌 것으로써 질병사는 자연사라고 하자는 의미로
이해가 된다. 여하튼 이렇게 자연사와 질병사를 포함해서 일단 죽음을 논할 경우에는
과연 어떻겠느냐고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일단 운이 나쁘면 죽는다고 하는 것을 전제로
본다면 운이 좋은 상황에서 자연사나 병사를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미뤄서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물론 변수가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평균적으로
봐서는 운이 좋아서 죽는 사람보다는 운이 나빠서 죽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하는 점에서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설명은 이렇게 간단히 드릴 수가 있지만 실은 그렇지도
않은 것이 또한 죽음의 관계이니 이것이 실로 복잡하다고 하는 것이다.



4) 중상(中傷)과 사망(死亡)의 차이



이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솔직히 시인을 한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중상으로라도 극복을 하고 살아나는 경우와 아예 숨을 거두는 경우에 대한
차이는 실로 대단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주적인 해석으로는 '죽지는 않겠다.'와
'살수가 없다.'의 관계를 읽을 수가 없지 않느냐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는
아직도 공부를 더 해야 한다는 생각이 뭉클뭉클 들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한편
생각을 해보면 공부를 더 한다고 해서 이 부분이 명확하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다. 그리고 구태여 이러한 것을 밝히려고 고생을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생각이 드는 것이 더 솔직한 마음이다. 그야 아무려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중상이나
죽음이나 힘이 든 것은 사살이므로 불리하다고 해석을 하면 그만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자꾸 든다. 그리고 은연중에 드는 생각은 언제 죽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온통 가득하다 보니까 실제로 죽음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8. 죽음보다는 삶에 어울리는 학문이다.



이미 스스로 답을 내려놓고 있는 셈이다. 자평명리학은
살아있는 사람의 운명을 논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에 더 매력을 느낀다고 하는 생각이
들어서 실제로 죽은 다음의 상황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그리고 언제 죽겠느냐고 하는 것도 그렇다. 여하튼 내년은 어떻게 살겠느냐는 것이
중요하고 살다가 무슨 일인가 생겨서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것으로써 그만이라고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러한 용도로만 사용을 해도 충분하다고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이 학문을 통해서 죽음을 읽는 것이 허술하다고 해도 전혀 아쉬운 마음이
없다. 오히려 살아있는 동안에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가게 될 것이며 무슨 일을
하는 것이 좋겠느냐고 하는 질문이 더욱 신명나는 것이다.


그리고 죽은 다음의 일은 또 그 상황에 맡겨 두자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동안의 상황은 이 학문을 의지해서 생각을 해보자는 정도라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이것이 오늘까지 낭월이가 죽음과 사주에 대해서 생각 해보는
것의 전부이다.



9. 혹 죽음을 100% 아는 학문이 있다면?



그 학문을 배우겠느냐는 질문을 해보기도 한다. 그런데
결론은 간단하다.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다시
자신의 생각을 많이 바꿔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기 위해서는
아마도 상당한 시간이 흘러가야 할 것임도 틀림이 없겠는데, 그 결과가 참으로 중요하고
삶을 꾸려 가는데 비중이 있는 부분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다시 10년을 기울인다고
해도 사양을 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알이지는 것은 결국 언제 죽겠다는
것이라고 한다면 별로 애써서 배우고 싶은 생각이 없다. 차라리 지금 이대로를 이해하고
살아있는 동안에 활용하고 죽는 것에 대해서는 모른 채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택할
심사이다. 그리고 그보다도 시간이 있다면 자신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공부에나 시간을
투자하고 싶은 생각이다. 물론 늘 그렇게 공부를 해 나가고 있는 셈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잘한다는 것이 자랑이기도 하지만 멍에가 될 수도 있다.
멍에는 그렇게 사람을 얽어매는 작용을 한다. 이제 앞으로 사람들은 유명인사가 죽음을
앞두고 있거나 또는 언제 죽어서 없어질 것인가에 대해서 궁금해한다면 그러한 예언을
한 사람에게 찾아가서 질문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순간부터 스트레스를 받게
될 가능성이 상당히 많을 것이다.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남의 죽음에 대해서나
궁리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말이다....


오늘 이렇게 활발하고 신명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나
생각하고 살면 되었지 언제 죽을 것인가를 살피는 것이 참 따분할 것이다. 그리고
늘 그러한 수명의 선고를 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생각컨데, 그 선생님의 상담실을
찾는 사람은 한결같이 언제 죽겠느냐고 물어 볼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사람의 죽음이
보인다고 한들 그렇게 말을 할 것인가? 이것도 고민스러운 장면이다. 내년에 죽을
것이 보인다고 치자... 그러면 그에게 내년에 죽을텐데 뭘 애쓰느냐고, 구경이나
다니다가 그냥 죽으라고 할 것인가? 이것도 여간 고역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난 그건 모른다.' 하는 것이 훨씬 속 편안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상당히 많이
든다.



매스컴에서 어느 누가 예언을 한 것이 적중했다고 하면서
그 사람을 보여주지만 낭월이가 그러한 장면을 보면서 느끼는 생각은 이렇다.


'또 한 사람의 학자가 멍에를 쓰는구나... 쯧쯧'


그러고 보니 명예(名譽)와 멍에는 많이 닮아 있는 꼴이네....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