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화] 아버지 죄송합니다.....

작성일
2001-11-04 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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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화] 아버지 죄송합니다.....

가을이 되었다고 말 만 하면서 우짠일인지 너무 덥다고 투덜거렸더니 엇저녁에는 갑자기 일진광풍이 몰아치고 나더니 밤에는 제법 쌀랑한 기분이 상쾌해진다. 어제 영등포학당에 강의를 하러 가는 시간에 부는 바람으로 인해서 습관처럼 애용하는 밀짚모자를 괜히 쓰고 왔다는 생각을 올해 들어와서 처음으로 해봤다. 서리가 내리고 나서야 가을인 줄을 아는 둔재라니.... 쯧쯧... 그래도 강의를 마치고 나서 대화의 시간을 갖자고 찾아오신 학당 회원들과 나눈 소주 한잔의 온도는 70도는 됨직 했다. 이제 맥주의 시간은 멀어질 모양이다.

오늘 아침에 창문을 열고 가을의 기분을 느끼다가 문득 지하에 계실지도 모르는 부친의 모습이 떠올랐다. 적천수강의에서 언급을 드리기도 했지만 지독히도 재물의 복을 얻지 못하고 태어나신 부친께서는 참으로 고생이라는 것이 자신의 천직인양하고 일생을 살다가 육신의 인연을 다하신 지도 어느 사이 5년은 되었나보다....
가끔 생각이 나는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드림으로 해서 아버지께 죄송했던 마음을 헹궈보려고 생각을 해봤다

1. 지난 어린 시절의 기억 한 도막

당시의 나이는 아마도 11살은 되었을 것이다. 4학년 정도가 된 무렵이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머나먼 타향인 안면도에서 겨우 안정을 얻고 동급생과도 약간의 사귐을 갖을 수가 있었는데, 아이들은 아무하고라도 잘 사귄다는 말도 다 믿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의 체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는 낭월이다. 어림도 없는 이야기이다. 오히려 왕따에 가까운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참 힘들었던 그림들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인지 몰라도 여하튼 부모님 때문에 겪는 고통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쩌면 어린 나이에도 부모님도 최선을 다 해서 살고 있다는 것은 느꼈던 것으로 생각한 것이 아닌가 싶다.

먼재골(당시 살던 곳의 지명)에서 샘골까지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고개를 두 개 넘어야 되는 마을이다. 샘골에는 염전이 있고 그 염전의 주인은 흔히 사업주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의례 택호려니 하고 그대로 따라 불렀다. 아마도 염전사업을 한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던 모양이다. 그는 피난민이었는데, 안면도에서 자리를 잡고 성공을 하셨던가 보다. 그리고 그 댁의 장남이 낭월과 동급이었던 인연으로 하루는 하교 후에 함께 그 댁을 들리게 되었는데, 아마도 백사장에 놀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밥을 먹고 가라고 해서 들어갔던 모양이다.

당시 우리 집의 형편은 극히 어려웠다. '생 땅'이 뭔지 아실랑가 모르겠다. 생땅을 일궈서 산도벼를 심었다. 쌀밥을 가족에게 먹이고 싶으셨을 것이다. 밭에 심는 벼를 산도라고 한다. 그래서 물에 심는 벼를 수도작이라고 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바닷물을 길어다 밭에 부었다. 아마도 아버지의 생각으로는 오줌이 비료가 된다는 것과 바닷물이 짜다는 것을 연결시켰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래서 영양분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시고는 그렇게 애써서 바닷물을 밭에서 길어다 부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느냐고요? 그냥 묻지 마시고 혀만 차시면 된다.

"쯧쯧쯧...."

그해 농사는 그대로 끝이 난 것이다. 그리고 밭벼 농사도 그렇게 끝을 냈다. 그 후로는 고추와 참깨를 하셨는데, 실패를 거울삼아서 연구를 많이 했다고 봐야 하겠다. 그런데 곰곰 생각을 해보면 부친의 무모함(?)이 전혀 무모해 보이지 않고 어쩌면 생명을 담보로 한 실험정신으로 봐야 할 모양이다. 그러한 정신력을 낭월이 조금이라도 물려받았기를 희망하기도 한다. 평소의 모습은 늘 뭔가 생각을 하는 것으로만 보였다. 어떤 때에는 하루 종일 말씀을 한 마디도 하지 않을 정도였다. 밤에는 메꾸리(짚그릇)를 만들고 비가 오면 새끼를 꼬셨다. 근면성실로 부자가 된다면 부친은 적어도 10억 재산은 누렸어야 한다. 그러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운명이었겠거니..... 한다. 물론 낭월도 이러한 장면을 보고 자랐다. 그래서 노력만 하면 잘 살 수가 있다는 소견머리 없는 말을 하는 분을 만나면 말도 되지 않는 소리 말라는 이야기를 할 수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 그런가보다 했는데, 부친이 게을러서 못살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 어린 생각에 내린 결론은 학교 공부는 공부고 노력은 노력이고 부자는 부자라는 식의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여하튼 어려서의 부친은 참으로 대단한 철벽과도 같은 산이었으며 위엄과 호통이 무섭기만 했던 시절이었다.

어느 회원 분은 낭월의 책을 보면서 나이도 많지 않은데 어쩌면 그렇게 많은 경험을 했느냐고 놀랍다는 말씀도 하시지만 부친에 비한다면 별 것도 아니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살으셨던 부친이었고, 그렇게 어려웠던 당시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고맙게도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밀가루를 몇 포대 주셨다. 부친은 그 밀가루를 지게에 지고 와서 말씀하셨다.

"자, 주현아, 뭐가 묵고 싶노?"
"빵이 묵고 싶심니더."
"봐라, 아이들 빵 좀 쪄조라."
"참말로 밀가루를 주덩교?"
"그래 두 포나 주더라 인자 빵 좀 묵어보자."

그래서 강낭콩을 넣고 범벅빵을 쪘는데 얼마나 구수했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지만 당시에도 참 좋아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빵도 쪄먹고, 밥도 해먹었다. 밀가루 밥 말이다. 어떻게 밥이 되느냐고 물으신다면 그냥 상상만 하시라고 할 참이다. 밀가루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밀가루 밥은 좀 그렇다. 하하~

2. 그 친구네 집에서 있었던 일

문제의 그 친구 집에 들어갔다. 마침 사업주 어른은 계셨다. 그래서 인사를 했고 그 아이에게 밥을 먹으라고 하면서 나에게도 밥을 주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내심 기대를 한 것은 부잣집에서의 화려한 식사였다. 그 인근에서는 가장 큰 부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찬도 많았을 것이다. 뭘 먹었는지는 별로 기억이 없다. 적어도 하얀 쌀밥을 먹었던 것은 기억이 생생하다. 그 당시의 부에 대한 상징은 아무래도 '하얀 쌀밥'이었을 것이다. 하얀 쌀밥과 대비되는 것은 '검은 보리밥'이다. 만약 검은 보리밥이 몸에 좋은 것이라고 하실 벗님이라면 '쩝...쩝....'이다. 그 시절을 모르신다고 해도 좋겠다.

그야말로 게눈 감출 사이에 뚝딱 먹어 치웠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그 친구를 살폈다. 그도 밥을 다 먹었는데, 밥그릇에 밥풀을 여나문 개 붙여놓고는 숟가락을 놓는다. 순간 낭월의 교육관에 일대 혼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문제이다.

부친은 늘 말씀하셨다.

"음식은 깔끔하게 묵어야 한데이."
"남기면 몬씬다."
"밥을 묵고 밥그릇에 밥풀이 붙으면 복이 달아난데이."

대략 이런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밥그릇에 밥풀을 남긴다는 것은 큰 죄를 짓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부잣집의 아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냔 말이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생각을 했다.

'아마도 부잣집에서는 밥을 이렇게 먹는 모양이다.'
'주인을 따르는 것은 손님의 예의이다.'
'고로 나도 주인을 따라서 하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래 밥풀떼기를 남겨두자.'
'비록 아깝기는 하지만 난 양반 아닌가(흐흐~).'
여기까지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밥을 다 먹고 물러났다. 그리고 밥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사업주 어른이 물었다.

"밥 다 먹었나?"
"예...."
"너희 집에서도 밥을 그렇게 먹나?"
"..............."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더 물을 필요도 없었다. 밥알을 남긴 것에 대한 문책이었다고 생각을 하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하고 싶었다.

"아닌데요. 우리 집에서는 밥알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야 하거든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버지께 엄청 혼나요. 그런데 이 집의 아들은 그렇게 밥을 먹네요. 그래서 그게 예의인가 보다 싶어서 그렇게 했어요. 아들 잘 좀 가르치세요. 괜히 나만 뭐라고 하시네요."

그러나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내성적인 성격에 큰 실수를 했구나 싶어서 그만 달아나듯이 얼른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르겠다. 부친의 가르침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던 자신을 탓하고, 배운 대로해야 한다는 것을 비로소 몸서리치게 느꼈고, 그래서 다시 한번 더 그 집에 가서 밥을 먹고 밥그릇을 비워야 아버지의 가르침에 대한 배신의 죄 값을 면할 것만 같았다.

혹시라도 벗님께서 '어린놈이 뭘 그랬으랴...' 싶으실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당시의 마음으로는 돌아오는 길에 바닷물에 빠져 죽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면 아마도 그냥 웃으실 것이다. 그렇게 괴로웠던 것이다. 하하~

3. 다녀왔습니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도 모르게 집으로 갔더니 저녁을 먹으려고 준비하던 참이었다.

"어디로 돌아댕기다가 인자 오노?"
"사업주 집에서 놀다 옵니더."
"그 집에는 와 갔더노?"
"친구가 있거든요."
"그래 뭐하고 놀았노?"
"밥 얻어 묵었심더."
"그래 많이 묵었나?"
"예. 하얀 쌀밥 배부르게 묵었심더."
"밥알은 남기지 않았제?"
".......예."
"하모, 그래야제."
"근데 그 집 아이는 밥알을 남기데예."
"그래? 그라마 상놈인데...."
"그래도 부자 아닙니껴."
"아마도 상놈 부잔갑다."
"밥알은 다 묵어야지예?"
"하모, 당연히 그래야제."
"예, 잘 알겠심니더."

아마도 위의 사연을 알게 되신 벗님은 낭월이 얼마나 심적으로 괴로웠을지 짐작이 되실 것이다. 차마 그렇게 상놈 짓(?)을 하고 왔다는 말씀을 못해 드렸다. 너무나 실망을 하실 것 같았고, 불같은 성질에 아마도 이 밤에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냥 혼자만 아는 일로 입을 봉하고 지나온 시간이 벌써 34년이 되었다.

4. 참말로 죄송합니다.

세월이 이렇게 흘렀건만, 그래도 아직도 그 일이 죄송스럽다. 그리고 잠시라도 부친의 가르침에 대해서 의심을 했던 그 자신의 부족한 주체성이 죄송스럽고, 비록 가난하지만 꿋꿋한 의지력을 버리지 않으셨던 부친의 자존심을 세워드리지 못한 것이 그렇게도 죄송했다.

이렇게 싸늘한 기운이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데, 그 추억의 한 장면은 늘 자신에게 경종이 되어서 울려주었던 것이다. 가르침에는 양반과 상놈이 있을지는 몰라도 부자와 덜부자는 없다는 것을 절절히 느꼈던 시간이었다. 오늘도 그 당시의 기분을 그대로 느낄 수가 있을 정도이다. 물론 아버지가 생존에 계실 적에 말씀은 드리지 못했지만, 이렇게도 지지리 못난 자식이었던 것을 아셨다면....... 아마도 웃으셨겠지..... 하하하~

5. 어느 덧 아비가 되어.....

그러게 말이다. 낭월도 이제 두 아들과 한 딸의 아비가 되었다. 그리고 자식들을 교육시킬 적마다 그 장면이 겹친다. 그리고 혹시라도 밖에 나가서 아비의 가르침에 대한 신뢰감을 얻지 못하고 아비처럼 멍청한 짓을 할까봐 종종 경계심을 주기도 한다. 그래도 차마 그 이야기는 못했다........ 언젠가 적절한 시기가 되면 이야기를 해줄까보다......

자식을 가르치면서 부친께서는 늘 주관적으로 가르치셨다. 다른 것은 배우지도 않으셨으므로 알 턱이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낭월은 그 후로 온갖 잡동사니를 많이도 주워 모았다. 그래서 새끼들을 가르칠 적에는 훨씬 더 권위를 더해서 이야기를 해 줄 수가 있는 것도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심지어는 이런 유치한 방법도 사용한다.

"아빠가 누구냐?"
"도사요.(차남 경덕이 녀석의 답변}"
"소설가요.(장남 청원이 녀석의 답변)"
"그냥 아빠요.(딸래미 금휘의 답변)"

어쩌면 장남 녀석은 아빠가 스님이라고 하기보다는 소설가라고 하는 것이 더 멋있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스님의 자식이라는 것이 말하기 싫었을 지도 모르겠다....... 음.....

"아빠의 말은 이치에 맞냐?"
"잘 모르겠는데요...."
"그러면 아빠를 찾아오는 사람을 보면 알지."
"누가 찾아오는데요?"
"어제는 대학교 선생님이 찾아 오셨지."
"우와~!"
"오셔서 아빠에게 이야기를 듣고 가셨지."
"아빠가 그렇게 대단해요?"
"만약 아빠의 말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면 어떨까?"
"대학교 선생님이 오시지 않았겠지요.'
"그럼 이치에 맞는 것을 알겠냐?"
"옙~!"

(흐흐~) 뭐 이런 식으로 교육을 시킨다고 해서 누가 탓하랴만 자신의 말에 신뢰감을 더하려고 하는 수작치고는 좀 유치해서 등이 스물거린다.... 그리고 비록 그렇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어리석은 경험은 두 번 다시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런 방법을 동원하는 아들의 마음을 부친은 아실까 모르겠다.

"사람들이 우리 아빠만 보면 모두 모자를 벗어."
"우와 대단하시네~!"
"그으럼(으쓱으쓱)"
"뭘 하시는데?"
"이발사."
"그래? 대단하시구나. 우리 아빠 차가 가면 다른 차는 다 비켜나."
"이야, 대단하네."
"장관님 차도 비켜나야 한데. 아빠가 그랬어."
"정말 대단하다. 뭘 하시는데?"
"소방관이야 119에 계셔."
"그렇구나..."

자신의 부친은 아마도 누구에게나 위대한 길잡이인 모양이다. 결코 우스개의 이야기라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적어도 자식에게만은 확실한 신뢰감을 구축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으로 오늘을 살고 있는 낭월이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빌어서 비로소 부친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게 된다. 그리고 혹시라도 벗님께서도 자녀의 교육에 간여를 하시는 입장이시라면 낭월의 생각을 함께 음미해 보시기를 권해 드리고 싶기도 하다. 자식에게조차 신뢰감을 잃는다면 아마도 가정은 무너질지도 모른다.

"담배를 피우지 말거라."
"왜요?"
"뼈가 삭는다."
"아버지는 왜 피우시는데요?"
".........."
"아버지도 피우지 마세요."
"왜?"
"뼈가 삭으시면 빨리 돌아가시잖아요."
"난 어른이라서 뼈가 삭지 않는다."
"아버지...."
"왜?"
"제가 무슨 학과를 하는지 아세요?"
"생체의학과 아니냐?"
"제가 공부하기로는 뼈는 죽을 때가지 성장하거나 노쇠한답니다."
"그래서?"
"뼈가 삭는데 어른 아이가 없다는 이야기지요."
"..........."

부디 이런 멋쩍은 일은 당하지 말기를 당부 드린다. 낭월이 다행히 담배를 피우지 않기에 아들 녀석에게 큰소릴 땅땅 치기는 하지만 애연가이신 벗님이라면..... 고민 좀 해보시는 것을 권해 드린다. 이 상쾌한 가을에, 사랑하는 자식과 약속을 하시고 금연을 하시는 것이 얼마나 행복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시는 것을 권해 드리고 싶다.

여하튼 그래도..... "아버지 죄송합니다."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