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청도⑬ [부록] 치동서원

작성일
2019-10-23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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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청도⑬ [부록] 치동서원(淄東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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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야, 치동서원에 댕겨 오꾸마~!"

어청도에서 치동묘를 보고서 자료를 찾다가 보니까 놀랍게도 전횡을 모신 사당이 어청도 외에도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내친 김에 날을 잡아서 치동서원을 찾아가보기로 했던 것이다. 물론 군산에서 석도로 가는 배를 타고 중국의 전횡도를 가 볼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이고 중요한 것은 어청도에만 머무르지 않는 전횡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자료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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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이름이 옥구남로란다. 문득 대만의 도로명이 생각난다. 화평동로 화평서로로 명칭이 되어있는 것이 떠올랐다. 차동서원은 군산시 옥구면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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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동서원은 네이버지도가 "승"이다. 그러니 어느 지도가 최선이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늘 염두에 두고 두 지도를 번갈아 보면서 도움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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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 양지바른 기슭에 아담한 서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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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화려하진 않지만 조촐한 모습으로 나그네를 맞이하고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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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동서원이 아니면 옥구에 올 일이 있었겠나 싶기도 하다. 그러니까 치동서원으로 인해 옥구에도 와보는 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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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그렇듯이 목적이 있어서 방문을 하면 약간의 설렘이 따른다. 어떤 모습을 볼 수 있으려나 싶은 기대감도 포함된 까닭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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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삼문의 문호는 숭덕문이구나. 중앙에는 태극이 그러져있고 오른쪽 문을 열어놓은 것은 방문자를 꺼러지 않는다는 의미로 보면 되겠다. 때론 매정하게 자물통으로 굳게 닫힌 곳도 심심찮게 만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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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 사람은 남린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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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안으로 들어가니까 내삼문이 높이 자리하고 있다. 오른쪽엔 담양전씨의 내력을 새겨놓은 비도 있어서 과연 전횡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곳이라는 느낌이 확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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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의 삼간 건물은 행사를 할 적에 관련 사람들이 일을 보던 곳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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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동서원이다. 치동은 오직 전횡의 사당에 붙는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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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도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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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너머로 치동묘가 보인다. 얼른 들어가보고 싶지만 차근차근 둘러본 다음에 들어가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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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풍경을 둘러봤으니 안으로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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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비에다 하얀 글씨로 잘 새겨놔서 읽기에도 무리가 없겠다. 다만 지금은 읽을 겨를이 없다. 일단 천천히 읽어보기로 하고 사진이나 반듯하게 찍어놔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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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에 놓인 플라스틱 상자에는 감이 들어있었다. 마침 오른쪽의 감나무를 손질하면서 감을 따고 있는 주인들이 있어서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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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의 가지를 자르는 것은 자꾸만 올라가는 나무의 속성으로 인해서 감을 따기가 힘들어지는 까닭일게다. 낭월도 작년에 감을 수확하고 높이 올라가는 가지를 잘랐는데 힘들여 따본 사람만이 공감한다. 멀리서 보기에는 높이 달린 감이 보기에 좋을 수도 있지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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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삼문의 편액은 명의문이다. 글을 쓴 사람의 낙관은 없군.... 왼쪽문의 아래가 꺾인 것은 좀 특이한 서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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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은 두 동이 나란히 있다. 정면에는 삼양사가 있다. 삼양사인 것은 세 사람의 남자를 모신 곳이라는 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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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에 파랑색으로 칠한 것은 좀 어색해 보이는감도 있다. 무슨 의도가 있었을 것인지 아니면 단청을 한 사람이 그 색을 좋아해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 산뜻하니까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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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어보고 합장하고는 밖에서 증명사진을 한 장 찍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오늘의 목적인 여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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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에서 보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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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치동묘이다. 어청도에서 본 치동묘이고, 외연도에서 본 전횡사당이 여기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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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치동묘(淄東廟)인 것을 보면서 서울의 동묘를 떠올려 보기도 한다. 그냥 동묘라고 할 수가 없었던 것은 동묘에는 관운장이 있어서일 수도 있다. 관운장이 나이로는 후배이지만 인지도로 본다면 엄청난 차이가 있으니 이건 나이로 논할 일이 아니라고 해야 하겠다. 전횡은 기원전 202년에 사망했고, 관우는 219년에 사망했으니까 약 400여 살의 차이가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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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을 나타내는 이름표는 제대로 찍어줘야 한다. 증명사진이기 때문이다. 정한수의 글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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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앞에서 합장배례하고 문을 열었다. 물론 문이 잠기지 않은 것은 누구라도 와서 문을 열고 참배해도 된다는 의미일 게다. 다행이다. 잠겨있으면 그냥 밖에서만 보고 돌아가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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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에는 중앙의 제단에 위패와 닫힌 함이 있다. 아마도 낭월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면 필시 영정이 있을 것이라는 짐작을 했다. 일단 열어봐야 확실하니까.... 위패틀을 옆으로 옮기고서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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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구면이네? 반갑습니다. 전횡 장군님~~! 어청도의 초상과 같은 사람이 그렸거나 어청도 초상을 사진으로 찍어서 액자로 모셨겠다는 생각이 든다. 화질이 흐릿해 보이는 것으로 봐서는 사진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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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봐도 같은 바탕임을 알 수가 있겠다. 그러니까 치동묘의 뿌리는 어청도와 연관이 있다는 것으로 정리를 할 수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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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위패함에는 어떻게 적었을지 궁금해서 열어본다. 시향전부자위(尸鄕田夫子 位)이다. 시향? 이건 무슨 뜻일까? 다시 자료를 찾아보니 전횡이 한고조 유방의 부름을 받고 가다가 시향이라는 곳에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고 그것을 애도한 신하가 시신을 운구하면서 슬픔을 견디지 못하여 지은 노래가 만가()라고 한다는데 말하자면 상여소리의 시초가 된 셈이다. 이렇게 해서 또 하나를 배우게 된다. 그러니까 전횡이 죽은 곳이 시향이고, 전부자는 존칭으로 붙인 부자()라고 봐도 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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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합장 삼배 하고 원래의 위치대로 놓은 다음에 문을 닫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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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산에는 밤이 한참 벌어지고 있다. 계룡산은 이미 끝났는데 치동서원의 밤은 늦밤인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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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삼거리로 나오니 볼록거울이 안전을 지키고 있구나. 반가워 낭월~! 치동서원의 글자가 거꾸로네? 그렇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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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지! 이제 자연스럽군. ㅋㅋㅋ

치동서원을 둘러보니 뭔가 전설이 마무리 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전설에서 현실로 이어지는 통로를 찾은 것도 같다. 전횡의 어청도는 전설에 가까웠는데 이렇게 담양전씨의 시조로 불리게 되면 이것은 혈통으로 이어지는 실화가 되어서 이어지게 된다.






담양전씨에 적힌 글을 옮겨 적으면서 이해가 어려운 부분은 해석을 첨부한다. 낭월의 조상 중에 담양전씨와 인연이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논산에도 담양전씨들이 있어서 혹 앞으로 만날 인연이 되면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차담으로 삼을 수도 있지 싶어서 내친 김에 모두 옮겨본다.





淄東書院史蹟碑(치동서원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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淄東書院(치동서원)은 群山市沃構邑五谷里一麓(군산시 옥구읍 오곡리의 일록-한쪽 기슭)에 位置(위치)한 근래에 건립한 書院(서원)으로 祭享(제향)공간과 講學(강학)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享祀(향사)는 紀元前(기원전) 二世紀(2세기)경 中國(중국) 古代(고대)의 제(齊)나라 王(왕) 田橫(전횡)의 義氣(의기)를 추앙 제사한 群山(군산) 於靑島(어청도)에 있는 淄東廟(치동묘)에서 由來(유래)한 오랜 歷史(역사)를 背景(배경)으로 하고 있다. 齊(제)나라의 首都(수도) 臨淄(임치)가 中國(중국) 山東省(산동성)에 있는데 田橫(전횡)이 漢高祖(한고조)에 敗(패)하고 東(동)으로 왔다하여 淄東(치동)이란 사당을 짓고 豊漁(풍어)와 海上安全(해상안전)을 빌어온 것이 嚆矢(효시)이다. 一九二六(1926)년 丙寅(병인)에 群山市(군산시) 沃構郡(옥구군) 潭陽田氏宗中(담양전씨종중)의 결의로 群山市(군산시) 西興南洞(서흥남동)에 淄東廟(치동묘)를 創建(창건)하고 潭陽田氏(담양전씨) 東來說(동래설)에 因(인)한 古代(고대)의 祖上(조상)인 齊王(제왕) 田橫(전횡)의 영정과 위패를 奉安(봉안) 享祀(향사)를 해오다가 一九五一年(1951년) 辛卯(신묘)에 고려말 潭陽田氏(담양전씨)의 七世顯祖(칠세현조-뛰어난 조상)이신 壄耒耕(야뢰경-야은, 뢰은, 경은) 三隱先生(삼은선생)을 追配(추배)하고 沃構儒林(옥구유림)이 享祀(향사)를 不絶(부절)하니 아! 수천년 세월 속에 大節(대절-대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침)의 義魄(의백-정의로운 기백)과 麗末報國(여말보국)의 忠魂(충혼)이 尙存公享(상존공향)함이랴. 一九八三年(1983년)에 後孫(후손) 및 士林(사림)의 獻誠(헌성-정성스런 헌금)과 성원으로 書院(서원)을 移建(이건-옮겨서 세움)하니 沃構(옥구)권 四大書院中(사대서원중)하나로 오랜 歷史的文化(역사적문화)의 傳統(전통)이 燦然(찬연-찬란함)히 빛난다.

 

○淄東廟誌(치동묘지-치동묘의 기록에 의하면)=中國(중국) 後齊(후제)나라 田橫(전횡) 장군을 奉安(봉안)한 廟宇(묘우)=

田橫(전횡)은 제(齊)나라의 貴族(귀족)으로 장군이요 諸侯王(제후왕)이었고 狄縣(적현-지금 山東省(산동성) 靑道(청도-靑島의 오자인듯)출신이다. 宗室(종실)인 그의 兄(형) 田儋(전담) 田榮(전영)과 BC209년에 齊(제)를 다시 일으켜 옛 城(성)을 되찾고 田榮(전영)의 아들 廣(광)을 王(왕)으로 세우고 項羽(항우)와 싸워 국권을 회복했으나 漢高祖劉邦(한고조유방)이 天下(천하)를 통일하자 그는 東海(동해)의 海島(해도) 또는 卽墨縣(즉묵현)으로 피하니 따르는 軍卒(군졸)이 五百(오백)이었다. 漢王(한왕)은 후환을 염려하여 策士(책사) 陸賈(육가)를 보내 懷柔(회유)하기를 「貴公(귀공)이 항복하면 齊王(제왕)의 자리를 주어 田氏門中(전씨문중)의 宗祠(종사)를 길이 누리도록 할 것이요 不然(불연-그렇지 않으면)이면 全滅(전멸-모두 죽이겠다는) 云云(운운-이하줄임)」 하였다. 田橫(전횡)은 부하들의 生存(생존)을 위해 단신으로 책사를 따라 洛陽(낙양)으로 가는 도중에 「우리 王(왕) 田廣(전광)을 죽인 원수요 나와 싸웠던 敵將(적장)에게 목숨을 구걸할 수 있느냐」 하며 自決(자결)을 하였다. 後(후)에 이 消息(소식)을 接(접)한 五百(오백)의 군사가 한결같이 殉節(순절-절개를 지켜 자결함)하였으니 어느 역사에도 찾아보기 드문 義擧(의거)였다 漢王(한왕)은 이 사실을 哀惜(애석)타 하였으며 後(후)에 海島(해도)를 田橫島(전횡도) 또는 鳴呼島(오호도)로 부르도록 하였으니 輓文(만문-애도의 글)과 喪歌(상가-슬퍼하는 노래)가 지금에 傳(전)한다. 墓(묘)는 中國(중국) 首陽山(수양산) 아래에 있는데 현재 墓碑石(묘비석)만 있으며 中國(중국) 靑道(청도-靑島일듯)에는 傳橫觀光(전횡관광) 레저團地(단지)인 傳橫道旅遊度假區(전횡도여유도가구-傳橫島일듯)가 있으며 韓國(한국) 群山(군산)의 於靑島(어청도)와 保寧(보령)의 외연열도 등지에는 傳橫(전횡)을 堂神(당신)으로 숭배하는 풍습과 그와 관련된 전설이 있으니 戰國時代(전국시대)로 거슬러 興亡盛衰(흥망성쇠)를 風靡(풍미)한 英雄豪傑(영웅호걸)의 眞面(진면)을 追思(추사-추모하고 생각함)케하니 그의 大義(대의)는 戰敗國亡(전패국망)에 春秋大節(춘추대절-역사상 큰 절개)이라 百世淸風(백세청풍-백년의 아름다운 풍습)이요 爭光日月(쟁광일월-일월과 그 빛을 다툼)이라고 要約(요약)한다.

 

○三陽祠誌(삼양사지)=潭陽田氏(담양전씨)의 顯祖(현조) 七世(칠세) 三隱先生(삼은선생-고려말의 뛰어난 담양전씨의 세 사람을 말하는데  사인공의 세 아들인 첫째 야은(壄隱) 전록생(田祿生), 둘째는 뢰은(耒隱) 전귀생(田貴生), 세째는 경은(耕隱) 전조생(田祖生)의 세 사람)을 奉安(봉안)한 祠宇(사우)=

文明公 壄隱先生(문명공 야은선생)의 휘는 祿生(록생) 字(자)는 孟耕(맹경) 號(호)는 壄隱(야은)이요 諡(시-시호)는 文明(문명)인데 先生(선생)은 潭陽府(담양부) 경대산 율천리에서 태어나 고려 忠惠王朝(충혜왕조)에 登第(등제-과거급제)하여 官(관)이 推忠贊化輔理功臣匡靖大夫門下評理兼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추충찬화보리공신광정대부문하평리겸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사)로 司憲府(사헌부)의 大司憲(대사헌)을 兼(겸)하시다. 偉績(위적)을 略記(약기)하면 出生(출생)하신 옛터를 公家(공가)에 喜捨(희사)하여 斯道(사도)를 振作(진작)하니 潭陽明倫堂懸板記文(담양명륜당현판기문)에 「安文成公(안문성공)의 太學(태학)을 創建(창건)함과[하였으니] 並美(병미-더불어 아름다움)」라 하였고 中國(중국)에 正使(정사)로 가셨다가 燕京(연경-지금의 북경)에서 古文眞寶(고문진보)를 구득하여 馬山(마산) 合浦(합포)에서 首刊(수간)한 것을 金佔畢齊先生(김점필제선생)은 「學者(학자)에게 有益(유익)한 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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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면]

칭송하였다. 高麗(고려) 禑王(우왕) 元年(원년)에 書筵師父(서연사부-왕의 앞에서 가르치는 스승)가 되었고 이때 背明附元(배명부원-명나라를 배신하고 원나라에 아부하는)하는 姦臣(간신)들을 배제하려다가 朴文正公尙衷(박문정공상충)과 함께 귀양길에서 道卒(도졸)하셨으니 尊華攘夷(존화양이-중국을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침)하시다가 殺身靡悔(살신미회-안타깝게 삶을 버림)하신 春秋大節(춘추대절-역사에 길이 남을 절개)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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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면]

國事(국사)가 날로 잘못되어감을 보시고 家率(가솔)을 湖嶺地方(호령지방-충청도와 경상도)으로 보낸 후 杜門洞(*두문동-별도설명)에 들어가 自靖(자정-스스로 조용히 지냄)하시니 新朝(신조-새로 생긴 조선)에서 간곡한 회유에도 끝내 不應(불응)하고 諸賢(제현)과 더불어 朝服冠帶(조복관대-벼슬아치의 의복)를 나무에 걸어버리고 폐양갓을 쓴체[채] 不朝峴(부조현)에 올라 各己(각기) 그뜻을 말할 때 「깊은 山(산)에 들어가 밭 가는 자 뉘가 알것이며 西山(서산)에서 고사리로 연명하다 죽은 伯夷叔齊(백이숙제)는 저 어떤 사람인가」하며 詩(시)로 수작하고 바다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어 存沒(존몰-생사가 불명함)을 알 수 없으니 淸風孤節(청풍고절-우아한 풍모와 외로운 절개)이 百世有光(백세유광-대대손손 빛남)하시다.

文元公耕隱先生(문원공경은선생)의 휘는 祖生(조생) 字(자)는 季耕(계경)이요 諡(시)는 文元(문원)이니 官(관)이 贊成僉議府事(찬성첨의부사)요 麗末(려말)에 靖節賢臣(정절현신)이다 忠惠王復位二年春三月(충혜왕복위2년봄3월)에 王(왕)이 永華樓(영화루)에 납시어 선생을 入直(입직)케 하시고 古今治亂(고금치란-역사상의 혼란을 다스림)을 말하며 이르시기를 「時代(시대)는 비록 다르지만 나라고 霍光(곽광)과 諸葛亮(제갈량)같은 臣下(신하)가 없겠는가 卿(경)의 忠義大材(충의대재)를 본디 알고 있는지라 王子二人(왕자2인) 忠穆忠定(충목과 충정)을 부탁하니 오늘저녁 이 말을 잊지 말아주오」하시니 俯伏受敎(부복수교-엎드려 교지를 받다)하실제 두 줄기 눈물이 官服(관복)을 다 적셨다고 麗史(려사-고려역사)는 적고 있고 鄭圃隱先生(정포은선생-정몽주)은 耕隱公(경은공)을 贊(찬)한 詩中(시중) 「一片江華(일편강화)에 千秋遺芳(천추유방)이라 쓰셨다. 남기신 詩文中(시문중) 警學文(경학문)과 誡子詩(계자시)는 程朱學(정주학-성리학)의 眞傳(진전)으로 敬義學闡發(경의학천발)의 宗主(종주)라 할 것이다. 三隱先生(삼은선생)을 奉安(봉안)한 祠宇(사우)는 三陽祠(삼양사) 외에 開城(개성)에 杜門院(두문원)과 洪城(홍성)에 龜山寺(귀산사)와 蔚珍(울진)에 景文祠(경문사)가 있고 坡州高麗統一大殿(파주고려통일대전)에 配享(배향)하였다 淄東書院享祀(치동서원향사)는 每年陰曆三月末丁日(매년음력3월말정일)로 定(정)하고 沃構儒林(옥구유림)과 後孫(후손)이 함께 奉祀(봉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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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면의 풀이는 생략함)

비를 세운 시기를 보니 2018년 4월 25일 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작년 봄에 세운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 이전에는 이 비가 아닌 다른 표시가 있었다는 이야기인 모양이다. 큰 공력을 들여서 잘 조성한 덕분에 나그네도 그 내력을 소상히 알 수가 있으니 보람이 있을 것이다.

비문을 살펴보니까 상세하게 잘 쓰긴 했는데 사소한 옥의 티인 오타가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지 싶다. 섬도(島)를 길도(道)로 쓴 것은 착오로 쓴 것을 꼼꼼하게 확인하지 않은 까닭이려니 싶다. 종이에 쓴 것은 다시 쓰기라도 하지만 돌에 새길 적에는 다시 더 살펴봤으면 좋았을 것이라는가르침을 주는 용도로 보면 되지 싶다.




*杜門洞(두문동)에 대하여(요약함)

두문동에서 살았던 태학생 72인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벼슬길에 오르기를 거부하고 충절을 지킨 72인의 사람을 말한다.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던 옛 지명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태학생 72명이 마을의 동과 서에 문을 세우고 빗장을 걸어서 밖으로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두문(杜門)이라고 했다. 태조 이성계가 그들을 회유하기 이해서 경덕궁에서 과거장까지 열었지만 이들은 응시하지 않았다. 1740년에 영조가 개성을 행차했을 때 부조현의 유래를 듣고서 비석을 세웠고, 후에 이러한 이야기가 임선미와 조의생의 자손들에 의해서 정조에게 알려지면서 성균관에다 표절사(表節祠)를 세워서 추모했다. 




제나라의 왕이었던 전씨에 대한 이야기(링크) 

어느 나그네의 전횡도 유람기(링크)

음... 전횡도까진 안 가봐도 되겠군.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