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 제34장. 인연처(因緣處)/ 16.현지(玄智)의 경험담

작성일
2022-09-15 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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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 제34장. 인연처(因緣處) 


16. 현지(玄智)의 경험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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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창이 뜨거운 차를 한 잔 따라서 현지의 앞에 놓아줬다. 목을 축이면서 이야기하라는 의미였다. 그러자 현지는 잔을 받아들면서 우창에게 목례를 하고는 말을 꺼냈다.

“제 사주를 사형이 풀이한 것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숨 가쁘게 살아온 나날이에요. 지난봄 산천에 백화가 만발했을 무렵에 주인으로 섬기던 대감이 춘정(春情)이 동했는지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데 달려들어서 겁탈하려고 했어요. 조용히 받아들이면서 잠시만 참았으면 아마도 맞았을 리도 없었을 것이고, 심지어 쫓겨나지도 않았겠지요. 어쩌면 호의호식을 할 기회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어요. 호호~!”

이렇게 말하는 현지의 표정이 잠시 처연(悽然)했다. 그정면이 다시 또렸하게 떠올라서 괴로운 마음을 털어내려는 듯이 고개를 한 번 흔들고는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만은 도저히 허락할 수가 없었지요. 이미 마음을 준 정인(情人)이 있었으니까요. 주인 대감은 이미 첩실(妾室)을 넷이나 두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완강히 반항했다가 흠씬 두들겨 맞고 쫓겨났어요. 호호호~!”

허허롭게 웃는 현지의 표정이 안쓰러웠다. 그야말로 웃어도 웃는 게 아니라 통곡을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이야기하자 주변에서 하나둘 이야기에 빨려서 우창의 일행이 있는 탁자 주변으로 모여들어서 모두 같은 표정으로 경악하기도 하고 또 웃어가면서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은 현지가 계속 말을 이었다.

“제게 부인의 패물을 훔쳐냈다고 하더군요. 생트집을 잡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도저히 굴복할 수가 없어서 그대로 받아들이고 10년 이상을 몸담았던 그 댁을 떠날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서 사귀던 남자를 찾아갔더니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싶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언제 정을 나눴던가 싶게 안면을 바꾸는 것을 보고는 모두가 다 소용없다고 생각하고 세상을 살아갈 의욕이 나지 않아서 정처없는 떠돌이가 되어버렸어요.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하루는 석양 무렵에 어느 강변에 다다랐어요. 흐르는 물처럼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에 어둠이 내리기를 기다렸지요.”

현지가 이렇게 말하자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도 충분히 공감이 간다는 듯이 저마다 안타까운 탄식을 내지르면서 혀를 찼다. 그리고는 다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현지는 목이 타들어 갔던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막상 어둠이 내리니까 이대로 그냥 죽으면 나만 억울할 뿐, 누가 알아주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둠은 여인에게 강력한 힘을 준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어요. 그길로 대장간으로 가서 칼을 하나 사서는 품속에 간직하고 다시 그 집으로 찾아갔죠. 대감을 죽여서 저승길에 동행해야 분이 풀리겠다는 생각이라도 들었나 봐요. 호호호~!”

“그럴 만도 하겠습니다. 신유(辛酉)의 기운을 마구 뿜어내셨습니다. 하하하~!”

우창이 이렇게 말하면서 웃자 대들 따라서 웃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위로를 해 주고 싶었던 마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을의 입구에 다다라서 다시 밤이 되기를 기다리면서 국밥을 사 먹고 있었어요. 든든하게 먹어야 마음대로 칼을 휘두를 수가 있겠더라고요. 호호호~!”

“그야말로 운명의 밤이었네요.”

현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진명이 자기도 모르게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현지가 진명을 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맞아요. 마침 그때 옆에 앉아서 내 몰골을 지켜보던 스승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제 삶은 또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요.”

“전생의 서원(誓願)이 있는데 천지신명은 그렇게 망가지도록 두지 않으니까요.”

“정말 그런가 봐요. 웬 늙은 할아버지가 말을 걸어오는 거예요.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던지라 대충 건성으로 대답했죠.”

당시를 회상하는지 현지가 잠시 허공을 바라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노인이 던진 한마디가 가슴을 후벼팠죠.”

“뭐라고 하셨습니까?”

현지의 말에 우창이 급하게 물었다. 그러자 현지가 말을 이었다.

“갑자기 말씀하시기를 ‘죽이려고?’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 말을 듣고는 마치 도둑질하려다가 들킨 사람처럼 소름이 돋았죠.”

“그랬을 만도 합니다. 스승님은 그렇게 핵심을 찌르는 한마디를 잘하셨지요. 하하하~!”

우창의 말에 현지도 잠시 그 장면을 회상하는 듯이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맞아요. 제가 문득 바라보자 다시 간단하게 말씀하셨어요. ‘따라오너라.’라고요.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앞서서 걸으시는데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하고 뒤를 따랐지요. 그랬더니 어느 큰 느티나무 아래에서 멈추시더니. 칼을 꺼내어서 나무 아래를 파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시키는 대로 팠더니 그 칼을 묻어놓고 꼭꼭 밟으라고 하시잖아요. 잠시 망설였지만 하라는 데까지 따라보자는 마음이 생겨서 그대로 따랐죠.”

“그러셨군요. 그다음이 궁금합니다.”

“칼을 묻어놓고서야 할아버지 얼굴을 쳐다봤어요. 이제 어떻게 할 것이냐는 듯이 말이에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다시 한마디만 하셨어요. ‘가자’라고요. 좀 황당했으나 최면에 걸린 듯이 저도 모르게 뒤를 따라서 밤새워 걸어서 다시 그 호숫가에 도착했더니 새벽에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앉으라고 하시기에 앉았더니 비로소 말씀하셨어요. ‘이제 나를 따라가도 되겠다. 그간 인생의 고난(苦難)을 겪으면서 수련(修鍊)을 많이 했으니 이제부터 일심으로 자신을 위해서 살아 보거라.’라고 하시기에 그동안에는 누굴 위해서 살았는지를 생각해 봤더니 과연 나를 위해서 살아온 게 아니라 남을 위해서 살아왔던 거예요. 세상에 태어나서 40년을 남에게 끌려다니면서 살았는데 이제 너를 위해서 살라는 말씀에 갑자기 대성통곡이 나오잖아요. 그렇게 목을 놓아서 시원하게 울었어요. 물론 부끄럽기는 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울고 났더니 할아버지가 한마디 하셨어요. ‘이제 과거와는 단절(斷絶)했다.’라고요. 그 말이 얼마나 통쾌하던지요. 호호호~!”

모두 현지의 짧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실은 세상에서 가장 긴 이야기로 들렸다. 오직 한 사람 혜암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입정(入定)에 들었고, 나머지의 사람들은 현지의 말에 따라서 감정이 움직였다. 이야기를 마친 현지가 우창에게 말했다.

“사형의 말씀 그대로예요. 고통의 시련으로 마음을 두드려맞을수록 더욱 강해졌고, 비로소 ‘나는 나의 삶을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귀인의 인연이라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스승님을 만나게 되었으니 이러한 것이 마치 오래전부터 짜놓았던 이야기인 듯싶은 생각도 들었어요. 그 집에서 그냥 참고 있었더라도 스승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어둠이 되기를 기다리지 않았더라도 또한 스승님과 인연은 빗겨 갔을 것인데 참으로 하늘이 도왔다는 생각을 그 후로 날마다 하고 있어요. 호호호~!”

“그렇게 된 인연이셨군요. 축하드리고 또 환영합니다. 하하하~!”

“바로 그날부터 스승님의 짐이 되었어요. 그래도 말벗이라도 해드리겠다고 나름대로 스승님을 지루하지 않게 하겠다고 쫑알거렸으나 스승님께는 도움이 되는지 알 수가 없죠. 오히려 그러는 과정에서 항상 가르침만 받을 따름이에요. 호호호~!”

“스승님과 동행하다가 보면 재미있는 일도 있었을 텐데요?”

우창이 묻자 이번에는 현지도 즐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맞아요. 거의 날마다 재미있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죠. 얼마 전에는 객잔에서 머물 비용을 만드느라고 스승님께서 맹인점쟁이가 되시고 현지가 바람잡이도 했었잖아요. 정말 재미있었어요. 호호호~!”

“상상만 해도 재미있습니다. 스승님을 잘 모셔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앞으로는 시주(時柱)의 무술(戊戌)을 만나게 될 테니 스승님만 잡고 열심히 공부하면 되겠습니다. 걱정은 끝나셨습니다. 하하~!”

우창이 이렇게 말하자 조용히 정좌하고 있던 혜암이 눈을 뜨고 말했다.

“우창아.”

“예, 스승님~!”

“네가 무토(戊土)더냐?”

“아, 잊지 않으셨습니까? 무진(戊辰)입니다.”

“그래, 네가 무진인데 아직도 모르겠느냐?”

“예? 뭘 말입니까? 혹시.....”

“그렇다. 이제부터 현지는 네가 가르쳐라. 시주(時柱)의 무술(戊戌)은 무진을 만나야 열려서 깨달음에 이르게 될 것이니 말이다. 허허허~!”

“아니, 그것이 무슨 이치입니까? 제자도 스승님을 따라갈 요량인데요.”

“쓸데없이 그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다니. 넌 이미 너의 길을 잘 가고 있느니라. 그리고 봐하니 현지는 네가 책임져야 할 인연이니라.”

“아니, 그것은 또 무슨 억지십니까?”

“이놈아, 생각해 봐라. 오늘 내가 왜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었겠느냐? 그것을 아직도 모르겠단 말이냐?”

“예? 정말이십니까? 그런데 갑자기 궁금한 것이 생겼습니다. 무술(戊戌)이 무진(戊辰)을 만나야 열린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혹 진술충(辰戌沖)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충을 하면 망가질 따름인데 열린다는 것은 잘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우창이 이렇게 묻자 혜암이 지그시 바라보고는 말했다.

“어쩌면 적지 않은 시간이 흘러갔는데도 그 궁금증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느냐. 진술(辰戌)이 충돌하면 술중신금(戌中辛金)과, 술중정화(戌中丁火)가 모조리 사라져버리고 천연(天然)의 인성(印星)이 되지 않겠느냔 말이다. 그러면 오롯이 수행에 전념할테니 그야말로 현지에게 내재된 번뇌의 찌꺼기를 말끔하게 없애 줄 인연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냔 말이다.”

“예? 그렇게 풀이하는 방법도 있었습니까?”

우창은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에 한 대 맞은 듯이 잠시 혼란스러웠다.

“너는 내 점괘(占卦)를 벌써 잊었단 말이냐? 허허허~!”

혜암의 말에 우창은 문득 7전 전의 어느 날 점쟁이 노릇을 하다가 봉변당했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스승님의 신기막측(神奇莫測)한 점술(占術)을 어찌 잊겠습니까? 그러시다면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우창이 이렇게 대답하자 주변에 모였던 사람들이 일제히 우레같은 박수로 환영했다. 그야말로 남의 일로 들리지 않았던 마음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우창과 현지는 목례(目禮)로 답례하자 비로소 저마다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잠시 자리가 정돈되는 듯하던 때, 밖에서 말의 방울소리가 들리더니 젊은 남자가 들어와서 주인에게 사람을 찾는다고 했다. 그러자 주인이 혜암에게 안내하자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는 모시러 왔다고 하면서 준비가 되셨으면 같이 가자고 했다. 우창이 깜짝 놀라서 말했다.

“아니 스승님 어딜 이리도 급하게 가시려고 합니까?”

“나도 혹이 붙기 전에 도망가련다. 허허허~!”

“어디로 가시는지나 알려주시지요?”

“바람처럼 오가다가 다시 만나면 또 반가울 따름이니라. 어디를 가든지 하던 대로만 하면 될 테니 또 보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문을 나가고 있는 혜암을 보면서 우창과 현지는 허리를 굽혀서 작별을 고할 따름이었다. 마차는 방울 소리를 울리면서 이내 멀어져갔다. 갑자기 허전해진 우창이 현지를 바라봤다. 삶에 찌들었으나 깊은 내면에서 밝은 기운이 서서히 배어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마음으로 지광을 바라봤다. 그러자 지광이 말했다.

“여태 살아왔듯이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는 혜암도인의 말씀을 벌써 잊었단 말인가? 하하하~!”

지광의 말에 진명이 말했다.

“언니를 만나게 된 것이 너무 기뻐요. 실은 어제까지 맡았던 소연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지 고민이었는데 오늘은 또 든든한 언니를 만나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전화위복(轉禍爲福)이지 뭐에요. 앞으로 많이 도와주세요. 진명도 언니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어요. 호호호~!”

진명의 말을 듣고서야 우창은 소연으로 인해서 여러 사람이 걱정했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만의 염려가 아니었던 것을 알고 나자 모두 따뜻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 뿌듯했다. 그야말로 수행자의 모임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 흐뭇해서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지광이 우창을 보며 말했다.

“아우의 스승이신 혜암 도인은 참으로 멋진 분이시네. 저러한 분의 감화를 받은 아우님이 부러울 따름이군. 스승을 만난다는 것보다 더 좋은 인연이 또 있겠는가. 하하하~!”

“우제(愚弟)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항상 모범의 기준이 되시니까요. 게으름을 부리다가도 스승님의 모습이 떠오르면 다시 마음을 다잡게 됩니다. 그러니 옆에 안 계셔도 항상 옆에서 채찍질하고 계신 것 같은가 봅니다.”

“당연하지. 채찍질하는 이가 어디 그리 흔한 일인가 말이네. 그리고 포충 선생의 일까지도 알고 계신 것을 보면 과연 인연의 범위는 또 얼마나 넓으신 것인지 헤아릴 수도 없겠네. 더욱 열심히 정진해야 하겠어.”

이렇게 말하면서 현지를 바라보는 지광의 눈길을 의식한 현지가 지광에게 말했다.

“지광 선생님께는 어떻게 호칭을 하는 것이 좋을까요? 스승님으로 칭해도 되겠습니까?”

우창도 그 점에 조금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었다. 이미 첫 인연이 혜암과 맺었으니 자신과는 사형제 간이 되는지라, 따지고 보면 지광에게는 어떻게 하는 것이 적당할지 얼른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현지도 그 문제로 생각을 했었던 모양인데 진명이 얼른 말했다.

“뭘 어렵게 생각하세요? 우리랑 같이 공부하는 것이니까 혜암 스승님의 인연은 그대로 접고 지금부터 정 사부와 진 사부로 같이 부르도록 해요. 그래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을까 싶어요. 그렇죠?”

이렇게 말하면서 지광과 우창을 번갈아 바라보자 지광이 말했다.

“역시 진명은 명쾌해서 좋군. 그대로 하지 괜히 호칭으로 인해서 불편하다는 것은 그야말로 군더더기일 따름이라네. 하하하~!”

역시 진명의 순발력은 이런 상황에서 큰 위력을 발휘했다. 지광의 칭찬을 듣자 진명이 다시 말했다.

“실은 언니의 후광이 매우 맑아요. 그러니까 힘들게 겪은 일과 아름다운 후광은 서로 같지 않음이 분명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백 마디 말이 필요 없다고 했나 봐요. 남을 위해서 사용할 능력을 타고나신 것이 분명할 테니까요. 함께 연마해서 보람차고 신명나게 살아갈 거예요. 호호호~!”

이렇게 희희낙락(喜喜樂樂)하고 있는데 중년의 남자가 저만치에서 머뭇거리면서 뭔가 할 말이 있는듯한 모습을 하고 있자, 염재가 그에게 눈길을 줬다. 그제야 다가와서는 말했다.

“저, 말씀들 나누시는데 죄송합니다. 아까부터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사로운 분들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실은 긴히 의논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여쭤도 폐가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면서 간절한 눈빛으로 염재를 바라보자 염재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를 몰라서 우창을 바라봤다. 우창도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궁금해서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해 보시지요.”

“실은 작고하신 선친을 양지바른 곳에 모셨는데 그 터를 잡아 준 지관이 천하의 대명당이라고는 했는데 과연 명당이 맞는지 의문스러워서 항상 염려하던 차에 오늘 기인분들을 뵙게 되자 그것에 대한 문제를 좀 풀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지사(地師)의 조언으로 모셨으면 당연히 명당일 텐데 왜 의문을 품게 되셨는지요?”

우창이 다시 묻자. 그제야 자리에 앉아서 자신의 의문을 말했다.

“실은 당연히 그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다른 풍수가의 말을 듣게 되었는데 그 자리는 흉지여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런 말을 듣고 보니 과연 어느 말이 옳은지를 몰라서 혼란에 빠졌습니다.”

듣고 보니 그럴 만도 했다. 아무래도 지광이 해결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든 우창이 지광을 바라보자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지광이 눈을 뜨고 말했다.

“선친의 묘가 있는 장소는 어딥니까?”

지광이 한 번 살펴봐 줄 듯이 말하자 남자는 크게 기뻐하면서 말했다.

“여기에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 10리만 가면 됩니다.”

“그런데, 묘를 쓰고 나서 가정에 큰 불상사가 생겼습니까?”

“아닙니다. 전후를 봤을 적에 별반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남자가 이렇게 답을 하자 지광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나빠진 것도 좋아진 것도 없는데 왜 두려워하는 겁니까?”

“지금은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큰 재앙이 닥치게 될 것이라는 말에 조바심이 일었습니다. 혹 허락해 주신다면 저의 집에서 하루 쉬시면서 둘러봐 주시기를 청하고자 합니다. 꼭 좀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허리를 굽혔다. 그 모습이 하도 간절해서 우창도 가서 봐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으나 이 사안은 지광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라고 생각되어서 가만히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지광이 말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내가 한마디 하면 또 다른 사람들의 말과 엇갈릴 수도 있는데 괜히 번뇌만 한 덩어리 추가하는 꼴이 될까 봐서 걱정되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봐준다고 한들 그대의 의심을 잠재울 수는 없을 테니 말입니다.”

“아닙니다. 여태까지 말씀을 나누시는 것을 잘 들었습니다. 해결하시는 내용을 봤을 적에 매우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태 선친의 묘터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 중에 이렇게 명료한 혜안을 갖고 계신 분은 없었습니다.”

지광이 남자의 안색을 보니 이 문제로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듯이 초췌해 보이기조차 했다. 그렇게 생각해서였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측은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었다.

“정 그렇다면 어디 한 번 가 봅시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장 궁금했던 사람은 염재였다. 겉으로는 알 수가 없는 명당에서는 또 어떻게 판단하는지 궁금했던 까닭이었다. 그리고 왜 누구는 좋은 터라고 하고, 또 누구는 흉한 터라고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확인해보고 싶었는데 지광이 가보자는 말에 제일 신나서 급히 마차를 준비하러 나가면서 말했다.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러자 남자가 다시 말했다.

“마침 저의 집에 머물 공간이 넉넉합니다. 모두 같이 모셔서 편히 쉬시게 하고 싶습니다. 동행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우창이 듣고 보니 그것도 거절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모두 같이 가보는 것으로 하고 주루를 떠나서 마차에 올랐다. 십리 길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염재가 마음이 급한 김에 말을 조금 세차게 몰았던 것도 영향이 있었겠지만 불과 차 한 잔을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아담한 마을에 당도했다.

“우선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남자가 이렇게 말하자 지광이 말했다.

“아닙니다. 선산부터 가보도록 합시다.”

남자의 급한 마음을 헤아리고 있던 지광이 바로 산소를 보러 가자고 했다. 그러나 남자는 고마운 마음으로 서둘러서 길을 안내했다. 산소는 마을의 뒤쪽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차를 세울 수가 있도록 닦아놓은 공터에 멈추자 모두 내렸다. 그리고는 지광을 중심으로 둘러싸고는 어떤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자를 가장 가까이에서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도록 안배했던 것은 당연하다.

지광이 주변의 풍광을 잠시 둘러보고는 남자에게 말했다.

“존함은 어찌 되십니까?”

“아, 제 이름은 공손강(公孫康)입니다. 올해 53세입니다.”

“공손 선생이셨군요. 선생은 이미 학문도 깊이 하시지 않았습니까?”

“예, 깊이랄 것은 없습니다만, 기본적인 공부는 거쳤습니다.”

“잘 되었습니다. 지금 제가 이 자리의 상황을 말하기 전에 제자를 시켜서 지맥(地脈)의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아직 공부 중인 제자에게 경험을 쌓게 하는 의미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공손 선생의 의혹을 보다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지광이 이렇게 묻자, 공손강은 매우 기뻐하면서 말했다.

“참으로 바라던 바입니다. 그냥 쓱 둘러보고 좋다,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이미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직접 그 과정을 본 적은 없습니다. 오늘 귀한 견식(見識)을 쌓게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표정을 본 지광이 거산에게 말했다.

“거산이 배운 대로 해 보게. 마침 저쪽에 버드나무가 있으니 한가지 꺾어와서 잡아보도록 하면 되겠군.”

지광이 가리키는 곳에는 손에 닿을 만큼의 버드나무가 있었다. 거산이 다가가서 손가락 정도의 굵기에 해당하는 부분을 잘라서 아(丫)자 형태로 다듬어서 들고 묘의 앞쪽에 서서 합장하고 묘를 향해서 반절을 두 번 했다. 그러자 모두 거산을 따라서 반절했다. 그리고는 거산이 대중을 향해서 말했다.

“고인께 예를 드렸습니다. 올바른 판단을 얻을 수가 있도록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이러렇게 고인에게 미리 고하는 것은 배운 바가 없는 거산이었지만 어느 사이에 저절로 익혀가는 과정도 있었다. 모두 숨을 죽이고 거산의 동작에 집중했다. 거산이 예전에 배운 대로 버들가지를 들고는 가로와 세로를 촘촘하게 걸으면서 손에 들린 버들가지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끝이 내려가는 곳과 올라가는 곳에는 표식으로 작은 자갈을 하나씩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