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8] 제39장. 춘풍(春風)/ 6.太湖의 일몰(日沒)

작성일
2023-10-20 04:35
조회
1118

[478] 39. 춘풍(春風)

 

6. 太湖의 일몰(日沒)

========================

 

아직도 노을이 지려면 시간이 넉넉했다. 다른 제자들도 호안(湖岸)에 부딪혀서 부서지는 물결의 소리를 들으면서 점괘를 들여다보는 것이 싫을 까닭이 없는지라 천천히 살펴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무엇보다도 다행인 것은 시주(時柱)의 병인(丙寅)이었다. 그야말로 혼란의 마음을 벗어나게 해줄 수가 있는 귀인(貴人)이 병화(丙火)였기 때문이다. 그것을 본 여인이 생각에 잠긴 우창에게 먼저 물었다.

병인(丙寅)은 무슨 의미일까요? 어리석은 제가 봐서는 나빠 보이지 않네요. 고도(孤島)에 밝은 태양이 떠오르는 것으로 봐도 될까요?”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듣고서 우창도 이 주인의 간지에 대한 상식이 상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얼굴을 쳐다보자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심코 봤는데 갑진(甲辰)과 경오(庚午)가 약간 떨어져 있는 것에도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여기에 대해서도 궁금한데 그 속에 의미가 있다면 말씀을 듣고 싶어요.”

우창은 여인의 말을 듣고서야 다시 보니 다른 네 개의 패와 약간 떨어져 있는 것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는 내심 무릎을 쳤다. 조짐이란 바로 이런 것이겠거니 싶었다.

아니, 조짐을 보는 안목이 탁월하십니다. 이렇게 차관에서 차나 팔면서 세월을 보낼 분이 아니시군요. 그러한 것을 조짐 밖의 조짐[兆朕外兆]’이라고 합니다. 무심코 흘려보내도 그만이지만 그것조차도 생각을 끌어내는 통로가 되기도 하니까 말이지요. 하하~!”

우창의 말에 자원이 눈을 크게 뜨면서 말했다.

아니, 싸부, 그러고 보니까 갑()은 장부(丈夫)가 되시는데 경()을 만났으니 일찍 먼 곳으로 가셨다고 하는 해석이 가능하잖아요? 더구나 갑진(甲辰)이고 보니 명당길지(明堂吉地)에 편히 누워계신다는 풀이가 가능한데 자원은 왜 여태 이러한 것이 보이지 않았을까요? 도대체 얼마나 공부해야 조짐외조(兆朕外兆)까지도 읽어 낼 수가 있는 것일까요? 참 신기해요. 호호호~!”

자원의 말에 진명과 춘매도 감탄하는 표정으로 우창과 여인을 번갈아 보면서 우창의 풀이를 기다렸다. 그러자 자원의 풀이에 밖을 한 번 바라본 여인이 우창을 보며 말했다.

과연 도사님의 손길은 그러한 것도 모두 보여주시는 것임을 새삼스럽게 알았어요. 그래도 병인(丙寅)이 보여서 우울한 하늘에 태양이 비춰주니 과연 앞으로의 삶은 밝은 날이 다가오겠다고 해석하고 싶어져서 주제넘게 드린 말씀이에요.”

아닙니다. 과연 멋지게 풀이하셨습니다. 여태까지는 힘든 나날을 보내셨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것은 파운망월(破雲望月)하듯이 일거(一擧)에 벗어나게 될 조짐이어서 더 바랄 것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우창이 시를 읊었다.

 

파도는 잠잠하고 바람은 살랑이니(熄波微風)

번뇌는 간곳없고 쾌청한 푸른 하늘(無煩靑天)

 

조금 전에 배 위에서 백거이의 시를 들었던 것이 문득 생각나서 이렇게 간단히 한마디 하자 여인이 감동하면서 말했다.

오늘 차는 제가 내겠어요. 이보다 더 좋은 덕담(德談)이 없네요. 참으로 얼마 만에 들어보는 말인지 모르겠어요. 너무 오랜 시간을 우울한 나날로 지냈는데 그러한 고뇌를 날려버릴 멋진 말씀이에요. 점괘가 이렇게 나온 것으로 봐서 올해에는 마음먹은 대로 일이 잘 풀리려나 봐요. 그런데 마지막에 있는 정미(丁未)는 무슨 뜻일까요?”

여인이 병인까지만 설명해 주고 그다음에는 어떻다는 말이 없자 궁금해서 다시 물었다. 우창이 정미의 뜻을 설명했다.

낮에는 태양인 병()이 세상을 밝게 비추고 밤에는 등불인 정()이 어둠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니 이보다 더 좋은 나날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이 정도는 이해를 하실 수가 있지 싶습니다. 그렇지요?”

우창이 이렇게 해석하면서 말하자 여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생각한 대로군요. 그렇게 해석이 되지 싶었으나 혹시 아전인수(我田引水)로 해석하는 것이나 아닐까 싶어서 여쭤봤던 것인데 그대로 풀이를 해주시네요. 오늘은 정말 즐거운 날이에요. 온종일 조용하게 앉아서 파도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렇게 귀인께서 나들이하실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이렇게 말한 주인은 제자들을 보면서 말했다.

과연 복이 많으신 분들이라서 얼굴에 구김이 하나도 없으시네요. 앞으로도 더욱 즐거운 나날이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안으로 들어가서 향긋한 귤을 한 쟁반 담아 갖고 와서는 권했다.

섬에 살다 보니 특별히 드릴 것도 마땅치 않아서 가끔 손님이 오시면 드리려고 저장해 놓았던 것인데 맛이라도 보세요.”

, 이것이 동정귤(洞庭橘)인가요? 귀한 것을 주시니 잘 먹겠습니다.”

진명이 인사를 하고는 하나씩 까서 먹으니 그윽하고 상큼한 향과 맛이 정신을 맑게 해주는 듯했다. 비스듬한 태양이 창을 타고 안으로 들어와서 탁자를 밝게 비추자 여인이 말했다.

이제부터가 서산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에요. 저쪽으로 가시면 정자가 있으니까 노을을 즐기고 오세요. 그 사이에 저녁 식사를 마련해 놓겠습니다. 뭔가를 해 드리고 싶은데 마침 오늘 아침에 어부에게서 고기를 받아놓은 것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구워서 조촐한 석반(夕飯)을 대접하겠습니다.”

우창은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너무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닌가 싶었으나 진심으로 그렇게 하고 싶은 표정을 보고서는 그냥 받기로 했다.

고맙습니다. 그럼 노을을 감상하고 다시 오겠습니다.”

, 그렇게 하세요. 저녁을 준비해 놓을게요.”

조금 걸어가자 호수를 바라보면서 앉아서 노을을 즐기도록 의자들이 있었다. 저마다 편안하게 앉아서 해가 점점 기울어가면서 하늘에 황금빛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순간을 즐겼다. 자원이 옆에 와서 말을 할 때까지 우창도 노을에 젖어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바라보는 풍경이었다.

싸부, 생각나세요? 노산에서 살면서 가끔 바라보던 동해가 떠오르지 않아요?”

, 맞아. 동해를 보면서 파도 소리를 듣곤 했었지.”

우창이 이렇게 말하자 자원이 최은주에게 손짓해서 가까이 오라고 했다. 그녀가 다가오자 우창과 자신의 사이에 최은주를 앉게 하고서 말했다.

이렇게 큰 호수를 본 적이 있어요?”

그러자 최은주가 말했다.

백부를 따라서 소주에 왔을 적에 두어 번 바라보기만 했었죠. 이렇게 배를 타고 서산도에 들어와서 풍경을 볼 생각은 하지 못했고, 그럴 줄도 몰랐어요. 그런데 이렇게 와서 보니까 정말 풍경이 장관이네요. 그리고 아까 차관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면서도 내심으로 감동했답니다. 외로움이 가득한 사람에게 희망의 빛을 나눠주는 것을 보면서 스승님께서 참으로 의미있는 일을 하신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언니들이 스승님을 따라서 진심으로 공부하는 모습도 감동이에요. 은주가 비록 스승님과의 특별한 인연은 있다고 할지라도 또한 한 사람의 제자로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을 할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제자들과 차별을 두지 말고 나이에 따라서 언니 동생으로 대해 주셨으면 편하겠어요.”

최은주가 이렇게 말하면서 진명과 춘매를 바라봤다.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자 다시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백부님의 후광(後光)으로 혹 공부하시는 분들이 불편하게 생각이라도 하시면 어쩌나 싶었어요. 그런데 오늘 이렇게 나들이하면서 전혀 그러한 생각이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 비로소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앞으로도 이렇게 대해 주시고 혹시라도 사모(師母)라거나 하는 호칭은 사용하지 말아 주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인연은 인연이고 공부는 공부니까요. 그리고 은주도 열심히 공부하고 모르는 것은 언니들께 여쭤볼 거예요. 아낌없는 가르침을 부탁합니다. 호호~!”

이렇게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이 참으로 솔직해 보였다. 그러자 춘매가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요. 은주 언니, 춘매는 올해 서른이에요. 그러니까 동생이 되는 거죠. 스승님을 모시고 여러 해를 살았으나 백년해로의 인연이 또 이렇게 나타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너무나 지혜로운 분을 만나게 되어서 행복하고도 마음이 놓인답니다. 행여라도 스승님이 못된 여인과 연분이 되면 어쩌나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았거든요. 호호호~!”

춘매의 나이를 알고서 최은주도 말했다.

, 처음부터 어딘가 평범해 보이지 않는 도인의 티가 나서 손위인 줄로 생각했지 뭐야. 그렇다면 당연히 동생에게도 도움을 받아야지. 환영해 주니 고마울 따름이야. 이렇게 멋진 풍광을 보면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너무 좋아. 진명 언니와 자원 언니가 많이 가르쳐 줘요. 열심히 따라서 배울게요.”

우창은 이러한 대화를 들으면서 인연이란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지로 만들지 않아도 저절로 이르게 된다는 자연의 이치가 떠오르면서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여인들이 즐겁게 대화하는 것을 들으며 일어나서 천천히 걸었다. 꽃잎은 바람에 날리고 갈매기들이 저녁 먹이를 찾느라고 무리를 지어서 자맥질에 여념이 없는 것을 보면서 모처럼 여유로움에 빠져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태양이 점점 수면(水面)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동해의 일출(日出)은 봤으나 이렇게 수면으로 떨어지는 일몰은 처음이었는데 일출과는 또 다른 장엄(莊嚴)함이 느껴졌다. 마치 인생의 황혼(黃昏)에서 돌아다보고 싶은 자기의 모습이 이랬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어봤다. 호수가 드넓은 덕분에 태양이 산으로 넘어가지 않고 수평선으로 넘어가는 장관을 보게 되어서 그 자리에 앉아서 하염없이 바라봤다. 춘매가 다가와서 부를 때까지.

스승님~! 완전히 석양의 노을에 빠지셨네요. 호호호~!”

, 춘매, 너무 아름답지 않아? 이런 풍경은 처음 봤어.”

춘매도요. 하늘이 도와서 멋진 풍경을 누리게 되었네요. 구름이라도 가득했더라면 우중충한 풍경만 보게 되었을 텐데 말이에요. 오늘은 참으로 운수가 좋은 날이 틀림없는 거죠?”

당연하지. 하하하~!”

우창에게 춘매는 언제나 편안했다. 항상 우창의 옆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항상 챙겨주는 것이 짐스럽지 않고 편안한 것은 아마도 벌써 여러 해를 함께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춘매를 만난 것이 3년째가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새삼스럽게 고마움이 밀려 올라왔다.

춘매가 있어서 행복하군. 고마워~!”

우창이 이렇게 말하자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해를 보던 춘매가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어서 가요. 이내 어두워지겠어요. 저녁을 초청받았으니 맛있게 먹어야죠. 춘매는 오늘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호호호~!”

차관으로 돌아오자 탁자에는 소박하지만 정갈하게 차려진 밥상과 그 옆에서는 탕이 끓고 있었다. 주인은 아까 배를 젓고 왔던 사공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다가 우창의 일행이 돌아오는 것을 보면서 반겨 맞았다.

오늘은 복이 많으신 분들이 오셔서인지 노을이 아름다웠죠? 날마다 그런 것은 아니거든요. 축하합니다. 변변치는 못하지만 맛있게 드셔 주시기 바랍니다. 사공은 저랑 같이 밥을 먹을 테니까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이시기 바래요.”

이렇게 정중하게 말하자 사공도 한마디 거들었다.

여태 사공 노릇을 했으나 오늘처럼 이렇게 저녁밥을 대접하는 손님은 보지 못했는데 고마운 말씀을 많이 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덕분(德分)에 저녁은 따뜻한 밥으로 해결하게 되었으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하~!”

우창도 합장으로 화답하고는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다음에 또 놀러 오라는 여인의 말과 함께 맛보라고 싸주는 귤차를 진명이 받아 들고 차관을 나섰다. 문을 나서며 진명이 여인에게 혹 우리가 생각나면 한산사 옆의 오행원으로 찾아와도 된다는 말을 남기고는 다시 사공이 젓는 삐걱삐걱하는 노의 소리를 들으면서 아름다운 태호의 야경(夜景)을 감상하다 보니 부두였다. 사공과 작별하고 오월루로 돌아왔다. 객청(客廳)에는 여기저기 사람들이 모여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본 진명이 우창에게 말했다.

스승님, 아직 초저녁이니 주무시기는 이르잖아요? 모처럼 오행원을 벗어났으니 술을 한잔 마시는 것이 어떨까요? 오늘은 술이 마시고 싶은걸요. 호호호~!”

진명이 이렇게 말하자 춘매도 동의했다.

~! 춘매도 그러고 싶어요. 언니는요?”

춘매가 최은주를 보면서 말하자 은주도 반기면서 말했다.

그래도 된다면 당연히 환영이야. 그렇지 않아도 마음은 있었는데 공부만 하시는 분들이라서 어떤지 몰라서 망설였지 뭐야. 호호호~!”

모두 봄나들이에 마음이 흥분되어서인지 오늘은 이렇게 보내고 싶었던지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기의 주량에 따라서 마시면서 여흥(餘興)을 즐겼다.

춘매가 우창에게 물었다.

이 빈관의 이름이 오월루(吳越樓)잖아요? 이름이 왜 이렇게 생겼을까요? 스승님은 혹시 이름에 깃든 뜻을 아실 것으로 생각이 되어서 여쭤봐요.”

이름이 좀 특이하다고 생각했던가 보군. 내가 생각해 보니까 춘추전국시대에 오나라와 월나라가 서로 무수히 많은 전쟁을 했거든. 그래서 원수로 지냈는데 또 때로는 같이 힘을 합해야 할 때도 있었어. 그래서 나온 말이 오월동주(吳越同舟)라고 하기도 하지. 그리고 이 소주는 바로 오와 월이 항상 서로 차지하려고 전쟁을 벌였던 곳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기념해서 지은 이름이지 싶군. 그러니까 서로 원수처럼 지내던 사이라고 하더라도 여기에서 술 한 잔으로 모두 풀어버리고 행복하게 되라는 의미일까? 하하~!”

우창이 이렇게 설명하자, 자원이 보충해서 말했다.

춘매동생은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말을 들어 봤어?”

그야 들어봤죠. 힘들게 견디는 것을 말하잖아요. 다만 그 고사의 내용은 잘 모르겠어요. 말씀해 주실 거죠?”

오월의 끈질기게 기나긴 세월을 빼앗기고 빼앗기를 수없이 반복하던 막바지였던 시기에 있었던 이야기야. 오왕(吳王)의 합려(闔閭)가 전쟁에서 패하며 깊은 상처를 입고 죽게 되자 아들인 부차(夫差)에게 유언을 남겼어. ‘월왕(越王) 구천을 죽여서 아비의 원수를 갚아라고 말이야. 그래서 부차는 아버지의 유언을 잊지 않으려고 잠을 잘 적에는 폭신하고 따뜻한 이부자리를 물리고 가시가 달린 나뭇가지를 깔고 잠을 자면서 복수의 생각을 했었어. 그래서 누울 와()에 땔나무 신()이 나온 거야.”

자원이 이렇게 설명하자 춘매가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아하~! 복수의 생각을 잊지 않으려고 그랬구나. 그렇다면 상담(嘗膽)은 쓸개 담()과 맛볼 상()인 것으로 봐서 쓸개를 핥으면서 복수의 생각을 놓지 않았다는 거잖아? 부차의 복수심이 대단했었네.”

춘매가 이렇게 말하자, 자원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야. 호호호~!”

그래? 그럼 뭐지?”

이번에는 오왕 부차(夫差)가 월왕 구천(勾踐)과 싸워서 이긴 거야. 아버지의 원한을 풀어주게 된 것이지. 그리고는 구천이 복수의 기회를 보기 위해서 환심을 사려고 부차에게 거짓으로 항복하고는 마구간에서 말을 돌보는 일을 자청했던 거야. 그러자 부차가 이를 가상하게 여겨서 한동안 지켜보다가 월()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지. 그 후로 구천은 원한을 잊지 않으려고 항상 머리맡에다 쓸개를 매달아 놓고는 그것을 핥으면서 치욕을 잊지 말도록 자책(自責)했다는 것에서 나온 말이야. 그러니까 와신상담에는 오월(吳越)의 역사가 깃들어 있다고 하겠네. 호호호~!”

~ 자칫했으면 헛소리할 뻔했잖아. 정말 자원 언니는 모르는 것이 없다니깐. 덕분에 잘 배웠어. 호호호~!”

웃음소리가 오래도록 이어지던 술자리는 거의 자정(子正)이 되어서야 파하고는 저마다 숙소에서 고단했던 하루를 마무리했다.

 

우창은 언제나 그렇듯이 새벽에 일어나서 산책을 나섰다. 여명(黎明)의 태호를 바라보는 풍경은 낮에 보는 것과는 판이하게 느껴졌다. 버드나무가 바람에 일렁이는 것도 운치가 있었고, 벚꽃이 하얗게 흩날리는 것은 한겨울의 백설(白雪)이 분분(紛紛)한 것을 연상시켜서 차분한 분위기가 무척이나 운치(韻致)있게 느껴졌다. 수면(水面)에는 짙은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보였던 나무들이 안개 속으로 빨려들 듯이 사라지고 주변은 온통 운무(雲霧)만이 보이는 진풍경을 보고 자연의 변화무쌍(變化無雙)함을 감탄하면서 바로 앞만 보이는 정도의 호반(湖畔)을 걸었다.

얼마를 사색에 잠겨서 걷자 안개 속에서 전망대(展望臺)가 나타났다. 팔각정(八角亭)의 현판에는 동문정(東門亭)이라고 쓰여 있었다. 지금은 전망대는 있으나 마나였다. 그래도 습관적으로 정자에 올라가자 태호를 조망하는 의자가 있었고, 앉아보려고 다가가서야 한 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이 눈에 익어서 자세히 살펴보니 어제까지 술을 마시며 함께 했던 최은주였다. 일찍 일어나서 산책을 나왔던 것으로 생각한 우창이 다가가서 말했다.

일찍 일어나셨구나. 나도 잠이 깨서 산책을 나왔는데 안개 때문에 멋진 태호가 사라져 버렸잖은가. 하하하~!”

최은주가 생각에 잠겼다가 우창의 소리에 깜짝 놀란 듯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는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스승님, 일찍 일어나셨네요. 다시 보니 반가워요. 호호~!”

안개 속에서 만나는 최은주의 모습이라서인지 더욱 반가웠고, 그래서 더 예뻐 보였다. 의자에 앉았다가 일어나서 인사하는 최은주에게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최은주도 우창의 손을 잡았다.

손이 차갑구나. 일찍 나왔던가 보네?”

이렇게 스승님께서 찾아와 주신 것을 천지신명(天地神明)께 감사드려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었으니 말이에요.”

그래......”

우창은 아무 말도 생각이 나지 않아서 이렇게 말하고는 최은주의 얼굴을 바라봤다.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있었고, 입에는 엷은 미소를 띠고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은 더없이 곱게 보였다.

앉지...... 춥지는 않아?”

우창이 이렇게 말하자 최은주도 우창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은주는 예전에 믿지 않았던 것을 믿게 되었어요.”

그래? ?”

사람들이 운명적(運命的)인 상봉(相逢)’이라고 하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도 세상에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고 생각했죠. 괜히 운명을 끌어다가 핑계를 댄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스승님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 말의 뜻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는 것이 꼭 있다는 의미까지도 덤으로 깨달았잖아요. 이제는 남들이 그렇게 말을 해도 당연하다고 생각할뿐더러 누가 물으면 은주도 당연히 그렇게 말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참 신기하죠? 호호호~!”

맞아, 겪어보지 않아도 아는 것은 이성적(理性的)인 판단이고, 겪어봐야만 알 수가 있는 것은 감성적(感性的)이겠지. 그러니까 감정(感情)이란 천언만어(千言萬語)로 설명한다고 해도 전해 줄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시인은 자연에서 얻은 영감을 빗대서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가 없음을 안타까워하지. 그래서 뭐라고 그래? ‘할 말은 많아도 이 마음을 언설(言說)로 나타낼 수가 없으니 차라리 말을 하지 않겠노라라고 하더란 말이야. 하하~!”

엄머, 맞아요! 지금 은주의 마음이 딱 그만큼이에요. 스승님의 표현력이라면 감정에서 하고자 하는 느낌도 설명할 수가 있으시겠는걸요. 호호~!”

우창은 최은주를 만나면서부터 줄곧 인연의 오묘함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전생의 이야기가 떠올랐으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것은 혼자만 알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 안개가 서서히 걷히네요. 같이 걸어요. 파도 소리 들으면서 밝아오는 새벽 풍경을 보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지 싶어요.”

그대가 새벽의 맛을 제대로 알고 있다는 것이 고마울 따름일세. 하하~!”

이것은 우창에게 큰 선물이었다. 항상 혼자서 새벽에 산책했는데 앞으로는 함께 할 수가 있어서 좋겠다는 설렘이 생겨서였다. 이것도 인연일까 싶은 생각을 했다.

새벽을 보지 못한 날은 하루를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스승님도 새벽을 좋아한다는 것에 감사해요. 호호~!”

내 맘도 그렇다네. 통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하하하~!”

최은주는 우창의 손을 놓지 않았다. 우창의 따뜻한 온기가 좋아서였지만 그것보다도 감정이 소통(疏通)하고 있는 느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우창도 차가운 최은주의 손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걸었다. 그렇게 해가 동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면서 솟아오를 때까지 걷다가 오월루로 돌아갔다.

객청으로 올라가자 텅빈 공간에는 한가운데에 피워놓은 숯불 위에서 물이 김을 내뿜으면서 끓어오르고 있었다. 누구라도 일찍 나와서 차를 타서 마시라는 배려였다.

따뜻한 차가 좋겠어요. 차 마셔요.”

최은주는 우창의 답을 들을 것도 없이 차와 술을 진열해 놓은 곳으로 가서는 주인이 내어놓은 차 중에서 홍차(紅茶)를 골랐다.

오늘은 홍차가 좋겠어요. 스승님은요?”

나도~!”

잠시 후 차를 우려서 두 잔 들고 와서 우창의 앞에 놓으면서 말했다.

홍차는 역시 기홍(祁紅)이죠?”

기홍이면.....?”

, 기홍은 안휘(安徽)의 기문현(祁門縣)에서 나는 홍차를 말하거든요. 홍차를 좋아해서 여러 곳의 차를 마셔봤는데 제 입맛에는 기홍의 부드러운 맛이 이른 아침에 마시기에 더없이 좋은데 스승님도 그렇게 느껴지시는지 마셔보세요. 호호~!”

최은주가 내미는 찻잔을 받아 들면서 말했다.

은주는 차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구나. 난 녹차(綠茶)나 오룡차(烏龍茶)는 많이 마셨어도 기홍은 처음 들어봤고, 홍차도 처음 마셔보는 건데 과연 부드러우면서도 짙은 풍미가 느껴지는 것 같군. 이것이 기홍의 맛인가?”

맞아요. 특히 새벽잠을 깨우는 차로는 그저 그만이에요. 녹차를 새벽에 마시는 것은 좀 부담스럽잖아요. 맛이 좋으면 제게 있는 기홍을 나눠드릴게요. 새벽마다 홍차를 마시면서 은주를 생각하셔도 좋고요. 호호호~!”

이렇게 말하면서 수줍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