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화] 스승된 자의 변명

작성일
2001-02-15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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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화] 스승된 자의 변명

어제 게시판에 올라온 글 중에서 유독 마음에 걸리는 내용이 있어서 고민을 많이 하게 되었다. 다른 내용이야 각자의 견해차이로 인해서 생길 수가 있는 것이기도 하고, 또 더러는 시기심으로 낭월을 긁어보려고 하는 글도 있어서 별로 개의치 않겠는데, 한 손님이 올린 ‘낭월에게 명리학을 배운 제자들의 폐해가 큰 걱정이라’는 글귀를 적어주신 내용은 과연 걱정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곰곰 생각을 하느라고 잠도 설치고 일찌감치 잠이 깨어서 다시 곰곰 생각을 하다가 여기에서 그에 대한 변명을 해야 마음이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부분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그래서 제목이 ‘스승된 자의 변명’이다. 낭월 스스로 스승의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자들에 대한 지탄을 받게 된다면 당연히 낭월에게 스승으로써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이므로 편의상 그렇게 썼음을 헤아려 주시기 바란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해보도록 힌트를 주신 손님께 감사를 드린다.

1. 제자는 어떤 사람인가

낭월에게 자평명리학에 대해서 공부를 하게 되면 제자라고 할 수가 있겠다. 그 본인이 단 1주일을 수강했던 혹은 1년을 수강했던 적어도 인연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므로 그 본인이 낭월의 제자라고 한다면 또한 가르치고 배운 인연이 있으니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 생겼다고 해서 아무런 잘못이 없으리라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연에 대해서도 늘 고맙게 여기고 있음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제자는 어떻게 낭월과 인연이 되었을까? 아마도 두 가지의 경로를 통해서 낭월에게 왔을 것이다.

(1) 낭월의 책을 통해서 인연이 되었을 경우

시중의 서점에는 그래도 상당히 많은 자평명리학과 연관된 책들이 있으니 학자로써는 참 흐뭇한 일이라고 해야 하겠다. 이렇게 읽을 거리가 많다는 것은 분명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행복한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예전에는 아마도 책이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기껏해야 연해자평정해나 명리정종정해 아니면 사주정설, 명리요강, 사주첩경, 천고비전(후에 사주감정법총정리로 개명), 사주보감 등등이 서점에서 볼 수가 있었던 자료들이었을 것이고, 이어서 사주추명설이 보이면서 서서히 명리학의 발전을 예고하는 시기가 되었지 않은가 싶은 추억을 떠올려 본다.

그에 비한다면 근래의 서점가는 대단히 활발한 자료들로 인해서 이제는 어느 책을 봐야 할지를 모를 지경이 되어 버렸으니 또한 공부하는 입장에서의 고충인지는 모르겠지만 과거의 상황을 이해한다면 결코 나쁜 일이 아니고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고 하는 것을 헤아리셔야 하겠다. 그렇게 해서 각자의 인연에 의해서 책을 만나게 되고 책이라고 하는 것이 한번 손을 잡게 되면 계속해서 이책 저책을 기웃거리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고, 그렇게 기웃거리는 과정에서 어떤 이론이 더 빨리 목적지에 도달을 하게 될 것이냐는 점으로 인해서 계속 책방순례를 하게 되는 것이 아마도 공부하는 사람의 코스가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본다. 낭월도 그렇게 공부를 했다고 생각이 된다.

어떤 때에는 또 주변의 선배들로부터 무슨 책이 좋다고 하는 안내를 받기도 한다. 그러면 또 그 책을 보면 당장이 눈앞의 장막이 걷히려나 싶어서 책을 구하려고 안달이 나게 되는 것도 인지상정이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분명 낭월의 저서도 접하게 될 것이고 그 내용이 맘에 들어서 아예 인연을 맺을 작정을 했다면 또한 책으로 인한 인연이라고 말을 해서 무리가 없으리라고 하겠다.

(2) 여러 스승을 찾아 전전하는 경우

이러한 인연의 제자들도 적지 않음을 안다. 어제는 그 분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학자라고 생각이 되어서 인연을 맺었다가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거나 혹은 자신과의 생리적으로 부합이 되지 않아서 다른 스승을 찾게 되는 경우도 늘 있는 일이고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다. 한번 맺은 인연이라는 멍에에 의해서 맘에 들지 않으면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목이 매여서 제자노릇을 일생 해야 한다면 또한 속박이라고 해야 할 것이고 적어도 자유로운 일이라고는 하기 어렵겠다.
그렇게 헤매다가 낭월을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낭월에게서 공부를 하다가 뭔가 맘에 들지 않아서 다른 스승을 찾을 경우도 얼마든지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한 경우도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물론 그러한 일이 즐겁다고야 못하겠지만 또한 충분히 이해가 되며 자신의 고유권한 임을 생각한다면 달리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아마도 인연이 그것 뿐인가 보다는 생각을 하는 것으로 정리를 한다.

(3) 낭월의 제자라는 타이틀이 필요해서?

설마 그런 일도 있으랴고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마도 전혀 아니라고는 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본다. 아마도 이러한 일은 앞으로 날이 갈수록 더 발생할 가능성이 많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어느 사이에 낭월의 이름이 비중이 조금씩 쌓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지만 감로사에 공부를 하러 와서도 선생의 가르침에는 뒷전이고 자신의 목소리만 높이면서 한 달을 보내고는 하산하는 사람의 목적은 아마도 이러한 것이 아닌지 매우 의심스럽다고 생각은 들지만 차마 그런 말이야 어찌 물어보랴…. 여하튼 그도 인연 따라 왔으니 최선을 다해서 가르치려고 노력을 하는 것으로 자신의 일을 삼으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아마도 대략 인연이 되는 경우를 보면 이렇게 세 가지의 경우로 요약을 할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을 해본다. 그 외의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낭월을 찾아 왔다고 하고 생각을 해본다.

2. 스승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이제 일단 찾아온 다음에는 낭월의 책임이다. 적어도 낭월에게 인연이 있어서 찾아 왔다면 그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왔거나 관계없이, 그 시간 만큼은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전달해 주도록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스승의 몫이라고 믿고 있으며 그래서 아직까지 한번도 여기에 대해서 소홀히 해본 적은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당해서 낭월은 자신에게 항상 올바른 마음으로 자평명리를 가르쳤는지에 대해서 자문자답을 하면서 교육에 임하고 있다.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다. 어떤 권위를 강요하지도 않았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배우려는 자의 열망과 가르치려는 노력만이 그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고 있다.
용신을 올바르게 보도록 가르치고, 대운의 해석을 올바르게 할 수가 있도록 가르치며 방문한 사람과 이야기를 할 적에는 늘 연민심으로 임하라는 이야기도 늘 빼지않는 대목이다. 그리고 사기를 치게 되면 지옥에 가게 된다는 말도 아마 낭월에게 배운 분들이라면 들어보셨을 것이다. 그리고 나름대로 연구를 한 내용 중에서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으며 이것은 필요 없는 것인 줄을 알면서도 그냥 무난하게(?) 살고 무난한 평가를 받으려고 생각 없이 전달해 줄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른 스승에게 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는 제자는 그러한 말을 해준다. 정말로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어서 가르쳐 준다면 당연히 제자된 자의 입장에서는 배워야 할 것이라고, 그런데 한참 배우다가 보면 처음의 말과 다음의 말이 연결이 되지 않으니 그에 대한 질문을 하면 질문은 하지 말고 가르쳐 주는 대로 배우기만 하라는 말도 한다고 하니 역시 스승도 가지가지인 모양이다. 여하튼 그렇거나 말거나 낭월은 자신의 소신대로 가르치며 질문을 한다면 몇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론을 내릴 때까지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각자의 인생은 자신의 소중한 순간들이다. 그래서 시간을 절약할 수가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부단히 연구하고 있고 그에 대해서 확인이 되는 내용은 그대로 바로 전달을 해 드린다. 그리고 왜 전에 한 말과 다르냐고 하거나 책의 내용과 다르다고 하면 낭월은 부끄럽지 않게 ‘신버젼’이라고 말한다. 왜 부끄럽지 않느냐면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과거에 쓴 글을 수정하지 못하고 이끌려 가는 것보다는 신버젼을 발표하는 것이 연구하고 살아있는 학자로써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제의 말과 오늘의 말에 차이가 있다면 오늘의 말이 정답이라고 하는 말씀도 드린다. 왜냐면 낭월은 살아있고, 그래서 생각을 하며 그 생각은 어제와 다르고 오늘과 다르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완전히 깨달음을 이루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혼란일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완전히 깨달은 다음에 남을 가르쳐야 할 것이 아니냐고 한다면 물론 할 말이 없다. 그런데 낭월의 생각은 좀 다르다. 불교에는 보살(菩薩)이라고 하는 지위가 있는데 흔히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이라고 하는 의미와 통하는 용어이다. 이 보살은 부처가 되지 않았으면서 중생을 제도하는 입장에 처한 경우인데, 자신이 길을 가보고 그 길이 별 무리가 없다면 되돌아와서 길을 못 찾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본 곳까지만 안내를 하고는 다시 길을 찾아 나서는 자를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낭월도 스스로 이러한 마음으로 오늘을 생각하면서 가르치고 있으며 경험을 해보고 옳지 않다고 판단이 된 학문의 논리는 배우지 말라는 간곡한 말씀도 거침없이 드리게 된다. 왜냐면 이미 그렇게 경험을 해봤기 때문이다.

월령도가 뭐냐고 묻는 학생도 있다. 월령도는 찾아온 사람의 배우자 성씨를 알아낸다는 일종의 점술이다. 월령도를 배우면 참 좋겠다는 말도 한다. 그래서 낭월은 절대로 그러한 공부를 하지 말라고 당부를 한다. 왜냐면 그러한 공부를 하는 사이에도 인생은 늙어갈 것이고, 천만다행히 그 원리를 깨달았다고 쳐도 과연 그래서 뭘 하겠는가 말이다. 남의 배우자 성을 귀신같이 알아 냈다고 치면? 그리고 나서 뭘 어쩌겠다는 말인가?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러한 원리를 알아 내기도 어렵다는 점이다. 많은 학자들이 그러한 신비술을 알아내려고 많은 시간을 투자했겠지만 결실은 아마도 신통치 않은 모양이다. 그리고 배우자의 성씨를 알아내봐야 상담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으며 인생에게 큰 변화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애초에 그러한 자연의 도에서 멀리 떨어진 공부는 포기를 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판단을 하고 있는 낭월이다.
물론 그래도 배워보고 말겠다면 누가 말리겠는가만 아마도 월령도의 전문가가 있다고 하면 그 월령도는 국제판으로 버전업을 해야 할 것이다. 왜냐면 그 월령도에는 서양인의 성씨는 없기 때문이다. 일본인의 성씨도 없다. 오로지 한국이나 중국의 성씨들이 나열되어 있음을 생각한다면 한중 외에는 쓸 곳이 없는 책이라고 해야 하겠고, 그렇게 한정된 책이라면 여하튼 학문으로 배울 필요는 없다고 하는 것이 변함없는 생각이다. 반면에 자평명리학은 적어도 지구의 북반구에 해당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대입이 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으로 자랑을 해도 좋을 학문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나름대로 소신을 담아서 가르치는 내용은 이미 발행된 책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서 혹은 1개월도 공부하고 혹은 6개월도 공부하고 혹은 1년도 공부하고 그렇게 또 자신의 인연을 따라서 떠나가기 마련이다. 그리고 스승에 대한 책임도 여기에서 다한다고 해야 하겠다. 내가 나의 생각대로 가르쳤으니 잘못 가르쳤다면 그에 대한 비난을 받을 것이고 잘 가르쳤다면 후에라도 양말이라도 사보낼 것이다. 그것으로 인연은 다 한다고 하겠고, 그 후로의 인연은 경우에 따라서 다르다고 해야 하겠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눠질 것인지를 또 생각해본다. 그리고 실로 낭월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고민스러운 장면이기도 하다.

3. 떠나간 제자들

낭월에게서 떠나간 사람에 대해서 과연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점으로 곰곰 생각을 해 봤는데, 실은 그 부분은 크게 신경을 쓸 일이 아니라고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몇 가지의 유형을 생각해 봤는데,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1) 스스로 상담에 임하면서 모르는 것은 묻는다

꾸준하게 낭월을 의지해서 임상을 하고 또 가능하면 호구지책으로 삼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아마도 낭월의 가르침에 대해서 많은 비중을 두고 삶을 살아가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한다. 만약에 낭월에게 배우고서도 낭월의 생각을 부정한다면 그는 연락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사랑스럽다고 해야 할까 보다. 실로 이러한 제자라면 대체로 제자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낭월도 가능한 한은 최선을 다해서 그의 공부 길을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그래서 하산을 한 학생들이 질문을 하면 언제라도 거절을 해본 적이 없다. 이러한 것은 스승의 애프터서비스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2) 또 다른 스승을 찾는다

낭월에게 배우기는 했지만 자신이 뭔가 부족함을 느끼거나 생각이 달라서 만족스럽지 않으면 또 다른 스승을 찾기 마련이다. 주로 족집게가 되고 싶은 사람 중에서 더러 있는 경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낭월은 그러한 방법은 알려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의 이유야 있겠지만 여하튼 그렇게 해서 또 다른 인연을 찾았다면 낭월과는 일단 인연이 다 했다고 봐도 되겠다. 그에게는 애프터서비스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겠고, 그도 아마 그러한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다른 곳을 기웃거리다가 다시 찾아 온다면 또 인연은 되살아 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은 든다.

(3) 이름만 달아 놓는다

앞에서 찾아오는 제자의 경우 단지 낭월의 제자라고 하는 타이틀이 필요한 경우라고 한다면 이름을 걸고 영업을 하거나 뭔가 호구지책을 삼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낭월뿐 아니고 다른 나름대로의 고명하신 학자님들을 늘 고민스럽게 하는 대목일 것이다. 물론 어쩔 수가 없는 일이라고 해야 하겠다. 더러는 미리 심사를 해서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도 있는데, 사람은 날마다 바뀔 수가 있다는 가능성을 믿고 있는 낭월로써는 그러한 기준으로 사람을 걸러낼 수가 없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애초에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4. 스승이 책임을 져야 할 부분

이제 중요한 것은 이 점이다. 여기에서 과연 낭월이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은 어디인가? 적어도 가르친 것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렇게 한다.

(1) 용신을 잘못 가렸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낭월이 알려준 용신이 틀렸다고 한다면 선생의 허물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다시 배워야 할 것인데, 사실 낭월도 가끔은 용신이 틀린다. 그리고 그렇게 정확하게 100% 알려줄 선생도 없다고 해야 아마도 옳을 것이다. 그러니까 선생은 이러한 것을 추리할 자료를 제공했으면 선생이 할 일은 일단 다 되었다고 해야 하겠고 그가 임상을 하면서 용신을 잘못 잡았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스승이 책임을 져야 할까? 여하튼 낭월은 용신을 가리는 방법에 대해서 늘 가르쳤으므로 낭월이 잘못 가르쳤다면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해야 하겠다. 그리고 제자는 그에 대해서 항의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스스로 더 완벽한 학문을 찾아서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겠다. 다만 낭월이 생각하기에는 이 정도의 기준이라면 충분히 스스로 용신이 잘 되었는지 잘못되었는지의 검증을 할 방법까지 알려 줬다고 생각을 한다. 왜냐면 모든 사주의 모든 용신을 다 알려줄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간의 책임은 져야 할지 모르겠으나 낭월이 사용하는 대로의 방법을 응용한다면 그로 인한 문제는 발생할 일이 없으므로 크게 책임을 져야 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이 된다.

(2) 선생이 가르쳐 주지 않은 것

이미 아시는 벗님은 다 아시는 대로 각종 신살이나 12운성등의 몇몇 명리학의 필수라고 여겨지던 내용들은 낭월이 가르치지 않는다. 왜냐면 그러한 것은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어서이다. 그러니까 선생이 가르치지 않아서 몰랐다고 하는 점에 대해서는 또 책임을 져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임상을 하면서 그 동안 수천 명을 상대해 봤지만 신살이나 12운성 또는 근래에 문제로 삼았던 6합 등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아도 상담은 잘 되었다고 하는 경험이 있으니 또한 문제가 될 것은 없다고 하겠고, 어쩌면 낭월에게서 그러한 것을 삭제하도록 배운 것에 대해서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제자들에게 사용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자기가 사용을 한다면 또한 부끄러운 일이겠지만 낭월이 오늘 생각하는 것은 오늘 가르치고 있으니 결코 부끄러울 일이 없다고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3) 제 멋대로 활용하는 것

소위 스승이 가르쳐 준 것도 아니고 낭월도 사용하지 않는데 제자라고 하는 사람이 제멋대로 사용을 하는 방법이야 이미 아무런 해당이 없다고 해야 하겠고, 그러한 것에 대한 책임은 아마도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해도 되겠다. 그리고 사실 제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책임져야 한다면 이러한 말이야말로 그대로 떼거지를 쓰는 것이라고 밖에 할 수가 없겠다. 생각을 조금만 해보면 알 일이다.
자신의 배를 통해서 낳은 자식도 마음대로 되지 않음은 부모가 되어본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다. 하물며 불과 얼마간의 가르침의 인연으로 그의 모든(도덕적인 것을 포함해서) 것을 책임지라고 한다면 이 말이 과연 합리적인지를 생각해 보시는 것도 좋겠다. 물론 어불성설이다.

“낭월스님 제자도 신살을 쓰던데요?”

이러한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신살을 쓰는 부분은 낭월의 제자가 아니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어디에서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낭월은 그러한 것을 단 한번도 꿈속에서조차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여하튼 낭월이 가르치지 않은 부분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점에 대해서는 순전히 그의 개인적인 문제라고 해야 하겠다.

5. 이것은 책임을 집니다

낭월이 가르친대로 용신을 찾았는데 잘못되었다면 책임을 지겠다. 그런데 늘 말씀드리기를 ‘확인을 해가면서 응용을 하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것이 결코 책임을 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늘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낭월에게 수시로 전화도 하고 메일도 주면서 의견을 나누고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아마도 점차로 오류를 줄일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고전에 나오는 격국론은 배우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니 그로 인한 오류가 발생한다면 책임을 지겠다. 발생한 원인 자체가 의심스러운 부분이 하도 많은 격국론이다. 그래서 낭월은 그러한 것을 배우지 말라고 가르쳤으니 그로 인한 허물이 발생한다면 낭월의 책임이다. 그러나 오늘까지도 여기에 대한 오류는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보고 있으니 걱정을 할 일은 아니지만 또한 알 수가 없는 일이므로 혹 이러한 것을 가르치지 않았음으로 해서 오류가 발생한다면 책임을 지겠다.

신살을 배우지 않음으로 해서 낭패를 당했다면 책임을 지겠다. 그런데 확신하건데 그러한 것을 몰라서 낭패를 당할 일은 없다고 생각이 되며 아마도 그랬다면 이미 신살을 배우도록 말씀 드렸을 것이다. 여하튼 그런 일이 생길지도 모르므로 만약 일이 발생하게 되면 그에 대한 스승으로써의 책임을 지겠다.

육합과 방합은 보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다. 그러니 이로 인해서 문제가 된다면 당연히 책임을 지겠다. 그러나 이미 수천(대략 5천 정도) 명의 사주를 임상하면서 확인을 해보고 내린 결론이니 전혀 그러한 일로 문제가 될 가능성은 없으리라고 생각은 되지만 또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여하튼 이러한 일로 문제가 된다면 책임을 지겠다.

12운성은 배우지 말라고 했으니 이로 인한 문제가 된다면 책임을 지겠다.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여전히 낭월은 이 부분에 대해서 고려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적용을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적어도 임상을 통해서 이 부분을 제외하게 되면 오히려 대입하기가 쉽다고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배우지 말라고 했지만 그래도 또 모를 일이니 과연 잘못되었다면 책임을 지겠다.

삼형과 육해와 육파에 대한 것을 배우지 말라고 했으니 이로 인한 오류가 있었다면 책임을 지겠다. 전혀 합리적이지 못함으로 해서 배우지 않은 것이 좋다고는 가르쳤지만 혹 모를 일이므로 이로 인해서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면 책임을 지겠다.

공망에 대해서는 적용을 하지 말라고 했으니 이로 인한 오류가 있다면 책임을 지겠다. 공망을 봐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단호하게 보지 말라고 했다. 그러니 또한 그로 인해서 오류가 발생한다면 낭월이 책임을 져야 할 것이고 그러한 경우가 있다면 당연히 책임을 지겠다.

심리적인 대입분야에 대해서 오류가 있다면 책임을 지겠다. 낭월이 관심을 두는 부분은 성격의 분석이며 아직까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매우 성공적이라는 임상경험담을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혹 여기에 대해서 오류가 있다면 당연히 책임을 지겠다.

이상 몇 가지에 대해서는 문제가 생긴다면 당연히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하겠다. 아직까지 이러한 것을 가르침으로 해서 피해를 입었다는 제자는 없었지만 혹 앞으로라도 이러한 일이 발생한다면 낭월에게 항의를 하시기 바란다.

6.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자격

그렇다면 누가 책임을 물을 수가 있는가? 그 자격은 적어도 낭월을 스승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 뿐이다. 그 외에는 스승에게 책임을 물을 자격이 없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하겠다. 왜냐하면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타인은 그 제자를 향해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고 그 제자는 비로소 스승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이 질서이고 순리라고 생각이 된다. 이점에 대해서 혹 오류가 있다면 벗님의 가르침을 청한다.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고 있는 셈이지만 혹 낭월에게 시비를 걸고 싶은 벗님이 있다면 이러한 점을 명확히 인식하시기 바라는 마음으로 알려 드리는 것이다. 그 제자는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고 그 스승도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허물을 범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약 스님이 술을 마시고 추태를 부린다면 그것은 그 스님의 개인적인 사정이지 부처님의 허물은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허물을 묻고 싶다면, 이성이 있는 올바른 사람은 그 스님에게 허물을 묻는 것이 옳다는 것을 이내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스님은 부처님에게 다시 항의를 해야 하겠는데, 그 부처님은 술을 먹지 말라고 했으니 아마도 항의를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 스님이 인연법을 설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했다면 당연히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그 스님에게 항의를 해야 할 것이고, 그 스님은 이번에야 말로 부처님에게 항의를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왜냐면 이땅의 구조는 인연의 법칙으로 존재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러한 순리를 무시하고 낭월의 제자라는 사람이 이러한 허물을 범했으니 스승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앞의 예에서 보듯이 과연 이성이 올바른 사람의 견해인지를 다시 물어야 하겠다.

단 하루를 가르쳐도 인연이기 때문에 그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니 낭월을 믿고 따르시는 제자라면 당연히 스승에게 책임을 물을 자격이 있다고 하겠고, 그로 인한 책임을 물으면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하는 것도 스승과 제자의 끈이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7. 마무리

자유게시판의 한 글로 인해서 이러한 생각을 해보게 되었으니 또한 고맙다고 해야 하겠다. 실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에 대해서 고민스러워서 잠을 쉽게 이룰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이렇게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 마음이 편해졌다. 늘 자신을 돌이켜보면서 부끄러움이 없는지를 되새기고 있는 낭월이다. 언제라도 가르침을 주신다면 또한 그에 대한 생각을 하고 또 의견을 드릴 것이다. 긴 글을 읽어주신 벗님께 감사 드리며…..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