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머니 - 正印

작성일
2007-09-11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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낳아주시고 길러주시는 어머니는 스스로 밥벌이를 하게 될 때까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존재이다. 적어도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해서 분가를 하기 전까지는 아마도 어머니의 신세를 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서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존재가 된다.

그런데 이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어머니는 일단 나 자신이 선택을 할 수가 없다. 어쨌던 어머니의 자궁을 빌지 않으면 이 땅에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왕에 만나야 할 어머니라고 해야 한다면 좀더 부유한 어머니를 만났으면 좋을 것이다. 모든 사람의 소망은 넉넉한 어머니를 만나서 부유하게 성장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있다. 지혜와 학식을 나눠줄수 있는 어머니를 만났으면 좋겠고, 덕망도 있어서 누구에게 소개를 하더라도 훌륭한 어머니를 뒀다고 부러워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기왕이면 용모도 아름다웠으면 더욱 좋겠다. 등등의 소망을 가져보게 되지만, 이것은 이뤄지지않는 것에 대한 희망사항일 뿐이다.

이미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선택되어진 것을 내가 원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애초에 안되는 것은 안되는 것으로 알고 마음이나마 편안하게 먹고 사는 것이 좋은데, 사람의 욕심은 이렇게 고칠 수 없는 것에조차도 미련을 갖는 모양이다. 이러한 소망이 이뤄지고 말고는 나중에 연구해 보도록 하고 일단 어머니를 나타내는 글자는 正印이라고 하는 것을 염두에 두자. 다른 경우에는 이설이 분분하지만, 정인이 어머니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견이 없다. 그런 것으로 봐서 이것은 아마도 합당한 이론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대로 수용을 한다.




★ 명리학은 모계사회(母系社會)인가?




명리학을 음미하다 보면 묘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의 사회는 분명히 부계(父系)인데, 명리학은 모계(母系)를 지향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에 아버지의 혈통을 논하는 것이라면 正印이 아버지가 되어야 옳다. 그런데 나를 생해주는 정인은 분명히 어머니라고 못을 박아 놓고 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씨를 뿌린 사람은 아버지라고 하는 정도로 소흘하게(?) 취급하고 있는 것도 눈에 띈다.

사회적으로는 어머니는 낳아주기만 했을 뿐이고, 그 씨앗은 아버지라고 하는 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심지어는 이것을 ‘밭과 씨앗의 관계’로 인식을 하기도 한다. 즉 밭은 누가 되어도 상관이 없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씨앗이라는 개념이다. 씨앗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그 밭의 이름이 정해진다고 보는 것은 극단적인 부계사회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아무 이의가 없을 것이다.

가령 밭에 콩씨가 떨어지면 콩밭이 되는 것이고, 팥이 떨어지면 팥밭이 되는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양귀비가 떨어지면 양귀비밭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서 밭은 덤으로 따라 다니는 정도라고 인식을 하고 있는 사회에서라면 명리학의 입장은 분명히 파격적이라고 해야 할 참이다.

그리고 이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도 현실인데, 우리 명리학도로써는 한번쯤 비판을 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자연법에서는 부계인가? 모계인가?




명리학은 분명히 모계사회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선 사주의 맨 처음인 탄생을 생각해보자. 출발점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떨어진 시점 이 된다. 이것은 그 모체가 출발점이 된다는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다. 즉 어머니로 인해서 사주가 발생했다는 것은 모계를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말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부계로 잡는 명리학의 이치도 없다고는 못한다. 즉 태원(胎元)이 그 소식이다. 언제 씨앗을 부렸느냐고 하는 점을 생각한다면 아버지의 영향에 대해서 상각한 점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비중으로 생각해 본다면 어림도 없다. 출생의 상황에는 견줄수 없는 미미한 존재일 뿐이라는 이야기다. 어느 것에 비중을 두고 있느냐는 것은 이 정도로만 이야기를 해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다음으로, 사주를 따질적에 일단 나를 생조해주는 인성(정인과 편인)이 얼마나 유력하게 되어있느냐는 점을 주의깊게 관찰해야 한다. 偏財의 상황은 그 다음에 고려하는 사안에 불과하다. 일단 정인이 하나도 보이지 않으면 비상이 걸린다. 그러나 편재는 보이지 않더라도 나중의 일이다. 우선은 크게 고려를 하지않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日干이 약하다는 판정이 나왔다면 절대로 편재를 봐서는 안된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긴급한 상황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정황을 볼적에 명리학에서는 아버지 보다는 어머니에게 비중을 크게 두고 있다는 점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진리일까? 과연 현실적인 사회의 습성이 자연의 법칙인가? 아니면 명리학의 이론대로 모계중심이 되어야 자연에 가까울까? 이러한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모계가 자연에 가깝다면 모계를 따르는 것이 더욱 이치적으로 합당하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인류역사의 초기사회는 모계를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자신의 종족표시인 성(姓)이라고 하는 글자를 봐도 그러한 흔적이 옅보인다. ‘女+生=姓’이 되는 까닭이다. ‘창힐 할부지’26)가 글자를 만들적에는 적어도 모계의 사회구조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추측도 가능하게 해주는 글자의 배합이다.

만약에 부계중심이었다면 종족의 표시를 나타내는 성이라고 하는 글자는 적어도 ‘父+生’가 되거나, ‘子+生’의 글자가 되어야 한다. 근데 이런 글자는 현재까지도 만들어지지않고 있다. 이것은 결국 우리의 초기역사는 모계사회였다는 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현실적으로 돌아와서  살펴보자. ‘아비없는 자식은 키워도 어미없는 자식은 못키운다’는 말이 있다. 물론 어머니가 없다고 하더라도 자식을 잘 키우는 아버지도 계신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볼적에 여성이 자식을 키우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자식은 여자가 키우는 것으로 결정이 나는 것도 각기 타고는 특성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음식과 세탁은 남자로써는 참으로 견뎌내기 힘든 작업이다. 더구나 애를 보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밤잠설치면서 아기를 보살펴본 남자라면 실감이 날 것이다.

그리고 오지를 탐험하는 프로그램을 보면 아직도 모계사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볼 수있다. 그들은 아무문제없이 잘 이끌어가고 있다. 그들의 가족에게 생각되는 아버지의 역할은, 그냥 씨나 뿌려주고 외적으로부터 보호를 해주는 정도가 전부인 것 같다. 생활수단에는 별로 노력을 하지 않는 것 처럼 보여서이다.

그리고 동물의 세계도 살펴보면 역시 암컷이 생존의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모양이다. 수컷은 기껏 암컷에게 잘 보이려고 싸움박질이나 하고 있는 것이 늘상 화면에 비춰지는 야생동물들의 세계이다.

그렇다면 원래는 모계사회였는데, 남자들에게 정복을 당해서 부계사회가 된것일까? 뭐라고 잘라서 말을 하기는 그렇지만, 일단 모계사회와 명리학의 어떤 연관성은 분명히 있지않을까 싶은 생각으로 잠시 망상을 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