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과학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

작성일
2001-02-21 18:50
조회
6438
[제99화] 과학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늘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나 알고 있는 일이 보다 합리적인지 또는 과학적인지를 생각하는 시간들이 있다. 그리고 더러는 과학적이 아니면서도 수용을 하기도 하고 또 더러는 합리적이 아니면서도 버릴 수가 없는 경우도 있음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인생은 참 난해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보곤 한다. 그래서 오늘은 과연 과학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에 대해서 생각을 좀 정리 해보려고 마음을 일으킨다. 요즘 자유게시판에서 낭월이 과학적으로 증명을 할 수가 없는 명리학의 근원에 대해서 의견을 올려보기도 했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인지를 곰곰 생각해보고 싶어서 벗님께 의견을 나눈다.

1. 용어의 올바른 이해

늘 위험스럽게 느끼는 것 중에 하나는 용어의 올바른 이해이다. 가령 正官格이라고 했을 경우에 월지의 격을 두고 하는 말인지 용신이 정관이라는 말인지를 구분하지 않으면 운을 읽음에 큰 오류가 생길 수밖에 없음을 염려해야 하겠다. 그래서 낭월은 반드시 용신격이라는 말을 전제로 해서 정관격이든 관인격이든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데, 만약 이러한 정황을 잘 모르는 벗님이라고 한다면 특히 격국론을 사용하시는 경우에는 용신격이 등장을 하면서 많은 혼란을 겪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용어를 바로 이해하지 않으면 큰 혼란이 발생한다는 말을 하게 되는데, 공자님도 정명론(定名論)을 펴셔서 용어의 통일을 급하게 생각하셨고, 남북한의 용어사전을 빨리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말도 같은 맥락이라고 이해를 해본다.

(1) 과학적-실험을 통해서 증명할 수가 있는 것

낭월은 이렇게 이해를 하고 있다. 그러니까 실제로 증명을 하여 명명백백하게 보여주지 않으면 다들 알고 있다. 그 주장은 비과학적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까 과학적이라는 말을 하게 되면 증명을 할 수가 있다는 말을 다시 사용하면 되겠다. 그리고 용어의 오해도 있는데, '과학적=완벽한 이론'이라는 생각을 하는 벗님도 의외로 많으신 듯 하다. 모두 과학이라는 말의 미신에 현혹이 된 경우라고 해야 하겠다. 과학적이라는 것은 무수한 실험을 통해서 일 부분을 밝혀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자체를 완벽한 것으로 확신해서는 다시 새로운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수도 있음을 적어도 지각이 있는 학자는 염두에 둬야 하겠다.

(2) 경험적-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이해하는 것

뭔가 과학적으로 규명을 하고 증명을 할 수는 없지만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대로 수용을 하고 인정하는 것이 경험적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불러서 별 무리가 없으리라고 생각이 되어서 이렇게 연결을 지어 봤다. 가령 영적인 존재를 과학적으로는 아직도 실험하고 불러서 증명을 하기에 여간 어렵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과학적이지 않다는 말을 하게 되고 인정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발표를 하게 된다. 그리고 과학자라면 그렇게 밖에 할 수가 없다는 것도 잘 알아야 한다. 그런데 과학적인 미신에 사로잡힌 민중들은 과학자의 이름을 빌어서 발표가 되면 그의 말이 만고의 진리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대로 믿어버린다. 일종의 교주현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안다. 과학적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리 실험을 해도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것은 태산처럼 수두록하게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과학적이라는 것으로 인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많이 망가졌는지에 대해서도 마음을 아파할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여하튼 용어에 대한 정의는 이렇게 해보도록 한다.

2. 명리학(命理學)은 과학적인가?

이러한 질문을 했다고 치자. 과연 벗님은 뭐라고 답을 하실 참인가? 과학적이냐고 묻는 말을 듣고 괜히 기죽지 마시라는 말씀을 먼저 드린다. 명리학은 과학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참으로 과학적이지 않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명리학은 과학적이지 않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또 더러는 그렇게 생각하실 것이다.

'그럼 미신이구만~!'

이렇게 단정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를 생각해 보면 그 동안의 교육시스템으로 인해서였을 것이다. 왜냐면 교육에서는 그 동안 과연 증명이 되지 않으면 모두 미신으로 미개인들이나 신봉하는 정도의 논리로 판단을 하고 논리적으로 타당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고 해야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방향에 지대한 영향일 미친 것은 아마도 서구의 물질적 합리성의 관념일 것으로 생각을 해본다. 과연 그러한 것이 얼마나 천박스러운 결론을 내리게 될지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서양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모두 합리적이고 현실적이고 과학적이고 그래서 대단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사소하고 창피스러워서 남에게 말도 꺼내기를 꺼려야 하는 것으로 생각을 했다고 봐서 크게 무리가 아니라고 하겠다.

이제 우리의 명리학을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한다. 명리학은 이미 수백년의 역사를 두고 임상을 하면서 그렇게 궁리를 해 왔다고 해야 하겠다. 그리고 여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연구하고 그에 대한 자료를 기록해 주신 선현들의 노력에 의해서 우리는 다시 계승하고 발전을 시킬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생성되고 반증되고 소멸되고 다시 발생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무수히도 많은 이론과 반론이 있었을 것이라는 짐작은 어렵지 않게 할 수가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명리학은 경험적인 학문이라고 말을 해야 하겠다. 통계적이라는 말도 즐겨 쓰시는 경우를 보는데, 통계적이라는 말은 논리성이 없을 경우에나 하는 말로 적절할지 몰라도 이러한 명리학을 두고서 통계학이라는 말은 매우 어색함을 느끼게 된다. 경험학과 통계학은 분명히 다르다고 이해를 해야 할 것이다.

3. 명리학이 과학적이지 못한 이유

당연히 과학적이고 싶은 것은 아마도 생각이 있는 학자라면 소망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객관적으로 여봐란듯이 자랑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것이야 어찌 낭월만의 생각이랴 싶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아마도 너무나 오래된 역사로 인해서 더욱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크게 억울하다고 할 것도 아니다. 역사가 오래된 것 중에서 과연 올바로 과학적으로 증명을 할 수가 있는 것도 그리 많이 않다고 하는 생각을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한 예로 지구의 역사가 얼마나 되었느냐는 질문을 과학자에게 했다고 하면 그는 뭐라고 할까? 그냥 오래 되었다는 말을 한다면 이미 그는 과학자가 아니라고 해야 하겠으므로 과학자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그러니까 지질학을 살피고 다시 유물을 정리하고 연구하고 궁리하고 다시 반증을 연구해서 내어놓은 결론으로는 약 40억년이 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하자. 어쩌면 그 정도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이라는 말은 그 시간은 매우 길고 아득해서 그렇게 봐도 무리가 없겠다는 정도일 뿐이다.

그런데 어느 과학자는 또 지구의 역사를 4천몇년의 몇월 몇일에 생겼다고 하는 말을 했다고 한다. 참으로 과학적인 결론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그가 바탕으로 삼은 것은 성경이었다고 한다. 성경을 바탕에 놓고 계산을 한 신부님의 결론이라고 하는데, 물론 몇월 몇일까지 명확하게 보고를 한 것은 흥미롭다고 하겠지만 요즘에 와서 그 말을 믿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즉 아무도 정확하게는 모른다는 것이 아마도 정답일 것이다. 그러니까 지구의 역사나 태양의 역사나 등등의 사연들은 과학으로 일일이 규명을 하기가 어렵고 다시 그 어려운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과학자들이 대단하다고 해야 하겠다. 여하튼 이렇게 해서 세월이 오래 흘러간 자료에 대해서는 과학이라고 해도 그렇게 명확하게 밝혀내기가 어렵다고 하는 점을 이해하시면 되겠다.

여하튼 세월이 이렇게 많이 흘러가고 보니 우리가 연구하는 이 명리학의 근원에 대해서 일일이 설명을 하고 증명을 할 수가 없으니 그렇게 과학적이 아니고 경험적이라고 해야 하겠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도록 한다. 그리고 경험적이라고 하는 것에는 실로 더욱 엄청난 정보들이 들어있다고 생각을 하신다면 벗님은 다시 생각을 하셔야 할지도 모르겠다.

4. 과학으로 설명될 수가 없는 일들

어디 한둘이랴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이면서 선결을 봐야 할 일이라고 생각이 되는 것은 영혼에 관한 연구이다. 현대의 최첨단 과학으로 영혼의 존재를 명백하게 밝힐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영혼을 부정할까? 아마도 그런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뭔가 아직도 영혼의 존재를 규명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은 모양이다. 왜냐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서 영적인 존재는 있는 것으로 놓고 설명을 해야 납득이 되는데 그러한 과정을 다시 재연해서 확인하고 그 구체적인 구조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의 예를 든다면 경락(經絡)이라고 하는 것이다. 게놈프로잭트를 마쳤다느니 유전인자의 모든 구조를 연구해서 이제 더 연구할 것이 없을 정도라고 인식할 정도로 알려졌는데, 그렇다면 경락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경락이 존재한다는 것은 경험을 통해서 익히 알고 있다. 중국의학에서는 경락마취사가 있다고 하고 그로 인해서 외과적인 수술을 할 적에 응용된다고 하니까 이미 서양의학에서도 그 존재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데 과학적으로 어떤 성분으로 어떻게 생겨서 어떤 경로로 작용을 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증명을 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해서 아직도 그 존재성에 대해서 결말이 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것을 봐도 과학이 아직도 걸음마단계라고 해야 하거나 너무 모르는 것이 많다고 해야 할 것이고 그래서 흥미진진한 분야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적에 우리는 두 가지의 결론을 내리게 된다.

(1) 비과학(非科學)적이다.

이러한 말로 대신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비과학이라는 말은 '과학으로는 설명을 할 수가 없는 성질의 현상이다'라고 이해를 해야 옳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신중함을 보이지 않고 '미신이다'라고 한다면 또한 많은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과학이라는 말은 문제가 없지만 용어의 이해를 할 적에는 초과학(超科學)이라는 말을 연결시켜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2) 논란의 가치가 없다.

그대로 무시하는 것이다. 논리의 꺼리가 없으니까 논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이해를 하면 되겠다. 가령 모기를 쫓는 부적이 있다고 한다면(실제로 그런 부적이 있다) 우리는 그냥 웃고 말면 그만이다. 왜냐면 그 말은 신비한 것처럼 들리지만 실은 너무 의미가 없는 말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 잠물쇠를 열리게 하는 부적도 있다. 역시 같은 의미로 잘못된 연결이라고 이해를 하면 되겠다. 이러한 것은 논란의 꺼리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를 해야 할 것은 과연 논란의 가치가 없어서 그만둬야 할 것인지 혹은 잘 모르면서 그냥 자신의 상식으로 봐서 납득이 되지 않으므로 무시를 하는 것인지를 구분하지 않고서는 큰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하겠다는 점이다.

5. 명리학은 경험적인 학문이다

여기에서 명리학의 성질을 정의한다면 이렇게 '경험적(經驗的)인 학문'으로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낭월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보는 이유에 대해서도 몇 가지 설명을 드릴 수가 있겠다.

(1) 발생원인을 일일이 증명하기 어렵다

당연한 말씀이겠지만 간지의 흐름이 甲에서 癸로 흐르고 子에서 亥로 흐르는지를 경험을 통해서 틀림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인식을 하겠는데 구체적인 실험을 통해서 증명을 할 수가 (아직은) 없다는 점이다. 오행이 木生火하고 火生土를 하는 것은 임상을 통해서 알겠는데, 과연 그러한 것을 어떻게 증명하고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가 있겠느냐는 질문에는 답을 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것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甲木이 己土를 만나면 합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경험을 통해서 알 수가 있겠는데, 과연 어째서 그러한 현상이 생기며 왜 甲戊가 합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구체적인 실험을 통해서 증명하기에는 참 만만치 않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어디 그뿐이랴, 지장간의 월률분야도 그렇다. 과연 인목에서는 수백년 수천년을 두고 어째서 7일간 무토가 당령하고 다시 7일간은 병화가 당령하며 또 나머지 16일은 갑목이 당령하는지를 정확하게 설명할 방법은 없지만 우리는 늘 감탄을 하면서 그렇게 믿고 사용하고 있다. 그렇게 믿는다는 것은 경험을 해보니까 그렇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믿고 쓰는 것이 혹 잘못될 수는 없을까를 늘 생각하면서 조심하고 또 살피는 마음은 그야말로 경험의 현상을 과학적으로 풀이해 보려고 노력하는 마음이라고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이것도 여러 책들을 살피다 보면 다시 황당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으며 공부하지 않은 벗님은 아마도 의아해 하실지도 모르겠다.

1) 지장간 寅月의 당령(當令)에 대한 오차

이미 졸저 『알기쉬운 천간지지』에서도 밝혀 드렸지만, 고전이라고 인정을 해야 하는 명리서에서조차도 당령의 기준이 서로 다름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무리 경험학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날짜가 일치하기라도 해야지 서로 다르다는 것은 그 의미가 무엇일까에 대해서 고민을 해봐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냥 고인의 가르침이기에 따른다고 하는 것은 발전의 가능성은 없고 그냥 신봉자 정도에서 만족을 하는 것으로 밖에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연해자평: 寅月- 戊土7일2분반, 丙火7일2분반, 甲木16일3분반
명리정종: 寅月- 戊土7일2분반, 丙火7일2분반, 甲木16일5분
삼명통회: 寅月- 戊土7일, 丙火5일, 甲木18일
적천수징: 寅月- 戊土7일, 丙火7일, 甲木16일
사주첩경: 寅月- 戊土7일2분, 丙火7일2분, 甲木16일5분

이렇게 인월의 당령에 대해서도 각각이다. 과연 어느 장단이 정확한 장단인지를 누가 무슨 방법으로 규명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마도 그냥 고개를 가로 저을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혹자는 갑골문에 나왔다고하는데, 그 갑골문에 어떻게 나왔길래 이렇게 다양한 경우가 나왔는지 참 알 수가 없다고 해야 하겠다.

중요한 것은 戊丙甲이라는 성분이 그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고 다소의 오차는 그냥 묻어두기로 결정을 하지 않고서는 한 걸음도 전진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생각이 있는 학자라면 다 경험을 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오차가 생긴 이유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을 하기에는 매년 약간의 변수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관(觀)하신 도인이 적어놓은 것은 정확한 그 해의 상황이었을 것이고, 우리는 대체로 큰 오차는 없기 때문에 그냥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6. 경험적인 학문은 경험으로 평가받는다

경험적인 학문을 과학적으로 평가해서는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많다고 해야 하겠다. 그래서 경험으로 이뤄진 학문은 다시 경험을 통해서 검증을 받고 수정보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도 아마 합리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자평명리학은 어떻게 경험하고 대입하고 수정해야 발전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않으면 발전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는 과연 어떤 방식으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냐를 생각하기에 이른다.

(1) 경험해보니 맞더라 그러니 써라

지당한 말씀이다. 경험해봐서 맞다면 달리 설명을 할 필요도 없다. 그냥 사용을 하면 그만이다. 십성(十星)의 작용을 경험해보니 맞다고 생각이 된다. 그래서 사용을 한다. 다만 십성을 미리 '좋은 십성〔吉神〕'과 '나쁜 십성〔凶神〕'으로 나눠놓은 부분은 맞지 않는다. 그래서 그 부분은 삭제를 하고 경우에 따라서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고 하는 것으로 인식을 하고 쓴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은 지혜로운 접근이라고 하겠다.

또 대운이 왜 월주를 기준해서 대입을 해야만할지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을 수도 있지만 대입을 해보니 맞고 그래서 그렇게 사용을 하고 있다. 그리고 경험상 간지를 나눠서 대입을 했을 적에 이해하기가 더 편함을 느꼈다. 원칙적으로는 간지를 나누면 곤란하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오히려 그편이 더 대입에 용이하므로 그래서 그렇게 사용을 한다. 왜냐면 이 학문은 경험으로 발전시키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대운의 순역에 대해서도 그렇다. 음남양녀는 역행을 하고 양남음녀는 순행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과연 성별에 따라서 운이 거꾸로도 간다는 것에 대해서는 설명을 구체적으로 할 방법을 모르겠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대입을 해보니 그게 더 설명을 하기에 용이하다. 그래서 그냥 사용을 한다. 어느 학자는 역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 모두 순운으로 대입을 해야 한다고 주장을 했던 일도 있다. 그러나 결국 그 이론은 그냥 이론으로 그치고 더 이상의 발전은 되지 못했지만 그렇게 과학적으로 연구를 해보려고 시도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하겠고 또한 용기가 있다고 하겠다.

(2) 경험해보니 안 맞더라 그러니 쓰지 마라

임철초 선생님께서 적천수징의(혹은 천미)에서 각종 신살이나 납음 등은 적용을 시켜보면 하나도 맞지 않으므로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타당하며 현명하다고 하겠다. 역시 경험적인 학문이기에 경험이 되지 않는다면 없애는 것이 오히려 발전을 할 수가 있다고 봐야 하겠기 때문이다. 형(刑)과 천(穿-원진)도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 모두 경험을 해보니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사용하지 말이야 하겠다. 그리고 철초님이 혹 잘못 판단을 했을지도 모르므로 직접 임상을 해보면 되겠다. 그리고 역시나 확인이 된다면 그냥 버리면 그만이다.

낭월도 마찬가지이다. 서낙오 선생님은 12운성을 버리기에 좀 망설였던가 싶다. 그러나 낭월은 그 논리적인 모순과 대입의 혼란성을 생각해서 버리는 것이 좋다고 결정을 내렸다. 지금도 많은 명리서에서는 여전히 12운성의 활용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결정을 내린 책은 흔치 않겠지만 나름대로 임상을 해보고 내린 결론이기에 벗님도 확인을 해보시고 과연 없어도 되겠다면 버리는 것이 현명하고 발전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특히 각종 신살에 대한 철초님의 추상같은 가르침을 접하고 너무도 속이 시원해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게 말을 해도 천벌을 받지 않을까 싶은 염려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결국 철초 선생님이 옳았고 그러한 가르침을 접할 수가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고 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 그러니 낭월이 벗님께 뭐라고 하겠는가? 이렇게 필요 없는 헛된 찌꺼기들을 빨리 버리시라는 말씀을 하고 싶어서 좀이 쑤시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물론 보수적인 학자님들이 낭월을 '명리학계의 공적(公賊)'으로 찍어서 잡아먹으려고 한다는 말도 누군가 해준다. 그래도 좋다. 오히려 공적이 되지 않으면 어찌 발전을 하겠는가 싶어서 전혀 꿀리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고 있다.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자신들도 발견하지 못한 오류를 새파란 젊은 놈이 찾아냈다는 것도 어쩌면 심기가 불편할 수도 있고, 또 자신들이 제자들에게 그렇게도 중요한 것이라고 수십년을 떠들었는데, 정말 햇병아리 같은 녀석이 다 쓸데없는 말이니까 모두 쓸어버린다고 한다면 과히 즐거울 마음이 들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고 해야 하겠고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그가 학자라면 과연 젊은 놈이지만 참고를 해보고 따지자는 정도의 생각은 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다. 좀 아쉽다는 말씀이다.

7. 낭월의 생각......

낭월은 어떤 이론이거나간에 작용을 얼마나 하는냐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연 그렇게 필요한 존재냐는 것도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그러니까 어떤 이론이 있어서 혹은 맞기도 하고 혹은 틀리기도 한다면 그러한 이론이 없어도 해석에 큰 문제가 없다면 50%의 가능성조차도 포기를 하자는 쪽이다. 왜냐면 하나라도 덜어내야 본질이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육합이라는 것이 그렇다. 맞는 것도 같고 틀리는 것도 같은 것이 육합이다. 그렇게보면 그렇게 보이고 달리 보면 달리 보인다. 그리고 육합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해석이 되지 않는 명식도 보지 못했다. 그러니 이러한 거추장스러운 것은 오히려 제거를 하는 것이 후학의 공부시간을 절약해주는 공덕이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단 1%라도 적용이 되는 것은 버리지 않겠다고 한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그 짐에 눌려서 숨도 쉬지 못할 것이다. 당장에 무수한 모순에 휘말릴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희망사항이라고 한다면 기왕이면 경험적이면서도 과학적으로 증명이 된다면 더 좋겠다는 희망은 늘 갖고 있다. 그래서 어떤 방법을 통해서 규명을 할 수가 있을지에 대해서도 늘 궁리를 하고 있는데 마땅한 방법이 보이지 않으니 당분간은 그냥 이대로 가야 할까 보다.

여하튼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명리학을 정리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많은 반발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점은 너무도 명백하고 어쩌면 결국은 무모한 시도로 그냥 명리학의 역사에 '철딱서니가 없는 한 바보의 몸부림' 정도로 판명이 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좋다고 보는 것은 그 동안의 많은 명리서들을 보면서 임상에 비중을 두지 않고 전달에만 관심을 둔 것이 아닌가 싶은 의구심이 많이 들어서이다. 경험을 해보고 필요가 없다고 생각이 되는 것을 줄이는 것은 다이어트라고 해야 하겠다. 군살도 빼야 한다. 병만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점을 벗님도 헤아려 주시기 바란다.

근래에 자유게시판의 소란으로 인해서 낭월에게도 이러한 것을 생각할 기회를 얻었다고 하겠고 그래서 또한 생각을 정리할 기회를 얻기도 했다. 그 바람에 경험적인 것과 과학적인 것의 차이에 대해서도 정리가 되었으니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고 해야 하겠다. 더러는 생각이 다른 벗님도 계시겠지만 여하튼 낭월은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임상을 하고 또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욱더 다이어트에 힘을 쓸 것이다. 줄일 수가 있다면 여하튼 조금이라도 줄여야 한다. 비록 낭월이 하는 일은 조금이라고 하지만 결국 낭월의 책을 통해서 공부하는 벗님이 일만명이라고 한다면 그 효과는 실로 생각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지대하다는 것을 가벼이 여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요즘 논산에서 천안으로 통하는 23번 국도는 계속 4차선으로 확장공사를 하고 있다. 그리고 중간중간에는 구부러진 길을 곧게 편 곳도 많다. 그러한 장면을 보면서 낭월의 작업도 그와 같다는 생각을 짐짓 해보곤 한다. 벗님이 어느 길로 해서 목적지를 가시거나 자신의 몫이지만 적어도 낭월로(朗月路)를 이용하시면 가장 빠른 길이 될 것이라고 하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리고 나중에라도 그러한 평가를 받는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하겠다는 말씀도 드리면서 이만 정리를 한다.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