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목이 토를 극한다(木剋土)

작성일
2007-09-10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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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목부터 생각을 해본다. 나무와 흙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나무로써는 위로 벋어 올라가야 하는 성질이 있고, 그렇게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흙에다가 뿌리를 내려야 가능하다는 간단한 이치 정도는 누구던지 알만한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목이 토를 사랑해야 옳지 어떻게 무정한 극을 한다고 하게 되는가, 하는 의문이 있을 법도 하다.

그런데 극이라는 말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토라고 하는 입장에서는 목의 뿌리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봐야 하겠다. 토로써는 나무뿌리가 파고 들어오는 것이 즐거울 리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목으로써는 토가 없으면 곤란하고, 토로써는 목이 없다고 해도 무슨 일이 생기지 않는 관계를 보면서 목이 토를 극하고 있다는 공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목에게 극을 받는 토에게도 감정이 있다면 목을 극하고 싶어질 것이다. 지배를 받는 노예들도 주인이 밥을 먹여주므로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서 살아가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자신의 노력에 비해서 주인의 대접은 어림도 없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마도 당연할 것이다. 그래서 토생금(土生金)이 되는 것은 아닐는지 모르겠다. 토가 목의 극을 받으면서 서러운 마음으로 금을 만드는 것이라고 해보는 것이다. 그러면 금은 어김없이 어머니인 토의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헤아리고서 목을 극해버리는 것이다. 사실 금극목(金剋木)이 분명하게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로의 함수관계를 생각하면서 여성들이 그렇게도 아들을 원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남아선호사상이라고 해서 혹자는 남자들이 아들을 원하기 때문에 여자들은 어쩔수가 없이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딸만 둘을 두었는데, 아내는 항상 아들타령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아들을 둘 수가 있는가에 대해서 매우 많은 열성을 보이지만, 정작 남편은 느긋하게 두 딸의 재롱에 취해있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시가댁에서도 시아버지 보다는 시어머니가 더 아들손주에 대한 애착을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을 늘상 실제로 상담하는 경우에서 많이 보게된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세간에서 흔히 생각하고 있는 이유가 일부는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어째서 여자가 더 아들을 원하는가에 대한 이유도 생각해봐야 하겠는데, 이것이 바로 보호를 받으려고 하는 본능이 작동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이다. 남편의 극으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방법에는 애교를 부리는 방법도 있겠고, 최상의 써비스를 해주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몸이 부서지도록 열심히 일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된다면 될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게 노력을 해도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는 것을 느낀다. 아무래도 아들을 낳아야 자신이 완전하게 보호를 받게 될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흐름이라고 본다. 사실 여성이 아들을 원하는 것은 자신이 아들을 키워보고 싶은 욕구도 있겠지만, 그 이면에는 아들이 없다는 것을 빙자해서 남편이 자신을 버리게 되면 어디에 가서도 하소연을 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욕구는 남편의 박해가 심하면 심할수록 더욱 강력하게 작용을 할 것이다.

그리고 또 중요한 점은 아들만 있으면 아들은 자신의 보호벽으로써 완벽한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을 위해서 일생을 헌신하다시피 하는 어머니들도 많은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놓고서 ‘숭고한 모정(母情)’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아마도 상당부분은 모정으로 인한 것일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극의 관계에서 이해를 해보려고 하는 것은 이 항목이 극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들만 있으면 남편과의 사회적인 의무에 대한 책임을 완수했노라고 당당하게 말을 할 수가 있겠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남편이 극제를 하는 가정의 싸움하는 장면을 보면 더욱 명백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네집에 들어와서 못해준게 뭐있노! 아들을 못낳아줬나? 밥을 않해줬나! 와 이라노~!!!”

이 정도이다. 일단 어떤 경우던지 자식을 낳아서 대를 이어줬다는 말은 받드시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한 소리를 들으면서 여성이 아들을 그렇게도 낳고 싶어하는 이유가 또 다른 방어벽으로 이용하려고 하는 본능적인 의미도 포함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음... 이야기가 약간 엉뚱한 곳으로 흘러갔나? 토의 열받는 마음으로 금을 생한다는 의미를 설명하다보니까 이렇게 되었지만, 사실 토생금을 하게 되고, 그 금은 금극목으로 아버지를 극하는 상황으로 전개되는 것이 실제로 생극(生剋)의 이치는 분명하다.




기왕이면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 목은 토가 없으면 곤란하다. 그래서 부하를 사랑하는 상사라고 하겠다. 그만큼 목에게 있어서의 토의 존재는 필요불가결한 존재인 것이다. 나무가 머리를 하늘로 향하고 자랄 수 있는 것은 토가 뿌리를 잡아주기 때문이라는 이치이다. 그래서 목은 부하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기에 극을 하더라도 유정한 입장이다.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이라는 입장하고는 전혀 다르다.

토는 목이 극하면 극을 받는다. 그리고 토가 두텁다면 필연코 목의 다스림을 요구한다. 토는 목의 뿌리가 잡아 주어야 보호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후(戰後)의 한국 산은 모진 포격으로 온통 벌거숭이 산이었다. 포화에 의해서 나무들이 모두 불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후에 가장 시급하게 한 일은 산에다 나무를 심자는 운동이었다. 노래까지 만들어서 불러가면서 산에 나무를 심었다. 그 결과로 지금은 온 산천이 녹음으로 덮여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산에 나무가 없으면 산사태도 나고 가뭄이 들었을 경우에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고 한다. 그러니 나무는 산을 떠날 수가 없고 산은 나무를 미워할 수가 없는 것인가보다. 벌거벗은 산은 보기에서 과히 아름답지 않다. 나무가 우거진 숲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토도 목의 극을 미워하지 않는다. 이렇게 서로 필요에 의해서 형성되는 관계이기에 사회적이라고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