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2] 제38장. 소주오행원/ 14.오욕칠정(五慾七情)

작성일
2023-09-20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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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2] 38. 소주오행원(蘇州五行院)

 

14. 오욕칠정(五慾七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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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한 나날이 화살처럼 흘러갔다. 우창은 제자들과 만나는 시간이 기다려졌고 또 무슨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인지를 생각하면 그것도 설렘이었다. 술시(戌時)가 되자 다시 제자들이 강당에 모였고 최은주도 자원의 옆에 앉아서 우창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스승님께 인사드립니다~!”

모두 함께 우렁찬 소리로 우창을 맞이했다. 우창도 합장하고는 모두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날마다 오행의 이치를 궁구하느라고 여념이 없는 여러분을 보면서 무한한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 오늘은 어떤 질문을 하시려는지 들어보겠습니다.”

우창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수경(水鏡)이 손을 들고 말했다.

저희 제자들도 스승님의 아낌없는 배려로 온포(溫飽)의 걱정이 없이 수학(修學)에 전념할 수가 있음에 한량없는 행복을 누리고 있어요. 더구나 이번에 새롭게 공부하게 된 백발 스승님의 상학은 또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관점으로 삶을 돌아보게 되어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백발 스승님의 말씀에 인간의 오욕칠정(五慾七情)이 모두 얼굴에 타고난다고 하셨는데 지난번에 스승님의 말씀에서 오욕에 대한 이치를 깨닫고 보니 오히려 새롭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오늘 스승님께 칠정에 대해서 말씀을 듣고 싶었습니다. 이 모두가 감정(感情)의 변화(變化)라고 하겠지만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마다 다른 것이 신기하기도 한데 그 기본적인 이치는 무엇인지가 궁금합니다.”

수경이 이렇게 말을 마치고 합장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우창이 대중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참 적절한 질문입니다. 같은 사안을 놓고서도 사람에 따라서 외부(外部)의 영향(影響)을 받으며 이성적(理性的)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감정적(感情的)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오욕은 누구나 근본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칠정도 마찬가지라고 할 것입니다. 불가(佛家)에서는 오욕(五慾)이라고 하고, 유가(儒家)에서는 칠정(七情)이라고 하니 비록 이름은 다소 다르더라도 실상은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해도 될 것입니다. 다만 상황에 따라서 드러나는 것으로 봐서 비유한다면 오욕(五慾)은 팔자(八字)의 명()이라고 할 것이고, 칠정(七情)은 운()이라고 할 수도 있지 싶습니다. 그러므로 오욕에 따라서 칠정도 작용하는 것이 다 같지는 않겠습니다. 고로 같은 장면을 보면서도 어떤 사람은 무감각하나 또 어떤 사람은 감정이입(感情移入)이 되어서 흐느끼거나 분노를 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좌중에서 항상 조용하게 눈을 반짝이면서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있던 오광(五廣)이 손을 들고 물었다.

스승님께 여쭙습니다. 일곱 가지의 감정(感情)이라는 뜻은 알겠는데 그 감정이 각기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무엇이 일곱 가지인지요?”

, 오광은 지금 무슨 과정을 공부하고 있습니까?”

우창이 반가워서 묻자 오광이 일어나서 대답했다.

궁리의 깊이도 없으면서 마음만 급한지 공부의 과정은 고급반에서 염재 형님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겸손이로군요. 이미 누구를 가르쳐도 손색이 없을 수준일 텐데 말입니다. 그대로 잘 궁리하시기 바랍니다. 하하하~!”

스승님의 은덕입니다.”

, 칠정에 대해서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것이 한 가지로 통일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우선 유교(儒敎)에서 말하는 것은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입니다. 기쁨, 분노,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욕망이지요. 그런데 불교(佛敎)의 가르침에는 희노우구애증욕(喜怒憂懼愛憎欲)이라고 하는데, 뜻을 살펴보면 기쁨, 분노, 근심, 두려움, 사랑, 미움, 욕망으로 약간 다릅니다. 다만 핵심을 생각해 본다면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우창이 이렇게 말하자 오광이 다시 물었다.

스승님, 일곱 가지라고는 하는데 뜻을 생각해 보면 오욕(五慾)과 같이 뚜렷한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가령 사랑은 기쁨에 넣고, 미움은 분노에 넣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욕망은 오욕에서도 논하고 있듯이 그것을 따로 말하는 것도 무척이나 어색하다고 하겠습니다. 누구나 기쁘기를 원하고 즐기고자 할 텐데 그것을 따로 논할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창은 오광의 명료한 주장에 대해서 공감하고 말했다.

오광의 설명이 이치에 맞겠습니다. 그래서 통상적(通常的)으로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이라고 해도 된다고 하겠습니다. 육정(六情)이라고 해도 될 것을 칠()이라는 숫자에 매여서 억지로 개수를 맞춘 듯한 감도 있으니 희노애락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는 것으로 정리해도 되겠습니다.”

우창의 설명을 듣고서 오광이 다시 물었다.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일곱 가지의 감정에서 화()가 없습니까? 사람의 마음에는 분명히 평화(平和)의 감정도 있을 것인데 그런 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고인의 뜻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오광의 날카로운 지적에 대해서 우창도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연 오광의 말에 공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오행원에서는 칠정(七情)이 아니라 오정(五情)으로 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희노애락화(喜怒哀樂和)로 다섯 가지의 감정이 되겠습니다. 하하하~!”

그렇다면 오욕오정(五慾五情)이 됩니다. 이것은 오행원의 오행과도 서로 부합되는 숫자이기도 합니다.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오광이 이렇게 정리하고는 우창의 설명을 기다렸다. 우창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잠시 생각하고는 설명했다.

우창은 오정(五情)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처음은 희정(喜情)입니다. 이것은 계절로 본다면 춘절(春節)의 감정(感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추운 겨울의 길고 긴 맹추위에 동사(凍死)를 면한 것을 기뻐하고 산천초목(山川草木)이 만화방창(萬化方暢)한 것을 기뻐하며 봄꽃이 천지에 가득한 것을 기뻐하는 것이니 희춘(喜春)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우창이 이렇게 설명하자 수경(水鏡)이 감탄하면서 말했다.

스승님께 칠정에 대해서 여쭙기는 했으나 그 이치를 자연의 흐름에 맞춰서 설명해 주실 것으로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오광의 명쾌한 질문과 함께 칠정(七情)을 오정(五情)으로 정리하고 보니 그 이치가 참으로 오묘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계절에 따라서 변한다면 봄에는 이렇게 기쁨이 샘솟는다고 해도 되겠습니다. 산새가 지저귀는 소리조차도 기쁨의 소리로 들리니 말이지요. 호호호~!”

수경이 감탄하면서 말하자 우창도 미소를 짓고는 다시 설명을 이었다.

()는 감정이 격앙(激昂)되어서 성내는 것이고, 글자를 나눠서 생각해 본다면 노예[]의 마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아마도 노예는 항상 부림을 당하는 까닭에 그 마음속에 성내는 것이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했던가 싶기도 합니다. 이것은 하절(夏節)에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가 있겠습니다. 여름에 날은 덥고 힘들게 일하노라니 몸에서는 쉼 없이 땀이 흐릅니다. 이런 때는 누가 큰 소리로 말만 해도 짜증이 나기 마련이지요. 그 이치는 화기(火氣)가 폭발(爆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름에는 특히 싸움이 잦다고 하겠으니 노하(怒夏)라고 이름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모쪼록 날이 더울 적에는 가까이 붙어서 싸우지 말고 서로 떨어져서 각자의 시간을 갖는 것이 좋다고 하겠습니다. 하하~!”

우창이 이렇게 말하자 수경이 거듭해서 말했다.

어마나! 정말이에요. 날이 더워서 염천(炎天)이 되면 모두 인내심이 고갈(枯渴)되고 자제력(自制力)은 상실되기 마련이니까요. 오늘 새로운 가르침에 자연과 더불어 이해하는 호사(豪奢)를 누립니다. 호호~!”

수경의 말을 듣고서 다른 제자들도 공감을 표하는 의미로 합장했다. 그것을 본 우창이 다시 말을 이었다.

다음에는 애()를 살펴보겠습니다. 애는 슬픔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비애(悲哀)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계절로는 추절(秋節)인 가을이 되겠습니다. 가을에는 만물(萬物)이 생명을 잃고 시들어갑니다. 춘절(春節)과는 반대가 되고, 그래서 환희(歡喜)가 변해서 비애(悲哀)가 되는 것입니다. 농부는 수확의 기쁨을 누리겠지만 자연을 관하는 철학자의 눈에는 저마다 삶의 여정을 끝내고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에서의 가을은 생각이 많은 계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색(思索)이 많지요. 그야말로 철학자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비애(悲哀)는 사념(思念)의 기본을 이루는 것이고, 그래서 우수(憂愁)에 잠기게 되기도 하니 애추(哀秋)라고도 하겠습니다. 이것도 자연의 순환에 따라서 이별을 하는 것이므로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마음에 안타까움은 어쩔 수가 없는 자연의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우창의 말을 듣고 있는 오광이 다시 물었다.

스승님께 또 말씀을 여쭙고 싶습니다. ()의 글자를 보면 옷 의()자 중간에 구멍[]이 뚫린 것으로 보입니다. 스승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니 가을에 바람이 차가워지는데 옷에는 구멍이 생겨서 바람을 막을 수가 없어서 슬퍼하는 마음이 생긴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일리가 있겠습니까?”

오호, 놀랍습니다. 앞뒤가 잘 들어맞으니 당연히 그렇게 생각해도 되겠습니다. 오늘 오광의 사색이 돋보입니다. 하하하~!”

오광이 고맙다는 의미로 합장했다. 우창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다음은 낙()입니다. 즐겁다는 것은 모든 것이 뜻과 같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이것은 계절로 동절(冬節)에 해당합니다. 한 해의 결실을 곳간에 저장한 다음에 날마다 삼삼오오로 모여서 놀이를 하고 술과 음식을 즐기니 이것이 쾌락(快樂)입니다. 이렇게 희노애락은 봄철의 환희(歡喜)와 여름철의 분노(忿怒)와 가을철의 애통(哀痛)과 겨울철의 쾌락(快樂)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크게 자연의 풍경과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보겠습니다. 혹 여기에 대해서 이견(異見)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셔도 좋겠습니다.”

우창이 말을 마치고 대중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염재가 손을 들자 우창이 말하라는 듯이 바라봤다.

스승님의 가르침은 항상 새로운 것을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희노애락을 춘하추동에 대입하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으나 과연 이치가 타당한 것인지에 대해서 아직도 약간의 의문이 남습니다. 너무 확대한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데 또 다른 비유로 타당성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다면 좋겠습니다. 혹시 누군가 반문(反問)하면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를 여쭙는 것입니다.”

우창은 염재의 이와 같은 물음에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염재의 질문에는 더욱 분명하게 정리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가령 누군가 그것이 말이 되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답하는 것이 좋겠느냐고 하는 의미로 이해가 됩니다.”

우창이 명료하게 하려고 염재의 질문을 다시 한번 정리하자 염재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스승님의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무엇이 궁금한지 잘 이해했습니다. 혹 누군가 그와 같이 물었다면 우창은 이렇게 답을 하겠습니다. 봄과 가을이 동시에 존재할 수가 없듯이 희()와 애()가 동시에 생길 수는 없습니다. 기뻐하면서 동시에 슬퍼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노()와 락()도 동시에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은 여름과 겨울이 동시에 존재할 수가 없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우창의 설명을 듣고 염재가 말했다.

, 그렇게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화를 내면서 즐거울 수가 없는 일이겠으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희노애락은 모두 한 방향으로 치우쳐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스승님의 말씀들 듣고서야 걱정이 사라졌습니다. 어느 누가 물어도 이렇게 설명해 준다면 이견(異見)을 제시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이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염재가 잘 이해했다는 듯이 다시 합장했다.

혹 또 궁금한 것이 있으면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우창이 다시 대중의 뜻을 물었으나 아무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동의한다는 의미로 합장배례를 했다. 그것을 본 우창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화()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계절에서는 토()가 모든 춘하추동(春夏秋冬)의 목화금수(木火金水)를 조절하고 균형을 이루듯이 오정(五情)에서는 평화(平和)가 그것을 담당하게 되니 이것은 오행의 토()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유교나 불교나 오욕과 칠정을 말하면서 왜 평화(平和)로운 마음에 대해서 논하는 말은 없는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 혹 의견이 있으시면 말씀해 보셔도 좋겠습니다.”

우창이 이렇게 말하며 자중을 둘러보자 이야기를 듣고 있는 현지가 손을 들고는 우창의 물음에 의견을 개진(開陳)했다.

현지가 생각하기로는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은 모두 평범한 범부(凡夫)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풍경을 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공자는 중용(中庸)을 말하고 부처는 해탈(解脫)을 말하며, 역대의 선사(禪師)는 방하착(放下著)을 말한 것을 생각해 본다면 수행자에게는 희노애락에 대한 영역(領域)을 적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지 싶어요. 그러니까 칠정의 앞에 범부(凡夫)나 중생(衆生)이나 평상인(平常人)의 오욕칠정이라고 붙여야 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이미 도를 깨달은 성현들은 그러한 소용돌이를 벗어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마음의 장난에 치우치지 말라는 가르침이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지가 이렇게 말하자 모든 대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이해되었다는 의미로 생각한 우창이 다시 말을 이었다.

옳은 말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니까 여름이 좋다거나 겨울이 좋다거나 혹은 봄이 더 좋고, 가을이 더 좋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중생의 단견(短見)이고 감정(感情)의 변화라고 하면 되겠습니다. 그러한 중생의 마음에 점차로 깨달음이 쌓이고 수행력(修行力)이 높아지게 되면 자연스럽게 춘하추동(春夏秋冬)이 모두 아름답듯이 희노애락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이며, 이러한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면 또한 오욕락(五慾樂)의 집착에서 벗어난 사람이 될 것이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이렇게 된 연후(然後)에야 비로소 감정(感情)의 지배를 받지 않고 평상심(平常心)이 평화로운 심경(心境)에서 순간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창의 말이 이렇게 정리되자 대중들이 우레같은 박수로 고마움을 전했다. 그러자 이야기를 듣고 있던 군엄(君嚴)이 손을 들고는 말했다.

스승님의 가르침은 금과옥조(金科玉條)입니다. 어느 하나도 버릴 것이 없이 이치(理致)에 부합하고 조리(條理)가 정연(整然)합니다. 그런데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어서 여쭙고자 합니다. 우리가 수행해야 하는 이유 중에는 방문자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에서 손님과 대화를 나눠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스로 번민(煩悶)이 가득한 채로 방문자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올바른 판단을 명쾌(明快)하게 내려 줄 수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오행원에서 배워야 할 것은 학문뿐만이 아니라 평정심의 마음도 수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군엄의 말을 듣고서 우창이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내 마음이 명경지수(明鏡止水)가 되지 못하면 방문자의 마음을 투명하게 비춰서 올바른 답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틈틈이 정좌(靜坐)하거나 산책을 하면서 이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살펴야 할 것입니다. 혹 가능하다면 한산사 대웅전에 가서 기도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새벽이나 저녁에 화상들이 예불하고 독경할 적에 절 마당을 거닐면서 마음을 비우고 불경(佛經)을 외우는 소리에 마음을 모아보는 것도 좋으리라고 봅니다.”

우창이 이렇게 답하자 군엄이 다시 물었다.

스승님, 문득 예전에 곡부(曲阜)의 오행원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릅니다. 당시에 제자들을 잃어버린 마음으로 분노가 가득했던 기문도사가 방문했을 때의 풍경이 떠오릅니다. 그때 스승님은 평온하게 이야기를 듣고 계셨는데 군엄은 그렇게 더불어 시비를 가리지 않고 가만히 있는 스승님을 뵈면서 처음에는 옆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분노(忿怒)가 치미는 것을 스승님께서는 애써 태연하게 참고 있거나, 아니면 속으로는 끓어오르는 화를 누리면서 얼굴에는 미소를 짓는 것이라면 흡사 위선(僞善)을 가장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순간에 스승님의 감정은 어떠했습니까? 오늘 말씀해 주신 평화(平和)의 상태라고 보면 되겠습니까?”

군엄이 지난 시절의 생각이 떠올랐던 모양인지 이렇게 물었다. 우창은 잊고 있었으나 군엄의 말을 듣자 당시의 풍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순간에 우창의 감정은 기문도사의 감정으로 이입(移入)했습니다. 그러자 당연하겠다는 마음으로 이해가 되었지요. 그러니 화를 내야 할 필요도 없었고, 그럴 이유도 없었던 것입니다. 다만 이야기를 다 듣고야 어떻게 된 것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했고 그래서 공감을 했던 것입니다.”

혹 스승님은 불교의 수행인 참선(參禪)을 하셨습니까?”

특별히 참선이라고 할 것은 없습니다. 항상 현자(賢者)의 가르침을 생각했으니 사유(思惟)했다고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다만 일구월심(日久月深)하다가 보면 그것도 참선인 줄을 알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생각해 보면, 결국 참선이란 마음을 평온하게 갖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은 항상 손님을 맞이해서 대화를 나눌 적에도 그와 같이 감정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 그러니까 손님이 찾아와서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할 적에는 스승님도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이야기에 집중하여 그를 이해한다는 뜻입니까?”

맞습니다. 그래서 질문하는 사람의 말이 어디에 떨어지는 것인지는 대략 잘 헤아린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대화(對話)의 시작은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겠습니다. 만약에 주객(主客)의 심경(心境)이 공감(共感)되지 않는다면 대화는 겉돌게 될 뿐이고 서로 각자의 이야기만 하다가 말게 될 테니 말입니다.”

스승님께서 비록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그래도 군엄의 생각에는 너와 내가 서로 같지 않다는 것을 느끼겠습니다. 나는 오행을 배워서 그대에게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므로 그대는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잘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랄까요? 이것은 무엇이 문제입니까?”

군엄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한 우창이 설명을 이었다.

예전에 읽어 봤던 금강경(金剛經)에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있으면 중생이다라고 하는 말이지요. 아상은 너와 내가 다르다는 분별심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타(自他)가 동일(同一)하다는 생각으로 이야기를 듣게 되면 감정의 이입이 쉽게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따로 분리되면 그 중간에서는 오류(誤謬)가 생기게 되고 그렇게 사소한 차이는 오해(誤解)가 될 수도 있으니 그야말로 이야기를 해주더라도 남의 다리를 긁는 것처럼 전혀 공감이 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쉽습니다.”

우창의 설명을 듣고서 군엄이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말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그런데도 가끔은 사주의 풀이가 자기의 삶과 맞지 않는다거나 내게 이러저러한 일이 있었는데 그대는 그것도 알아내지 못하느냐는 등의 말을 하면 아무래도 상처받지 않겠습니까? 군엄은 그러한 것도 두렵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군엄의 말에 우창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만약에 손님이 그런 말을 한다면 그의 성정(性情)에 부합하지 못한 것이거나 설명이 부족했다고 보면 됩니다. 무엇을 전달하지 못한 것인지를 되짚어 보면서 다시 설명하면 대부분은 해소됩니다. 간혹 방문자는 조언해주는 말은 듣고 싶지도 않고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 답만을 달라고 하는 자도 없진 않습니다. 예컨대 돈을 많이 벌어서 큰 부자가 되겠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는 만족할 줄도 모르고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말이 나올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사람과 같지요. 그러면 또 그렇게 마음에 없는 말을 해주면 됩니다. 이미 무슨 말을 해 줘도 자신이 원하는 답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원하는 답을 주면 그것이 답이 됩니다. 그로 인해서 나중에 틀렸다고 따짐을 당할 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하하~!”

우창이 웃음이 나와서 이렇게 말하며 웃자 군엄이 다시 물었다.

스승님께서는 웃음이 나오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학자의 자부심(自負心)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 답을 요구하는 사람에게는 그래? 어디 내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두고 봐라, 나중에 보면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해주고 싶어서 안달이 나지 싶은데 그것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습니까?”

군엄은 여전히 답이 필요하다는 듯이 물었다. 우창도 차를 한 모금 마시고서는 다시 설명했다.

군엄은 우이독경(牛耳讀經)의 뜻을 아시지요? 소가 듣기에는 부처의 법문도 개가 짖는 소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에 앉아있는 사람을 소로 보면 됩니다. 소는 무슨 말을 들어도 그 말의 뜻이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할 뿐이니 말입니다. ‘여물 먹어라라고 하는 말로 들릴텐데 그렇게 듣는다고 해서 학자의 자부심이 상처받을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창이 다시 이렇게 말하는데도 군엄은 그래도 개운치 않은지 다시 물었다.

만약에 그렇게 말을 해서 손님이 가고 나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합니까? 아무래도 군엄은 화가 나서 분함을 삭이지 못하고 혼자서 식식거리지 싶어서 염려됩니다. 군엄을 위해서 조금만 더 수준이 낮은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야 손님이 방문을 열고 댓돌에 신을 신는 순간 다 잊어버리게 됩니다. 용하게 잘 맞춘 이야기도 잊어버릴 상황이니 하물며 언짢은 말인들 기억에 남아있을 까닭이 있겠습니까? 물론 그러한 것이 잘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손님의 문제가 아니라 상담가의 문제입니다. 아직은 공부가 부족한 것이지요. 잘 본다고 추켜세우거나 볼 줄 모른다고 비아냥거리는 말은 돌아서면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상황에서 또 다른 사람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잘되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점차로 경륜(經綸)이 쌓이게 되면 저절로 터득하게 될 것이니 지금은 열심히 오행(五行)의 이치(理致)에 대해서만 궁구(窮究)하시면 됩니다. 그야말로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는 것은 망상(妄想)일 따름이지요. 하하하~!”

우창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서야 군엄은 이해가 되었다는 듯이 합장하고는 말했다.

과연 스승님의 말씀이 보약입니다. 이제야 마음이 평온해졌습니다. 내일이라도 누군가 군엄에게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한다면 무심하게 들어줄 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오늘의 가르침이 필요 없어질 때까지 더욱 정진(精進)하겠습니다. 자평법(子平法)의 자평(子平)이 잔잔한 수면(水面)과 같다는 생각을 문득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야기를 마치고는 더 이상 질문이 없자 우창도 강의를 끝내고 서재로 돌아왔다. 그러자 진명이 따라 들어와서 말했다.

스승님의 가르침이 가슴이 벌렁거렸어요. 이와 같은 가르침을 어디에서 들어보겠어요. 다른 제자들도 모두 같은 마음이었을 거에요. 특히 스스로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 선생이라는 아상(我相)을 내려놓으면 된다는 말씀에서는 송곳으로 심장을 찌르는 것처럼 짜르르하게 통쾌했어요. 호호호~!”

그랬구나. 다행일세. 하하하~!”

스승님 편히 쉬세요.”

 

 

진명이 돌아가자 우창도 보람도 있었고 변화도 많았던 하루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