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반달(47) 추사유배지

작성일
2021-06-03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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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반달(47) [12일째 : 3월 19일(금)/ 1화]


추사(秋史) 김정희선생의 유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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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를 누비고 다니는 중에도 신경이 쓰이는 것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바로 주말이다. 아무래도 여행객과 관광객이 어우러지는 휴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일에는 어디를 가도 그만인데 금토일이 되면 사람이 덜 모임직한 곳으로 일정을 잡아달라는 화인과 호연의 간곡한 부탁을 뿌리칠 수가 없는 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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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어려울 일이 아니다. 그래서 오늘은 느긋하게 추사선생이 귀양살이를 했다는 유배지로 방향을 잡아놓고서 새벽에 옥상으로 올라갔다. 오늘은 또 어떤 풍경을 보게 되려나 궁금한 까닭이다. 아니나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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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하늘에 가득하고 바람에 흩날리는 풍경은 예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바다의 사정은 전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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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고기잡이를 나갔던 배들이 밤에 갈치를 잡아서 돌아오는 것인줄로 생각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들어오는 배의 속도가 최고속도라는 것을 느끼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새벽에 본 바다의 정보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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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속 8m로 바람이 일어나고 있다는 정보였다. 옥상에서도 그 징조를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바다에는 풍랑경보가 발효되었다는 이야기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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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을 지켜 본 서귀포항이지만 이런 분위기는 또 처음이었고, 기대하던 바였다. 잔잔한 바다에 풍랑이 일고 배들이 속속 피항하는 풍경이야말로 심심한 풍경을 역동적인 모습으로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면을 그냥 두면 될 일이 아니다. 그래서 타임랩스를 켜놓고서 간간히 폰으로 풍경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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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배도 들어오고 작은 배도 들어온다.
동쪽에서도 들어오고 서쪽에서도 들어온다.
이런 때야말로 항구는 엄마의 안전하고 따뜻한 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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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도를 가보려고 했는데 풍랑주의보로 인해서 다음으로 미뤘다. 그냥 방에서 아침이 되기만 기다리고 있으면 이러한 풍경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부지런한 사람이 하나를 더 보게 되는 법이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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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도 우중충하다. 그래도 바다는 역동적이어서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는 이렇게 삶의 모습을 보면서 맞이하는 날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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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도 느긋하게 먹었다. 일행들도 조금은 지쳤는지 동작이 재빠르지 않은 것으로 보여서 낭월도 구태여 서두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까 12시가 넘어서야 추사유배지에 도착한 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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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에 아침을 먹고 이것저것 하다가 11시쯤 출발했다. 그래서 여기에 내려주고는 화인네 부부는 다시 지인과 약속한 곳으로 향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각자 흩어져서 한두 시간을 보내기로 했던 것이다. 추사 선생에 대해서 관심이 적었을 화인네 부부에게는 미련도 아쉬움도 없을 코스이니까 더 잘 된 셈이지 싶기도 하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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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선생이 마중을 나와 계셨다. 반갑게 인사하고 한 말씀 청했다.

낭월 : 어르신을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추사 : 먼 길에 노고가 많으셨군. 잘 오게.
낭월 : 귀양살이는 어떠하십니까?
추사 : 그야 세상 좋지.
낭월 : 과연 진심이십니까?
추사 : 물론이네. 권력자들의 눈치도 없고 맘대로잖은가?
낭월 : 그러시다면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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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기념관에서부터 찍었던 사진파일 한 뭉텡이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꼼꼼하게 정리한다고 했음에도 워낙 찍은 파일이 많아서인지 이렇게 이야기를 정리하려고 살펴보다가 그것을 알게 되었는데, 어디에 묻혀있는지 저장하는 과정에서 잘못 되었는지 알 방법은 없지만 중요한 것은 현재로는 그 사진들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보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폰으로도 간간히 찍어놔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나가 없어져도 대략 이야기를 만들 정도의 자료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냔 말이지. 나중에라도 어디에서 나타나게 되면 다시 보완하기로 하고 이야기는 그대로 진행하는 것이 옳겠거니.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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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편액이었다. 「의문당(疑問堂)」이라니. 의심이 나는 것을 묻는 집이라는 뜻이로구나. 과연 추사 선생은 학자임이 틀림없다는 것을 이렇게 간단한 세 글자의 현판만 봐도 알겠구먼. 모쪼록 배우는 자는 물어야 한다. 알아도 묻고 몰라도 묻고,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완전히 구름이 사라지고 짙푸른 하늘만 남을 때까지 의운(疑雲)을 남겨서는 안 된다. 오죽하면 눈치도 보지 말고 머뭇거리지도 말고 마음대로 물어보라고 이러한 현판을 썼겠느냔 말이지. 그래서 일단 감동으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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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년에 대정향교에서 부탁해서 써준 것이라고 한다. 추사 선생의 나이가 1786년 생이니까 나이 예순에 쓴 글인 모양이구나. 과연 학문이 완성을향해서 내달릴 황금의 시기였다는 것도 유배시절에 걸작을 탄생시킨 것과 무관하지 않겠다는 것을짐작케 하네. 만약에 20대나 30대에 귀양살이를 했더라면 울분이나 토하다가 술로 망가졌을 수도 있지 않겠느냔 말이지. 가만, 유배의 사유는 무엇이고 몇 살에 시작된 건지도 알아봐야 하겠군.




 

조선조의 훈척 가문()의 하나인 경주 김문()에서 병조판서 김노경()과 기계 유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 김노영() 앞으로 출계(: 양자로 들어가서 그 집의 대를 이음)하였다. 그의 가문은 안팎이 종척(: 왕의 종친과 외척을 아울러 이르던 말)으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권세가 있었다.


1819년(순조 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예조 참의·설서·검교·대교·시강원 보덕을 지냈다.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고금도()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로 복직되고, 그도 1836년에 병조참판·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하고,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 그는 다시 10년 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왔다. 그러나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왔다. 이 시기는 안동 김씨가 득세하던 때라서 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학예()와 선리()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정희 [金正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러니까 제주도의 귀양은 1840년이었으니까 당시 나이는  54였고, 제주도에서 9년을 귀양살이로 보냈으니까 귀양이 풀려난 것은 1848년으로 당시 나이는 63세였네. 오나가나 추사에게 걸림돌은 윤상도(尹商度) 잖여? 도대체 이 사람은 또 누구기에.... 그런데 정작 윤상도에 대해서는 자세한 자료가 없는 모양이구나. 없는 건지 못 찾는 건진 모르겠고.

귀양에서 풀려서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니 그 인생도 참 고달펐던 모양이다. 팔자라도 뽑아볼까 싶어서 생일을 찾아보니 1786년 6월 3일로 나오는구나. 어디....

고대만년력

보통은 쓸모가 없는 것도 필요한 때가 있는 법이다. 중국고대만년력이 바로 그런 책 중에 하나다. 기원전 2070년부터 1864년까지 수록이 되어 있으니까 유사이래로 누구든 생일만 알게 된다면 사주는 몰라도 삼주는 찾아낼 수가 있기 때문에 특히 옛사람의 삶을 참고할 적에는 참으로 소중한 보물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생일이 틀렸다면 어쩔 방법이 없지만 정확하게 기록이 되었음을 전제로 한다면야 명리학자에게 매우 소중한 만세력임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1786년

추사 선생이 태어난 해는 서기 1786년이므로 청나라로 봐서는 건륭51년의 병오(丙午)년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생일을 찾아보는 것이 조금은 복잡하기는 한데 그것도 육갑을 외울 줄만 안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가 있다. 물론 모르면 배우면 된다. 지금 그 방법을 설명할 요량이니까 이대로만 하면 세종이든 이순신이든 모두 찾아낼 수가 있다는 것이니, 그들의 삶이 왜 그러한 마음으로 점철되어 있었는지를 참고하는 심리분석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싶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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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생일은 6월 3일이로군. 그렇다면 6월의 항목을 찾으면 된다. 六月小(유월소)라고 된 것은 이 달은 음력으로 29일까지만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아래의 을미(乙未)는 월의 간지, 즉 월주(月柱)가 된다. 그럼 두 가지는 해결이 되었다. 병오년 을미월이다. 다음은 일진을 찾아야 한다. 그 아래의 '6.26'은 양력으로 그 날은 6월 26일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양력으로 6월 26일이 음력으로 6월 1일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어디에 쓰는 것이냐면. 절기가 지났는지를 확인하는 용도로 쓰라는 말이다. 양력을 기준으로 미월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면 되는 것인데. 양력 26일이면 절기로는 망종이고 월건은 오월(午月)이 된다. 이것까지 알아야 이 만세력을 사용할 수가 있다는 것도 알아둬야 실수하지 않는다.

양력은 매년이 비슷한 기간에 절기가 들어오므로 기준을 삼을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가끔은 절입일의 하루 전후에 해당한다면.... 그것은 포기해야 할 모양이다. 고로 추사 선생의 연월은 병오년 갑오월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음은 일진이다. 초하루가 계유(癸酉)이므로 3일까지만 따지면 되겠네. 2일-갑술, 3일-을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삼주가 나왔다.시주는 물론 포기하면 된다. 그리고 심리를 참고하는데 일주까지만 있으면 80%는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 시주를 찾느라고 고생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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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충명과인(聰明過人)이나 용신이 약하구나. 밖은 활동이 불편하니 안방생활이 최고이고, 그래서 귀양살이에서 편안하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면서 잘 지내셨나? 말년에도 귀양살이는 이어진 것으로 봐서 시주에도 용신이 없다고 보고 식상용인격(食傷用印格)이 되고, 수용신에 금을 희신이 되는 것으로 보면 되겠다.

그렇다면 갑목은 아마도 윤상도가 될 모양이다. 불붙은 나무에 의지하다가 낭패를 당하고 귀양을 갔는데 다행히도 물이 많은 제주도라서 빛나는 업적을 쌓게 되었을 것이고, 불후의 명작인 세한도도 여기에서 창조되었으니 흉화위길이 아니고 무었이겠느냔 생각도 해 본다. 세상 천지에 의지할 곳은 자기 한 몸[일지의 해(亥)] 뿐이로구나. 고독한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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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를 창작했으니 그것만으로도 그의 창작력(食神)은 인정을 받고도 남음이 있겠다. 가만, 호가 왜 추사(秋史)였을까? 춘추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라고 해도 되겠지만 간단하게 사주에 수(水)가 있고 용신인데 그 수는 금(金)이 없어서 풍전등화이니 누군가 금을 넣으면 좋다고 해서 가을은 금의 계절이므로 추사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 물론 그 외에도 수많은 호가 있었지만 추사가 대표인 것으로 봐서 그렇게 꿰어맞춰도 되지 않겠느냔.

더구나 나이 54세에 귀양길에 올랐던 것은 비로소 활약을 하게 될 주운[51~60]의 중년이니 이것이야말로 금상첨화랄 밖에. 아니 그 좋은 운에 귀양살이가 웬 말이냐고? 그야 환경이 그런 것을 우짜겠노 말이지. 그래도 그 시기에 뭘 하고 살았는지가 중요하지 않겠느냔 말로 얼버무리고는 후다닥~!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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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렸는지도 모르는 진영이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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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을 지나가면서 추사고택의 이정표를 보면서도 그냥 지나쳤는데 다음에는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못하겠군. 반드시 들어가서 살펴봐야 하겠다는 씨앗을 여기에다가 심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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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의 서화에 대하서야 뭐라고 왈가왈부 하겠나.... 고개만 끄덕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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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기념관에는 이러한 것들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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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균사청(如筠斯淸)」'대나무처럼 맑게'

추정하기로는 추사의 시집 10권에 있는 김여균(金如筠)에게 써준 것이 아닐까 하는 의미도 있는데 그럴싸 하군. 실은 기념관을 둘러보고 나오다가 책이 눈에 띄어서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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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김여균에 대한 이야기도 이 책에 있어서 알게 되었거니와, 연지님도 비싼 책을 왜 사느냐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돈은 이내 사라지고 말지만 책은 남기 때문에 이런 기회에 이런 곳에서 이런 책을 구입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아쉬워할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그냥 샀다. 그래봐야 10만원도 안 된다. 두고두고 즐거울 것에 비하면 그것은 큰 돈이 아니라고 퉁친다. 그래서 또 부자가 되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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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채에는 주인이 살고, 바깥채에는 추사가 살았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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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선생은 초의 스님과 차를 마시느라고 여념이 없으시군. 초의 스님과 추사의 각별한 인연이야 이미 유명하지만, 여기에 또 한 사람 다산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초의 스님에게는 늘 차가 떨어졌다고 징징댔다는 이야기는 너무 유명하니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게고.... 왜 징징댔는지는 을해(乙亥)를 보니 대략 이해는 된다만, 불평불만이 많았다는 것도 관살이 없는 것으로 봐서 또한 짐작할 바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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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양살이 형벌 중에서도 가장 엄중하다는 위리안치(圍籬安置)에 절도안치()까지 겸한 것으로 인해서 제주도에서 탱자나무 울타리 안에서 살았으니 차와 벗하고 붓을 벗삼아서 창작에 몰두를 할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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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세월을 알바 없는 유채꽃은 뒷뜰에서 샛노란 빛으로 지난 시절의 추사 선생을 위로하는 듯도 하다.  그렇게 한 시간 여를 둘러보면서 추사 선생과 놀이에 빠져있는데 화인의 전화.

화인 : 싸부님 어디 계세요?
낭월 : 추사선생이랑 논다만.
화인 : 더 놀으실래요?
낭월 : 이제 많이 놀았다.
화인 : 그럼 입구로 나오세요.
낭월 : 왜? 안 둘러보고 그냥 가려고?
화인 : 그러고는 싶은데 배 고파요. 
낭월 : 아, 밥 먹을 시간이로구나. 그래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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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지 않은 곳에 옥돔식당이 있었다. 오늘 낮에는 또 옥돔을 먹게 되나보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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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연 : 이 집은 보말칼국수로 유명한 집입니다.
낭월 : 옥돔이 아니고?
호연 :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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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느라고 목도 컬컬하던 차에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은 감로수랄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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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말칼국수가 먹을만 했다. 이것은 낭월식으로 해석하면 '맛이 좋더라'는 의미이다. 실은 먹는 것으로 호들갑을 떠는 것은 늘 모양빠지는 것이라고 배웠다. 그래서 표현이 가능한 어휘를 별로 습득하지 못한 것도 있을 게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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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보말칼국수와 시원한 제주막걸리의 궁합이 천생연분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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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또 행복한 시간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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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 : 드실만 했어요?
호연 : 아주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할매 : 다행이네요.
낭월 : 여기는 옥돔이 전문인가 봅니다?
할매 : 옥돔은 팔지 않아요. 
낭월 : 그런데 이름이.....?
할매 : 아, 전에 옥돔식당을 하던 사람이 쓰던 간판이에요.
낭월 : 그렸군요. 이름이야 아무러면 어떻습니까. 하하
할매 : 맛있게 드셔 주셔서 고마워요.
낭월 : 잘 먹었습니다.(먹을만 했다고 하면 서운해 하실까봐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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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사진 일발~!

(여행은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