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夜子時가 발생한 연유...

작성일
2007-09-11 10:34
조회
8546

원래 없었던 것이 나타나게 된 것에는 모두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인과(因果)를 믿는 학자의 사고방식일 것이다. 그래서 과연 어떻한 이유가 있었기에 이렇게 골치아픈 문제가 등장을 했겠느냐는 점을 관찰해봤다. 함께 생각을 해보자.

우선 무엇보다도 명리학은 가장 현실적인 학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살아가는 것과 맞아 떨어지지 않으면 당연히 폐기처분이 되고 삭제되어가는 것이다. 아무리 탁월한 이론이라고 하더라도, 예언을 해서 적중하지 않는다면 쓸모가 없이 되어벌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이 야자시라고 하는 것의 밑바닥을 흐르고 있는 것이다. 어떤 연유로 인해서인가 우리는 밤 12시를 하루의 시작으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기준을 가지고서 따져보니까 실제로 사람의 운명이 적중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렵게 생각을 할 필요가 없이 그대로 채용하면 되는 것이다. 결국은 내년에 돈을 벌겠다고 예언(?)을 했으면 벌면 되는 것이다. 이치적으로 완벽해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이론가의 입장이다. 물론 이치적으로도 완벽하고 실제로도 부합이 된다면 더욱 좋다고 생각을 할 뿐이다.

이것은 입춘을 명리학에서 한 해의 시작으로 따지는 것과도 서로 통한다고 하겠다. 근래에 역학동호회의 게시판을 보니까 어째서 명리학의 시작을 인월로 삼게 되었느냐는 질문이 었었는데, 여기에 한 회원이 설명하기를

‘은나라에서는 子月을 설로 삼고, 다시 왕조가 바뀌어서 하나라가 되자 이번에는 丑月을 설로 삼았다. 그리고 다시 주나라가 되자 이번에는 寅月을 시작으로 삼았다. 이렇게 별 의미없이 왕조가 변하는 것을 기점으로 해서 정해진 그야말로 우연발생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라는 형태의 이야기였다. 이 글을 읽으면서 잠시 생각해 봤는데, 우연이라고 생각이 되었겠지만, 실제로는 필연이 그 속에 들어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하나의 왕조가 들어선다면 많은 것에서 변화가 발생한다. 우선 법이 달라지고, 사람들의 인심이 달라진다. 어쨌던 이렇게 모든 것이 달리진 상황에서 태어난 아기라면 그렇게 달라진 공기를 흡수하게 되었을 것이고, 무엇보다고 왕조가 바뀌었다는 것은 그만큼 천지의  기운이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한다. 그렇게 되면 그 아이는 달라진 공기의 흐름을 타고 살아가게 될 가능성이 많아진다. 이것은 인공분만의 운명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는 점과도 완전히 부합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월로 한 해의 시작을 삼았던 후로 태어난 사람들은 인월의 기준에 걸맞게 사주팔자를 타고 난 셈이고, 그래서 우리는 또 그러한 기준으로 따져들어도 운명이 잘 맞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시각은 子正을 하루의 시작으로 보고 있으니까 당연히 아자시를 부여해서 감정을 하여야 맞게 된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그러한 리듬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달리 떼를 쓸 필요가 없는 셈이기도 하다.




사실 연구를 할만큼 하신 명리학의 대가들께서 야자시를 자연스럽게 책에 서술하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검토를 마친 것이라고 믿어본다. 다만 낭월이가 야자시를 운용해야만 그 사람의 운명이 적중하는 자료를 찾아내기가 어려운 것은 실제로 명확하게 야자시라고 하는 공간에 탄생한 사람의 자료를 얻기가 쉽지않았고, 그렇게 얻어진 자료가 충분히 객관성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사주의 내용적인 상황을 봤을적에, 야자시에 태어났다면 장관을 하게되고, 조자시를 적용한다면 거렁뱅이가 될 수 밖에 없는 경우가 발생한다면 정확하게 임상을 해볼 자료가 되겠는데, 어느 것이 적용되더라도 변화가 뚜렸하지 않다고 한다면 이것을 학술자료로 채용하기에는 객관성이 떨어진다고 생각되어서이다.




낭월이의 생각은 야자시가 적용이 되어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좋다. 구태어 어느 것을 채용함으로써 누가 잘했다고 상금이라도 한 뭉텅이 줄것도 아닌데 구태어 이러한 말썽장이를 잡고 늘어져서 시비꺼리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적어도 서락오, 오준민, 원수산 등의 선배님들은 나름대로 충분히 명리학에 대해서 연구를 할만큼 했다고 믿기 때문에 그대로 채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새로운 학설이라고 해도 되겠다. 왜냐면 예전(적어도 청나라 이전에는)에는 없었던 학설(學說)인데, 그 후에 발생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새로운 학설은 발생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상대성이론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날 불확실성이론이 등장을 하면서 또 이상하게 되어버리는 것과도 같다고 생각을 해보자. 아시는대로 양자역학(量子力學)은 명확하게 알 수가 없다는 것이 중심사상이다. 얼핏 생각하기에 ‘1+1=확실하지않다.’ 는 이야기라고 이해를 하고 있다. 확실하지 않은 이유는 그대로 하나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수백개가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뒤따르면서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된다. 그런데 상대성이론은 명확하게 알 수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명확하게 알 수가 있는 것이 결국은 명확하게 알 수가 없다는 학설을 맞이하게 되는 것과 야자시를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던 학설에 갑자기 엉뚱한 녀석이 등장을 한 것과 비교를 할만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이러한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의 사이에 깔려있는 사정은 문외한이 생각하고 있는 것 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계산적일 것으로 생각되어서 더 이상 언급을 생략하도록 하거니와, 다만 문외한이 단편적으로 느낄적에 서로 비교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정도로 야자시의 주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