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참선을 해도 부처가 못되는 이유

작성일
2001-07-23 18:17
조회
6747
[제126화] 참선을 해도 부처가 못되는 이유

세상에 이유가 없는 것은 없다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까 무엇이거나 그렇게 되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데, 특히 그 중에서도 부처가 되려는 사람은 많은데 어떤 일인지 부처가 되었다는 말은 들리지 않으니 낭월의 귀가 어두운 것인지 아니면 부처가 되고자 하는 마음과는 달리 방법에 문제가 없는지를 곰곰 생각해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또 망상 보따리를 풀러 본다. 말이 되면 좋고 말이 되지 않으면 땡땡이화상의 넋두리로 생각해주시면 되겠다.

1. 왜 부처가 되지 못할까.......

노력을 그렇게도 하는데 말이다. 이것은 참 묘한 현상이라고 해야 할 모양이다. 선원(禪院)에서 공부하시는 모습들을 보면 그야말로 호랑이를 때려잡고도 남을 기세로 달려든다. 그리고 잠도 줄이고 여간해서는 누우려고 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목표는 부처가 되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10년 20년 심지어는 30년이 되어도 부처가 되었다는 말이 들리지 않는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 과연 그렇게 어리석어서일까? 아니면 너무 영리해서일까? 여하튼 부처가 되려는 노력에 비해서 주어지는 결과물은 너무도 가뭄에 콩나기이다. 아니, 가뭄에 콩 나는 만큼이라도 된다면 너무 감사한 일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보다 훨씬 낮은 확률(?)을 갖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혈기 왕성한 젊은 수행자들이 그렇게 눈을 부릅뜨고 부처가 되려고 달려들었다가는 모두 제풀에 나가떨어진다. 그리고 더러는 다음 생을 기약하면서 이번 생의 공부를 포기하기도 하고, 또 더러는 차라리 공부는 되지 않으니 포교사업이라고 하자고 물러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심리적인 내부에서는 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도 또한 수행승들의 현실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그리고 낭월은 여기에 대해서 또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2. 언하(言下)에 오도(悟道)한다는 말.

이러한 말도 분명히 있다. 말끝에 깨닫는다는 의미이다. 당연하다고 하겠고, 그렇게 해서 얻는 깨침이 바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예전의 사람들은 근기가 수승하고 요즘 사람들은 근기가 약해서인가? 오히려 지혜로 본다면 요즘 사람들이 훨씬 뛰어나지 않을까? 말이야 그렇다. 너무 사량분별을 많이 하는 바람에 원래의 지혜로움에서 멀어진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낭월이 이렇게 분석하고 있는 것도 실은 '지혜와는 십만팔천리'라고 하는 말도 당연히 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실제로는 그렇지도 모를 일이다. 비록 그렇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오늘의 현실은 너무도 안타깝다는 것이다. 낭월은 참선을 하다가 애초에 근기가 아님을 알고 포기를 했는데, 요즘 다시 그 장면을 생각해보니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뒀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하니 이것은 또 무슨 자기합리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언하에 깨닫지 못한다면 이미 틀린 것이라고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깨달음이란 그렇게 고민하고 궁리하는 것도 있겠지만 완전한 깨달음은 언하에 알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낭월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언하게 깨닫는 것일까? 그리고 언하게 깨닫지 못하고 10년 20년을 허비하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여기에 대해서 늘 생각하고 있는 낭월이다. 그 이유가 뭔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전생에 업이 많아서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어쩌면 공부하는 방법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냐고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지금은 그 방법에 대해서 강력한 의심이 들어서 실은 이렇게 정리를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3. 방법이 잘못되지 않았을까?

옛날에는 도인이 많이 나왔는데 날이 갈수록 도인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옳은 것이 아니다. 뭔가 잘못된 것이다. 전생에 죄업이 많아서라는 핑계는 고려하지 말자. 문제는 방법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 지금의 방법은 간화선(看話禪)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화두를 든다는 의미인 정도는 벗님도 이해를 하고 계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래야 무슨 말인지 얼른 알아들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가? 요즘 그 화두에 대해서 강력하게 의문을 제기하는 말들이 있음을 알고 계신지 모르겠다. 실로 모든 수행법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발생되었고 유지된다고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화두수행법도 처음에는 그 방향이 있어서 발생했을 것이라는 점은 이해를 해야 할 모양이다. 그런데 과연 그 방법에서 무슨 오류가 생긴 것은 아닐까? 세월이 흘러가면서 왜곡되고 비틀린 것이야 무수히 많다. 어찌 수행법이라고 해서 그러한 오류가 없겠느냐는 생각을 해보자는 것이다. 어째서 중국에서 그렇게도 찬란한 꽃을 피웠던 수행법이 다시 시들어 가는 것이며, 그에 대한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인지도 생각을 해봐야 할 일이다. 도리어 지금의 분위기로 봐서는 다시 퇴행(?)을 해서 인도의 수행법으로 가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는가를 되물을 정도의 수용하려는 마음은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뭔가 잘 되지 않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하는 점을 여기에서 생각 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문득 놀라운 점을 생각하게 된 것은 아마도 망상의 극치라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말이 되는지에 대해서 한번 살펴 주시기를 바란다.

4.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아시는 분은 다 알만한 화두의 하나이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다음은 벽암록(碧巖錄)의 한 구절이다.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을 찾아와서 물었다.
"우주의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그럼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조주화상이 말하기를
"나는 청주에 있을 때 베 적삼 하나를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었지"

이상이 문답 내용이고, 그 스님이 물었다는 질문이 바로 '만법귀일인데 일귀하처오?' 이다. 만법은 하나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 라는 질문을 조주스님에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아무 설명도 없다. 조주스님의 답변만 남아있으니 베적삼의 무게가 일곱근이더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곰곰 생각해 본 낭월의 소견이다. 그냥 낭월의 소견이라고 생각을 해 달라는 말로 얼버무리고 의견을 드린다.
질문을 다시 생각해보자. 그리고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 질문이 실은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애초에 사족(蛇足)을 물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다시 이 점을 생각해보도록 하자.

5. 이미 '만법귀일'로 완료된 것이었다.

다시 추가로 그 하나가 어디로 가느냐는 질문은 애초에 뱀 그림에 다리를 더한 것에 불과한 것이고, 말도 되지 않는 질문을 조주스님에게 했다고 생각이 된다. 왜냐면 모든 법은 두루 통한다는 것으로 봐도 그만이고, 결국은 같은 뿌리에서 발현된 것이 만법이라고 봐도 상관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근원이 같은 것으로 이것은 낭월을 포함해서 벗님도 이해를 하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 공감이 가지 않는다면 다음의 구절은 읽으시지 말라고 권유를 드려야 하겠다. 이 말의 장면을 본다면 두 사람은 충분히 만법귀일이라는 의미는 파악을 하고 있다는 것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다시 이 장면을 낭월식 각본으로 재연해서 생각해 보도록 한다.

"조수스님 안녕하셨습니까?"
"그렇소, 어서 오시오 수행자."
"질문이 있어서 왔습니다."
"말씀하시구랴."
"만법귀일이라고 하는 말을 아시지요?"
"그렇지 당연한 말을 왜?"
"그래서 질문을 합니다."
"뭘 알고 싶은데?"
"그 하나는 어디로 가지요?"
"???"
"정확한 답을 듣고자 합니다."
"진짜로 정확한 답을 원하시우?"
"그렇습니다. 꼭 원합니다."
"노승에게 엿을 먹이려고 수작부리는 것이잖우~!"
"예???"
"자신이 더 잘 알텐데 뭘 그러슈."
"꼭 답을 듣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어디 들어보슈."
"예, 고대하겠습니다."
"내가 예전에 청주 땅에 산 적이 있었소."
"그러셨군요."
"그때도 여름이었는데 누군가 삼베적삼을 시주합디다."
"시원하셨겠습니다."
"근데 그 삼베적삼의 무게가 7근이두만."
"예???"
"그래도 모르겠소?"
"무슨 말씀인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하지 말란 말이요."
"삼베적삼이 7근(요즘저울로 본다면 4KG정도...)이나 나가나요?"
"어때요? 말이 되지 않지?"
"그렇지요. 솜저고리도 그렇게는 나가지 않을 걸요."
"그러니까 네놈 질문이 그렇단 말이야."
"뭐가 잘못 되었습니까요?"
"그래도 모르겠냐?"
"예, 좀 쉽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법의 근원이 같다는 것은 아냐?"
"그럼요. 그야 알지요."
"근데 그 하나가 갈 곳이 어딧겠냐?"
"저도 그걸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대가 또라이지."
"왜 그렇습니까?"
"애초에 잘못된 거잖아."
"왜지요?"
"그 하나는 근원이며 핵심인데 갈 곳이 있다고 생각하냐?"
"그걸..... 잘...."
"그러니까 그게 바로 망상이라는 거야."
"왜 그렇습니까?"
"그노무 왜? 왜? 왜?는 잘도 하는구나. 허허허~"
"모르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그대는 애초에 질문이 되지 않는 것을 물었단 말이야."
"그럼 하나는 돌아갈 곳이 없나요?"
"그것도 잘못 된 거지."
"왜요?"
"글자 그대로 만법은 평등하고 하나이고 같은 근원이야."
"그야 당연하지요."
"근데 뭐가 문제냐면 넌 거기에 발을 붙이려고 안달이 난거야."
"????"
"왜 그대로 있는 대로 보지를 못하냐?"
"그럼 문제는 제게 있었네요?"
"그렇다니까, 참 머리 나쁘네....."
"아직도 모르겠냐?"
"......... 아하~!"
"인제 감이 잡히남?"
"비로소 저의 어리석음을 깨달았습니다. 삼배 올립니다."
"그려 그려~! 그래도 곰은 아니네 허허허~!"

각색이 좀 푸짐한 것은 낭월의 천성이려니 해주시기 바란다. 여하튼 그 방문객은 조주스님의 말씀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무리가 없겠다. 자신이 엉뚱한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고 하는 점을 깨달았다는 것만으로도 이제는 올바르게 공부를 해나갈 방향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리를 해본다. 위와 같은 스토리전개에 무슨 오류가 있는지도 살펴봐 주시기 바란다. 대체로 원래의 상황에 충실했다고 생각이 된다.

5. 후학들이 원숭이 흉내를 내지는 않았나요?

혹 모를 일이지만, 낭월이 잘못 이해를 했다면 한 수 알려주시기 바란다. 낭월이 생각하기에 이러한 대화가 화두로 남았다는 것이 참 우습지 않으냐는 것이다.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것을 알려줬을 뿐인데 그곳에서 대단한 깨달음이 있었다고 지레짐작을 한 것은 아닐까? 그렇기에 지금도 선상(禪床)에 앉은 큰스님은 너무도 당당하게 외치고 계신다.

"만법이 귀일한데 일귀는 하처오~!"

여기에 대해서 당당하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느냐~!'고 달려들어서 귀싸대기라도 한 대 올려 부치고 싶은 수행자는 없었을까? 그냥 '그래 심오한 말이야. 여기에는 뭐라고 토를 달면 안 돼 그냥 이치만 의심하고 의심하면 대오각성을 할 날이 오는 거야.' 하는 정도였을까? 하기야 그럴 필요도 없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말을 하는 노승이 무엇을 알고 있겠느냐는 측은지심으로 헤아리고 조용히 일어나서 자리를 떠날 수도 있겠다. 여기까지는 그대로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그 말에 다시 설명을 하고 토를 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닌가 싶다. 벗님의 생각은 어떠신가?

"문제가 되는 문제를 내야 하는 거야. 그걸 문제라고 내는 거야? 그런 말을 하면 대학생 정도만 되도 문제가 잘못되었다고 항의를 할거야. 그런데 그것을 갖고 일생을 씨름해? 제정신이야? 그렇게 한 생의 삶을 허비하고 또 언제 깨달음을 얻을꺼야? 그러니까 오백생을 해도 안 되는 거야, 답이 나와야 말이지. 요즘은 퀴즈문제가 유행이두만. 그런데 그 질문에도 문제가 있다고 해서 또 수정이 되는 것을 알아? 대학입시 문제에도 오류가 있다고 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모두 정답으로 처리를 했다는 것을 알아? 그런데 조사와의 대화라고만 하면 무조건 비판도 없이 따라서 일생을 이끌려 다녀야 하는 거야? 왜 그렇게 판단이 없을까? 그러니까 어느 학자도 불교를 깔보고 마구 폄하를 하는 거야. 그래도 할 말이 없잖아. 호국불교이니 호법으로 불교를 지키느니 하는 말은 좋아. 그런데 뭐야. 불교를 지키는 것이 깡패들 동원해서 자기 비위에 맞지 않는 사람 두들겨 패는 거야? 그게 불교를 지키는 거야? 우리 세존께서는 그렇게 하라고 가르쳤어? 불교를 망치는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라고 질문을 한다면 과연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낭월은 잘 모르겠다. 그냥 뭔가 상당히 미안하다는 생각만 들지 않을까 싶다.

6. 부처가 되려면 깨어 있어야 한다.

이 말은 누구나 알고 있는 말씀일 것이다. 그리고 깨어 있으란 말은 잠을 자지 말란 말일까? 절대로 그게 아니다. 이성이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벗님도 그 정도는 알고 계실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고 앉아 있는 산송장을 칭송하는 버릇도 고쳐야 할지 모르겠다. 육신은 잠을 재워야 한다. 너무도 간단한 이치이다. 부처님이 잠을 자지 말라고 했던가? 그러면 서산대사는 이단이게? 서산대사는 잘 하신 말씀이 '주리면 먹고, 졸리면 자게' 라는 것을 알 분은 다 알기 때문이다. 육신이 잠을 자면서도 이성은 깨어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이해를 해본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앉아서 잔다고 장자불와라고 칭송을 하니 그렇게 하는 것이 도를 잘 닦는 것인가 싶어서 또 따르는 철부지들이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에 대해서 누가 답을 좀 해주시기 바란다.

7. 깨침의 불교가 미혹의 불교가 되어선 안 된다.

낭월이 염려하는 것은 이것이다. 과연 불교는 깨침을 주는 종교인가. 아니면 불타의 가르침에 잘못이 있는가? 여하튼 불교는 날이 갈수록 망해 가는 모양으로 비춰지고, 다른 종교는 나날이 발전하는 것으로 보이니 참으로 산골화상으로서는 마음이 늘 착찹하기만 하다. 그리고 그 이면에서 더욱 더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인생 일대사를 해결하겠다고 달려든 청안학인(靑眼學人)을 미혹의 구렁텅이로 몰아들이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미 율곡선생이 선원의 방법에 오류가 있음을 지적했던 모양인데 무슨 빽으로 줄기차게 버티고 있는 것인지도 참 걱정이 된다. 부디 불타의 가르침으로 많은 중생의 번뇌가 소멸되기를 기원드린다.

불교가 쇠락한다면 그 이유는 불상의 크기가 적어서도 아니고, 스님들이 게을러서도 아니다.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공부를 해도 깨칠 수가 없다면 그 방법에 잘못이 없는지를 봐야 하겠는데 그 방법은 점검하지 않고 스스로 마음을 포기하고 물러나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고 일반인이 불교를 사랑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너무 현학적이고 난해해서일 것이다. 이렇게 거룩한 가르침을 난해함으로 대우를 받아서야 되겠는가를 또 묻고 싶다. 간단명료하고 이치분명해야 한다. 불립문자라는 말이야 옳은 말이지만 설명이 궁하면 써먹는 방패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래서 지각이 있는 사람은 '웃기고 있네'라는 생각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말 자신의 삶을 사랑한다면 여기에서 낭월의 의문들에 대한 의견을 살펴주시기 바란다. 끝으로 공식 하나,

簡單明瞭 條理整然 覺性之道
玄之又玄 又之又玄 滅亡之道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