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 제24장. 정업(定業)/ 3.업(業)의 글자에 담긴 뜻
작성일
2020-10-10 06:42
조회
2879
[261] 제24장. 정업(定業)
3. 업(業)의 글자에 담긴 뜻
========================
즐겁게 점심을 먹고 다시 연승점술관으로 돌아온 세 사람은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춘매와 염재는 우창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우선 업(業)이 앞으로 가서 되는 말과, 뒤로 가서 되는 말이 있지. 앞으로 가면 작업(作業), 상업(商業), 직업(職業)과 같은 문장을 조합한다네. 그러나 업(業)이 뒤로 가게 되면 엄청나게 많은 것이 생겨나니 의미를 잘 이해하게 된다면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네.”
우창이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가는 것을 들으면서 염재가 말했다.
“그렇겠습니다. 그러니까 업(業)이 앞에 놓이면 원인이 되는 것이네요. 이것은 미정업(未定業)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업(業)이 뒤에 놓이면 모든 결과를 포함하기 때문에 정업(定業)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스승님께서 해 주실 말씀은 후자(後者)가 되는 것이지요?”
“옳지~! 참 총명(聰明)하군. 하하하~!”
“그야 스승님께서 이렇게도 쉽게 설명해 주시니 당연합니다.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데도 못 알아 듣는다면 그것은 바보가 아니겠습니까? 우선 글자의 모양부터 설명해 주세요. 맨 위의 배(业)는 무슨 뜻이 됩니까?”
“그 글자의 뜻에는 업(業)도 있고, 북녘도 있고, 달아난다는 뜻도 있다네, 그러니까 동남서북(東南西北)을 말할 적에 북쪽을 의미하거나 ‘몰래 도망간다’는 뜻의 달아난다는 것이 포함되는데, 이 모두를 다 대입해도 말이 된다는 것이 신기하다면 참으로 신기하지.”
“업(业)으로 볼 적에는 업(業)자를 생략한 것으로 봐도 되므로 설명에서는 빼도 되겠습니다. 대신에 북과 배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북(业)자는 북(北)으로도 쓰니 같은 자(字)인데, 북은 어느 방향인가?”
“그야 북쪽이지 않습니까?”
“맞아. 탄생(誕生)의 방향이 있다면 어디라고 볼까?”
“동방(東方)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것이나, 왕의 뒤를 이을 태자가 동궁(東宮)에 거하는 것을 봐서는 동쪽이 탄생의 의미로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의 방향도 있겠는가?”
“동에서 태어났다고 한다면 서(西)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야 앞뒤가 맞지 싶습니다. 그렇게 되면 북쪽과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죽으면 어디로 가기를 희망한다고 하던가?”
“불자(佛者)는 임종(臨終)을 하게 되면 서방정토(西方淨土)의 극락세계(極樂世界)에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이 관음보살(觀音菩薩)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대동하고 맞으러 오기를 바란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은 정신일까? 육체일까?”
“극락세계든 지옥이든 육신은 가지 않고 영혼이 가는 것이 맞겠습니다.”
“그렇다면 육신은 어디로 가는가?”
“육신은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그 무덤의 방향이 어디라고 할 수 있을까?”
“무덤은 저마다 위치가 다른데 어찌 방향이 있겠습니까?”
“그야 상징적이지 않겠는가? 태어남도 마찬가지로 동쪽 집에서도 태어나고 서쪽 집에서도 태어나지만, 그냥 동쪽이라고 하듯이 말이네. 하하~!”
우창이 이렇게 설명하자 비로소 염재가 그 의미를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
“아, 이제 이해가 되었습니다. 고래(古來)로 죽음을 북망산(北邙山)으로 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북쪽을 죽음의 방향으로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왜 북망산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야 낙양(洛陽)의 북쪽에 있는 산이 북망산인데 왕후장상(王侯將相)이나 일반 평민들이 숨을 거두면 모두 북망산에서 장사(葬事)를 지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는데 아마도 타당하지 싶네.”
“그런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배워도 배워도 끝이 없습니다.”
“노래도 있다네. 들어 볼텐가?”
“예, 궁금합니다.”
그러자 우창이 소리를 가다듬느라고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노래라기보다는 시를 읊듯이 했다.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누구냐
“이런 노래가 있다네. 북망산을 생각하다가 문득 떠올랐어. 하하하~!”
“이해가 됩니다. 과연 북쪽에는 육신이 묻히는 곳임을 잘 알았습니다.”
“잘 이해하고 있군. 바로 그것이라네 그러니까 업에는 이미 행위(行爲)가 끝났다는 것을 포함한다는 뜻이 들어있음을 알겠는가?”
“아하~! 그런 뜻이었군요. 그러니까 죽음과 함께 생업(生業)은 끝이 났다는 의미란 말씀이지요? 이제야 명료하게 이해를 했습니다.”
염재가 잘 이해한 것으로 보고 우창은 설명을 계속 했다.
“다음으로 달아난다[北]는 뜻이 되었을 적에는 이미 모든 일이 끝나서 손을 쓸 수가 없다는 뜻이 그 안에 포함된 것으로 보면 될 것이네. 달아나고 없다는 것이니 이것은 완료(完了)되었다는 뜻과 서로 통한다고 하겠네. 그러니까 업(業)은 무슨 일이든 마무리가 되어서 끝났다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는 말이지.”
“그렇게 깊은 뜻이 있는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신기합니다. 공부를 많이 하게 되면 그런 것도 저절로 알아 질까요?”
염재가 감탄을 하자 춘매가 옆에서 거들었다.
“안돼, 그것은 태어날 적에 이미 타고나는 것으로 봐. 호호호~!”
우창은 춘매의 말에 미소로 답하고서 설명을 이어갔다.
“다음에 나오는 글자는 양(羊)이지?”
“맞습니다. 왜 양이 업에 들어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우선 염소의 뜻으로 본다면, 달리 해석이 될 방법이 없네. 그러니까 다른 뜻으로 봐야 풀이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지. 이 글자에는 바라본다는 망(望)의 뜻과, 자세(仔細)하다는 뜻의 자세할상(詳)이 들어있다는 것은 대부분 모를 것이네.”
“그렇습니까? 바라보는 것과 자세하다는 것은 금시초문(今始初聞)입니다. 그렇게 하면 또 해석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염재는 업경대(業鏡臺)라고 들어봤나?”
“업경대라면 사후에 저승에 갔을 적에 망인(亡人)의 생전 행위를 모두 보여주는 거울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지 싶습니다만.”
“맞아. 업경대를 볼 적에 자세히 보겠는가? 아니면 대충 보겠는가?”
“그야 한 인생의 삶을 되돌아보는데 자세히 봐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세하다는 뜻이 맞겠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하지. 양(羊)의 모습은 좌우(左右)가 대칭(大秤)을 이루고 있지 않은가?”
“맞습니다. 대칭은 항상 봐도 아름답습니다.”
“왼쪽은 악업(惡業)이고 오른쪽은 선업(善業)이라네. 그것에 대해서 정확하게 중심을 이루고 있는지를 보는 의미도 있다고 봐야겠지?”
“그렇습니까? 그것은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도(道)도 보이는가?”
“도는 보이지 않습니다.”
염재가 답을 하자, 춘매가 거들었다.
“도는 두 개가 보이네? 왜 두 개지?”
춘매가 이렇게 말하자 염재가 깜짝 놀라며 존경스런 눈빛으로 춘매를 바라봤다. 춘매가 염재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우창은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도(十)가 둘이 있다는 것은 천도(天道)와 지도(地道)를 의미하는 거지. 천도는 태어나기 전에 받은 도가 되고, 지도는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쌓은 도가 될 것이니까 말이야.”
그러자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는 염재를 대신해서 춘매가 궁금한 것을 물었다.
“아니, 천도와 지도가 있다면 당연히 인도(人道)도 있어야 하는 거잖아?”
“물론이지, 인도는 뭐겠어? 지금 업경대 앞에 앉아있는 영혼(靈魂)은 인도가 되는 거야.”
우창의 설명에 춘매도 깜짝 놀라서 말했다.
“아니, 어떻게 그런 해석이 나와?”
“생각하다가 보면 그런 것도 가끔은 나와. 하하하~!”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염재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무슨 뜻인지 두 분은 교감을 하시는데 제자는 전혀 가늠하지 못하겠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염재가 이렇게 답답해서 말하자 우창이 미소를 짓고는 물었다.
“『역경(易經)』은 읽으셨지?”
“과거를 보기 위해서 시험관의 질문에 대비하려니까 대략이나마 겉핥기는 했습니다만 깊은 이치는 모릅니다.”
“그렇다면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는 알고 있겠지?”
“그것은 알지요. 『계사전(繫辭傳)』에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맞아. 일음일양이 뭐라고 했나?”
“도(道)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도(十)라고도 한다네. 음(一)과 양(丨)이 만나서 도가 되는 까닭이라네.”
“아하~! 그런 뜻이 있었군요. 이제야 양(羊)에서 두 개의 도가 보입니다. 그러니까 모르면 양손에 쥐어 줘도 모른다는 말이 나왔네요. 잘 이해했습니다.”
“양(羊)의 위에 있는 두 획은 양의 뿔을 의미한다고도 하지만, 실은 낮과 밤을 의미할 수도 있는 것이라네. 다른 설명으로는 신체로 쌓은 업과 정신적으로 쌓은 업도 되겠지. 이것이야말로 행업(行業)을 하는 모든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말이네. 물론 음양(陰陽)으로 봐도 안 될 것이 없지.”
“참으로 오묘(奧妙)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의 인(人)은 어떻게 해석이 가능한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좌양우음(左陽右陰)은 아는가?”
“그것은 들어봤습니다.”
“왼쪽의 별(丿)은 양이므로 몸이 행동한 것이고, 오른쪽의 불(乀)은 음이므로 마음으로 지은 것을 말한다네. 그러니까 마음으로 지은 행위(行爲)와 몸으로 지은 행위(行爲)가 모두 업(業)을 만들게 된다는 말이지.”
우창의 설명을 듣고서 염재는 감동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는 말했다.
“오늘 ‘업(業)’이라는 글자 하나를 통해서 무진(無盡)의 설법(說法)을 들은 것과 같습니다. 글자 하나에 전생부터 현생까지의 몸과 마음으로 지은 모든 행위가 다 들어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글자공부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이치까지도 고스란히 전해 받았으니 과연 스승님의 가르침이란 이렇게도 소중하다는 것도 겸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기쁩니다. 여태까지 무엇인가를 배워서 이렇게 기쁨에 잠겨 본 적이 없었지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이네. 업(業)에 대해서 이해를 했으니 이제 그 나머지는 모두 이해를 한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일세. 어떤가? 다른 업에 대해서도 설명이 필요할까?”
“아닙니다. 이미 핵심을 얻었으니 그 나머지는 스스로 분석해도 충분히 이해가 되지 싶습니다. 혹여 이해가 되지 않으면 다시 여쭙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가르침에서 어떻게 공부해야 할 것인지를 가늠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서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사저께서도 도움을 주셔서 고마웠습니다. 내일 다시 와서 공부를 여쭙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작별을 하고는 마차를 타고 돌아갔다. 춘매는 비록 짧은 하루의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에도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나름대로 감동을 했고, 우창도 좋은 인연을 만났다는 생각으로 흐뭇했다. 염재가 돌아가고 다시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춘매가 말했다.
“오빠와 염재의 말을 들으면서 나도 알게 모르게 공부가 조금 되었다는 것을 느꼈어. 가랑비에 옷이 젖는 줄을 모른다는 말은 이런 뜻인가 싶었어.”
“그래? 날마다 열심히 쌓은 공덕이지 뭘. 축하해.”
“고마워. 진심으로 오빠가 아니었으면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을 텐데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심으로 뿌듯했던 것을 알아? 행복이란 이런 것이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어.”
“다행이네. 하하하~!”
“아, 그런데 궁금한 것이 생겼어.”
“뭐가?”
“악업은 쌓지 말아야 하겠으나 설명을 이해하다가 보니까 선업조차도 쌓으면 안 된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왜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도인이 되어가느라고 그러지.”
“그게 도인이랑 무슨 상관이야?”
“최상의 업이 무엇인지 알아?”
“선업이지 뭐야.”
“아니~!”
“그럼 뭐지?”
“무업(無業)~!”
“뭐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란 말이야?”
“당연하지.”
“무슨 말이 그래?”
“불가(佛家)의 해탈(解脫)은 무업에서 이뤄지는 거야. 무념무상(無念無想)이야말로 무업이라고 할 수가 있지.”
“그럼 무업으로 밥은 어떻게 먹고, 장사는 어떻게 하지? 현실과 동떨어진 이론은 공론(空論)이라고 해야 하는 거잖아?”
“밥을 먹어야지. 당연히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
“내 말이 그 말이잖아.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냔 거야.”
“그런데 밥을 먹어도 밥을 먹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서 먹는 거야. 그게 무업이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나중에 공부가 더 깊어지면 차차로 알게 될 거야.”
“아니, 난 지금 알고 싶어. 알아듣게 설명을 해 줘봐.”
“그래? 그렇다면 어디 잘 생각하면서 들어 봐. 누이는 가끔 멍~할 때가 없었어? 옆에서 뭐라고 말은 하는데 무슨 말인지 들리지는 않는 경우 말이야?”
“왜 없어. 수두룩하지. 그것은 다르잖아? 멍한 상태에서 무엇을 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말이야. 뭘 하면서도 멍하다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
“그런가? 그렇다면 나도 무업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겠는걸. 누이가 알아듣지 못하게 말했다는 것을 보면 말이지.”
“뭐야? 오빠도 잘 모르면서 내게 설명한 거였어?”
“그러게. 난 이해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네. 하긴, 물속에 있으면서 물 밖의 상황을 설명한다는 것이 어불성설(語不成說)이네.”
“어? 그건 느낌이 오는데? 그러니까 유업(有業)에 살고 있으면서 무업을 이해하기도 어렵거늘 그것을 설명까지 한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는 이야기잖아? 그건 이해가 되네.”
“맞아~! 바로 그거야~! 내가 설명할 수가 없는 이유가 말이지. 실은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 문자가 없는데 그것을 설명하려니까 마음대로 적당한 비유를 찾는것도 어렵다는 이야기지.”
“에구~! 오빠도 참 고생이 많다. 호호호~!”
“다음에 손헌 선생님을 뵈었을 적에 누이가 직접 물어봐. 공법(空法)을 깨달으신 분이라서 무업에 대해서도 멋진 비유로 설명해 주실지 모르니까. 근데 요즘은 몸이 좋으신가 나들이도 안 하시지?”
“그러게. 몸이 좋으시면 다행이잖아.”
“내일도 염재가 온다고 했으니까 오빠가 무슨 이야기를 해 줄지가 궁금하네. 오늘은 업(業)을 뜯어먹고 보냈는데 내일은 뭘 가르칠까?”
“아니, 누이는 아직도 몰라?”
“뭘?”
“공부는 소리에 메아리와 같은 거야. 소리가 안 들리는데 어떻게 메아리가 울리겠어? 제자가 소리를 내면 스승이 메아리로 답하는 거잖아.”
“아, 그렇게 되는 것이었어? 난 여태 그것도 몰랐네.”
“문답(問答)이라고 하잖아. 유문유답(有問有答)이고, 무문무답이지.”
“그러니까 물으면 답하고, 안 물으면 답을 할 일도 없는 거네?”
“맞아~!”
“참, 업(業)자를 풀이하는 이야기는 재미있더라. 문답(問答)도 풀이를 해 줘봐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 궁금해지네.”
“오호~! 글자 뜯어먹는 재미를 들였단 말이지? 참 좋은 일이네. 하하하~!”
“물을 문(問)은 무슨 뜻이야?”
“문(門)은 무슨 뜻인지 알지?”
“그야 출입하는 문이잖아?”
“문은 통로(通路)가 되기도 하지?”
“방문(房門)을 통로라고 하기는 좀 억지처럼 들리잖아?”
“아, 그 문만 생각했구나. 이런 문을 생각했어야지.”
그러면서 우창이 붓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렇게 생긴 것이 문(門)이야 방문과 같아?”
“아하~! 이제 알겠다. 그런데 오빠는 그림도 참 잘 그리네? 난 그림을 못 그리겠더라. 머릿속에는 그럴싸한 것이 있는데도 막상 손으로 옮기려고 하면 전혀 다른 것이 되어버리니 말이야. 호호호~!”
“그야 뭐 재주랄 것도 없지. 하하~!”
“맞아. 통로에는 반드시 문이 있으니까.”
“그 통로는 길이기도 하지?”
“당연하잖아?”
춘매가 그것은 쉽게 이해를 했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우창이 미소를 짓고는 다시 물었다.
“자, 문(問)은 길[門]에서 입[口]을 열었어. 이건 무슨 뜻이지?”
“입은 입구(口)니까 알겠는데 그것을 열었는지 닫았는지는 어떻게 알아? 그냥 입이잖아?”
“누이가 보기에 구(口)는 입을 다문 것으로 보여? 아니면 열고 있는 것으로 보여?”
“그야 보기에는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네.”
“맞아. 보이는 그대로 읽으면 되는 거야. 그러니까 길에서 입을 벌렸어. 다만 크게 벌리건 작게 벌리건 상관이 없어. 입술이 떨어졌다는 것이 중요할 따름이지.”
“길에서 왜 입을 벌려? 먼지나 들어가라고.”
“먼지나 들어갈 것을 알면서도 입을 벌려야 할 때가 있는 모양이지.”
“어디 그것도 그림으로 그려줘 봐. 그림을 보니까 바로 이해가 되잖아.”
“그야 뭐 어려운 일이라고.”
그러면서 그려놓은 그림에다가 추가로 사람을 그려 넣었다.
“어때? 누이가 보기에 이들은 무엇을 하는 것 같아?”
“어머, 순식간에 사람이 생겼네. 어디..... 아하~! 길을 묻네. 한 사람이 길을 묻고 한 사람이 길을 가르쳐 주는구나 맞지?”
“그래, 맞아. 누이가 이해해서 다행이군. 다시 생각해 보자. 길을 묻지 않는데 길을 가르쳐 줄 수가 있을까?”
“그럼 미친놈이라고 할지도 몰라. 길을 알려주는 사람이 문에 앉아있다가 길을 모르는 사람이 찾아와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물으면 비로소 답을 하는 거네?”
“그런데 길이 외길이라면 물을 필요가 있을까?”
“외길에서 길을 물을 일은 없지. 갈림길이라야 어디로 갈 것인지를 모르면 묻는 거지.”
“그러니까 문은 실제로 있거나 없거나 갈림길이라면 문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봐도 되는 거야.”
“듣고 보니까 내가 묻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 호호~!”
“문 앞에 앉아있는 사람은 길을 아는 사람일까?”
“당연하지. 길도 모르면서 앉아있으면 되나?”
“맞아. 그래서 길을 아는 사람에게 길을 묻는 것이 문(問)인거지. 이것이 정상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
그러자 춘매는 말도 안 되는 말이라는 듯이 답했다.
“아니, 길을 모르는 사람에게 물을 수도 있나?”
“무슨 말이야? 누이가 식당 아주머니에게 오행을 묻는 것과 내게 묻는 것에 대한 답이 같을까?”
“무슨 말이야? 누가 식당에서 음식을 만드는 아주머니에게 오행을 묻는다고. 그게 잘 물은 거야?”
그러자 우창이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근데, 사람 중에는 제대로 물어볼 곳인지 아닌지도 가리지 않고 자기가 답답하면 노파든 아이든, 하다못해 개나 고양이에게도 묻는다는 것이지.”
“그럴 수도 있기는 하겠다. 그럼 제대로 된 안내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많겠네?”
“물론이지.”
“자칫하면 엉뚱한 길로 들어가서 방황을 할 수도 있겠네?”
“당연하지.”
“정말 길을 묻는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구나. 이미 가본 사람에게 물어야 한다는 이야기잖아?”
“그래서 질문도 사람을 봐가면서 해야 하는 거야. 덮어놓고 묻는다고 해서 원하는 답이 나오기를 기대할 수는 없으니까.”
“와우~! 또 하나 배웠네. 잘 물어라~!”
“누구에게나 자신이 모르는 것을 물을 수는 있지만, 그 답에 대해서 보장을 할 수가 없단 말이지.”
“문(問)을 물었더니 그 속에서도 깊은 이치가 있음을 보여주네. 오빠의 가르침에 대한 열정은 아무나 따라 할 수가 있는 것은 아니야. 대단하니까.”
“그래서 길잡이의 안내자 팔자가 있는 거지. 선생의 팔자 말이야. 하하하~!”
“오빠는 선생 팔자가 맞는 것 같아. 틀림없어. 호호호~!”
“길을 잘못 물으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아마도 엉뚱한 길로 가서 죽도록 헤매면서 고생하다가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겠네?”
“그렇겠지? 그런데 진리를 잘못 물으면 어떻게 될까?”
“어? 진리를 묻는 것도 길을 묻는 것과 같은 거였네? 진리를 잘못 물으면 수행을 한다고 엉뚱한 노력으로 소득도 없이 고생만 하는 것 아냐?”
“왜 아니겠어? 또, 잠이 오지 않는다고 물었는데, 귀신이 붙어서 그렇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고, 그러면 또 퇴마사(退魔師)가 필요하다면서 거금(巨金)을 요구할 수도 있겠지?”
“아하, 길을 잘못 물으면 몸이 고생하고, 진리를 잘못 물으면 마음이 고생하고, 문제를 잘못 물으면 마음이 고생하고, 형편을 잘못 물으면 돈이 죽어나겠구나. 그러니까 묻는다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가 않네.”
“실은 매우 간단해.”
“그게 어떻게 간단할 수가 있어?”
“잘 물으면 되니까.”
“쳇, 그게 어렵단 말이잖아. 어떻게 물어야 잘 묻는 거냔 말이야.”
“잘 물으려면 공부를 해야겠지? 공부하면 진실로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를 알게 되고, 그러면 자연히 누구에게 물어야 올바른 답을 얻게 될 것인지도 깨닫게 되는 거야. 그런데 잘 모르면 아무에게나 묻게 되는 거지.”
“무슨 뜻인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아. 쉽게 좀 말해 줘봐.”
춘매가 어떻게든 이해를 해 보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서 우창이 말했다.
“가령, 먼 타지의 사람이 생후 처음으로 곡부에 놀러 왔는데 누군가가 그 사람에게 공자묘로 가는 길을 물으면 어떻게 답을 해 줄 것이며, 농사만 짓는 사람에게 도를 물으면 또 어떤 답을 얻게 될 것이며, 상인에게 지혜를 물으면 또 어떤 답을 얻게 될 것인지 장담을 할 수가 없는 것과 같은 거야.”
“그래도 불가능하다는 말은 안 하네?”
“단정적으로 그렇게 말을 할 수는 없지. 왜냐면 비록 겉으로 종사하는 일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면의 모습은 또 저마다 다른 까닭이지.”
“정말 사려(思慮)가 깊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겠네. 그러니까 길은 오빠에게 물으면 되는 걸로 하면 맞지?”
“오행에 대한 길이라면 대충 맞을 수도 있는걸로. 하하하~!”
우창의 말을 들으면서 춘매는 더욱 신뢰감이 쌓여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