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세계적(世界的)인 관점

작성일
2007-09-10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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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지도를 놓고서 십간이 어떻게 작용하게 될런지를 궁리해본다. 물론 이것이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대체적으로라도 뭔가 유사성이 있다면 십간의 이해를 돕는다는 의미에서는 충분히 검토를 해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기에 한번 접근을 해보고 싶은 것이다.

우선 갑목이 해당하는 나라는 한국이다. 언제나 관찰을 할적에는 나에게서 가까운 것부터 찾아가는 것이 기본이라고 하겠는데, 갑목에 가장 근사하게 느껴지는 것이 한국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였다. 어째서 그런가에 대해서 의견을 드린다면, 가장 먼저 우리가 세계를 지배하게 될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근래에 발간된 많은 서적을 통해서 익히 보신적이 있으실 것이다. 과연 어째서 그렇겠느냐고 하는 점에 대해서는 뭔가 분명히 설명을 하지 않지만(실은 여러 가지의 설명이 있지만) 여기저기에서 민족우월론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분명히 한국은 갑목이 되어서 세계의 기둥이 될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니까 우선 고개를 갸웃갸웃 하시는 벗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믿기지 않는대로 그냥 두고 넘어가면 그만이다.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은 상황설정이므로 좋은게 좋다는 정도로만 받으들여도 구태어 시비를 걸 것 까지는 없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낭월이까지 여기에 가세를 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기분이 든다면 낭월이도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어서 그런다는 점을 잠시 들어주시기 바란다.

우선 갑목의 특성 중에 한가지인 급하다는 점에서 그러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으로 생각을 해본다. 갑목은 물질에서 위만 쳐다보고 돌진하는 형태라고 생각을 해보는데, 실제로 우리 민족은 어지간히도 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세계적으로도 이미 인정을 받은 것이 있다. ‘코리안=빨리빨리’ 라고 하는 트레이드 마크이다. 빨리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할인을 해서 생각해 보더라도 미래지향적이지 과거안주형은 아닌 것이 명백하다. 줄을 서는데에도 새치기라고 하는 것이 늘상 공존한다. 가만히 서있는 사람이 열받거나 말거나 자신의 상황이 급하다 싶으면 즉시로 결행을 한다. 물론 공중도덕이 없는 사람이 그렇게 하지 교양있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고 싶어하는줄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누구나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늘상 확인하고 있는 낭월이다.

‘급행료(急行料)’라고 하는 것도 우리민족의 특허품이라고 할 수가 있겠고, 극장 앞에서는 더욱더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이다. 암표는 성질 급한 사람이 자기의 순서를 기다리지 못하고 빨리 영화나 연극을 봐야하는 경우에 이용하는 일종의 급행표라고 할 수가 있겠다. 또 병원에서도 인맥이나 학연을 앞세워서 줄서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틈새를 비집고 끼어들고 있다. 특히 주말의 고속도로에서는 더욱더 두드러진다. 무엇보다고 노견이라는 이름으로 정해진 갓길을 기가 막히게 잘도 빠져나가는 것을 보면서 역시 한국인은 갑목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의 선악(善惡)을 논하자는 것은 아니다. 범법이고 위법이고를 논하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직 그러한 일이 생기는 것에서 바로 갑목의 특성을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이러한 성분을 일러서 갑목의 기운이 가장 강한 민족이라고 결론을 지어보는 것이다. 이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자연의 섭리에서는 좋고나쁜 것이 없다고 봐야 올바른 판단이 될 것이다. 이 갑목은 희망적으로 미래를 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우수한 능력이라고 하겠고, 항상 생기가 넘친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이다. 앞을 보고 달린다는 점에서는 남보다 먼저 도달을 할 수가 있는 것이므로 유리한 것도 많을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기운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를 생각해본다. 아무래도 피(血) 속에 그러한 성분이 잠재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해보는데, 그래서 본능적으로 그러한 행동이 나오는 것이라고 본다.

갑목의 기운이 한국인 속에 스며들어 있는 이유는 가장먼저 서낭당의 당나무(堂神)가 떠오른다. 어느 동네를 가든지 그 동네의 가장 뛰어난 명당에는 사당이 깃들어서 주민과 애환을 함께하고 있다. 오래된 마을일수록 이러한 분위기는 더욱 심하다. 어린아이들은 엄숙하고도 웅장하게 온 마을을 뒤덮는 해 묵은 거목을 보며서 자랐고, 그 나무아래에서 잠자고 또 뛰놀면서 성장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나무의 에너지가 몸과 마음 속으로 스며들었다고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를 뒷받침 해주는 서양의 설화가 있는 것도 이채롭다.

흔히 ‘큰바위 얼굴’이라고 하는 말로 교과서에서 접하게 되는 이야기를 알고 계실 것이다. 대충 생각나기에는 그 동네의 사내아이가 앞산의 바위산에 사람얼굴을 닮은 바위를 보면서 자랐다고 하는 이야기인데, 결과적으로 그 아이가 바로 기다리던 바위의 얼굴을 닮은 사람은 남이 아니라 바로 자기자신이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이야기의 진위를 떠나서 심리적으로는 당연한 이야기라고 하겠다. 실제로 임산부가 잉태를 하고 있는 중에 어느 특정인을 계속 생각하고 있으면 뱃속에 있는 아이도 그 모습을 닮게 된다는 이야기도 같은 의미로서 일리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려서부터 당연히 큰 甲木의 에너지를 공급받으면서 자라온 사람의 몸 속에서는 갑목의 기운이 배어들기 마련이라는 생각에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반대표를 던지진 못할 것이다. 그냥 단지 동네에 있었기만 하다면 또 이야기는 다르다. 그 나무에게 기도를 하고 온갖 소망을 빌어가면서 성장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하루이틀도 아니고, 한두 해도 아닌, 적어도 수천년간을 그렇게 해왔다고 한다면 과연 영향이 없겠느냐는 생각이다. 이것은 마침내 하나의 민족성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희망을 버리지 않는 민족이 되었다. 그리고 세상을 다스리는 으뜸민족(약간 간지럽다만...)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도 수없이 많은 침략을 당했어도 끝까지 자신의 민족성을 지켜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것도 갑목만의 특성이라고 볼 수 있겠다. 앞으로 세계를 한국인들이 지배를 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괜히 나온 것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되는 것도 이러한 점에서이다. 이러한 점은 장점이라고 봐도 되겠다. 어쨌던 한민족의 최고주의는 갑목에서 나온 부산물이라고 하는 점을 중시해보고, 이것이 결국은 일등국민을 만들것이라고 희망을 품어본다. 그렇지만 늘상 실속이 없다. 원래 일등은 그렇게 실속이 없는 모양이다. 잔치만 벌려놓고 정작 주인은 굶고 있는 형상이라고나 할까? 이제는 실속을 함께 겸비하는 요령도 갖추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운 마음을 품어본다. 그 이유는 을목의 항목으로 넘어가서 이해를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