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세상에 부적응

작성일
2007-09-04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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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데 쉽게 잘 적응을 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어린 나이로 본다면 학교에서 왕따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택한 경우도 심심찮게 뉴스에 오르내린다. 그리고 어린 아이만 그런 것이 아니고 세상을 많이 살아 온 성인도 적응을 하지 못하고 세상을 피하고자 하는 최후의 선택으로 극단적인 길을 택할 수가 있는 것이므로 나이와 환경에 국한되지 않는 것이다.

직장(職場)에서도 어울리지 못하고, 그렇다고 자신의 일을 활기차게 꾸려가지도 못하면서 이리저리 치이다보면 세상에 대한 흥미를 얻지 못하고 마침내 세상을 떠날 연구를 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경우에 절간은 좋은 안식처(安息處)가 될 수도 있다. 종교기관은 이러한 성향의 사람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해 주기도 하는 역할이 되기 때문이다.

예전 사람들이 세상에서 뭔가 하다가 잘 되지 않으면‘절에 중질이나 가지 뭘~!’이라는 말을 곧잘 하기도 했다. 물론 중노릇이 그렇게 만만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세상에서 적응을 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현실도피(現實逃避)라고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 틀렸다고 하기 보다는 자신의 능력으로 오죽이나 세상에서 적응하지 못했으면 산중(山中)으로 찾아들었겠는 지를 생각하고 현명하다고 판단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세상에 적응을 못하다가 보면 이러한 생각조차도 하지 못하게 된다. 어쩌면 그렇게 할 겨를이 없다고 하는 것이 정답이 될 것이다. 이러한 성향의 사람은 아마도 세상을 떠나는 것이 자신에게나 이웃들에게 부담을 덜어주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왜 이러한 현상이 생기게 되는지에 대해서 분석을 해 본다.

무엇보다도‘전생에 사람으로 살지 못하고 축생(畜生)으로 살았을 가능성이 많다’는 설이 있다. 축생은 짐승을 통틀어서 하는 말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잘 적응을 했는데, 어쩌다가 인간으로 태어나는 바람에 그 복잡하고 실타래와 같은 인생살이에 적응을 못해서 자꾸만 위축된다는 것인데 이러한 것이 좀 황당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일리는 있어 보이기도 한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에도 적응을 못하고 힘들어 하는 것을 보면 그럴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逆)으로 세상에 잘 적응하는 사람은 전생에도 인간으로 삶을 살았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다. 또 적응하지 못하고 젊어서 죽는 사람은‘전생에도 삶의 경험을 여기까지만 하였기 때문에 더 살지 못하고 자살을 하게 된다’는 설도 있다. 즉 영적(靈的)인 진화(進化)가 거기까지라는 이야기이다. 그 다음에는 준비가 되지 않아서 죽음을 택한다는 말인데, 이것도 생각을 해 보면 또한 일리가 있는 이야기이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자살도 습관성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할 수가 있는 일이다. 그리고 습관은 천성이 되어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재연(再演)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기도 하다. 여하튼 어떤 경로를 밟아 왔더라도 자살을 하지 않고 견뎌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