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화] 때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작성일
2001-05-27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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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때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때'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엇그제 영등포 학당에 강의를 갔다가 내려오면서 내내 생각에 잠겼다. 그 생각의 중심에는 '때'라고 하는 글자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때는 한자로 말하면 시기(時機)라고 할 수도 있겠다. 또는 시기(時期)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때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오늘은 앞의 時機를 생각하고 싶어진다. 어떤 것이 시기 즉 때가 될까...... 그리고 벗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도 함께 생각을 해보시도록 하자. 왜냐면 이것은 인생의 여정에서 결코 적지 않은 부분이 아닌가 싶어서이다.

1. 강태공이 기다린 때

흔히 기다림을 이야기 할 적에는 강자아를 거론하는 것에 망설임이 없다. 그는 오랜 시간을 기다린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아마도 기다림의 대표로 늘 생각을 해서일 것이다. 그의 기다림은 무슨 때를 기다린 것이라고 해야 할까? 아마도 '등용될 때'를 기다린 것으로 봐야 할 모양이다. 그래서 자신의 뜻을 펴기 위해서 그 시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봐서 무리가 없다고 하겠는데, 그렇게 계획을 속에서 익히면서 때를 기다라는 현자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게 된다.

같은 기다림이라도 그 종류는 다르다고 하겠는데, 가령 복수의 일념을 잃지 않으려고 쓸개를 핥으면서 때를 기다렸다는 부차나 구천의 이야기대로의 기다림은 아무래도 지혜로웠다고는 하기 어렵겠다. 증오심으로 기다리는 것과 조용히 웃으면서 기다리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고 해야 하겠다. 낚시를 하는 사람의 기다림과 벼슬을 못해서 안달이 난 사람과의 기다리는 모습은 사뭇 다르다고 해야 하겠다는 것이다. 벗님은 기다리고 계신 것이 없으신지?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기다리고 계신지에 대해서도 겸해서 생각을 해보시는 것도 좋겠다.

기다림으로 따진다면 김대중 대통령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하실지도 모르겠다. 대통령에 출마한 것이 얼마나 긴 시간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얻었던 온갖 경험들은 아마도 긴 인생의 여정에서 본다면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헤아려보기도 한다. 그런데 또 생각을 해보면 오래 기다린 대통령이나 갑자기 등장한 대통령이나 모두 사람이 아니겠느냐는 생각도 든다. 왜냐면 그렇게 기대를 했던 여러 가지들이 막상 진행되는 과정을 보면서 생각하기에는 신통한 수가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흔히 어른들 말씀에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을 하시는데, 참으로 오랫동안 기다림으로 달관이 되신 견해가 아닌가 싶은 생각도 해본다.

그런데 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것은 또 어떨까? 세상에서 그보다 지루한 것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차가 많아서 10분이나 20분을 기다리는 것은 그래도 견딜 만 하겠지만 1시간에서 더러는 2시간을 기다려야 할 경우도 있는데, 그 지루함은 만만치 않다고 해야하겠다. 물론 말로는 40년을 기다린 사람도 있는데, 그깟 한두 시간 정도 기다리는 것을 지루하다고 하면 되겠느냐는 말씀도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인내심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예전에 낭월이 만행(떠돌이화상)할 적에는 주요 교통 수단이 완행열차였는데,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10시간을 기다려야 할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면 참 옛날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하실려는지 모르겠다.....

2. 노자의 물러난 때

도덕경의 탄생이야기는 드라마를 한편 보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성문지기가 등장을 하고 지나가는 노자를 붙잡고 법문을 청한 이야기이며, 노자께서도 참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이렇게 기특한 사람을 만나서 남길 수가 있었다고 하는 생각이 드셨다면 또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뭔가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차마 뭐라고 하기가 뭣해서 그냥 떠나는 중에 그 가려운(?) 곳을 긁어준 것은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해보는 낭월이다. 그래서 노자는 물러날 때를 논할 적에 등장해서 아무런 손색이 없다고 하는 생각이 든다. 왕에게 할말을 하다가는 자신의 목숨이 온전하지 못할 것 같고, 그렇다고 그냥 연명을 하면서 자리에 연연하는 것은 자신의 생리에 맞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을 해본다. 요즘 여당의 젊은 의원들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등장을 한다는데, 그들도 물러날 것을 작정하고 나서는 것인지 아니면 젊은 혈기에 좀 튀어 보려고 나서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아마도 물러날 것을 작정했다면 그래도 가상하겠지만, 튀어보려고 나섰다면 머지 않아서 후회만 남기지 않을까 싶은 걱정을 해본다.

그리고 물러나는 것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은 잠시만 생각을 해보면 알 일이다. 그러니까 어저께 법무부장관이 물러나는 때를 생각해봐도 되겠다. 옛 철인들은 나아가는 것보다 물러나는 것이 더욱 어렵다고 했는데, 과연 그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물론 법무장관이 3일을 일하고 물러나는 것은 물러날 때에 물러나는 것이 아니다. 쫓겨날 뿐이다. 그렇게 물러나는 것은 참으로 나아가지 않은 것만도 못한 것이 되어버린 셈이다.

이 시대의 양주동이라고 해도 좋을 어느 동양학자도 그렇게 쫓겨나듯이 물러났다고 한다. 언론에서 빛나는 활약을 하다가는 무슨 연고인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활동을 하던 방송이 중지되었다고 하는 말이 들린다. 그리고 그 이면에서 곁들여지는 이야기들 중에는 너무 나아가려고만 하고 물러날 생각은 못한 것이 아니냐는 말도 들린다. 그래서 참으로 어려운 것이 물러날 때가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부디 스스로의 뜻으로 물러난 것이기를 바라는 것은 역시 낭월도 학자이기에 학자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연민심이다.

물러날 때를 놓친 것은 고 정주영회장도 마찬가지라고 해야할 모양이다. 그리고 이것은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대다수의 사람은 그렇게 스스로 물러나야 할 때를 알기 어렵다고 하는 점에서 본다면 오히려 수행자들도 일단 벼슬길에 발을 들여놓으면 그 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는데 다시 말해서 뭘 하겠느냐고 해야 하겠다.
그래서 순치황제는 왕 노릇을 17년인가 한 끝에 비로소 그 자리를 물려주고 출가를 하면서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는 기분을 읊은 노래도 있는데, 그 마음을 생각해보면 스스로는 물러나야 할 때를 알고 있으면서도 주변의 환경에서 허락을 하지 않아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예전의 선비들은 자신의 병환을 핑계로 물러난 경우가 꽤 많았던 모양인데, 지혜로운 왕이라고 한다면 자기 욕심만 채울 것이 아니라 그렇게 물러나고자 하는 신하의 마음을 잘 헤아려서 지그시 눈을 감고 허락을 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하겠다. 물러나는 일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 보니 이렇게 여러 사정이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3. 나아감이 없으면 물러갈 일도 없을 낀데.....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본다면 나아가지 않는다면 물러갈 일이 없다는 것은 간단한 논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을 하신 선현들도 적지 않았던 모양인데, 얼른 생각나는 사람으로는 죽림칠현들이 떠오른다. 그 들의 자유로움과 진출멸시현상-進出蔑視現狀(?)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에 일부의 사람들에게는 존경도 받았던 모양이다. 그 중에서도 자신에게 벼슬자리를 주겠다고 하는 제안을 받고는 흐르는 물에 자신의 귀를 씻었다는 이야기를 남긴 사람은 가히 '부진즉불퇴(不進卽不退)'의 사고방식을 몸소 실천하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 시대에 무슨 방법을 동원하던지 간에 벼슬 한자리 해보려고 안달이 나 있는 군상들을 보면서 과연 누가 더 지혜로웠는지 다시 생각을 해보게 한다. 그렇게 단명하는 장관들이 많이 나올수록 이러한 생각은 더욱 의미심장하게 되살아나니 말이다.

그런데 더욱 대단한 것은 그보다 한 술 더 뜨는 사람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 선비가 귀를 씻고 있는 아래에서 자신의 소에게 물을 먹이다가는 더러운 물을 자신의 귀한 소에게 먹일 수가 없다고 그냥 끌고 가버렸다고 하지 않는가 말이다. 이렇게 물러나지 않으려는 노력들은 가히 초인적이라고 해야 하겠다. 물러나지 않으려면 나아가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님은 많이 떨어진다고 하겠다. 나아가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는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고, 그로 인해서 겪은 수모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죽림의 현자들이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고 해야 할 모양이다.

4. 선생 노릇에도 진퇴가 있을지......

이것은 퇴계선생과 같은 학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자신의 학문을 연구하고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아낌없이 나눠주고 그렇게 자신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학자의 경우에는 무엇이 나아감이고 무엇이 물러감이 될지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봐야 하겠다. 그리고 곰곰 생각을 해보면 학자의 진퇴는 이론적으로 논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1) 학자의 나아감 - 이론을 세우고 정립함

일단 이러한 의미로 학자의 나아갈 때를 생각해 보도록 한다. 그러니까 이론적으로 자신의 바탕을 세우고 기반을 잡으면서 보다 구체적으로 임상을 하고 확인을 한 자료는 다시 확정을 하고, 확인이 되지 않는 자료는 보류를 하며, 그렇게 해도 전혀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이 되면 과감하게 포기를 하는 것으로 학자의 나아갈 때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학문을 연마하는 과정에서 점차로 그 학설에 동조를 하는 사람이 생기게 되고, 또 그에 반비례해서 반대하는 사람도 자연스럽게 형성이 된다면 학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으로 이해를 해서 무리가 없겠다. 이렇게 되면 나아간 것이 확실하다고 하겠다.

(2) 학자의 물러남 - 두 가지의 경우를 생각함

학자가 물러나는 것에는 두 가지의 종류가 있지 않을까 구분을 해본다. 그 하나는 뜻을 이루고 조용하게 물러나서 은거를 하는 것으로 그야말로 학문을 하는 사람에게는 최상의 꿈이라고 해야 하겠다. 이렇게 되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고, 노년의 칸트가 산책을 즐기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고 하겠고, 여행을 다니면서 유유자적(悠悠自適)을 즐기는 것도 또한 꿈이라고 해야 하겠다. 그리고 가끔은 제자들이 술병이라도 들고 찾아와서 적막을 깨어주기도 한다면 또한 행복한 일이 아닐까 싶다. 낭월의 꿈이라고 해야 하겠다. 이렇게만 된다면 학문을 한 보람이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또 하나는 쫓겨나는 것이다.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떠벌리거나, 남을 모함하거나, 또는 편협하게 자기이야기만 주장하는 경우에 주변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홀로 외쳐봐야 아무도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므로 결국은 달리 방법이 없어서 스스로 쫓겨나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본다. 물론 이렇게 된다면 학자로써는 최악이라고 해야 하겠고, 정치인에게 정계의 은퇴를 강요하는 것과 같다고 해야 하겠는데, 여하튼 이지경이 되기 전에 스스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 현명할지도 모르겠다. 참으로 어려운 것이 물러나는 것이라고 하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힘든 일이라고 해야 하겠다.

그래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온갖 노력을 할 수도 있을 것이며 그 중에서는 남의 학문을 도용해서 자신의 것으로 포장을 한 것이 나중에 들통이 나서 그야말로 형편없는 대접을 받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물론 세상에는 비밀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겠는데, 만약 그렇게 스스로 연구를 한 일이 수십년이 투자되었다고 한다면 물러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울 것이 인지상정이니 과연 이러한 지경이 되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는 질문에 본인이 벗님이라면 간단하게 말씀을 하시기도 어려울 것이다.......

5. 그래도 五行에는 진퇴가 있으니......

적천수의 내용에서 등장을 하는 문구에 진퇴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다. '理乘氣行豈有常 進兮退兮宜抑揚'의 구절을 두고 드리는 말씀이다. '이치가 기를 타고 흐르니 어찌 항상하겠는가, 나아가고 물러가니 때로는 눌러주기도 하고 또 때로는 거들어 주기도 한다'는 의미라고 해석을 하면 되겠는데, 자연을 이해한다는 것도 어쩌면 이렇게 사람이 자신의 길에서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문득 해봤다. 그리고 언제나 중도(中道)와 중화(中和)의 아름다운 조화로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서 치우침이 없는 시간들 속에서 한가로이 스스로 그렇게 편안할 시간이 도래하기를 바라는 것은 비단 낭월만의 꿈은 아닐 것이다.

中和를 '비겁한 중립'이라고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그에게 중화의 의미를 설명할 기분이 들지 않아서 그만두기는 했는데, 비록 말을 해 준다고 해도 그가 그 의미를 수용할 것 같지가 않아서이다. 왜냐면 그 中和의 의미는 말로 전달할 수는 있어도 그 의미를 깨닫기에는 어려울 것이고, 또한 의미를 이해는 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그 경지를 느끼기에는 또한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이 되어서이다. 그래도 어쩌면 말을 해줬어야 학자의 본분을 져버리지 않은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또 늦은 후회인 모양이다. 한쪽으로 치우쳐서 치달리는 것이 세상의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스스로 한 쪽에서 푹 빠져 있다가는 다시 또 반대쪽으로 쏠리는 현상들은 어디에서라도 흔히 볼 수가 있는 모습들이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중화를 이야기한다면 아마도 비겁하다는 말 외에 달리 무슨 말을 떠올릴지 모르겠다.

6. 여름이 시작되었으니 가을도 멀지 않았겠지.....

이제 여름이 시작되었는데, 낭월은 벌써 가을을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는 것도 여러 가지라지만 가만히 있어도 돌아올 계절을 기다리는 놈 만치 멍청한 녀석도 없으련만 그래도 마냥 늘어지는 여름이 싫고, 또 마구 물어대는 모기가 싫고, 또 찌뿌듯~한 컨디션도 싫어서 여름만 시작이 되면 자신도 모르게 가을을 기다리고 있다. 더러는 여름이 없는 나라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면서 말이다. 그게 얼마나 어리석으냐는 것은 빤히 알면서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도 한참 멀있지.....

'하긴, 때를 알면(철들면) 죽을 시간이 임박했다니.... 허허~'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