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동업자 - 比劫

작성일
2007-09-11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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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점차로 복잡다단해 지면서 돈을 벌어들이는 방법도 참으로 다양하다. 누군가는 직업이 현재까지 일만 오천가지라고 하던가? 그리고 오늘도 새로운 직업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니까 실제로는 알 수가 없다고 해야 할 모양이다. 그렇게 많은 직업을 갖게 되면서 스스로 하는 경우에는 사장이 되고 그 아래에서 월급을 받으면 종업원인데, 요즘에는 서로 자금을 나눠서 부담하고는 동업자라고 하는 형식으로 사업을 하는 사람도 많은 모양이다.

한쪽은 기술을 대고, 또다른 한쪽은 자금을 대고서 50:50으로 나눠먹는 방식도 있다. 그리고 출자금이 서로 다를 경우에는 비율을 조정해서 서로 공평하게 나누기도 하므로 남에게 일을 해주고 급료를 받는 것 보다는 훨씬 매력적이라고 생각이 되는 사람에게는 맘이 드는 관계이다. 그래서 생겨나는 것이 동업자인 것이다.

우선 동업자는 힘을 모아서 협력하고 그렇게 해서 들어온 수입은 서로 나누니까 동등한 입장이 된다. 동등하지 않은 경우에는 동업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말도 된다. 이러한 관계는 비견이나 겁재라고 하는 십성을 대입함으로써 설명이 가능하다. 그래서 사람의 관계를 볼적에 흔히 생길 수 있는 경우에 동업자라고 하는 관계도 한번쯤 생각해보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동업자의 하는 행동에 따라서 比肩에 해당하는 사람도 있고, 劫財에 해당하는 사람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겠다. 동업을 하다가 불화가 발생하면 아무래도 어느 한쪽이 겁재적인 행동을 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즉 노력에 비해서 많은 수익을 챙기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즉, 계약서 상으로는 50:50으로 나누자고 해놓고서 상대방이 모른다는 것을 이용해서 슬쩍슬쩍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는 동업자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행동이 한두번이야 그냥 넘어갈 수 있겠지만 돈맛이라는 것이 그렇게 한두번 맛을 들이면 그만둘 수가 없는 것이고, 그래서 꼬리가 길어져서는 들통이 나게 마련이다. 이렇게 되면 애초의 좋은 의미에서의 동업은 원수관계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동업자의 관계는 더 이상 진정이될 수가 없어서 깨어지고 마는 결과가 당연하게 다가오게 된다.

그래서 동업자는 겁재가 되기도 하고, 비견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동업이라고 하는 자체가 이미 겁재의 관계를 인정하고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십성론의 의미를 생각해봐도, 겁재는 내가 약할적에는 협조를 하고 내가 여유가 생기면 뜯어먹는 것이라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정도가 심각하다면 관계를 정리해야 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겁재의 기질이 있다고 봐야 하겠다.

그리고 사주 중에서 겁재가 자신의 재물을 빼앗아 가고 있는 형상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동업을 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일단 사주를 봐서 동업을 해도 자신의 몫이 돌아올 사람인지, 아니면 재주만 넘고 수익은 없을 사람인지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겠는데, 애석하게도 여기에서는 그 방법을 설명할 수가 없다. 천상 용신에 대한 연구가 이뤄지가 난 다음에야 비로소 올바른 답을 내리게 된다.




★ 인간관계의 확대해석법




이 외에도 많은 사람과의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다만 이렇게 몇가지를 말씀드리게 되면 이것을 잘 활용해서 확대해석하면 나머지에 대한 것들도 얼마든지 추리가 가능하게 된다. 가령 이모는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다면 이모는 어머니의 비견이므로 정인으로 보면 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정인이 어머니가 되니까 편인도 역시 이모의 역할을 할 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또 고모는 어떻게 되느냐고 한다면 아버지의 겁재이므로 정재가 고모인 셈이다. 그리고 정재는 아내와도 동격이므로 이러한 경우에 과연 어떻게 말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또 고민이 될 것 같은데, 이것도 신경을 쓸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즉 이모나 고모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면 말을 할 필요가 없고, 혹 상담을 의뢰하는 사람이 묻는다면 이러한 상황을 대입해서 말해주면 되는 것이다. 가령 고모에게서 유산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면 즉시로 정재에 대한 상황을 살피면 된다. 원래는 정재가 처의 역할이지만, 이렇게 본인이 지정을 해서 묻는다면 처는 잠시 뒤로 재껴두고서 고모를 정재에다가 대입해서 길흉을 말해주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간단한 것이다. 그러니까 정재가 사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면 유산을 받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면 되고, 나쁜 작용을 하는 것으로 판명이 된다면 어렵다고 보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확대해석해서 고모와 성관계를 갖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이때부터 사기꾼이 되는 것이다. 즉 정재에 해당하니까 정재는 처라고 하는 고정관념이 있을 경우에는 생각을 해볼수도 있겠다고 본다. 그렇지만 대입만 할 뿐이지 동격은 아닌 것을 잊으면 곤란하다. 이런 식으로 따지다 보니까 예전에 진소암(陳素庵)님께서 명리학자들을 꾸짖어 말씀하신 대목이 있다.

“어떻게 편재가 아비가 되는고? 순전히 상놈의 이치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구먼. 아버지는 나를 낳아 주셨으니까 편인이 되는 것이라고 봐야 하네. 삼강오륜도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연의 이치인 오행을 논한다고 한다는 거여! 만약 아비가 편재라고 한다면, 편재는 아들이 아비를 두들겨 패는 것이라고 해야 하는데 세상에서 인간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럴수가 있느냔 말이여! 에구 무식한 것들... 쯧쯧.”

이렇게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이것도 틀렸다고는 못하지만, 적용방법이 잘못된 것이다. 아버지를 편재로 봤을 경우에는 두들겨 팬다는 의미보다는 생활비를 벌어 온다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두들겨 패는 아들도 있기는 있다. 다만 신체적으로 위해를 가하기 보다는 정신적으로 두들겨 패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래서 자식이 부담스러워서 열심히 노력을 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름이 같다고 해서 모든 것도 둥일한 것으로 따지지는 말자는 것이다. 그렇게 획일적으로 대입을 시킨다면 아마도 스스로 모순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올바르게 적용이 된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분별도 할수 없는 사고력이라고 한다면 애초에 자평명리학은 인연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다른 방면으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마도 성취가 빠를런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 내용에 흐르는 이치를 항상 생각하고 이름에 너무 집착을 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은 이 인간적 십성론에서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