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五行의 상극(相剋)

작성일
2007-09-10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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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의 관계를 가정적인 관계라고 한다면 상극의 관계는 사회적인 관계라고 한다. 가정적인 관계에서는 이익계산에 대해서 대단하게 집착하지 않는다. 가정에서도 계약관계라는 것이 간혹 있기도 하겠지만, 그 정도는 극히 일부분이고 대개의 일반적인 가정에서의 관계는 서로 봉사하고 헌신하는관계가 대분분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가정적인 관계를 ‘상생의 관계’라고 한다면 상극의 법으로 논하는 사회는 전혀 그 성격을 달리한다.

우선 사회에서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이라는 법칙이 기본으로 깔려있는 것이 그 차이점이다. 가정에서는 약육강식의 이론이 없다고 본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힘있는 자가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법칙이 그대로 적나라하게 살아있다. 이것이 바로 생존경쟁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회가 그러하다면 사람의 운을 따지는 명리학에선들 그 이치가 없을 수가 있겠는가? 당연하겠지만 사회라는 것은 개인적인 인간이 남들과 겨뤄서 어떻게 생존 하는가를 알 수있는 극명한 현장이다. 그리고 그 현장은 극하는 이치가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내가 극하고 내가 극받고 항상 주고 받는 이치는 인과법대로 흘러가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인 이치를 相剋이라는 말로 대치하면 된다. 사회라고 해서 서로 아끼고 보호하는 이치가 없겠는가만, 그래도 항상 기본적인 흐름은 상극의 구조로 짜여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서 궁리를 하게 된다. 복잡하다면 대단히 복잡한 사회의 천태만상을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 상극의 이치이다.

극을 하는데에도 음양이 있기 마련이다. 물론 음양이 모두다 극을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기왕에 극을 하더라도 정이 있게 극을 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고 그냥 무정하게 극을 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가령 두 사람의 종업원이 있다고 한다면 그 중에 한 사람은 항상 최선을 다해서 회사발전을 위해서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고 보자. 출근도 남보다 먼저하고 퇴근은 남보다 늦게 하면서 자신의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사원과, 또 한사람은 눈치나 보고 잠시라도 틈이 나면 잡담이나 나누려고 하고 퇴근시간이 되기가 무섭게 총알처럼 달려나가는 사원이 있다면, 이 두사람 중에서는 누가 더 좋아보일런지 물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만약에 이 두사람이 어느 날 똑같은 실수를 했다면 그중에서도 더 미운 사람이 있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음양이 다른 극(剋)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극을 받더라도 음양이 같으면 더욱 심하게 당하고, 음양이 다르면 약간의 사정을 봐가면서 극을 받는다는 것이 다른 것이다. 이러한 것을 알아야 올바른 극에 대한 공부를 했다고 할 것이다.

그럼 나는 극하는 입장이 될것인가 아니면 극을 받는 입장이 될것인가. 이러한 것을 궁리하는 것이 상극법이다. 그리고 사회에서는 필연적이다. 그래서 이렇게 相剋에 대한 이치를 궁리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