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허(虛)에 대한 소식

작성일
1999-12-09 00:00
조회
5423
 


[33] 허(虛)에 대한 소식



오늘은 도올 김용옥 선생님의 虛에 대한 도덕경의 일부를
교육방송으로 시청하면서 멋진 가르침을 한 수 배워서 그냥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그 동안 나름대로 생각을 한다고 했던 주변머리가 갑자기
뭔가 휑하니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말이다.....



1. 허(虛) = 공간(空間)



낭월이의 천박한 생각으로는 이렇게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현재의 모든 사고하는 스타일이 이러한 식으로 된다고 하니까 낭월이 만의 탓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도올 선생님은 그 사이를 비집고 날카로운 할을 하셨다. 어림 턱도
없는 생각으로 노자를 이해하지 말라는 대갈일성~!



2. 虛 = 비어있음... 그리고....



뭔가 이런 식으로 이해를 해야 할 것으로 입력이 된다.
그러니까 글로만 이해를 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고 다시 비유로써 설명을 하되
역시 생각을 하시되 맛있게 하신다는 생각을 절로 들었다.



책상의 목적은 글을 쓰고자 함이다. 그리고 글은 책상이
비어 있을 적에 사용이 가능하다. 그러나 만약 책상에 뭔가 수북하게 쌓여 있다면
이미 차버린 것이어서, 여기에서는 글을 쓸 수가 없는 것이니 이것도 허의 개념으로
이해를 한다면 책상이 허해서 사용을 하게 되는 것이므로 여기에서만 국한시켜서
이해를 한다면 허는 공간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겠다. 책상에 공간이 생겨 있으므로
사용이 가능하다는 말을 한다고 해서 크게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도랑의 위에서 누군가 물에다 대고 오줌을 누면 그 오줌은
물과 함께 흘러간다. 그리고 한참 아래에서 어떤 목마른 나그네는 다시 그 물을 마시게
된다. 그러나 그 오줌은 흐르는 사이에 정화가 되어서 나그네는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물의 허를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허이다.


만약 위에서 트럭으로 똥물을 퍼다 부었다고 치자 그러면
똥 덩어리가 둥둥 떠내려 갈 것이고 아래의 나그네는 그 물을 먹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물에 허가 없어서라고 이해를 시킨다. 여기에서의 공간 개념은 어떻게 집어넣을
것이냐고 하는 점에서 허는 공간인 듯 싶으면서도 또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만들려고 애쓰시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떠오르는 노자님의 말씀이
있었다.



수레바퀴는 허가 없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 수십 개의
바퀴 살은 중심으로 모여있고, 그 중심에는 구멍이 있어서 바퀴가 굴러간다. 그래서
쓸모가 있는 것이다. 만약에 이 중심에 구멍이 없다면 그 바퀴는 무슨 쓸모가 있으랴....



이런 의미로 이해가 되는 내용인데, 어려서 노자를 읽었지만
이러한 내용들이 자꾸 기억 속에서 남아서 한 번씩 되새김질을 하게 만드는데, 오늘도
이러한 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이 생각이 떠올랐다. 과연 그 바퀴의 틈 사이를
공간이라고만 이해를 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전혀 공간이 아니라고 하는 말로는
또 설명을 하기가 곤란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뭔가 비어있음이
있어서 쓰임새가 생긴다는 것은 틀림이 없는데, 그 동안 나름대로 생각을 하기에는
허는 공이고 공은 공간이라고 하는 관계가 모두 같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오늘 이야기를
들으면서 뭔가 그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나게 해준 도올 선생님의 연구가 너무도 고마웠던 것이다.



물론 이제부터는 '虛 = 空間'의 관계를 다시 바라다보도록
할 참이다.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할 것만 같아서 너무 즐거운 마음에 잠이 달아나
버렸다. 그리고 또 혼자만 생각하면 될 것을 이렇게 키보드를 두드려서 함께 고민해
보자고 부질없는 짓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피식 웃는다.



3. 虛와 쓰임새와 用과 用神



역시 사주쟁이는 항상 사주의 냄새를 풍기고 다닌다. 여기에서
또 용신을 들고 나오는 것을 보란 말이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여기에
대한 변명은 또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고 우선 용신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련다.


허로 인해서 쓰임새가 생기고 또 그 쓰임새를 살펴보면
반드시 허로 인해서 발생한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쓸용(用)에 대해서 언급을 하셨는데,
그래서 다시 用이라는 글자만 보면 여지없이 用神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사람이 낭월이니
도리 없이 연결을 시켜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물 컵이 비어 있으면 물을 담아서 먹지만, 뭔 가로 차 있다면,
가령 콩이 가득 들어 있다거나 과자가 가득 들어 있다면 그 컵은 쓸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쓸 수가 없다는 말은 다시 이미 쓰여져 있다는 말이 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쓰여 있는 것은 쓰일 수가 없다?' 반드시 쓰이지 않은 것만이 쓰일 수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까 과연 모든 것이 그렇다는 것을 알 수가 있겠다.
그리고 사주팔자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작용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4. 용신의 구조를 다시 바라다 보자.



용신은 어떻게 발생하게 되는가? 가령 간단하게 신약한
사주가 있다고 치자. 이미 신약한 것은 관살(官殺)이나 식상(食傷)이나 또는 재성(재성)이라도
많이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면 이미 그러한 성분은 차 있으므로 더 이상 쓸
수가 없다는 이야기도 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낭월이가 진리를 찾아가는
형식이다. 과연 그렇다면 여기에서 없는 것은 무엇인가?  또는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를 물어도 되겠다. 왜냐면 사주에서는 전혀 없는 것은 또한 쓸 수가 없는
것이고, 이것은 컵이 있어야 그 빈 컵을 사용할 수가 있는 것이지 컵이 없다면 이미
사용을 할 수는 없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그래서 일단 있는 것 중에서 비어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살펴보게 되는 것이고, 다시 말해서 관살이 많은 상황이라면 적은 인성이 있을 경우에는
그 인성이 필요가 생기는 것이라고 이해를 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혹 인성이 없다면
또 적은 비겁을 용신으로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쓰임새의 역할은 다소 떨어진다고
해도 쓰이는 것은 틀림이 없다고 보자는 것이다. 물론 식상이 많이 있더라도 그 식상은
쓸모가 없으므로 다시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인성을 쓰게 된다는 말도 뭔가 서로
통하는 맛이 있는 것으로 보겠다.



5. 인생살이에서의 용신 역할



다시 말해서 인생살이를 채우는 것도 역시 비어 있는 것을
채우는 것으로 일관하는 것이 대부분의 목적이 된다. 돈이 없는 사람은 언제 돈을
벌겠느냐고 묻게 되고, 배우자가 없는 사람은 언제 배우자가 생기겠느냐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을 보면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벼슬이 부족한  사람은 늘 그 마음에
부족한 벼슬에 대해서만 생각이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더 채워야지... 별을 두 개
달은 사람은 언제 세 개를 달겠느냐고 사주쟁이에게 묻는다. 이미단 것도 많으므로
이제 그만 달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 경우에는
이미 별이 많은데 더 채우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디까지 채우면 만족이 될까?
그러면 물론 넘치게 될 것이다.



그 사람은 늘 그 부족한 관을 채우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가능성이 상당히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럴까? 그의 사주에서는 그 관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일생을 그 부족한 관을 채우려고 온통 마음을 기울인다고 말을 한다면
도올 선생님이 한 방망이 내리실지 모르겠다.



6. 용신은 화두(話頭)이다.



낭월이 생각에는 그렇다. 사주에서 용신의 의미는 바로
그 화두가 아닌가 싶다. 그냥 일상적인 말로 한다면 숙제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사람마다 자신의 숙제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숙제를 알아내는 것이 사주의 용신일
것이다. 그리고 그 용신은 그 사람의 쓰임새이니 공간성이 포함된다고 하겠고, 또
언제 쓰일지를 알아내는 것으로도 사용이 되니까 이것은 다시 시간적인 의미도 포함이
된다고 하겠다.



누군가는 '사주는 시간만 있고 공간이 없다'고 하는 말도
하던데 글쎄... 이것을 시간과 공간이라고 말한다면 또 무슨 말로 그 빈틈을 공경해
올지 궁금하다.... 왜냐면 비어야 쓸 수가 있는 것이고 상대방도 빈틈이 있어야 공격을
할 수가 있겠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완벽한 것이 좋은 것은 아닐 것이다. 뭔가
허술한 그래서 2%의 공간이 있어야 모든 자연은 살아갈 수가 있다고 생각한 낭월이의
소견도 과히 너무 엉망인 것은 아니었다고 하는 생각을 문득 하면서 수줍게 웃는다.



7. 그리고 용신은 사주의 虛이다.



결국 이렇게 돌아가고 싶고,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된다.
벗님들 이것은 낭월이의 경험담이지만, 그렇게 용신을 찾아서 3천리를 헤매고 다녔는데,
막상 용신을 찾고 나니까 그 마음이 억수로 시원했을 것으로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실은 덤덤한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미 용신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을 그렇게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찾아 다녔다는 말인가.... 싶은 생각도 들고... 여하튼 생각보다
시원하기보다는 담담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요즘도 그러한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러한 기분도 어쩌면 虛와 약간은 닮아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虛에 벗님들의 고민을 담을 수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허가 없다면.
즉 내 사주의 용신을 찾지 못했다면 어찌 벗님들이 들어올 공간이 있겠느냐는 말을
드린다면 억지가 될까?



말이 되기는 되는 건가.......???



       깊어 가는 계룡산의 밤 소리를 들으며...



                낭월 두손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