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8] 조선 말은 들리는데 소통은 안 되는 길림(吉林)

작성일
2017-07-12 18:05
조회
5992

[718] 조선 말은 들리는데 소통은 안 되는 길림(吉林)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어느 사이에 초복입니다. 무지막지한 폭염이 시작되었네요. 모쪼록 건강조심 하시고 편안한 여름 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계룡산도 30도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대단한 여름입니다. 하하~!

연길비행기

 

1. 백두산 나들이


이미 여행기를 읽어 보신 벗님은 아시겠습니다만, 2017년 6월 28일부터 7월 2일까지 5일간 백두산 나들이를 다녀 왔습니다. 돌아다닌 이야기야 여행기로도 충분하겠습니다만, 뭔가 가슴 한 켠에서 아련~하게 남아있는 여운은 한담에서나 넋두리 삼아서 중언부언 해 볼까 싶은 마음을 일으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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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이 허물을 벗고 있습니다. 백두산 북파에서 반팔로 돌아 다녔더니만 화상을 입었던 모양입니다. 하필이면 열심히 발라 주던 선크림도 이 날은 바르지 않고 돌아 다녔네요. 그래도 천지의 에너지를 받았으려니 하고 만족합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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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공항에서 부터 중국 여행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여행기를 정리하고 다시 도올 선생의 중국일기가 궁금해서 1권을 펼쳐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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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작년에 사서 읽은 책이었네요. 책을 구입하면 간단하게 구입일시를 적어 두는데 2016년 3월 5일로 쓰여 있었으니 알 수가 있었습니다. 이 책이 나온 것은 2015년 12월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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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앞을 쫘악 펼치니 이런 사진이 나옵니다. 도올 선생의 중국여행도 이 사진으로부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음과 동시에 느낌이 다르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처음에 이 책을 읽을 작년 3월에는

'음... 연길공항이라는 곳이 중국에 있구나....'

그런데 직접 그 공항을 다녀 온 다음에 올 7월에 다시 보는 느낌은

'아, 맞아! 이랬었지....'

같은 사진이지만 보는 사람이 경험한 것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받아들여지는 감상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벗님께서 낭월의 여행기를 읽으시면서도 그러한 느낌일 것이라고 짐작해 봅니다. 하하~!

맑은 천지도 보고, 안개에 감싸인 천지도 봤으니 그만하면 볼 것은 다 봤다고 해도 되지 싶습니다. 더불어서 고산지대에서 핀다는 야생화들도 만발을 한 것을 보면서 즐거운 나들이를 했습니다. 비록 길지도 짧지도 않은 4박5일의 나들이었습니다만, 최대한으로 즐거운 여행길이 되도록 했습니다. 일행들의 일심단결이 빚은 결과물이겠거니 싶습니다.

 

2. 재미있는 안내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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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 공항에 내려서부터 한글은 항상 따라 다녔습니다. 한글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네요. 조선글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자꾸만 뒤를 좇아다녀서입니다. 그래서 시내를 지나갈 적에는 간판을 읽는 재미가 또 쏠쏠했는데 이동 중의 사진들이 별로 많진 않아서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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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행 중에 만난 터널입니다. 훈춘을 가다가 만났지 싶은데, 이렇게 중앙선이고 뭐고 없습니다. 앞에 차가 오면 기다려 줍니다. 그리고 틈이 생기면 또 진행하네요. 사고가 날 뻔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만, 묘하게도 잘 빗겨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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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는 조선글이고, 오른쪽에는 중문입니다. 밀강령차굴이라고 되어 있는 것이 보이지요? 차굴이야말로 순수한 우리말로 보이네요. '차가 다니는 굴'이라니 달리 더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되지 싶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통일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또 어떤 곳은 영문 그대로 소리나는 대로 적어서 '텐넬'이라고 한 곳도 있었거든요.

왜 낭월이 조선글이라고 생각을 했는지 이해가 되실 겁니다. 한글은 '터널'이잖아요? 전국을 그러게 돌아다녀도 '차굴'이라고 쓴 곳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불러야 한다는 생각도 못 했다는 것이 더 타당하지 싶습니다. 외국에 나가서 우리말을 만나게 된 기분.... 참 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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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시인이라는 윤동주 선생의 유적을 찾아서 용정(龍井)으로 가는 길초에서 발견한 간판입니다. 한글이면 틀린 것이고, 조선글이면 맞은 것입니다. 두음법칙이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두음법칙.... 이건 정말 못마땅한 한글의 사용법이라고 생각하는 낭월입니다.

그런데 낭월만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아니었더군요. 이미 많은 학자들이 두음법칙의 문제점을 제기했지만 기득권자들의 생각에는 권력 외에는 관심이 없었는지 그냥 마이동풍이었던 모양인가 싶습니다.

이러한 법칙이 만들어 진 것은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겠거니.... 합니다. 다만 이치적으로는 매우 불합리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만 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물론 국민의 대다수가 '룡정'이라는 소리를 못 한다면 부득이 용정이라고 고쳐서 발음해도 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자연발생적으로 변화하는 것이야 뭐 딱히 뭐라고 탓을 할 것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조선족에서는 원음법칙(두음법칙에 상대되는 법이므로)이 그대로 적용되어 있었고, 가장 반가웠던 만남이었기도 했습니다. 북한에서는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조선로동당'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두음법칙은 해방 후에 대한민국의 수립이 되는 소용돌이 속에서 생겨난 문법이려니.... 싶습니다.

아마도.... 낭월의 상상입니다만, 그 두음법칙을 만든 사람(아마도 학자겠지만)은 혀가 짧았거나 굳어서 초성의 'ㄹ'발음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니면 그 사람이 속해있던 집단이 모두 그랬거나.... 그래서 다른 사람도 그렇게 어려운 줄을 알고서 법칙으로 만들어서 자신들의 혀짧은(혹은 혀굳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혹 이에 대해서 달리 생각하신 벗님도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산골 촌놈인 낭월의 생각은 그렇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사용했던 어법을 그렇게 한 순간에 뜯어 고친 것을 보면 분명히 심모원려의 연구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은가 싶은 짐작을 해 봤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혀도 어려운 발음을 통해서 움직이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런데 룡정을 보는 순간 '아하~ 맞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음법칙이 존재하지 않는 조선말을 보면서 반가웠던 것은 낭월 만이었을까요?

어차피 러시아를 너시아라고 할 수도 없고, 로스엔젤레스를 노스엔셀레스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고 보면, 글로벌시대가 될수록 두음법칙은 망한 법칙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과 함께 괜한 짓들을 해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고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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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읽어 보세요. '용정중학역사전시관'이라고 소리가 나시겠지요? 쓰여진 그대로 '룡정중학력사전시관'이라고 읽어보시라고요. 혀가 잘 움직이지 않는다고요? 아마도 그러실 수도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신식 교육에 의해서 혀가 적응해 버린 탓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중국어를 배우는데도 불리하고 영어를 하는데도 아마 유리할 것은 하나도 없으리라고 봅니다.

낭월도 이것을 읽으면서 혀가 꼬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벗님도 같은 현상이 생겼으리라고 짐작을 해 봅니다. 그렇다면 두음법칙이 옳은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도 해 볼 수가 있겠네요? 왜냐하면 읽기에 편한 것이 좋은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한다면 일리가 있다고도 하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혀의 운동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용정'이라고 할 경우와, '룡정'이라고 할 경우에 혀는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관찰해 보면 되겠습니다. 분명히 룡정이라고 할 적에 훨씬 더 많은 운동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소리도 분명히 구분할 정도로 납니다. 혀의 운동이 많이 된다는 것은 결코 나쁠 이유가 없다고 생각을 해 봅니다.

이씨(李氏)가 자신은 '리씨'라고 해서 좀 당황했던 옛날의 기억도 있습니다. 어느 절에서 가족의 이름을 적는데서 생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ㄹ'이 초성에 오면 'ㅇ'로 소리가 나는 것이 옳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부친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더구먼요. 그래서 낭월이 맘대로 이씨로 바꿔줬습니다.

모르면 용감한 법입니다. 그 후로는 절대로 그런 주제넘은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냥 '리씨'라고 하면 '리씨'로 적고 그렇게 불러주면 됩니다. '라씨'라고 하면 또 그렇게 라씨라고 불러주면 됩니다. 오히려 잘 하고 있는 것을 잘못 되었다고 해야 하는 한글의 교육정책이 문제가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한 참 후의 일입니다.

작명을 할 적에 이 문제는 약한 혼란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이름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보기 때문에 길흉에 작용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작명법에서의 소리 오행은 이씨 오행의 'ㅇ'을 토(土)로 보거나, 수(水)로 보는데, 이것을 원래대로 한다면 'ㄹ'는 화(火'가 됩니다. 이것은 좀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ㅇ'을 토로 본다는 것은 이해가 되겠는데, 수로 보기도 하느냐고 묻고 싶으신 벗님도 계실 수 있겠습니다. 물론 그렇게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것은 훈민정음의 오행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도 있구나... 하면 되겠습니다. 낭월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뭐라고 토를 달고 싶진 않습니다. 다만 이(李)가 두음법칙에 의해서 '오얏리'에서 '오얏이'가 되었다는 것만 중요할 따름입니다.

 

3. 사방이 조선글이라도 말은 중국어


참 기이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처음에 차를 타고서 주행하면서 간판들을 보니까 모두가 한글이 위에 있고, 아래에 중문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어를 몰라도 돌아다니는데 문제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왠지 모르게 여유로움이 생겼다고나 할까요?

물론 일행 중에는 장춘(長春)에서 오랜 세월을 의학(醫學)을 수련하면서 보낸 홍박사도 있었고, 화인이나 낭월의 오죽잖은 중국어 실력이라도 밥을 사먹을 정도는 되기 때문에 크게 아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중국어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한국 사람이라면 분명히 반가웠을 것은 당연하지 않았을까 싶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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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이 조선글이면 그 안에서 음식을 파는 사람도 조선말을 할 수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하겠습니다. 물론 낭월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는 것을 직접 겪어 보고서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온통 보이는 조선글과는 다르게 뭘 사러 가서 한국 말을 하면 대부분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참 희한하다고 생각했지요. 여기 저기에서 조선 말은 들립니다. 그런데 막상 이야기를 해 보면 잘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홍박사에게 물었습니다.

낭월 :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걸까?
박사 : 아마도.... 조선족은 모두 돈 벌러 가서 그럴 거예요.
낭월 :  아무리 그렇게 다 나갔을까?
박사 : 아무리 노력해도 돈벌이가 안 되니까 모두 한국으로 간 거죠.
낭월 : 오호~! 그건 말이 되네. 그렇구나....

그래서 도대체 중국의 조선족은 얼마나 되는지 자료를 찾아 봤습니다. 그랬더니 180만명 정도라고 나오네요. 다음은 검색에서 얻은 내용입니다. 재미있어서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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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大韩民国) 약5000만명(2014年기준)

북한(朝鲜民主主义人民共和国) 약2300만명(2014年기준)


해외조선민족(海外朝鲜民族)/한민족(韩民族)


중국(中华人民共和国) 약180만명

미국(美国) 约170万

일본(日本) 约55万

카나다(加拿大) 253,322

러시아(俄罗斯) 222,027

우즈베키스탄(乌兹别克斯坦) 175,939

오스트리아(澳大利亚) 205,669

필리핀(菲律宾) 115,400

카자흐스탄(哈萨克斯坦) 103,952

베트남(越南) 84,566

브라질(巴西) 48,419

영국(英国) 45,925

인도네시아(印尼) 31,760

독일(德国) 31,248

뉴질랜드(新西兰) 30,792

아르헨티나(阿根廷) 22,024

태국(泰国) 20,200

키르기스스탄(吉尔吉斯斯坦) 18,810

프랑서(法国) 14,738

말레이시아(马来西亚) 14,580

싱가포르(新加坡) 13,509

우크라이나(乌克兰) 13,001

맥시코(墨西哥) 12,072

과테말라(危地马拉) 9,921

인도(印度) 8,337

파라과이(巴拉圭) 5,229

홍콩(香港) 5,209

캄보디아(柬埔寨) 4,772

이탈리아(意大利) 4,203

남아프리카(南非) 3,949

스페인(西班牙) 3,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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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한하게도 중국에서 정리해 놓은 한민족/조선족에 대한 자료가 이렇게 정밀하게 나타날 줄은 미쳐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중문으로 된 국명은 우리가 부르는 방법으로 한글로 바꿨습니다. 2016년 기준으로 약 80만명이 한국에 체류한다는 자료가 있네요. 그렇다면 과연 중국에서 그 빈 자리를 메꾸는 비 조선족의 숫자가 그만큼 많다고 하겠습니다.

홍박사의 이야기에 고개가 끄덕여 지네요.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이 낭월이 알고 있는 몇 사람을 포함해서(ㅋㅋ) 170만명이라고 한다면 지금 현재로 봐서는 미국이 최대로 많은 것으로 봐야 하겠습니다. 그러니 연변의 조선족 자치구에서 조선 말로 소통이 잘 되지 않는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3. 중국식이거나 서양식으로도 쓰이는 조선글


대천혼천관성(大川琿春串城)이락 쓰고, '대천훈춘뀀성'이라고 읽네요. 훈춘이야 지명이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꿸관(串)을 뜻으로 풀어서 뀀이라고 한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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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우에는 중문을 직역한 것으로 보이는 조선글도 보였습니다. 그냥 한자의 소리대로 읽어서 검표처라고 해도 될 것인데, 개표를 써놓고 또 곧처(處)임을 감안하여. 개표 곳이라고 한 것은 좀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대목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 나라는 조선의 것이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단면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외래어도 많이 보였습니다. 당연하다고 하겠네요. 그러한 간판도 살펴봤습니다. 이렇게 간판을 읽으면서 천천히 걸어보는 것도 좋았겠습니다만 바쁘게 이동하는 차를 자꾸 세우라고 할 수도 없고 해서 카메라의 초점 능력만 믿고서 셔터를 눌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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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익을 파는 가게인 모양인데, 상호는 디니야입니다.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체인점인가 싶기도 하네요. 그런가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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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中文)으로는 전뇌(電腦)라고 했는데, 조선글로는 왼쪽은 컴피터라고 써놓고, 오른쪽에는 컴퓨터라고 썼습니다. 그러니까 외래어에 대해서 일정한 통일을 보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혹 한문(漢文)을 왜 중문이라고 하는지 의아하실 벗님이 계실지 모르겠네요. 이렇게 걱정이 많은 낭월입니다. 혹 궁금하셨다면 간단히 말씀을 드립니다. 옛날의 문서는 한문이고, 요즘의 글은 중문입니다. 중문이란 중국에서 사용하는 문자라는 뜻입니다. 한문은요? 한나라때에 사용한 문자라는 뜻이라고 할 수가 있겠네요.

연변 중심가를 둘러 봤더라면 더 재미있는 간판도 볼 수가 있었을텐에 그점은 조금 아쉬웠습니다만, 이미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문자의 구조를 읽어보는 것에 대한 재미를 붙였는가 싶기도 합니다.

그리고 대만에서의 표기와도 약간 차이가 나는 중문도 보였습니다. 다만 대체로 거의 99%는 서로 같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4. 독립군들의 활동무대 북간도(北間島)


이번에 만주벌판을 누비고 다니면서 비로소 이 곳이 독립군들의 주 무대였음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막연히 북간도를 중심으로 활동했다는 문자로 공부한 역사에서 현장을 누비면서 공감하게 되는 느낌은 상당히 달랐습니다.

만주(滿州)는 왜 만주인지, 북간도는 왜 북간도인지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자신의 얕은 지식을 생각하면서 잠시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막연한 생각으로는 북간도는 러시아의 어느 한 지역이겠거니.... 했습니다. 폭설이 쌓여있고, 짐승의 털로 만든 모자와 옷을 입고는 말을 타고 다니는 정도의 상상이었지요.

그런데 그 북간도가 바로 용정(龍井)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지역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시나마 북간도의 중심에 서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만주는 만주족이 자신의 성역으로 주장하여 일반인의 출입을 금했다는 것에서 나온 이야기였습니다.

아시는 대로 만주족은 청나라를 세운 만청(滿淸)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청이라고 하면 만주족이 세운 나라가 청나라이고 그래서 만청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명(明)을 한명(漢明)이라고 하지는 않는 것을 보면 이것도 소수민족에 대한 편견이라고 할 수가 있지 않은가 싶은 생각도 해 봅니다.

그런데, 북간도 혹은 간도(間島)라는 이름이 왜 붙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자료를 찾다가 보니까 그것도 만주와 서로 연관이 있었네요. 청나라에서 성역으로 만들어 놓은 자신들의 고향인 길림, 흑룡강 일대를 출입금지구역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외부와 단절이 되어서 흡사 섬과 같은 형태가 되었다는 의미에서, '중간에 있는 섬'이라는 뜻으로 간도라고 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북쪽에 있어서 북간도라고 했더는 이야기는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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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이렇게 친절한 지도를 그려서 베풀어 주니 고맙다는 말씀부터 드립니다. 간도가 이렇게 광범하니까 북간도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나 봅니다. 더구나 북간도와 서간도를 포함해서 동간도까지 구분이 되어 있었다는 것은 이렇게 지도를 통해서 이해하게 됩니다.

이번에 돌아보게 된 여정을 보니까 결국은 북간도, 서간도, 동간도였네요. 연해주도 쬐끔 포함되었다고 우겨도 될랑가 모르겠습니다만, 방천을 밟았으니 여하튼 전혀 아니라고 하지 않아도 되지 싶습니다.

art_1471916816▲중국 훈춘 부근 방천에서 바라본 러시아, 북한, 중국의 접경지역. 저 멀리 동해가 보이고 러시아 핫산과 북한의 나진을 오가는 철교가 두만강 위로 놓여 있다.Ⓒ간도답사학교

빌려온 사진이지만 낭월도 이 위치에서 사진을 찍었기 때문에 설명용으로 가져왔습니다. 낭월의 사진이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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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날이 맑았더라면, 동해바다를 볼 수가 있을 뻔 했다는 것을 위의 사진을 보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위의 사진은 가을에 찍은 것으로 보이네요. 역시 여름과 가을의 기후 차이는 어쩔 수가 없나 싶기도 합니다.

연길에서 서점에 구경 갔다가 눈에 띄어서 사온 책이 있었는데 오늘 문득 들쳐 봤습니다. 그런데 눈에 띄는 첫 이야기가 보여서 잠시 읽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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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장백산 민간고사(長白山 民間故事)》라는 책 이름이어서 무슨 이야기가 그 안에 들어있을까.... 싶은 호기심으로 사온 책이지요. 그리고 맨 처음에 나오는 제목을 보니까 사람 이름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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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우소고사(楊靖宇小故事)」라는 제목으로 봐서, 양정우라는 사람에 대한 전해오는 이야기인가보다..... 싶었지요. 그런데 한 줄 두 줄 읽어가다가 보니까 그야말로 항일투사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니까 만담으로 전해지는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근대의 이야기였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제목에 속았다고 해도 되겠습니다. 하하~!

그런데 이 사람에 대해서 조금 더 이해를 해 보려고 검색을 해 봤더니 과연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나오네요. 조선독립군들과 같이 활동했음도 당연히 등장을 합니다. 아마도 간도에서 활동하려니까 서로 만날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더구나 그의 삶은 비참한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참 안타깝단 생각도 들었습니다. 순찰을 나갔다가 왜병의 총을 맞고 죽었는데 목만 잘라 가는 바람에 남겨진 시신은 들짐승들이 뜯어먹고, 까마귀가 파먹어서 허벅지만 하나 나뒹구는 것을 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을 보면 처절했던 삶의 마지막이 상상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참혹함이 어찌 양정우 한 사람에게 국한된 이야기겠느냐는 것이지요. 이름조차 남기지 않은 수없이 많은 독립군은 또 얼마나 처참한 삶의 그렇게 타향에서 살다가 떠나게 되었을지를 생각해 보면서 문득 숙연해 지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불과 1930년대와 40년대 초에 일어난 간도의 현실적인 역사였단 이야기네요......

 

5.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


"연변에서 왔시요~!"

라는 말을 들어봤다면 연변이 어디인가 싶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냥 중국의 한 지역에 우리와 같은 말을 쓰는 중국인들이 살고 있는가보다 하는 정도일 수도 있지 싶네요. 연변을 갔는데 연변은 없고 연길만 있었더라는 생각이 들어서 자료를 좀 찾아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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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에 있는 자료를 봤더니 동북삼성(東北三省)인 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에 흩어져 살고 있는 조선족이 많은 지역이 있는 모양인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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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서도 연변조선족 자치주는 길림성의 연길(延吉)이 중심이라고 하니까 연변은 비교적 넓은 지역이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더구나 장백현(長白縣)은 조선족 자치현이라는 말인가 봅니다.

장백현

그렇군요. 백두산의 서남쪽에 해당하는 지역은 장백현이었습니다. 북한과 국경을 나누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네요. 여기는 조선족 자치현이라고 하니까 모든 운영을 조선족이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지는 알 수가 없겠습니다만 아마도 공산당에서 그렇게 둘 리가 없다고 봐야 하지 싶습니다.

그야말로 이름은 이름일 뿐인 것이지요. 이름만 자치(自治)일 뿐이라는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놓고 결국은 하나의 중국으로 뭉뚱그려 넣고 말 테니까요. 그들이 티벳에 대해서 하는 일을 보면 능히 미뤄서 짐작을 하고도 남는다고 하겠습니다.

이미 자치주의 주인이면서 다시 자치현이 존재한다는 것은 아마도 무마용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이렇게까지 대우를 해 주는데 반란을 하여 괜히 분리독립을 한다느니 하는 생각은 하지 말라는 얼르고 달래는 작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왜냐하면 돌아다니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글자는 조선글이고, 여기저기에서 조선말은 들리는데 막상 소통을 하려고 하면 소통이 되지 않는 기이한 현상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름만 조선족자치주이고, 조선족자치현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춰놓고 보면 결국 그 지역을 다스리는 것은 한족이라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잠시 보고 느낀 것이니 당연히 사실과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혹 낭월의 생각이 틀렸을 가능성이 더 많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그러나 천만년의 빛을 이해하는데 한 줄기의 빛이면 충분하다는 생각도 들기는 합니다. 이쯤에서 도올 선생이 왜 그렇게도 열변을 토하게 되었는지도 어렴풋이나마 이해가 됩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는 이러한 의미로 형성된 명칭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연(燕)나라의 변방(邊方)이라서 연변인가 싶은 생각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글자가 연변(延邊)인 것으로 봐서 연결의 꼬투리는 잡히지 않네요. 왜 연나라를 떠올렸느냐면 춘추전국 시대에는 연나라가 춘추오패나 전국칠웅에서 활발했던 지역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소진과 장의에서도 등장하는 지명이네요.

전국칠웅

전국시대의 지도라고 등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연나라의 지도에서도 연길은 포함되지 않았네요. 뭔가 막강한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도올 선생의 추론이 힘을 보태게 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게 뭘까요? 당연히 고구려가 될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동북삼성이라는 지역은 전국시대에서도 변방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도 공격하고 싶었던 고구려가 버티고 있었고 이것은 자기네 영역으로 포함시키지 않았던 것으로 봐서 조선의 영역으로 봐서 중국이 아니었다는 것도 미뤄서 짐작을 할 수가 있겠습니다. 참으로 난감한 그림입니다. 중국측에서 봤을 적에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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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도도 마찬가지로 대략 전국시대의 형태인가 싶은데 역시 연나라는 백두산을 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세상에서는 다른 나라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는 근거이기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6.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역사 전쟁


이거 이야기가 좀 커지나요? 뭐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없는 이야기를 하자는 것도 아니니까요. 하하~!

우리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서 대략은 알고 있습니다. 중국의 동북지역을 중국의 역사로 만들기 위한 역사왜곡사업이라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를 전국시대의 그림에서 대략 이해가 되겠네요.

동북삼성이 중국의 역사에 편입되기 위해서는 조선족이 옛날에는 그 자리에 살고 있지 않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일이 복잡해 지거든요. 그들이 만들어서 발표한 자료를 보면 느낌이 뚜왁~! 옵니다. 그 자료(북경 민족단결잡지사-2007년판)에 의하면 옛날에 조선족이 살았었다는 말은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나 봅니다.

조선족의 이동은 3차례에 걸쳐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1차는 1910~1945에 한반도에서 약 140만 명이 이주했다는 것입니다. 고종시기에 이주를 했거나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했던 시기를 말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2차는 1945~1953에 중국에서 거주하던 조선족들이 한반도의 남북한으로 이동을 했답니다. 해방 후에 돌아온 사람들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 시기에 약 100만의 인구가 빠져나간 셈이 된다고 하겠네요.

3차는 1985~2006에 중국에서 한국으로 약 25만 명이 이주했다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 들어온 조선족을 말하는 것 같고, 한국에서 중국으로 70만 명이 이동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자료의 어디에서도 그 이전에 살고 있었다는 조선족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야말로 깔끔하게 청소를 해 버렸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관광지도

광개토대왕릉은 어디에 있나 하고 찾아보니 여기로군요. 광활한 고구려의 기상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 영토확장의 광개토대왕이고 우리는 그의 활약에 박수를 치면서도 남을 침략하지 않았다는 이중적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ㅋㅋㅋ

고구려가 조선의 역사에서 포함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발을 붙일 곳이 없게 만들어야만 했던 중국정부도 고생이 많습니다. 없는 것은 만들고, 있는 것은 없애려면 얼마나 힘들겠느냔 말이지요.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은 그래도 어떻게 해 본다고 하지만 있는 것을 없애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거든요. 왜냐하면 그것이 역사이니까 말입니다.

일제의 식민지화,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물려서 고구려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다고 해도 되겠습니다. 그야말로 남북한의 역사 책에서만 남아있다가 그것조차도 언젠가 사라져버릴지도 모르겠네요. 물론 그렇거나 말거나 뭐 어쩔 수는 없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조차도 역사이니까요. 얼마나 많은 나라들이 생멸했는지를 보면 알 수가 있는 일이니까요.

가야국이 사라진 것만 봐도 그렇지요. 그렇게 사라지고 편입되면서 역사는 흐른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조선족이 한반도에서 유입된 소수민족이라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거짓말도 근거가 반딧불이 만큼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이니까요. 전혀 허무맹랑하면 누가 들어주느냔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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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것은 전국시대부터 연나라의 동쪽은 항상 변방이었고, 우리는 그 지역이 막강한 실력자들인 고구려가 지배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연나라도 발해(渤海)에게 먹혔고, 발해도 우리의 역사라고 본다면 또한 뭔가 연결고리를 찾을 수도 있지 싶습니다.

이런 소리를 하면 중국인은 그럽니다.

"삼황오제도 모두 동이족이라메~?"

주역 전문가인 대만의 증사강(曾仕强) 선생도 그럽디다. "황제도 한국 사람이라고 한다"면서 웃더군요. 그러나 그게 웃을 일인지 슬퍼할 일인지는 또 두고 봐야 할 것입니다만, 역사만 있고 영토가 없으니..... 참 안타까울 일입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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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대표하는 왕조인 한나라 지도입니다. 물론 그들이 그린 지도라는 단서를 붙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도 거짓말도 잘 하는 사람들이라서....

아무리 할인해서 보더라도 삼한(三韓)은 두통꺼리였겠습니다. 쪼맨하게 붙어서 도저히 마음대로 청소가 되지 않았던 것을 지도에서도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지요. 살실 북한에서는 조선이라고 하고  남한에서는 한국이라고 하는 것도 여기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가 있지 싶습니다.

북한은 고조선의 영역을 생각해서 조선이라고 국호를 정한 것이겠지요. 그리고 고구려도 미련이 남아서 고려연방제라는 말이 나온 것이려니 싶습니다. 반면에 남한은 왜 한국(韓國)일까요? 아마도 한(韓)은 삼한에서 나왔을 것으로 봅니다. 학교에서도 이렇게 배우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진한, 변한, 마한의 삼한에 뿌리를 두고서 한국이라고 하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이 일리가 있다고 여기는 낭월입니다. 그렇게 되면 절대로 다른 나라에게 먹히지 않았다는 자존심도 조금은 살아날 수가 있겠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이거 일이 너무 커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역사는 재미있습니다. 하하~!

kr-map-han

일본에서 그려놓은 삼한인가 싶습니다. 사실 우리의 역사 공부는 어떻습니까? 관심이 없거나 일본이나 중국의 자료를 바탕으로 연구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 연구도 없이 그냥 받아들이기만 해서 도올 선생이 열을 많이 받으셨는가 싶기도 합니다. 비록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이렇게 산골 무지랭이의 관점으로도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많다고 하겠는데 지식분자들의 생각은 또 어떨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여전히 임나(任那)를 이야기하고 있네요. 일본도 역사문제에 대해서는 참으로 고민이 많은 나라인가 봅니다. 오죽하면 광개토대왕의 비문조차도 시멘트를 발라서 왜곡시킬 생각을 했겠느냐는 생각을 해 보면 더욱 그들의 고민이 어디에 있었는지도 궁금해 집니다.

뭐, 그런다고 달라질 것이 있겠느냐는 생각도 듭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존심의 싸움이겠지요. 중국과 일본의 자존심 싸움에 우리 역사는 자꾸만 움츠려 드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일본해도 그렇고... 임나설도 그렇고.... 뭐 위안부도 그렇고....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어 보이기만 한 것은 왜일까요?

前三国

다시 중국측의 지도에 보이는 삼한입니다. 영역은 서로 다르지만 여하튼 그 삼한의 존재만큼은 부정을 할 수가 없었던가 봅니다. 이렇게 한대(漢代)에는 조선의 영토까지도 접수했었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끝까지 어떻게 하지 못한, 쪼맨한 지역의 삼한의 존재를 제거하지 못했다는 아픔이 있었지 싶기도 하네요. 참 안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는 누가 지은 것인가요? 검색을 해 보니까 고종이 대한제국이라고 지은 것이 시발점이었다네요. 그렇다면 고종은 무슨 근거로 대한제국이라고 했을까요? 그에 대한 설명도 있나 싶어서 찾아 봤습니다만, 쉽사리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그렇다니까 그런가보다 하라고요....? 하하~! 글쎄 올시다.....

앗~! 이승만이 대한민국이라고 했다는 말도 나오네요..... 음.... 대단히 찝찝하네요. 조선이라는 국호로 오랫동안 내려온 역사를 바로 부정하고 삼한의 의미에서 따온 대한민국이란 말인가요? 고려라고 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기왕에 이름을 붙인다면 말이지요. 고려는 고구려를 이어받았고, 조선은 고조선을 이어받았는데 왜 한국은 삼한을 이어받았을까요? 그렇게 되면 북진통일은요? 에구~! 여러 가지를 상상하게 만듭니다.

외국 사람들에게는 고려(korea)라고 하면서 우리는 왜 삼한에 머무른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당연히 고려라고 했어야지요. 웅지(雄志)가 도무지 보이지 않습니다. 중원을 호령하던 기개 말이지요. 백두산 호랑이가 웃습니다. 참말로, 고종이나 이승만이나.... 쯧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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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만 봐도 시원합니다. 우리 나라의 국호는 고려(高麗)였어야 합니다. 높이 빛나는 고운 나라이니까요. 반면에 한국은 도무지 걸맞지 않는 국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맘대로 해 볼 수는 없으니까 요렇게 한담에서라도 중얼거려 봅니다. 뭐 안 될 것이 있나요. 이참에 문 대통령께 건의해서 국호를 고려로 바꿔버리지요. 예? 그럼 고려연방제를 부르짖고 있는 북한에 먹히는 꼴이라고요? 괜한 걱정을요. 하하~!

수(隋)나라도 벌벌떨고, 당(唐)나라도 어쩔 수가 없었던 고구려.... 그 위상은 진한의 도움을 받고서야 무너뜨릴 수가 있었던가 봅니다. 신라의 협공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고구려와의 싸움을 이길 수가 있었다고 보면 말이지요.

국호가 한국이라 놓으니까 마한(馬韓-전라도)과 진한(辰韓-경상도)이 싸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묘한 데자뷰일까요? 하여튼 이렇게 역사의 여행은 재미있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에구~ 너무 길어졌네요. 이 쯤에서... ㅋㅋㅋ

 

 7. 마무리


사실, 여행이라고 해 봐야 불과 가는 날과 오는 날을 빼고 백두산에 갔던 것도 뺀다면 겨우 하루라고 해도 될 극히 짧은 시간에 느껴 본 나그네의 소감이라는 점에서 구우일모(九牛一毛)에 불과한 관점일 수도 있음을 생각해 봅니다만, 그럼에도 약간의 감상이 있어서 중언부언 해 봤습니다.

그러면서 이 지역에서 발해에 대한 유적이나 고구려의 유적에 매료되어서 탐사를 하셨던 도올 선생의 마음도 헤아려 봤습니다. 이렇게 유적지를 찾다 다니다가 보면 누구라도 그 피 속에 한국인의 유전자가 흐른다면 무심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번 여행이 유적탐사도 아니고 그냥 백두산 관광에 불과했으므로 혹 다음에 다시 기회가 된다면 차분하게 여유를 갖고서 둘러봐도 좋겠다는 여운이 남았습니다. 그러면 광개토대왕의 유적도 둘러보고 흑룡강성과 요령성을 거쳐서 한바퀴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은 생각을 간직하고 돌아 왔습니다.

그래서 결론은요.

대만에서 느낀 것과는 또 많이 다른 그런 감상이 있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혹 나들이를 하시게 된다면 이러한 자료가 참고되셔서 더욱 알찬 여행길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17년 7월 12일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