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숫자로 사주를 풀이하는 것에 다하여 - 1

작성일
1999-10-14 00:00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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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숫자로 사주를 풀이하는 것에 대해서 (1)


 

어떻게 하면 보다 편리하게, 그리고 보다 정확하게, 가능하면
오류를 0%로 하는 사주 해석법을 얻을 수가 있을까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궁리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는 이미 오래 전부터 많은 노력들을 해 왔던 부분이기도
하고 지금도 그렇게 연구를 하고, 또 앞으로도 그에 대한 노력들을 하실 것으로 보겠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자평명리는 발전을 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이 된다. 마치 금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많은 금속을 발견했듯이 말이다. 그리고 오늘은 그
중에서도 숫자화 시킨 명리학의 해석법에 대한 생각을 해봤다.


 

 

1. 숫자로 사주를 풀려는 시도


 

 

낭월이가 접해본 서적으로는 하건충 선생님이 이 부분에
대해서 상당한 시도를 하셨다. 그리고 자신이 수학자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해야 할 모양이다. 그 분의 생각으로는 10간과 12지에 대해서 간단하게
수치적인 대입을 하게 되면 결론이 나와서 사람의 길흉화복이 그대로 부합이 되어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만들어내신 도표가 다음과 같다.


 

 

양계초의 팔자를 참고해서 본다면


 

 

時 日
月 年


 

癸-1 丙-1
甲-1 癸-1


 

巳-(庚-0.3 丙-0.7) 午-(丁-1) 寅-(丙-0.3 甲-0.7) 酉-(辛-1)


 

 

이렇게 숫자로 분류를 해 놓은 다음에 다시 각기 十干을
놓고서 어느 성분이 가장 강하냐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각자 확인을 해보시기 바라겠고,
나타난 표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甲-1+0.7=1.7


 

乙-0


 

丙-1+0.7+0.3=2


 

丁-1


 

戊-0


 

己-0


 

庚-0.3


 

辛-1


 

壬-0


 

癸-1+1=2


 

 

이렇게 계산이 나온다 여기에서 보면 가장 힘이 강한 것은
丙火와 癸水라고 나오게 된다. 물론 『팔자심리추명학』 책에서는 더욱 복잡한 계산이
뒤따른다. 일일이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은 이런 식으로 많은 선배님들이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만 생각하시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명확하게 따지는 것은 상당히
매력적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실로 이러한 숫자를 들여다보면서 사주를 생각하다
보면 이러한 작업이 용신을 찾는 것 외에 어떻게 적용이 되느냐는 점에서는 또 난해한
부분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용신을 찾는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이렇게 복잡한
계산을 해야 한다는 것이 우선 부담이다. 물론 낭월이의 생각일 뿐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사주의 분위기를 음미하기에는 자꾸 멀어지는 것만 같아서 맘에 들지는
않는다.


 

그렇거나 말거나 정확하게 계산이 나오기만 한다면 달리
할 말이 없다. 중요한 것은 오류를 줄이는 것이지 복잡한 것을 피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렇게 숫자로만 계산을 하다보면 종격의
구조를 인정하기 어려운 계산이 나온다. 그래서 종격을 부정하게 될 공산이 큰데,
결국 종격이 흔하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고 보니 역시 그 모순점이 이
부근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단지 용신을
찾는 과정에서의 이러한 방법이 100% 명확하지 않다고 한다면 그냥 궁리를 통해서
얻어진 것이 훨씬 선명하지 않은가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근래에 명리학을 연구하시는 벗님들이 낭월이에게 자꾸
이러한 질문을 해온다. 숫자로 사주를 계산하는 방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묻는 것이다. 그래서 그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 현재 한국에서는 녹현
선생님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는 『신사주완결』에서도 바로 이와 같은 숫자의 사주학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하신 내용이 들어있다. 그러다 보니까 공부하는 사람들은
자꾸 혼란이 되는 모양이다. 물론 낭월이가 오래도록 연구하신 선배님의 작품에 대해서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있으랴... 다만 각자의 개성이라고 이야기를 할뿐인데, 구태여
답변을 요구하면 이렇게 말씀드린다.


 

 

"이미 낭월이의 해석법이 나왔고, 녹현 선생님의 해석법이
나왔으니 스스로 대입을 시켜서 확인을 해보면 될 것을 뭣 때문에 낭월이에게 묻습니까?
스스로 자신의 사주를 놓고서 답이 다르게 나왔다면 그 차이점을 확인해서 더 근접한
논리를 채용하면 될 것이고, 혹 같은 답이 나왔다면 또한 문제가 될 것이 없을 텐데
왜 묻는 겁니까? 누가 더 용하냐고 묻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잘못된 질문이지요.
낭월이가 뭐라고 말을 해야 하겠어요? 낭월이가 더 잘났다고 해야 하겠어요? 아니면
그 분이 더 잘하신다고 해야 하겠어요?


 

만약 낭월이가 더 잘났다고 하면 아정인수격으로 꼴사납게
될 것이 뻔하고, 또 그 분이 더 잘하신다고 한다면 낭월이는 그럼 뭐라고 해야 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런 질문을 하시는 의도야 이해가 됩니다만, 스스로 잘못 물었다는 것을
인정하셔야 할겁니다. 낭월이에게 물을 적에는 낭월이가 연구한 것에 대해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나 부합이 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답을 요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책을 보다가 궁금한 점이나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발생했다면 그 책을
저술하신 분에게 물어야 할 것이지요. 이게 당연한 상식 아닌가요? 그런데 마치 경쟁이라도
시키려는 듯이 물어보는 것은 다소 무례하다고 생각이 되네요 그렇지 않나요?"


 

 

이렇게 말을 하게 된다. 여하튼 공부를 하는 입장에서는
어느 것을 잡고 씨름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이 많은 모양이다. 그러나 실은
세상에서 정답이 어디 있으랴.... 각자의 개성에 따라서 연구를 하다가 자신의 생각에
부합이 되지 않으면 그만두면 될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노리는 것은 어떻게 하면
노력을 덜하고 완벽한 정답을 얻을 수가 있겠느냐는 생각만 가득한 모양이다. 그런
사람은 영원한 거렁뱅이를 면하기 어렵다고 생각이 된다. 왜냐면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일생을 마감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여하튼 뭔가 매력적인 부분이
보이면 그대로 물고 늘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달려들어야 한다. 그러다가 답이
보이지 않으면 다시 다른 선생을 찾으면 될 일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마도 용감한
학생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실제로 학생이 선생을 고를 수는 없다고 하는 생각을 한다.
왜냐면 학생은 모르기 때문이다. 반면에 선생은 학생을 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미 스스로 겪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무 꾀만 부리는 학생을 보면 참 맘에 들지
않는 것이 또한 선생도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은 적어도 십 년 세월을 투자해서
이만큼 얻었는데, 학생은 그 노력의 십분의 일은 그만두고 백 분의 일도 투자하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마음으로 어찌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가 있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2. 누가 더 잘났느냐?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은 분별심(分別心)이다. 이미 아득히
오랜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우리의 인생을 연구하고 발전시킨 분들은 부지기수이다.
그 선생님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그나마 이 정도라도 답을 얻을 수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그래서 늘 선현들의 가르침에 경건한 마음으로 고맙게 생각을
하고 또 그 중에서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부분은 과감하게 수정을 해야 하리라고
생각이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마도 후학의 노력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떤가를 생각해본다. 사람들(자평명리학을 공부하는)은 이렇게 생각이 되는 모양이다.


 

 

"궁통보감과 적천수 중에서 어떤게 더 좋은가?"


 

"자평진전과 연해자평 중에서 어떤 책이 더 좋은가?"


 

"왕초보사주학과 신사주완결에서 어떤 것이 더 정확한가?"


 

"명리정종과 사주정설 중에서 어떤 책이 더 좋은가?"


 

 

늘 이런 식이다. 여기에서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가령
궁통보감보다 적천수가 더 좋다고 하자. 그러면 그 사람은 궁통보감은 포기하고 적천수만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다시 적천수보다 궁통보감이 더 좋다고 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치자. 그러면 다시 그 사람은 적천수를 버리고 궁통보감을 보게 될 것이다.
원래가 줏대가 없는 사람은 그렇게 항상 우왕좌왕한다. 그리고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낭월이의 생각이기는 하지만....


 

그 왜 있지 않은가, 초등학교에서 '팔러 가는 당나귀'라고
하는 극본 말이다. 아마도 그 이야기가 생각나시는 벗님은 40대가 아닌가 싶다. 요즘
책에는 없어졌는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여하는 요지는 남의 이야기만 들으면서
당나귀를 팔러 가다가 당나귀를 강물에 떠내려보냈다는 이야기이다. 그렇게 자신의
인생이 떠내려가는 것에 대한 비유가 아닌가 싶다. 참 의미심장한 이야기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자꾸 저울질을 하고 있는 사이에도 인생은 자꾸만
흘러가게 된다. 결국 그 시간에 대한 보상은 아무도 해주지 않는다. 결국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서 스스로 책임을 질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꾸 자신이 없어지는 사람은
경험자라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묻기를 즐겨한다. 과연 그 경험자는 완벽하냐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는 모양이다. 이런 일은 옛날에도 있었다.


 

 

처음에 싣달타가 고행을 시작했을 적에 스승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어느 유명한 신선을 찾았다. 그리고 그에게 2년여를 공부한 끝에 선생과
같은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선생의 지혜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는 다시 다른 신선을 찾아 떠났다. 그리고 그 신선에게서도 2년여를 공부하고서는
그의 지혜도 역시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이 되어 미련 없이 다른 스승을
찾아서 길을 떠났다.


 

 

낭월이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스승의 학문이 일단 진리에 근접 하다고 생각을 했으면 목숨을 달고 매달려야 한다.
그리고 그의 밑천이 들어 날 지경이 되면 그때 떠나면 된다. 그런데 영악한 일부
사람들은 그러한 노력과 시행착오를 범하지 않으려고 머리를 굴리고 있는 모양이다.
이 얼마나 멋없는 결과인가... 자꾸 묻기만 하고 달려들지 못하는 것은 아무 것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이 석가모니를 보면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용감해야
가능한 것들도 더러 있는 모양이다. 그런 점에서 낭월이는 용감하다. 입산하면 답이
보일 것으로 생각이 되어서 입산을 했고, 또 오행을 연구하면 답이 보일 것으로 생각이
되어서 열심히 매달리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진 것들은 책으로 간간이 정리가
되어가고 있기도 하다. 그 책의 선악은 논하지 말자. 그냥 그렇게 열심히 답을 찾아가고
있는 와중이라고 하는 것만 생각하시면 되겠다.


 

그리고 이 작업도 언젠가 답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즉시에 집어치우고 다른 길로 빠져들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세상에서 과연 완벽한 학문이 있겠느냐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있다고 누가 말하더라도 다 믿지 않는다. 지구 자체가 완벽하지 않은데 그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과연 완벽하겠느냐는 생각이 자꾸 들기 때문이다. 누군가 낭월이에게
사주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깨달았겠다고 이야기를 하기에 참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의 생각 속에는 뭐가 있기에 완벽이 가능하다고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럴 수가 있겠느냐는 생각은 오늘도 변함이 없다. 그래서 연구하고 또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여하튼 이미 운명에 대해서 서술한 책이 수백 권이다. 그
속에서 완전하게 100% 정확한 책이 없다고 하는 것은 낭월이도 명확하게 답변을 드릴
수가 있겠다. 심지어 자신이 교재랍시고 펴낸 책 속에서도 오류는 발견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남이 쓴 것에 대해서 어떻게 장담을 한단 말인가. 아마도
옛날에 써진 책이나 오늘에 써진 책이나 앞으로 써질 책들도 같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늘 책이 나오고, 또 나오는 것이겠지만 그렇게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벗님이 명리학에 대해서
관심이 있고, 그래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한다면 이렇게 분별을 하지 말고 그대로
파고 들어가시라는 당부를 드리고 싶은 것이다. 궁통보감이 좋은지 자평진전이 좋은지를
구분하는 시간에 실제로 본론을 한자라도 익히라고 권하고 싶은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 것이 바로 『명리대감(命理大鑑)』이라는 책을 보면서이다.


 

 

명리대감은 종진첨 선생이 지은 명리서이다. 그 내용을
보면 대부분이 납음오행에 대한 내용으로 그득하다. 물론 납음오행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설명을 가하려고 노력하였던 모양인데, 낭월이가 봐서는 일고의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서점에서 집어들었다가는 도로 놔버렸다. 그런데 다시 집어든 것은 뒷부분(약
4분의 1 정도)의 내용이 맘에 들어서이다. 십성의 구조를 살피고 있는데, 그냥 각자의
특성을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정관과 상관의 대비와 편관과 식신의 대입이다. 이러한
시도는 다른 내용을 모두 버린다고 해도 충분히 책값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이 되어서
사들고 돌아 와서는 많은 영양분을 공급받았다. 십성을 명상하는 요령을 배운 것이다.
그로 인해서 오늘 낭월이의 십성 연구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셈이다. 그러니까
자칫 납음으로 인해서 본론을 보지 못했다면 그만큼 공부는 뒤져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항상 책을 살필 적에는 이러한 부분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어떤 선생의 책이든지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을
하게되고 무엇인가 배울 점이 있고, 그 내용이 매력적이라고 한다면 수용을 하는
것이 자신의 학문에 도움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노라면 누가 더
도움이 되느냐는 문제는 참으로 사치스럽고 게으른 관심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셈이 되어 버린다. 이것이 낭월이의 공부하는 방법이라는 말씀을 드린다.
그래서 항상 선생을 만나는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기도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