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슈여행③ 시모노세키

작성일
2017-03-20 18:20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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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슈여행③ 시모노세키(下關)와 어머니에 대한 추억


 

가이드 금휘가 이끄는대로 첫날을 묵을 곳에 도착하니 그곳은 큐슈의 북쪽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도시인 기타큐슈(北九州)였다. 후쿠오카 공항에서는 대략 80km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그리고 항구의 풍경이 아름답다는 모지코(門司港)에서 요지에 자리 잡고 있는 호텔이 모지코 프리미어 호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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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서 본 풍경이다. 봐하니, 저 높은 건물은 모지코 레트로 전망대가 되겠군. 저 멀리 보이는 것은 관문교(關門橋)일테고, 건너가면, 야마구치(山口)의 시모노세키가 되겠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면서 주변을 둘러본다.

그런데,  제목은 시모노세키라고 쓰고, 여행은 기타큐슈로 가서 무슨 뜻인가 할 수도 있지 싶다. 그것은 숙소의 위치에서 비롯된 아득한 과거로의 추억여행이 된 까닭이다. 지도 상으로 봐서 시모노세키는 큐슈가 아니라 중국(中國)의 야마구치(山口)가 되는데, 중국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서 지도를 찾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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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일본을 크게 여덟 구역으로 나누는 군. 한국의 팔도(八道)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러니까 구주도가 맨 서쪽에 있고, 이어지는 곳에 중국도가 있다고 보면 되겠고, 현으로 나누면 구주의 후쿠오카와 이어지는 곳에 중국의 야마구치가 있는 것으로 정리하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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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서 쉬다가 저녁을 먹고는 산책삼아 둘러본 풍경이다. 주황색 건물이 모지코 호텔이고, 다리 저 너머로 보이는 관람차는 시모노세키의 놀이시설이다. 여유롭게 일주일 정도 푹 쉬어도 좋을 풍경이었다. 금휘가 인터넷을 열심히 뒤진 결과물이 이 정도라면 상당히 성공적이라고 해도 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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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http://blog.naver.com/raccoonlab]


일본의 거리 주변 풍경이 크게 새롭지 않은 것도 물론이거니와, 시간대 조차도 같으니 공항에 내려서 시간을 바꿔서 계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일본 여행에서 망외소득이라고 해도 되지 싶었다. 한국과 같은 동경(東經) 135도를 사용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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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공항에서 동으로 향해서 달리면 나타나는 것이 기타큐슈이다. 지도는 글씨를 크게 보고 싶다면 클릭하시면 된다. 다른 사진도 조금은 커질 것이니 참고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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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웬 일인지 정작 목적지인 모지코보다도 해협 건너로 마음이 자꾸만 간다. 그곳은 시모노세키였는데 어려서 들은 말이 있어서였다. 당일 저녁은 모지코에서 휴식을 취하고 다음 날 아침을 먹고는 반드시 시모노세키를 가봐야 하겠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알았단다.

사실, 행선지는 큰 윤곽만 그려졌을 뿐이고, 실제로 여정은 언제나 유연한 고무줄 스케쥴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부모님을 위한 여행이었으니 가보고 싶다는데 안 될 이유는 없었던 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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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은 아이들이 묵은 곳에서 바라 본 풍경이다. 그러니까 항구의 안쪽이 되는 셈이다. 그것도 물론 볼만 했지만, 금휘가 부모님을 위해서 전망이 최고로 좋은  방을 잡은 곳의 전망은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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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보이는 곳이 바로 시모노세키이다. 길게 보이는 하얀 선은 수족관인 모양이고, 관람차는 밤이 깊도록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가는 화물선들의 흔적도 볼만 했다. 그런데 왜 시모노세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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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새벽의 해안을 내려다 보니 풍경이 괜찮다. 자료를 찾아보니까 부산에서 시모노세키까지 오가는 여객선이 있다고도 한다. 이름하여 '부관(釜關)페리'이다. 이것은 부산의 부와 하관의 관을 따서 붙은 이름일게고, 한국에서 부르는 이름일 것이라는 짐작만 해 본다. 일본에서는 '관부연락선'이라고 하겠거니..... ㅎㅎㅎ

1905년부터 1945년까지 부산항과 시모노세키 항 사이를 정기적으로 운항한 여객선으로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이라고 나오는 군. 그러니까 해방이 되기 전까지  운항하던 항로였다는데, 지금도 여전히 오가는 것을 보면 살아있는 항로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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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 김에 연락선 비용도 알아보니, 최하등급인 2등실이 왕복 18만원이라고 한다. 최고급은 스위트로 48만여 원이다. 소요시간은 대략 11시간 쯤 되는 모양이다. 여하튼 지나는 길에 알아두는 정보 정도이다.

자,

이제 왜 시모노세키를 생각했는지에 대해서 추억을 떠올려 본다. 여행은 원래가 추억여행이기도 하다는 것이 이런 경우에 딱 어울리는 말이라고 해도 되지 싶다. 그 추억의 여행은 직접 현장에서 얻은 추억도 있지만 전해들은 추억도 당연히 추억의 범주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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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게 사느라고 분주했던 시절이었던지라 변변한 어머니 사진도 없군..... 이것이 어머니께서 가장 행복하셨을 순간이었을 것이라고 믿어 보는 사진 한 장이다. 자식들은 갓바위에 기도하러 올라가고 대신 편안히 다녀오라고 손녀 금휘를 보고 있으시겠다고 한 장면인 듯 싶다.

이렇게 뜬금없는 옛날의 어머니 모습을 여기에서 떠올려 보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는데 참 알 수가 없는 것이 여행길이려니 싶다. 그렇게 아련한 추억의 한 자락을 회상하면서 시모노세키를 향해서 출발했는데, 먼저 만나야 하는 것은  관문(關門)터널이다. 감몬터널이라고 지도에 표시 되는 해저터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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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저터널이라고 해서 통영해저터널을 생각하면 안 된다. 여기는 제대로 차량이 통과하는 해저터널이기 때문이다.

[추신] 이 글을 쓸 적에는 몰랐는데, 가거대교를 가게 되면 해저터널이 나오는 것을 알게 되어서 추가한다. 통영의 그 터널이아니라 제대로 차량이 통행하는 관문해저터널과 같은 급의 터널이었고, 길이는 3.7km이고, 편도 2차선의 넓이이며, 수심 49m까지 파고 내려갔다는 이야기와 함께 세계 최저라는 내용도 있는 것을 봤다.[2017.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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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만든 터널인가 보니까, 동아일보의 옛날 기사에 1936년에 착공했다고 하는 것으로 봐서, 해방 전에 사용했었다는 것을알 수가 있겠고, 이미 그 당시에 이 정도의 기술을 갖고 있었다는 것도 놀랍다. 과연 일본과 부산으로 해저터널을 뚫을 계획을 할만 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언젠가 그런 말이 있었는데, 왜 잠잠한지 모르겠군. 아마도 어려움이 많아서 무산되었나 싶기도 하다. 또 궁금해서 자료를 찾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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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원래 이런 계획이 있었군. 노무현 대통령 때에 이야기가 오가다가 말았던 모양이다. 여하튼 언젠가는 시행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다.

해저터널은 간몬(關門)터널이고, 그 옆에 새로 놓은 간몬교(關門橋)는 고속도로라고 보면 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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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 내부의 모습이다. 제대로 만든 터널로 인해서 두 섬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원래 섬과 섬을 이으면 연도교(連島橋)이고, 육지와 섬을 이으면 연육교(連陸橋)인데, 지상으로 연결된 간몬교는 연도교라고 할까? 아니면 연육교라고 할까 그것이 궁금하다. ㅎㅎ

터널을 지나서 시모노세키로 들어섰다. 부두가 보이는 곳에 차를 대고는 둘러보니 해양수족관이 있는 곳에 유람선 선착장이 늘어서 있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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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낭월의 기억으로는 일본이라는 국명 이외에 들어 본 일본의 지명으로는 가장 먼저 들어 본 것이 하관(下關)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초등하교 3학년 정도에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해방 전에 일본에서 살았었다는 이야기가 궁금해서 기억에 남아있었던가 싶다.

옛날의 인연을 따라서 전 남편의 직장문제로 일본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던가 뭐라던가 싶었는데, 금융관련 직장인이었던 모양이다. 그야말로 당시로는 상류사회에서 살았었다고 한다.

낭월의 부친은 너무도 가난한 시골의 빈농이었으니 부유한 삶을 살다가 혼자가 되어서 장사라고 하고 다니다가 만난 인연의 소개로 재혼을 하게 되었으니 다른 것은 몰라도 몸이 알고 있는 부유함에 대해서는 많이 그리웠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물론 당시로써는 그러한 것을 알 바가 없는 어린 아들에게 이야기를 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겟느냐는 생각을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배를 타고 시모노세키에 내려서 낯 선 풍경에 대한 소감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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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시모노세키에 도착해서 부두에 서니까 문득 오싱(おしん)이 생각난다. 시작 부에선가.... 나이 든 오싱이 어린 손녀를 곁에 두고서 추억을 이야기 하는 장면이다. 문득 카메라 렌즈 앞에 금휘가 걸린다. 금휘 옆에 할머니가 있다면 바로 오싱의 한 장면이 되네....

마침 옛날 사진첩에서 나온 사진도 손녀를 안고 있는 것이었는데, 이것도 하늘의 계시인가 보다. ㅋㅋ 무슨 계시씩이나 하긴 하겠으나, 또한 그 어린 손녀가 이만큼 자라서 부모와 함께 시모노세키에 섰으니 오싱이 생각 날 만도 하다.

어머니가 그리울 때가 있다. 그것은 시공을 떠나서 언제라도 불쑥 그리워지는 인연이라고 해야 할 모양이다. 그리고, 이렇게 어머니가 적어도 70년여 전에 이 자리 어딘가에 서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바라봤을 젊은 시절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가능하면 국제터미널을 찾으려고 두어 바퀴 돌았는데 쉽지가 않았다. 아마도 옛날의 연락선 부두는 아니었겠지만 국제여객선 터미널은 못 만났더라도 여기가 그거인냥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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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만큼 화물선 하나가 지나간다. 저 건너 편은 어제 잠을 잤던 곳이다. 부두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어머니와 손녀딸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 아가야. 옛날에 내가 이 자리에 있었더란다.

손녀딸 : 그러셨어요? 그때는 할머니도 참 젊으셨겠어요. 예쁘셨죠?

어머니 : 그래..... 참 많은 세월이 흘렀구나.

손녀딸 : 일본의 생활은 어떠셨어요?

어머니 : 그런대로 재미있었지. 남편을 따라서 이역만리로 왔지만 사람들과 잘 사귀었지.

손녀딸 : 재미있는 이야기 한두 가지만 들려 주세요. 할머니.

어머니 : 그때는 왜 그렇게도 지진이 많이 일어나던지 첨에는 많이 무서웠지.

손녀딸 : 맞아요. 원래 일본은 지진도 많이 일어나잖아요.

어머니 : 그런데 이해를 하지 못할 것은 말이다.

손녀딸 : 예, 할머니.

어머니 : 일본 사람들은 지진이 나면 화로를 들고 대나무 숲속으로 뛰어가더구나.

손녀딸 : 대피소로 가는 것이 아니고요?

어머니 : 대피소라는 것도 없었던가 보다. 그런데 왜 화로를 들고 가는지는 아직도 몰라.

손녀딸 : 대숲으로 들어간 것은 아마도 땅이 덜 갈라지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머니 : 아, 대나무 뿌리들이 엉켜서 그랬을 수도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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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딸 : 그리고, 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어머니 : 이건 우스운 이야기란다.

손녀딸 : 그 이야기를 해 주세요. 뭐예요?

어머니 : 벌건 대낮에 남자들이 벌겋게 튀겨진 불알을 내어 놓고 오가는 모습이지.

손녀딸 : 엄머, 놀라셨겠어요.

어머니 :조선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참으로 상스럽게 보였지.

손녀딸 : 그랬겠어요. 지금 시대 같으면 난리가 나죠.

어머니 : 온천에서 푸욱 익은 것을 털래털래 하면서 걷는 것은 상놈 같았지.

손녀딸 : 이미 옛날에 좋은 경험을 하셨네요. 저는 이제 일본 와 봤잖아요.

어머니 : 그래 아들며느리와 손자손녀랑 일본에 오니 나도 좋구나.

손녀딸 : 할머니께서 동행하실 거라는 생각은 못했어요.

어머니 : 원래 육신을 떠나면 영혼은 자유로운 것이란다.

손녀딸 : 그럼 할머니 계속 같이 다니세요.

어머니 : 그러렴. 내가 무사하도록 잘 지켜 주마.

시모노세키의 부두에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옛 추억의 한 자락을 떠올려 보는 시간도 여행에서 나쁘지 않았다. 연지님도 생각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이 수족관을 둘러보면서 여유를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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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잠시 오싱의 모드로 회상하는 이야기를 떠올려 봤다. 어쩌면 이번 여행길에 어머니께서도 동행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지켜주고 있는 것 같은 마음으로 시모노세키에서 멀어져 가는 연락선을.... 또 귀국선에서는 멀어져 가는 일본 땅을 바라보셨을 어머니를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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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역의 건물은 달라졌지만, 그래도 하관역(下關驛)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이 자리에서 기차를 타고 내렸을 모습도 생각해 본다. 비록 이야기만 들었지만,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것도 거의 50년이 지난 세월이 사이를 흐르고 있었지만, 왠지 어제 저녁에 들은 것만 같은 생생한 느낌은 또 뭘까..... 싶다.

낯선 지역에서 남편 한 사람만 믿고 동행했을 여인을 생각해 본다. 언젠가 왜 남편과 헤어지셨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어려서나 지금이나 궁금한 것도 많은 낭월이었던 모양이다.

낭월 : 엄마, 왜 전의 남편과 헤어지셨어?

엄마 :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지....

낭월 : 은행장까지 했으면 상당한 경제력이 있었던 거잖아?

엄마 : 돈에 대해서는 아쉬울 것이 없었지.

낭월 : 이렇게 가난한 아버지랑 살면서 형편이 어려우니 생각도 더러 나시겠네?

엄마 : 전혀~!

낭월 : 돈이 없어서 맨날 선학 오봉이랑 그릇들을 이고 다니면서 팔아야 하잖아?

엄마 : 그래도 옛날의 부유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단다.

낭월 : 왜?

엄마 : 너희들이 있잖니.

낭월 : 그래도 문득문득 쪼들리는 사람이 힘들 때는 생각도 날 것 같어.

엄마 : 그러게....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랬을 만도 한데 왜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나...

낭월 : 헤어진 이유를 들어봐야 겠네. 왜 헤어지신 거야?

엄마 : 일본에서 돌아와서 대전에서 살았었지. 그때도 금전적으로는 잘 지냈지.

낭월 : 그랬겠네.

엄마 : 친구 들도 다들 귀부인들이었지.

낭월 : 맞아, 전에 대전 이모네 집에서 얻어왔다고 헌 옷을 가져온 적이 있었어.

엄마 : 그래, 그 친구들은 잘 사니까 모두 비싼 것들이었지.

낭월 : 못 살아서 옷을 얻어오려니까 챙피하지 않았나?

엄마 : 챙피한 것보다 더 한 것이 뭔지 알아?

낭월 : 그게 뭔데?

엄마 : 자식들이 추위이 떠는 거.

낭월 : 난 그렇게 못 할 것 같애....

엄마 : 그게 엄마라는 존재란다.

낭월 : 근데 왜 헤어졌지?

엄마 : 육이오 전쟁이 일어났지.

낭월 : 맞아. 그렇다면 1950년이었겠네.

엄마 : 친정에서 연락이 온 거야.

낭월 : 무슨 연락이?

엄마 : 친정 아버지께서 위독하시다고.

낭월 : 그럼 가봐야 하잖아? 난리 통인데?

엄마 : 그래도 아버지의 마지막은 봐야 하겠어서 채비를 했지.

낭월 : 외할아버지께서는 어떤 분이셨는데?

엄마 : 늘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를 외우시면서 살으셨지.

낭월 : 그러면 동학도였네?

엄마 : 그것도 아니?

낭월 : 배웠으니까, 

 엄마 : 친정에 가서 부친의 임종을 볼 수가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었어.

낭월 : 그래도 어떻게 가긴 하셨네?

엄마 : 남편에게 친정을 가봐야 하겠다고 했더니....

낭월 : 응.

엄마 : 혼자 갔다 오라잖아.

낭월 : 무서웠나 보다.

엄마 : 아무리 무서워도 장인이 임종하다는데....

낭월 : 그러게.

엄마 : 그 말 한 마디에 모든 것을 버릴 수가 있겠더라.

낭월 : 이해를 할 수도 있잖아?

엄마 : 그 순간, '이 남자랑은 이제 끝났구나...' 싶었어.

낭월 : 참 독하기도 하셔라.

엄마 : 친정에서 아버지 상을 치르고 와서 바로 헤어졌지.

낭월 : 위자료라도 많이 받지 그랬어? 헤헤~!

엄마 : 그냥 입은 옷 그대로 나와버렸지.

낭월 : 이해가 되네. 그래서 혼자 다니다가 간난뱅이 아버지를 만나셨구나.

엄마 : 비록 못나고 가난하긴 했지만 사람은 믿을만 했어.

낭월 : 워낙 사람에게 상처를 받으셔서 그랬네.

엄마 : 그리고 너를 얻었잖니?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다고.

이렇게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부유함보다 마음의 행복을 택한 어머니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이쯤 와서 생각해 보니 알 것도 같다. 이렇게 추억과 함께 시모노세키를 거닐다가 다시 길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