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9] 제39장. 춘풍(春風)/ 7.자작자수(自作自受)

작성일
2023-10-25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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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9] 39. 춘풍(春風)

 

7. 자작자수(自作自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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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원은 여느 때와 달리 분주했다. 청명(淸明)이었다. 오늘 저녁에 이곳에서 우창과 최은주의 혼인식(婚姻式)을 치러야 하는 날이니 당연히 분주할 수밖에 없었다. 우창과 최은주는 조용하게 두 사람을 축하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나 자사는 또 입장이 좀 달랐기 때문에 어른이 진행하시는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며칠 전에 최은주의 모친도 찾아가서 인사를 했다.

오후가 되자 사람들이 속속 도착하여 더욱 시끌벅적했다. 자사는 음식을 도맡을 식당을 마당에 차리라고 해 놓고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먹고 즐기도록 안배했다. 진명과 염재도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면서 진행을 도왔다. 신랑과 신부의 맞절까지도 축하해 주고는 열렬한 제자들의 박수를 받으면서 두 사람은 신방으로 꾸며놓은 별채로 들어갔다. 밤이 깊어가자 자사도 휘하의 사람들과 최은주의 모친들을 대동하고 돌아갔고, 오행원은 다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적막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오행원에 식구가 한 사람 더 늘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새벽의 적막을 깨면서 초급의 제자들을 위해서 고월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밖으로 울려 나왔고, 춘매는 가족들이 먹을 음식을 마련하고 있었다.

우창도 일찍 잠이 깼다. 항상 혼자서 자다가 사람이 하나 늘고 보니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어서 잠을 설쳤으나 기분은 한없이 좋았다. 옆에서 곤하게 잠들어 있는 이제는 아내가 된 최은주를 보면서 비로소 홑몸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렇게 지그시 바라보다가 살며시 일어나서 언제나처럼 밖으로 산책했다. 최은주는 곤하게 잠에 빠져있어서 깨지 않도록 조심했다.

호젓한 길을 천천히 걸으면서 지저귀는 산새들 소리를 들었다.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 소리와 두부를 팔러 다니는 소리도 섞여서 새벽을 깨우고 있는 풍경이 좋았다. 언제나 항상 보고 듣던 풍경이고 소리였지만 오늘은 왠지 특별해 보이는 느낌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뒤를 따랐기 때문이려니 싶었다.

서재로 돌아와서 물을 끓이고 있는데 최은주가 들어왔다.

일찍 산책 다녀오셨어요? 저는 고단했던가 봐요. 나가시는 것도 몰랐어요. ”

얼마나 고단했겠어. 사람에게 치이는 것도 참 힘들었을 텐데 그래도 일찍 일어났네. 물이 끓으니까 차 마실까?”

좋아요. 오늘 새벽에는 입안이 상쾌하게 귤차를 마시는 것이 좋겠어요. 서산도에서 얻어온 것이 있잖아요.”

우창도 그것이 생각나서 꺼내서 찻잔에 하나씩 넣고는 끓는 물을 부었다. 잠시 후에 상쾌한 귤의 향이 서재를 가득 채웠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최은주가 우창을 보며 말했다.

흡사 오래전부터 이렇게 마주하고 차를 마셨던 것만 같아요. 이렇게 익숙한 분위기는 뭘까요?”

그랬었나 보지. 나도 그런 것을 보면 전생에도 이렇게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눴을지도 모르지. 하하~!”

아마도 그랬을 거예요. 어제는 엄마께서도 너무나 기뻐하셔서 내심 고마웠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엄마께서 원하시는 대로 돌아가시기 전에 효도 한 번 하려나 싶었는데 이렇게나 쉽게 그 소망이 이뤄졌으니 말이에요. 호호~!”

다행이구나. 내가 뭔가 착한 일을 하는데 거들었다는 말이지? 하하하~!”

맞아요. 그런데 시부모님은 언제 뵈러 가죠? 어디에 계시나요? 그것도 안 물어봤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죠? 호호호~!”

부모님이 계셨더라면 당연히 모셔 왔겠지. 모두 저세상으로 떠나신 지도 이미 오래이니 뵙게 해 드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군. 그러니 찾아갈 곳도 없다네. 그래서 나도 장모님을 어머니로 여기고 자주 찾아뵐 요량이라네.”

, 그러셨구나. 알았어요. 자원 언니가 가르쳐주는 공부가 너무 재미있어요. 스승님을 옆에서 보필하려면 그만큼은 아니라도 웬만큼은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막상 해 보니까 이렇게 재미있는 것이 어디에 또 있을까 싶다니까요. 그래서 오히려 깊이 빠져들고 있어요.”

그것참 다행이로군. 오행공부가 재미있다니 자원에게 내가 감사해야 하겠는걸. 자원의 성품이 찬찬하고 꼼꼼하니까 잘 알려줄 테니까 열심히 익혀봐.”

그런데 부탁이 있어요. 비록 어설프긴 하지만 그래도 공부의 길로 들어섰으니 이제 아호(雅號)를 하나 지어주세요. 은주도 다른 선생들처럼 아호로 불리고 싶단 말이에요. 그동안에는 공부도 얼마 못했거니와 바빠서 부탁을 못 드렸는데 오늘 새벽에는 혼인한 기념으로 아호를 주시면 의미가 더욱 크지 않겠어요? 호호~!”

최은주가 자신에게도 호를 지어달라는 말에 우창이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호는 스스로 짓는 것이라네. 혹 맘에 둔 것이 있으면 말해 봐.”

, 그런 거예요? 원래 호는 스승이 지어주는 것이라고 들었는데?”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 제자라면 당연히 그렇지. 다만 이미 세상을 살 만큼 살아온 사람이야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나타내는 호를 짓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니까.”

최은주가 우창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까 그것도 일리가 있네요. 실은 제 이름자가 은주이니까 풀이하면 은구슬이잖아요? 그래서 아호를 서옥(瑞玉)이라고 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을 해 본 적은 있어요. 듣기에 좀 촌스럽죠?”

최은주의 말에 우창이 중얼거려 봤다. 어감도 좋았다.

~ 좋은걸. 어감도 좋고 뜻도 좋고 우창과도 잘 어울리네. 그렇다면 오늘부터 아호를 서옥이라고 하자. 서옥 선생~! 하하하~!”

서옥 선생이라고 하니까 조금은 있어 보이네요. 좋아요. 호호호~!”

그래, 재미있게 공부하면서 살아보세. 그만 밥 먹으러 갈까?”

그러고 보니 아침 시간이네요. 어서 가요.”

우창과 서옥이 함께 식당으로 가자 춘매는 따로 부부의 겸상(兼床)을 차려놓고는 우창 내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반겨 맞았다.

스승님, 오늘부터 두 분은 따로 상을 차려드리기로 했어요. 그래야 우리가 편할 것 같아서 말이에요. 호호호~!”

우창은 춘매의 배려에 감동하면서 차려 준 상을 받았다. 그러면서 제자들의 상을 둘러봤다. 혹시라도 음식에도 차별(差別)이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그것을 본 춘매가 말했다.

스승님, 밥상의 구별(區別)은 있어도 음식의 차별(差別)은 없어요. 똑같이 차렸으니까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마시고 드세요. 호호호~!”

춘매는 우창 부부의 상을 차려주는 것이 즐거웠다. 우창은 제자들과 함께 먹는 아침이 행복했다.

아침을 먹고 나자 소주자사가 백발과 함께 나들이했다. 어제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는데 조용한 시간이 찾아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옥이 다과(茶菓)를 대접했다.

백부님 이제 아호로 불러주세요. 서옥(瑞玉)이에요. 아셨죠?”

그래? 어른이 되었다고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뜻이로구나. 그래 알았다 서옥아. 허허허~!”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백발이 한마디 거들었다.

, 스스로 옥이 되면 남들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말이지? 그렇게 만인의 사랑과 우창의 아낌없는 보살핌을 받으면서 행복한 나날이 되게나. 하하하~!”

고마워요, 백발 숙부~! 오행 공부를 시작했으니까 앞으로도 많이 가르쳐 주세요. 신기막측(神奇莫測)한 면상술(面相術)도 언젠가는 배우고 싶어요.”

그야 무슨 문제가 되겠나. 언제든 말만 하게. 사모님이 부탁하면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가르침을 드려야지. 이미 내가 상학을 가르치고 있으니 공부는 시작이 된 셈인데 뭘. 하하하~!”

숙부님, 놀리지 마시고요. 사모가 뭐예요. 그냥 서옥아~!’로 불러주시기를 간청드리겠사옵니다. 호호호~!”

이렇게 말하자 모두 한바탕 웃었다. 오늘은 백발의 면상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 날이기도 해서 차를 마시고는 시간이 되자 강당으로 갔다. 우창은 모두 공부하러 들어가고 나자 조용히 의자에 기대어 앉아서 정신없이 보낸 며칠을 되새겼다.

무슨 일이든 순식간(瞬息間)에 일어나는 것이 신기하고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을 생각했다. 예측(豫測)하고 준비하는 것도 있지만,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다가와서 소용돌이처럼 몰아치는 급류(急流)를 만나게 되었을 적에는 이성적(理性的)인 판단할 겨를도 없음을 느꼈다. 함께 하는 것과 부부가 된다는 것도 생각해 봤다. 그동안 여인들과 즐거운 도락(道樂)을 누렸는데 백년가약(百年佳約)은 또 다른 인연이라는 것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래서 인륜대사(人倫大事)라고 한다는 것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에 서옥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증세도 완전히 사라졌다. 그야말로 월하노인이 두 사람을 맺어주고는 떠나갔던 모양이다.

 

저녁을 먹고는 술시(戌時)가 되자, 우창의 이야기를 듣고자 오행원의 제자들이 자리에 앉았다. 우창도 강단에 앉았다. 오늘은 또 무슨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인지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시간이 우창도 무척이나 좋았다. 지금이 바로 그 시간이었다. 차를 마시면서 대중을 둘러봤다. 눈빛이 초롱초롱한 것을 보면서 새로운 열정이 불타올랐다. 채운이 먼저 손을 들었다.

스승님, 제자들을 대표해서 혼인을 축하드려요.”

고맙습니다. 여러분의 정성으로 무사히 잘 치를 수가 있었습니다. 모두 함께 수고해 주셨기 때문이지요.”

우창이 이렇게 말하면서 합장하고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제자들도 답례하자 채운이 다시 물었다.

스승님, 으늘은 문득 혼인에 대해서 여쭙고 싶어요. 특히 여인의 배우자 인연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 좋겠어요. 어떤 여인은 별다른 능력도 없는데 훌륭한 남편을 만나서 호의호식(好衣好食)하는가 하면, 또 어떤 여인은 재색(財色)을 겸비(兼備)했음에도 허랑방탕(虛浪放蕩)한 남편을 만나서 일생을 고단하게 일만 하면서 늙어가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채운이 이렇게 묻자 우창도 잠시 생각하고는 답했다.

그렇습니다. 비단 여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남자도 능력을 갖추지 못했더라도 아내를 잘 만나서 잘 지내기도 하지만, 또 출중(出衆)한 재능(才能)을 타고났더라도 처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정신적(精神的)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기도 하니 이것은 남녀가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겠습니다. 혼인하지 않는다면 해당이 없겠으나 인연을 만나고 나면 또 다른 인연(因緣)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창의 말에 채운이 다시 물었다.

혼인하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혼자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좋을까요? 흑백논리로 여쭙는다면 어떻게 답을 하시겠어요?”

채운의 물음을 들으면서 우창도 잠시 생각을 해 보고서 답했다.

옛말에 혼인은 해도 후회하고 하지 않아도 후회한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말이 존재한다는 것은 혼인에 대해서 실패할 가능성이 성공할 가능성보다 훨씬 더 높아서 그런 말이 나온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 봤습니다.”

왜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셨나요? 모든 것이 다 그렇듯이 혼인도 성공과 실패가 반반(半半)이라고 한다면 혼인으로 인해서 행복할 가능성도 그만큼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당연하지요. 아마도 객관적(客觀的)으로 본다면 반반이 맞을 것입니다. 아니, 반반이라기보다는 3할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행복할 가능성과 불행할 가능성이 각각 3할이고,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한 경우도 3할은 있을 것입니다.”

우창의 말을 듣고 있던 유하가 손을 들고는 말했다.

스승님의 말씀이 이치에도 타당하고 현실적으로도 맞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럼에도 혼인함으로써 고통이 된다는 인식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저마다 팔자대로 만나서 살아가는 것이라면 팔자를 봐서 짐작할 수가 있을 테니 미리 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과연 팔자의 인연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게 될지 궁금해요.”

유하의 맑고도 큰 음성이 강의실을 가득 채웠다. 오랜 시간을 무대에서 공연했던 것으로 인해서 목소리가 커진 것이 이런 때도 매우 유용하게 쓰였다.

팔자의 영향이 절반은 차지할 것으로 봅니다. 나머지 절반은 환경의 영향이라고 하겠습니다.”

우창이 이렇게 말하자 이번에는 군엄(君嚴)이 물었다.

보통은 팔자대로 산다고 하는데 스승님의 말씀대로라면 절반밖에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까? 의외입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그야 팔자를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겠지요. 피할 수가 없는 일을 당하면 팔자려니 하는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 봐도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절반은 팔자의 영향이라고 하는 것도 실은 엄청난 것임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절반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겠습니다. 절반은 숙명(宿命)의 인연으로 만난다고 하겠고, 나머지 절반은 환경(環境)의 영향으로 만난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보는 것이 비교적 객관적인 판단이 되리라고 봅니다. 명학(命學)을 연구하는 여러분의 관점에서는 온전(溫全)히 팔자의 영향이라고 하고 싶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반드시 그렇게 된다면 운명은 개선(改善)이나 개악(改惡)이 될 여지도 없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조물자(造物子)의 계획이 있다면 금생(今生)에도 진화(進化)의 여지를 남겨놨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하하~!”

스승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과연 이치에 타당하게 생각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의 영향은 어떻게 살필 수가 있겠습니까? 스승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 것에도 이유가 있으리라고 여겨집니다.”

군엄이 진지하게 다시 묻자 우창도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목청을 가다듬고서 말을 이었다.

가령, 하나의 방에 장성한 청춘의 남녀가 함께 머무르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창이 이렇게 되묻자 이번에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현지(玄智)가 손을 들고 말했다.

스승님, 제자가 생각하기에는 두 남녀는 본능적으로 음양지도(陰陽之道)를 이루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어요. 만약에 그렇게 한 공간에 함께 하는 것조차도 팔자라고 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에요.”

오호~ 그것조차도 팔자의 영향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셨습니까? 과연 학문을 연구하는 자세입니다. 하하하~!”

우창이 칭찬하자 현지가 합장으로 고마움을 표하자 우창의 말이 이어졌다.

만약에 그렇게 팔자대로 만난다면 도중에 헤어지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별(死別)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함께 하면서 반목(反目)하게 되어서 급기야 생이별(生離別)하게 되기도 하니 이러한 것을 보면서 부부인연의 절반은 환경에 의한다고 봐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창이 이렇게 말하면서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시자 대중들도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다시 이어서 말했다.

남녀가 만나서 부부의 인연으로 이어지는 것이 팔자이기도 하고, 전생의 인연이기도 하고, 환경의 영향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부부가 서로에게 실망(失望)하고서 헤어지는 것도 또한 팔자이기도 하고 전생의 인연이기도 하고 환경의 영향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팔자에서 말하는 인연법은 참고할 만하다고 하면 충분할 것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현지가 다시 말했다.

스승님의 말씀에 공감(共感)하겠어요. 부부의 인연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해 보게 되네요. 그러니까 부부궁(夫婦宮)이 완미(完美)하더라도 가정(家庭)이 화목(和睦)하다는 단언(斷言)은 할 수가 없다는 의미잖아요? 반면에 불미(不美)하더라도 또한 가정은 반드시 불목(不睦)하다고도 할 수가 없다는 말씀이기도 하니 오히려 이치에 타당하다고 여겨지네요.”

맞습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상당(相當)한 노력(努力)이 필요하게 됩니다. 부부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노력하지 않는다면 평생을 행복한 마음만으로 살아갈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혼인을 한 다음에는 쌍방(雙方)이 서로 노력하고 양보하면서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려니 합니다.”

우창의 말을 듣고 다시 생각하던 현지가 의견을 말했다.

비록 팔자의 배우자궁인 일지(日支)에 기구신(忌仇神)이 있다하더라도 지극한 노력을 하게 되면 희용신(喜用神)까지는 아니라도 한신(閑神)의 정도는 될 수가 있다는 의미로 들리기도 하네요. 반대로 그 자리에 용신(用神)이 있다고 하더라도 배우자에게 끝없이 요구한다면 상대방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떠나갈 수도 있을 테니까 노력의 의미가 새삼스럽게 중요함을 깨닫겠어요. 그렇다면 팔자대로 산다는 말은 앞에 어느 정도라는 수식어(修飾語)를 붙어야 하겠잖아요?”

현지는 생각하는 것이 무척 명쾌(明快)했다. 우창이 말하는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과연 어느 정도는 팔자대로 살겠으나 절대적인 것으로 알고서 확신(確信)으로 말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나이가 지긋한 안산(安山)이 손을 들었다. 우창이 무슨 말이 있느냐는 듯이 바라보자 말했다.

스승님, 제자가 알고 있는 부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볼까 합니다. 다른 도반들의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서입니다. 특히 노력이 중요하다는 점에 대해서 말씀을 들으면서 떠오른 이야기입니다.”

, 그렇습니까? 당연히 말씀해 주셔야지요. 경청하겠습니다.”

우창이 이렇게 말하며 의자에 앉자 안산이 앞으로 나와서 대중을 향해서 말했다.

제가 잘 알고 있는 형님이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오행 공부를 하면서 항상 묻고 답했던 형님으로 역학(易學)에 대해서도 깊은 통찰을 하고 있었던 형님이어서 항상 배우려는 마음을 품고 있는 형님이셨지요. 그 형님 부부의 사주를 보게 되었는데 일주(日柱)는 임자(壬子)였고 용신은 화토(火土)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처궁(妻宮)은 기구신에 해당하는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이번에 소주로 오는 길에 형님을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제자가 보기에는 일지에 기구신이 있음에도 부부는 잘 지내고 있는 것으로 보였기에 그에 대한 의문을 풀고자 함이었지요.”

안산의 말을 듣고 모두 귀를 기울였다. 항상 궁금했던 부분이기도 했던 까닭이었다. 안산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오늘 찾아뵌 것은 형님이 아내를 대하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를 확인하려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혼인을 후회하기도 하고 헤어지려고도 생각했더랍니다. 그렇게 해서 아내에게 불평을 말하기도 하고 소위 말하는 구박(驅迫)도 했었답니다. 그렇게 힘든 중에도 묵묵하게 그것을 받아주는 아내를 보면서 하루는 반성(反省)했답니다.”

안산의 말은 우창에게도 참으로 의미심장(意味深長)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혼인을 하고서 이야기를 듣게 되니 더욱 가슴을 파고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형님이 제게 들려주신 말입니다. ‘아우야 내가 생각을 해 보니까, 실은 내가 나쁜 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 뭔가. 불만족(不滿足)은 당연히 말을 할 필요도 없었네. 다만 그 불만족이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지 않았겠나? 그랬더니 온전히 내 욕망(慾望)에서 나온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네. 내가 바랬던 것은 처도 나와 같이 학문을 궁리하면서 서로 공맹(孔孟)을 논하고, 노장(老莊)과 불학(佛學)까지도 섭렵하면서 함께 즐기기를 원했던 것이었다네. 이러한 생각을 자네가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그런데 처는 학문에 대해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 그때부터 후회가 되기 시작했지. 내 뜻을 관철(貫徹)시키기 위해서 아무리 강요도 하고 회유도 해 봤으나 그것도 한두 번이지 억지로 지속할 수는 없었던 거야. 급기야 나도 성정을 제어하지 못하여 크게 폭발하고 말없이 가출해서 유람하기도 했고, 다른 여인을 찾아보기도 했었지 뭔가.”

안산이 잠시 말을 멈추고 대중을 둘러 봤다. 모두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집을 떠나고서야 비로소 아내를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가 있었지. 살아온 나날을 아내의 입장이 되어서 다시 생각해 보니 늙으신 시부모(媤父母)를 봉양함에 조금도 게으름이 없었어. 내가 공부하고자 하면 글을 읽는데 어두울까 봐서 등불을 밝혀주고 우는 아이들을 데리고는 밖으로 나갔으며, 밥때가 되면 정성을 다해서 먹거리를 마련해서 상에 올렸었다는 것도 생각하게 되었네. 그러자 비로소 깨달았지. 팔자대로 받은 느낌이 선입견(先入見)이었다는 것을 말이네. 나도 웬만큼 명학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으니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었지. 그래서 그 순간부터 다시 아내를 살펴보게 되었던 것이라네. 혼자 밖을 떠돌면서 생각해 보니까 이미 아내의 편안함에 나도 모르게 길이 들여져 있었던 것을 알았지. 아내의 존재가 내게 얼마나 큰 도움을 주고 있었는지를 그제야 알게 되었으니 비로소 너무나 고맙고 미안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네.”

이렇게 말한 안산이 자신의 의견도 첨부했다.

그렇게 말하는 형님의 표정에서 참으로 후회한다는 마음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진즉에 이러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서 배부른 투정만 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던 것이지요. 사람은 팔자대로만 사는 것이 아닌가 보다는 생각은 그때 형님의 말을 들으면서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형님의 말씀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나서는 다시 형님의 이야기를 설명했다.

실로 생각해 보면, 내 욕심만 채우려고 했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고 나서는 떠났던 마음을 고쳐먹게 되고서야 귀가하게 되었지. 그리고 아내가 돌아온 나를 그렇게 기쁜 표정으로 반기는 것을 보면서 내심으로 얼마나 미안했던지 말도 하지 못할 지경이었네. 그런데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나? 그냥 말없이 아내를 힘껏 포옹(抱擁)할 따름이었다네. 그렇게 껴안고 아내를 바라보는 순간 원망하던 마음과 아쉬웠던 감정들은 봄눈처럼 녹아내렸다네. 이것은 팔자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을 비록 수행이랄 것도 없지만 스스로 각성(覺醒)함으로 인해서 좋은 인연으로 전환(轉換)이 된 것이라고 하면 어떨까 싶더군.’이라고 하면서 웃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웃는 형님의 모습에서 아내에 대한 애정이 가득하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말한 안산이 다시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스승님과 도반들도 이러한 이야기를 들어둔다면 후에 누군가에게 조언하게 될 적에 참고가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울러서 오늘 말씀해 주신 대로 팔자의 영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나, 노력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확연(確然)하게 깨달았습니다. 그 형님의 말씀과 오늘 들은 스승님의 말씀이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보니까 비로소 그간에 남아 있었던 의문이 말끔히 해소(解消)되었습니다. 더불어서 부부의 인연도 이와 같을진대, 자녀의 인연이며 이웃과의 인연도 또한 이와 같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운명도 하나의 조건이고 암시일 뿐이지 그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다만 그에 대해서는 얼마만큼 노력하느냐에 달렸다고 생각이 됩니다.”

안산이 이렇게 말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가서 앉자 대중들도 우레같은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안산의 말이 끝나자 우창이 잠시 생각해 보고는 말했다.

역시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 맞습니다. 직접 보고 들었던 이야기가 이렇게도 생명력이 느껴질 정도로 공감이 되니 말입니다. 막연하게 이론적으로 생각했던 부분조차도 현실감이 느껴지니 오늘 안산의 경험담은 우리 모두에게 큰 깨침이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혹 여기에 대해서 말씀하실 분이 계십니까?”

우창이 이렇게 말하면서 대중을 둘러보자 서평(西平)이 손을 들었다. 예전에 재물(財物)에 대해서 논의했던 제자임을 떠올리고서 눈길을 주었다.

, 말씀하시지요.”

우창의 허락을 받고서 서평이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말했다.

스승님의 가르침과 안산 도반의 말씀에 감동했습니다. 마음이 모든 것을 다 꾸려가는 것임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불학(佛學)에서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했습니다. 그 유심(唯心)의 장난으로 말미암아 행복한 삶이 되기도 하고 불행하다고 여기는 삶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도 자신의 욕망(慾望)에서 비롯할 수가 있겠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서 손을 들었던 것입니다.”

서평이 이렇게 말하자 우창도 궁금해서 귀를 기울였다. 서평의 말이 이어졌다.

팔자는 욕망을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저마다 팔자가 다르듯이 세상을 바라보는 모습도 다르겠습니다. 남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현처(賢妻)라고 할지라도 스스로는 둔처(鈍妻)라고 여기고 불평불만(不平不滿)을 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팔자는 감정(感情)이고 수행은 이성(理性)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팔자를 탓하고 살아도 일생이고 수행하면서 살아도 일생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렇기에 기왕 주어진 팔자를 탓한다고 해서 돌아올 것이 아무것도 없는 줄을 안다면 오히려 팔자를 성찰(省察)하고는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자신의 허물을 반추(反芻)한다면 어찌 복된 삶이 되지 않겠느냐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달리 말씀드리면, 감정적인 사람은 팔자를 못 면하고 이성적인 사람은 팔자를 개선(改善)하는 것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다시 생각하면, 스승님의 말씀대로 팔자도 중요하나 환경과 노력도 그에 못지않다는 것이 지당(至當)합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말씀을 이렇게라도 전하고 싶어서 주제넘게 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고맙습니다.”

 

 

서평의 말에 우창도 고마워서 합장했다.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를 해주자 다른 제자들도 머릿속이 개운해져서 큰 박수로 호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