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자평명리학은 목적인가? 수단인가?

작성일
2001-06-11 08:38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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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메일을 한통 받았는데, 낭월의 명리학 접근에 대해서 매우 못마땅한 듯한 내용이 들어 있어서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고민을 한 끝에 다음과 같은 문제로 인해서일 것으로 생각을 해서 여기에 낭월의 소견을 올려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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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화] 자평명리학은 목적인가? 수단인가?

늘 명리학을 연구하면서도 그 주체에 대한 대우를 어떻게 해야 비난이라도 면해 볼 것인가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특히 자평명리학(子平命理學)을 연구하는 입장에서는 어떻게 방향을 설정하고 진행해야 가장 올바른 것인가에 대해서 가끔은 자신에게 되묻곤 하는 질문 중에 이 내용이 늘 포함되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은 이 점에 대해서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벗님의 생각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정도로 이해를 해주시기 바란다.

1. 자평명리학이 목적이 되는 경우

여기에서 처음이라고 하는 것은 낭월이 처음에 사주공부를 하려고 했을 적을 두고 하는 말이며 학문이 처음에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여하튼 스스로 자신의 생각만큼만 세상을 읽을 수가 있을 것이라고 늘 생각하다 보니까 자평명리학에 대해서도 처음에 그 정도의 이해로 접근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자평명리가 목적이 되면 어떤 일이 생겨나는가를 생각해 보시는 것이 좋겠다.

(1) 목숨을 건다

우선 자평명리학에 대해서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렇게 매달려서 전체를 연구하고 오로지 인간의 길흉화복에 대해서 명확하게 뚜렷한 해석을 내려야만 자신의 본분사(本分事-본래 목적하고자 한 일)를 다 했다고 할 것이고, 그렇게 정확한 풀이를 하였을 적에 그 목적은 이뤄졌다고 생각을 하게 되겠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이 이뤄지기까지는 온 몸과 마음을 모아서 노력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겠다. 낭월도 이렇게 목숨을 걸 정도로 명리학의 본분사는 오로지 인간의 길흉화복에 초점을 맞춰서 진행되어야 하고 그렇게 읽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으니 목숨을 걸만큼 연구 했느냐고 물으신다면 당연히 그렇다고 답변을 드릴 수가 있겠다.

(2) 최고의 희망이다

당연한 일이다. 오로지 자평명리학이 희망이고 길흉화복을 예리한 칼날처럼 파헤치고 일 점의 어긋남이 없이 정확하게 맷돌이 들어맞듯이 보드와 너트가 서로 일치하듯이 그렇게 들어맞아 줄 적에 희열을 느끼게 되는 것이고 비로소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정도의 경지에 도달하기 전에는 절대로 완성이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오로지 온 신경은 정확한 예언에 있는 것으로 목적을 삼고 그 이상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해야 하겠다. 그리고 낭월도 한 동안 이러한 생각으로 연구를 했던 것도 사실이므로 당연히 그렇게 이해를 하는 것에 대해서 납득이 된다. 그리고 아마도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는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

(3) 신봉자가 될 위험이 있다

늘 그렇듯이 세상은 음이 있으면 양도 있는 법이다. 그러니 이렇게 명리학의 목표를 세웠을 경우에는 다른 방법에 대해서는 고려를 하기 어렵다고 하겠고, 그래서 더욱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려고 노력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또 의외로 깊은 통찰력을 얻을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을 하지만 많은 수의 연구인들은 주로 이 언저리에서 거품을 물고 명리학을 옹호하기에 여념이 없을 수도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낭월도 역시 이와 같은 생각으로 얼굴에 핏발을 세우면서 명리학을 하찮게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 어리석음을 꾸짖곤 했으니 결코 이러한 경험이 없다고 못하겠다. 당연히 겪어본 나머지라고 말씀을 드릴 참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러한 신봉자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은 좋은 약에 대한 부작용을 주의하는 정도로 이해를 해도 무리가 없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그 해악은 언제라도 나타날 수가 있음을 생각하고 늘 조심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2. 자평명리학이 수단이 되는 경우

수단이라고 하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간단한 이야기로는 생계수단도 가능하겠다. 그리고 충분히 생계수단으로서의 가능성도 있다고 해야 하겠다. 다만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생계수단이 아니고 또 다른 교통수단으로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 이점에 대해서 혼동이 없으시기를 바란다.

(1) 왠지 목숨을 걸기에는 부담이다

그렇게 여러 해를 자평명리학의 전파사가 되어서 열정을 보였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아무래도 그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나의 수단으로서의 자평명리학은 대단한 것임이 틀림이 없다. 그리고 목적이 된다고 해도 그만한 가치는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경험을 통해서 결코 실망시키지 않음을 확인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떤 부분들이 목숨을 걸고 싶은 마음을 무력하게 만들었을까에 대해서도 언급을 드려야 하겠다.

1) 부모의 유전인자 비중이 크다

아무리 같은 시간에 태어난다고 해도 어떤 부모를 만났느냐는 점에 따라서 많은 결과의 오차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면서부터 명리학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점차로 자신감이 없어졌다. 부모가 지혜롭지 못한 사람에게서 태어난 사람의 유전인자와 지혜로운 부모의 유전인자를 받은 사람은 그냥 같은 사주라는 이유만으로 같은 결과를 누려야 한다고 떼를 쓰는 것이 어느 날은 우습게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자평명리를 무시해야 할까? 물론 그러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다만 그 비중이 적지 않음을 말씀드리는 것이고, 이러한 비중은 여하튼 적지 않은 차이를 갖고 온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또 다른 경우로는 부모가 부자인 경우와 가난한 경우에도 많은 차이가 난다. 어려서의 환경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결코 적은 비중이 아닌 것은 틀림이 없다고 한다면 이렇게 각기 다른 환경에서 태어난, 같은 사주는 결코 같은 결과를 누릴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서로의 좋은 운에서 서로는 행복해 하겠지만 그 들의 통장 잔고나 지식의 범위까지도 모두 같아야 한다고 주장하려니까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된다면 적어도 부모의 유전인자나 출생이전의 상황들도 분명 고려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절대로 자평명리로 모든 해석을 할 수가 있으리라고 하는 생각에는 점차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또한 스스로 다 느껴본 과정이다.

2) 환경에 따른 변수가 크다

사주는 시간을 논하는 학문이다. 환경에 대해서는 고려를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후학이 나름대로 환경의 비중을 들어서 겸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또한 올바른 명리학은 아니다. 발전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여하튼 맹자의 어머니를 보면서 늘 느끼는 것은 어떤 환경에서 성장을 하느냐에 따른 변수는 당연히 존재한다고 해야 하겠고, 비록 같은 사주라고 하더라도 각기 다른 환경에 처해진다면 아마도 그 변수는 적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과연 오로지 연월일시만으로 인생을 모두 감당할 수가 있겠느냐는 질문에는 점차로 자신이 없어진다. 예를 들어본다.

김춘삼씨는 거지로의 왕이 되었으니 대단했지만 또한 학문을 하여 왕이 된 것과 비교한다면 분명 뭔가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냥 가정해보는 것이다. 그의 환경에서는 학문은 너무나 사치스러운 것이었을 게고 오로지 생존 그 자체만 비중이 있기에 그는 그렇게 성공을 했다고 하겠다. 다만 같은 사주라도 좋은 환경에서 성장을 했다면 거지왕보다는 또 다른 부분에서 왕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중요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사주가 같으면 인생의 생업이나 부귀빈천이 모두 같아야 한다는 말을 하기에는 너무나 부담이 크다고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3) 노력의 변수도 적지 않다

여하튼 뭔가를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 노력의 마음이 환경과도 유관하겠지만 어려서의 성장기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본다면 분명 노력이 같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같은 비중으로 노력을 한다고 하더라도 약사가 대우를 받는 시기에는 약사가 되기 위해서 노력을 할 것이고, 변호사가 대우를 받는 시기에는 변호사가 되려고 노력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까? '아마도'라고 하는 말을 전제해야 하겠지만 예전에 연예인이 되려고 했을 적에 부모님이 다리몽뎅이를 꺾으려고 달려들었던 것과 지금의 부모들이 서둘러서 시키려고 하는 것에는 분명 환경적인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변수가 자꾸만 보이면서 자평명리학으로 세상의 인생들에 대해서 모든 답을 내릴 수가 있다고 생각했던 장면들이 슬슬 퇴색을 하게 된다. 그래서 목숨을 걸기에는 아무래도 의문이 남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2) 어디까지 봐야 할 것인지도 어렵다

사람이 타고 난 사주를 통해서 과연 배우자의 상황이나 자녀의 인연 또는 재물에 대한 길흉이나 일의 성패 등에 대해서는 큰 부담이 없이 접근을 하겠는데, 더욱 구체적으로 몇 살에 몇 살 먹은 배우자를 만나서 아들 몇 명에 딸은 몇 명을 둘 것이며 각각 몇 살에 아들과 딸을 둘 것인지에 대해서는 질문을 받으면 그냥 고개를 돌리게 된다. 그렇게 인생의 운명이 정해졌다고는 생각이 되지 않기도 하거니와 일치하는 학문도 없다는 생각을 늘 하게 되는 까닭이다.

만약에 어느 벗님이거나 자신은 위와 같은 모든 것에 대해서 다 알 수가 있으며 만약 정확하지 않는다면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겠다고 한다면 당장에 달려들어서 따져 묻고 싶다. 그러나, 만약에 '자신은 어리석어서 잘 모르지만 명리학은 그렇게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고 하는 명리학의 아류(亞流)들과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것도 낭월의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깨달음이지 이상향이 아니다. 명리학을 배우면서 세우는 이상향이야 각기 다를 수가 있겠지만 그것은 정답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리고 자신의 이상에 대해서 혹 낭월과 같은 사람이 찬물(?)을 끼얹었다고 해서 노발대발하실 필요는 더더욱 없다고 하겠다.

물론 이러한 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어쩌면 낭월의 천성이 아둔해서일 것으로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쩌면 그러한 세세한 부분까지는 사주를 통해서 알기가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은 혹 변명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일부의 선생님들은 이러한 말을 한다고 해서 낭월이 무슨 명리학에 대한 '대역죄인'인양 몰아가는 분위기도 더러 느껴보는데, 그러한 대우를 받을 적에는 천상 변명 아닌 변명을 하게 된다.

"낭월의 명리연구는 목적이 아니고 깨달음으로 가는 수단이랍니다."

그렇다. 각자에게는 그 목적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사주풀이가 목적인 경우에는 그렇게 목적을 삼고 연구를 하면 그것으로 행복하실 것이고 그대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같은 의미로 낭월은 사주풀이에 목적을 두지 않았다고 해서 비난을 받아야 할 이유도 전혀 없으며 또한 하나의 삶일 뿐이라고 하는 너그러운 이해를 해주시라는 부탁을 하게 되는 것이다.

3. 낭월의 목적은 깨달음이다

늘 놀라움으로 가득할 때가 있는데, 하건충(何建忠) 선생님의 책을 보면서도 그러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하 선생님의 글에서 느끼는 것은 결코 적중하는 것에 있지 않다는 느낌을 늘 받게 된다. 그의 시선은 늘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자평명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 자평명리론을 바탕에 놓고서 더욱 새로운 영역을 찾으려고 노력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낭월의 생각도 그 방면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늘 궁리에 궁리를 해도 하 선생님의 지혜를 다 이해하지 못해서 언저리에서 기웃거리고 있는 입장이지만 여기에서 명확히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이 자평명리학은 '뭔가를 발견하는데 아주 멋진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뭔가를 알게 된다면 자연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 낭월의 이상향이고, 그 목적을 향해서 오늘도 노력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게 된다.

(1) 자평명리학을 딛고서

낭월은 자평명리학을 사랑한다. 그리고 언젠가 때가 오면 자평명리학을 밟고 튀어 오를 참이다. 그때에는 또한 멋진 디딤틀의 도구로 이용이 될 것이다. 자평명리학은 참으로 매력적인 학문이며 너무나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자평명리학을 만나게 된 인연에 또한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자평명리학의 추종자가 되어서 일생 그 굴레에서 만족하면서 살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서도 곤란하다는 생각을 늘 하게 된다. 근래에 들어오면서 그렇게 생각하는 시간이 더욱 많아지는 것은 아닌가 싶다. 어쩌면 벗어난다 벗어난다 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못난이가 될지도 모르겠다. 비록 그렇더라도 늘 벗어날 틈새가 있는지를 기웃거릴 참이다. 아마도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2) 자연으로 눈을 돌리면......

지난 한담에서 물리학의 이야기를 언급했었다. 그렇게 물리학을 생각하면서도 다시 오행의 이치를 궁리하게 된다. 일부분을 인용한다면 다음의 부분에서 또 고민을 했다. 물론 글을 올려놓고 나서도 계속해서 궁리는 끝이 나지 않는 것이다.

수소=水=1,6
고열=火=2,7
헬륨=木=3,8
압축=金=4,9
조화=土=5,0

아마도 기억이 나실 것이다. 수소와 선천수에 대한 언급을 생각해본다. 이표를 나름대로 생각해 봤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또 달리 변경을 하고 싶어진다.

우주=土=0,5
수소=水=1,6
고열=火=2,7
헬륨=木=3,8
압축=金=4,9

토의 위치를 끝에 놓고서 늘 생각하던 습관이 잘못된 것은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갑자기 뒤통수를 치면서 이렇게 맨 처음으로 올려놓고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실로 곰곰 생각을 해보면 0이 시작이라고 보는 것이 1을 시작이라고 보는 것에 비해서 훨씬 현명한 판단이 아닐까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물론 그냥 해보는 생각이다. 다만 그냥 막연하게 기분이 내키는대로 생각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럼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생각했는지도 설명을 드리도록 한다.

(3) 고인들의 말씀 중에서

부처-이미 너희들은 본래부터 부처였다.
예수-원래는 에덴동산에서 자유로운 존재였다.
단군-원래 하늘에서 살았던 완성체였다.(추측임)

이와 같은 이야기가 있음을 생각한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미개한 존재가 아니고 깨달음이나 자유에 해당하는 존재였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처음에 土로부터 출발을 한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으며 오히려 그래야 더욱 타당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4) 하건충 선생론

여기에서 다시 하건충 선생님의 생각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의 천고팔자비결총해(千古八字秘訣總解)를 보면 뒷 부분에 原理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리고 어쩌면 사주와는 전혀 무관한 설명인 것으로 느껴지는 대목이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예전에 낭월의 목적이 사주풀이에 있을 적에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를 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지금도 별로 이해가 깊어진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 물리학 책을 보고 나서 다시 흥미가 동해서 살펴보면서 놀라운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머리통을 쥐어박는다. 이미 설명을 해 놨는데, 깨닫지 못하고는 엉뚱하게 방황했다는 죄 값을 묻는 것이다. 다음의 의미를 살펴 주시기 바란다.

(첨부한 그림을 다운 받으셔서 살펴보시는 것이 좋겠다.)

그림을 보면 하건충 선생님은 맨 처음을 水로 본 것이 아니고 土로 놓고 생각을 하셨다는 것을 너무도 분명하게 알 수가 있었던 것을 이제야 발견하게 되는 것을 보면 역시 세상만사는 모두 인연이 되어야 얻을 수가 있는가 보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리고 앞의 성현들이 가르침을 주신 대목과 그대로 연결이 되면서 과연 하선생님이 발견하시고 생각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의 말씀에는 늘 자연에 대한 성찰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아마도 하선생님에게도 명리학이 목적인지 아니면 수단인지를 물었을 적에 아마도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명리학을 의지해서 자연을 깨닫게 되었으니 명리학은 멋진 수단이라고 하는 말씀을 하셨으리라고 짐작만 해본다.

이렇게되고 나서야 비로소 원리에 대한 대목을 다시 살펴봐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래서 점차로 인간의 길흉화복에 대한 흥미는 식어진다고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길흉화복을 예단하는 것도 좋기는 하지만 그러한 것에 매달려 있는 시간에 오히려 자연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더욱 흥미롭다고 하는 말씀으로 대신하는 것이 더 좋겠다.

4. 누가 나에게 왜 명리학을 하느냐고 묻거든....

누구나 그 일을 하는데 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낭월이 명리학을 연구하는 것에도 당연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며, 그 이유를 본다면 무엇보다도 명리학을 통해서 자연으로 연결이 되는 통로를 찾을 수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어서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방법은 찾을 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공상까지도 해본다. 누구나 속아서 산다고 하는 말도 있기는 하지만 여하튼 낭월은 이러한 목적으로 명리학을 연구하고 있다고 해야 하겠다. 그러니까 너무 구체적으로 적중을 시켜야 하는 것이 명리학자라고 한다면 또한 취향이라고 해야 할 모양이다. 그렇게 하실 분은 그렇게 하시고 달리 생각할 분은 또 달리 대입을 한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아무 곳에서나 부합이 되어야 참으로 대단한 명리학이라고 해야 할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혹 자신의 명리학 연구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이야기하시면서 인간의 길흉화복을 정확하게 추단하는 것이 아니라면 자신은 명리학을 배우지 않겠노라고 하는 말씀을 하신다면 낭월은 이렇게 생각한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다.

"낭월은 만약 명리학이 오로지 인간의 길흉화복을 매월의 운세까지 그리고 자녀의 숫자까지 읽어내는 것이 전부였다면 진작에 걷어 치웠을 겁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은 명리학을 통해서 얻을 수가 있는 것이 참으로 많다고 하는 생각으로 인해서인데, 그 목적이 오로지 자녀의 숫자나 재물의 구체적인 분량에 있는 것이 아니고, 뭔가 매우 흥미있는 방향으로 전개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있다. 실제로 앞으로 무한의 발전 가능성을 본다면 자평명리학은 그 잠재력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해야 하겠다. 그래서 여전히 명리학의 매력에 취해서 이렇게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하건충 선생님의 원리론을 잡고 시간을 좀 보내야 하겠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리고 그 소식을 조금이라도 얻는다면 벗님과 함께 공유할 것임을 약속드린다.

이렇게 낭월이 생각하는 명리학은, 그 방향을 깨달음으로 향하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관찰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연구하시는 방향에서 함께 하지 않는 낭월을 너무 심하게 공격하면서 못마땅해 하시지는 않는지 살펴주시고 '제 목적이 있으려니....'해주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공감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너무 심하게 야단하지 말라는 당부의 말씀을 드린다. 과연 어느 누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는 또 시간이 흘러봐야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냥 오늘 최선을 다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해주시라고 당부 드린다.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