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부처가 이 땅이 온 까닭은........

작성일
2001-04-23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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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3화] 부처가 이 땅이 온 까닭은......

부처님이 오셨다는 날이 다가옴에 따라서 감로사에서도 그에 대한 봉축 행사를 준비한다고 한참 바빴다. 이제 대략 급한 불은 끈 것으로 봐서 다시 여유를 찾았다고 해야 하겠는데, 그렇게 준비를 하면서 이 노인네가 뭐하러 와서는 이렇게 벚꽃 화사한 봄날에 사람을 바쁘게 하느냐는 투덜거림이 발생하면서 도대체 뭐하러 왔는지에 대해 생각을 해 봤다.

1. 자신의 윤회 앙금을 제거하고.....

윤회가 사실적인 자연의 이치라고 한다면 그 인간도 그 사슬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까 가장 시급한 것은 자신의 업장을 털어 내는 것이 가장 시급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봤다. 보통 스님들과 나누는 대화는 이럴 것이다.

"스님 불교가 뭐래요?"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겁니다."
"부처님이 뭘 가르쳤는데요?"
"4성제와 팔정도와 육바라밀을 가르쳤지요."
"그게 뭔데요?"
"사성제라고 함은 고집멸도라고도 하는데....."
"그게 뭔지 쉽게 설명해 주세요."
"그러니까.... 그게.... 중생을 구제하는 겁니다."

이렇게 대화가 진행되는 것도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 질문자가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답변하는 스님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남의 다리를 서로 긁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뭐든지 있는 그대로 보고 관찰하고 생각하고 수용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불교뿐 아니라 무엇을 하거나 모두 통용되는 이치라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과연 부처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왔을까? 아마도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냥 윤회의 업연(業緣)에 의해서 태어났을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고 자연적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도 별 수가 없는 인간이 아니냐고 묻고 싶다면 당연히 그렇다고 답변을 해야 할 것도 피할 수가 없겠다. 부친과 모친의 사이에서 유전인자를 부여받고 태어난 갓난아기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전하는 말에는 태어나면서 아홉 마리의 용이 물을 토해서 목욕을 시키고 아기는 일어나서 일곱 걸음을 걸었는데, 발 아래에서 연꽃이 솟아올라서 발을 떠받치며 일곱 걸음을 걸은 후에는 한 손은 하늘을 가르치고 한 손은 땅을 가르치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외쳤다고 하는데, 이것을 믿는다면 아마도 제정신이 아닐 것으로 봐서 무리가 없겠다. 이것도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상징적으로 이해를 할 수는 있겠지만 그 상징적인 것을 상징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사실로 믿으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 때문에 늘 문제를 일으킬 수가 있다는 것이다.

"부처는 나면서부터 걸었다니까~!"
"에구~ 말도 안 돼."
"그러니까 부처지 네 좁은 소견으로 이해하려고 하지마 다쳐."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그러니까 부처지 참 뭘 모르네. 너 바보 아냐?"
"그런가...."

이렇게 멀쩡한 사람이 바보가 되고 바보가 정상이 되는 현상은 늘 생기기 마련이다. 여하튼 부처를 믿는 것은 자유지만 스스로 이성적인지 맹신적인지는 가끔 평가를 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본다. 그는 인연에 의해서 석씨 가문에 큰아들로 태어났을 뿐이고 그가 할 수가 있는 것은 젖을 빨고 똥오줌을 못 가리는 것뿐이었다. 만약 그가 참으로 나면서부터 걸었다고 한다면 별종이거나, 기형이라고 해야 할 것이고, 그것이 만약 신통력이라고 한다면 그의 모친을 7일만에 죽도록 하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평생 자신을 위해서 출산을 하고는 그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부모은중경을 설한 내용으 봐도 그러한 의미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데, 이 경의 제목도 문제는 문제이다. 왜냐면 내용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뿐이면서 경의 제목은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이니 말이다. 올바른 제목은 모친은중경이거나 자모은중경(慈母恩重經)이어야 옳다는 주장을 해봐야 누가 들은 척이나 하려마는...... 하하~

2. 그도 윤회를 면하려고 몸부림 쳤다.

몸부림이 아니고서는 아무 것도 얻을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냥 그런가보다 해서는 얻을 것이 없을 뿐이다. 그래서 역경을 스승으로 삼으라는 말도 하는 모양인데, 당연한 이야기라고 이해를 한다. 특히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증이 엄청 강했을 것으로 미뤄서 짐작을 해본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과정을 보면서 번민에 빠지는 모습이 다소 강조되었다고는 하더라도 너무 과민반응을 보인 것이 아니겠느냐는 의아심도 든다. 활기발랄한 20대 초반에서 죽음의 공포에 눌려서 세상 살 맛이 나지 않았다는 것은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공포증은 아마도 모친의 죽음이 겹치면서 더욱 강하게 뇌리에 박힌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그의 주변에서는 늘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이 붙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죽음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왕궁을 벗어나서 도망을 친 것이다. 아마도 그가 신강한 사주였다면 그냥 왕궁에서 자신의 일을 보면서 마음의 평정을 얻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다가는 달콤한 왕의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을 억제하지 못하고 성을 빠져나갔을 것으로 짐작을 해본다. 아마도 나중에 그가 깨달음을 이룬 다음에 말을 하였듯이

"악사의 거문고 줄은 너무 조여도 너무 느슨해도 곤란하다."

이런 말을 할 즈음의 마음 상태였다면 왕궁을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하겠다. 아마도 그의 청년기에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현자를 만날 수가 있었다면 그렇게 목숨을 건 고행의 길에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을 해본다. 아마도 장자(莊子)를 만났더라면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이보쇼 싯달타. 그대는 지금 참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는 거라구. 그대가 왕의 큰아들인 것이 무슨 허물이 되겠느냔 말이야. 왕이 되어서 백성들이 끼니를 굶지 않도록 잘 다스려서 서로 미워하지 않는 마음이 있고 누가 정치를 하는지에 대해서도 왕이 옆에 있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여 태평가를 부르도록 한다면 또한 멋진 일이 아니겠냔 말이야. 그게 뭐야. 아버지를 배신하고, 혼자 뭘 얻겠다고 그 길을 나섰느냔 말이야. 참 어리석은 일이야. 왜냐면 이 자리에서 얻을 수가 없는 것은 집을 나간다고 해서 얻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야. 그래 결국은 뭘 깨달을거야? 자신은 결국 죽고 말 것이다? 생로병사는 면할 수가 없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냔 말이야. 쓸데없는 망상 치우고 왕자의 수업이나 열심히 하시라구. 나가봐야 고생이야 고생. 허허허~!"

이렇게 말씀을 드린다고 해서 부처를 장자보다 못한 것으로 이해해야 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라는 말씀을 또 드린다. 왜냐면 부처가 나중에 얻은 깨달음은 또한 그에 못지 않은 성취라고 봐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냥 젊은 싯달타에게 장자를 붙여본 것이다. 장자는 성곽지기를 통해서 왕도 귀찮고 부자도 귀찮다고 한 요임금을 비난하는 글을 썼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미뤄서 짐작을 해봤다. 고작 아들 하나 얻은 것을 놓고 '장애물'이라느니 하는 무책임(?)한 싯달타의 소견은 그리 크다고 하기 어렵겠다. 그리고 그의 의식은 늘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에 다 집중되어 있었다고 하는 것이 아마도 옳을 것이다. 그 공포는 자신이 죽음의 문턱까지 가본 다음에야 비로소 벗어나게 된다는 것도 참 묘한 일이다.

3. 깨달음은 공포로부터의 자유

그 고행을 통해서 얻은 것은 무엇인지 본인이 아니고서야 누가 알겠느냐는 말을 해야 하겠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는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그 자유를 얻고 나자 이번에는 죽고 싶어졌을 수도 있겠다. 그가 큰 깨달음을 얻고서 죽어버리려고 했다는 것이 경전에 등장을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사주에 선전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가 죽어버리려고 했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죽을까봐 두려워서 공부를 했는데, 이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했으니 분명 큰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리고 그 상황을 해탈(解脫)이라고 하였을 것이고, 그 해탈의 의미는 죽음의 강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의미로 해석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 자유를 얻고 나서야 비로소 세상의 이치가 보이고, 그 구조를 이해 했으며 그때에 산천은 여섯 가지로 진동을 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가능할 것으로 생각을 한다. 왜냐면 경봉 스님이 깨달음을 얻으시는 새벽에 영축산에는 산천이 방광을 했던 기이한 현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낭월은 늘 사실을 미뤄서 전설을 저울질하는 버릇이 있다. 그러니까 땅이 진동을 했다는 말은 믿을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었을 적에 내 마음이 격랑의 깨달음에 대한 환희에 잠겨있으니 당연히 땅도 진동을 하는 것이다. 너무 확대해서일까? 믿지 않으셔도 상관은 없다. 그러나 풍수학에서도 동기감응설이 있으니 내가 환희심에 잠기면 주변에서도 그 진동을 느낄 것이라는 생각은 틀림없을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4. 그가 위대한 이유

만약에 그가 깨달음을 얻고서 자신이 하늘이라고 했더라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그를 외면했을 것이다. 다만 그를 따르게 되는 것은 자신이 하늘이 아니고 구세주가 아니고 다만 안내자라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겸손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진심으로 안내자가 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나는 길을 안내하는 가이드이다. 내가 가본 것에 대해서 안내를 할 수가 있다. 내가 가보지 않은 것은 안내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우주의 이치를 알고 윤회의 바탕을 깨달았으며 진정한 자유로움이 무엇인지를 경험해봐서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방법을 안내해 주는 것이다. 물론 내 말을 듣고서도 따르지 않는 것이야 난들 우짜겠노. 각자 알아서 할 일이다. 그래서 나도 인연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존재일 뿐이다. 다만 깨달음과 자유로움을 생각하는 수행자에게는 내 안내가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음...... 늘 감동스러운 장면이다. 그의 가르침은 이렇게 인간적이기에 더욱 빛이 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신이 구세주라는 말을 하지 않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짐작도 하지 못하겠지만, 툭하면 '재림예수'라거나 '미륵'이라거나 해서 자신의 중대한 사업계획을 말하는 자칭구세주를 보면서 참으로 스스로 구세주라고 하지 않기가 얼마나 어렵겠느냐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 하나 만으로도 그의 스승 자격은 충분하다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신이 깨달은 장면을 그대로 나눠주려는 과정에서 사사로운 목적이 없다는 것은 성자만의 특징이라고 해도 되겠다. 그리고 진정한 성자는 자신의 깨달음을 나눠주는데 조건이 붙으면 곤란한 것도 당연하다.

5. 다시 부처님 오신날은 다가오고.....

언제나 습관처럼 연등을 만든다. 그러면서 잠시나마 그의 오신 목적을 생각하기도 한다. 그가 인간으로 왔기에 위대하고 깨달음을 얻어서 더욱 위대하지만 더욱 위대한 것은 그가 구세주를 선언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구세주는 없다."

누가 세상을 구할 것인가? 예수? 부처? 노자? 공자? 칭기스칸? 알랙산더? 아님 나폴레옹? 달라이라마? 그 모두는 세상을 구제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구세주는 없을 것이다. 아무도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 낭월의 판단이다. 다만 안내자를 만날 수만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구제를 해야 할 대상도 아니고 그럴 성질의 것도 아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제하는 것으로 모든 일은 끝이 난다고 하는 것이 아마도 현실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을 스승으로 삼으라고 한 성자는 바로 부처였다.

6. 불교는 목적인가 수단인가

여기에서 다시 이런 원론을 생각해 봐야 하겠다. 과연 불교는 목적일까? 아마도 불교를 바로 이해하신 벗님이라면 아니라고 고개를 흔들 것이 분명하다. 불교의 목적은 깨달음에 있으니 깨달음은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절대로 불교를 믿는 것만으로 해결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보는 것이 가장 옳을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목적이 아니고 수단이 되는 것이며 깨달음의 수단으로의 불교는 참으로 대단하다고 해야 하겠다. 왜냐면 불교를 수단으로 삼은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의 즐거움에 동참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낭월도 늘 불교를 깨달음의 도구로 생각하고 열심히 이용하려고 연구 중이다.

부처님 오신날이 다가오면서 불교의 목적이 스스로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교통수단이 되는 것으로 작용하게 되기를 기원하면서 잠시 의미를 생각해 봤다. 벗님의 법당에서도 우담발화가 만발하기를 기원 드린다.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