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4] 어느 길손과의 대화: "명리학이 뭡니까?"

작성일
2014-06-03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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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예전에 공지사항으로 올렸던 것인데 홈페이지를 개편하면서 낭월한담으로 옮깁니다. 혹 이미 읽으셨던 벗님께는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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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길손과의 대화: 명리학이 뭡니까?


어제는 멀리서 오랜만에 반가운 벗이 찾아왔습니다. 항상 진리(眞理)를 생각하고 보다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겠다고 하는 친구입니다. 지나는 길에 들렸다고 하는데 마침 동행(同行)을 한 중년의 남자가 있었는데 차(茶)를 나누면서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사주(四柱)에 대해서 좀 더 이해를 하고 싶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해 줄 수 있겠느냐고 해서 몇 가지의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해 줬습니다. 그리고 손님이 떠난 다음에 이야기를 나눈 것에 대해서 정리를 하면 혹시라도 초학자(初學者)나 입문자(入門者)에게는 약간(若干)의 방향(方向)에 대한 제시(提示)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써 봤습니다.


2013년 1월 21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







길손: 낭월선생께 묻습니다. 사주팔자(四柱八字)가 무엇입니까?


낭월: 이 땅에 태어날 때의 시간(時間)을 연월일시(年月日時)로 나눠서 간지(干支)를 부여(附與)하게 되면 네 개의 기둥에 여덟 글자로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길손: 간지(干支)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낭월: 그것은 천기(天氣)의 변화(變化)를 나타내는 십간(十干)과 지질(地質)을 나타내는 십이지(十二支)입니다.


길손: 그것으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낭월: 그렇게 태어난 사람의 품성(稟性)과 살아가는데 장단점(長短點)을 파악(把握)하는 용도(用度)가 됩니다.


길손: 어떻게 장단점을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까?


낭월: 그것은 사주팔자(四柱八字)를 간지(干支)로 변환(變換)하여 놓고서 오행(五行)과 음양(陰陽)으로 대입(代入)하고 비율(比率)을 궁리(窮理)하여 알 수 있게 됩니다.


길손: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부모(父母)의 사랑에 의해서 탄생(誕生)하는 것인데 그것으로 무엇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낭월: 그것은 생물학적(生物學的)으로 본 관점(觀點)입니다.


길손: 생물(生物) 중에서는 동물(動物)에 속하고 동물 중에서는 영장류(靈長類)에 속하며 그 중에서도 인류(人類)로 분류가 되는 것이 인간(人間)인데 그 외에 또 다른 무엇이 작용(作用)을 한다고 보는 것입니까?


낭월: 사람을 논할 적에 동물(動物)로 논한다면 그렇게 보는 것도 타당(妥當)하지만 인격체(人格體)로 논하게 된다면 육체(肉體)의 주인(主人)인 본성(本性)이 주체(主體)가 되므로 저마다 타고 난 품성(稟性)이 다른 것은 천지(天地)의 기운(氣運)을 받고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길손: 그렇다면 우연(偶然)히 그날 그 시각(時刻)에 태어난 이유(理由)로 빈부(貧富)와 귀천(貴賤)이 나눠진다는 것입니까?


낭월: 현실적(現實的)으로는 그렇게 봐야 할 것입니다.


길손: 그것은 너무나 불공평(不公平)하지 않습니까?


낭월: 원래 세상(世上)은 그렇게 불공평(不公平)한 것입니다. 마치 하나 밖에 없는 빵을 열 사람 중에서 먹을 사람을 뽑으려면 추첨을 하게 되는데 그 중에 걸리는 사람은 공덕(功德)이 많은 사람이고 빵을 맛볼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은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길손: 그렇다면 억울(抑鬱)하지 않도록 설득력(說得力)이 있는 방법(方法)으로 이해(理解)를 시켜 줄 수 있겠습니까?


낭월: 그 문제(問題)에 대해서 낭월은 삼생론(三生論)으로 이해(理解)하는 것이 보다 객관적(客觀的)이고 설득력(說得力)이 있는 방법(方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길손: 삼생론이 무엇입니까?


낭월: 삼생(三生)이란 과거세(過去世), 현재세(現在世), 미래세(未來世)를 말합니다. 그리고 탄생(誕生)은 과거(過去)의 삶을 이어서 다시 주어진 것이라고 보는 관점(觀點)입니다. 이것은 마치 산천(山川)의 초목(草木)이 가을에 잎을 떨어트리거나 말라 죽지만 다음 해 봄이 되면 다시 새로운 씨앗에서 싹이 나와서 자라는 것과 같은 관점(觀點)입니다.


길손: 그렇다면 사주(四柱)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은 전생(前生)에서 쌓은 인연법(因緣法)의 영향(影響)이라는 이야기가 됩니까?


낭월: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번의 삶에서 쌓은 공과(功過)는 다시 다음 생의 사주(四柱)로 이어질 것으로 봅니다.


길손: 그런데 전생(前生)에 좋은 공덕(功德)을 쌓아서 좋은 팔자(八字)로 태어난다는 증거(證據)를 댈 수 있겠습니까?


낭월: 증거(證據)를 댈 수는 없습니다. 그냥 짐작(斟酌)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길손: 그렇다면 믿을 수는 없다는 말도 됩니까?


낭월: 그렇습니다. 그렇게 봐도 됩니다. 그러나 긍정적(肯定的)으로 생각을 해 볼 수만 있다면 일리(一理)는 있는 추론(推論)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길손: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어떤 추론이 가능(可能)합니까?


낭월: 불교(佛敎)에서 전해지는 경전(經典) 중에는 삼세인과경(三世因果經)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번 생에 단명(短命)하는 것은, 전세(前世)에 살생(殺生)을 많이 한 업보(業報)이고, 부유(富裕)하게 살아가는 것은, 전세(前世)에 재시(財施)를 많이 한 까닭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벌어도 끼니 걱정을 면하기 어렵다면 이것은 빈한(貧寒)한 사람이니 전생(前生)에 복덕(福德)을 짓지 못한 사람과 상통(相通)하는 논리적(論理的)인 근거(根據)가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길손: 그렇다면, 사주(四柱)를 볼 줄 알면 그 사람이 전생(前生)에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낭월: 그건 아닙니다. 사주(四柱)를 풀이하여 재물(財物)복이 없거나 부귀(富貴)를 누릴 수 있는 사주인지를 판단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것이 반드시 전생에서 온 것이라는 증명(證明)을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단언(斷言)을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러한 결과(結果)를 놓고서 역(逆)으로 추산(推算)을 하여 전생(前生)에 그러한 행위(行爲)를 하지 않았겠느냐는 짐작을 하는 것뿐입니다.


길손: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설명을 합니까?


낭월: 구태여 설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믿지 않으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길손: 사주팔자(四柱八字)에는 그 사람의 부귀빈천(富貴貧賤)과 길흉화복(吉凶禍福)이 모두 드러나 있는 것이 확실(確實)합니까?


낭월: 확실(確實)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짐작을 할 수는 있습니다.


길손: 확실하지도 않은 것으로 사람의 운명(運命)을 거론(擧論)하는 것은 사기(詐欺)에 해당(該當)하는 것이 아닙니까?


낭월: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세상(世上)에는 확실(確實)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길손께서는 그러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도리어 길손께 여쭙고 고견(高見)을 듣고자 합니다.


길손: 당연(當然)히 있습니다. 과학적(科學的)으로 증명(證明)이 된 것은 확실(確實)하다고 해도 되기 때문입니다.


낭월: 그렇다면 다시 묻겠습니다. 과학적(科學的)으로 증명이 된 것은 무엇이 있습니까? 과학적으로 길손이 내년에 어떤 삶이 이어질 것인지를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과학적으로 어떤 사람의 삶이 언제 흥성(興盛)하고 패망(敗亡)할 것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까?


길손: 그것은 과학적(科學的)이지 않기 때문에 과학(科學)으로 거론(擧論)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증명(證明)이 되지 않는 것은 미신(迷信)이기 때문입니다.


낭월: 그렇다면 과학으로는 인류(人類)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는 것입니까?


길손: 그러한 것들도 앞으로 점점 밝혀 질 것입니다.


낭월: 그렇다면 아직 완전(完全)하지 않은 이론(理論)이라는 이야기입니까? 완전하지 않은 이론이 앞으로 어떻게 완전해 질 것인지를 장담(壯談)할 수는 있는 것입니까? 혹 길손께서는 과학교(科學敎)의 미신(迷信)에 빠져서 맹신(盲信)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길손: 과학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發展)하고 있으므로 멀지 않아서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 확실(確實)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적어도 존재(存在)하지도 않는 간지(干支)를 들먹거리면서 인간(人間)의 마음에 혼란(混亂)을 일으키는 사기행각(詐欺行脚)은 하지 않아야 한다고 보며 그것은 언젠가 과학에 의해서 허구(虛構)라는 것이 밝혀질 것입니다.


낭월: 그렇게 되는 날이 하루 속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것을 알기 전까지는 어떻게 합니까? 그냥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아무런 확신도 갖지 못한 채로 막연히 꿈만 갖고 열심히 노력하여 최선을 다 하는 것뿐입니까? 그리고 최선을 다 하면 이뤄지기는 합니까?


길손: 이미 원자(原子)와 핵(核)과 전자(電子)에 대해서도 규명(糾明)을 했고 생물적(生物的)으로는 유전인자(遺傳因子)를 규명하여 DNA를 찾아서 게놈지도까지도 완성하는 단계를 넘어 섰습니다.


낭월: 그렇게 되면 인간의 미래가 어떤 과정(過程)을 통해서 어떻게 진행(進行)이 되어서 어떤 미래가 될 것인지에 대해서 소상(昭詳)하게 알 수가 있습니까?


길손: 아무래도 과학으로 미래의 개인에 대한 운명을 알기에는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씀을 듣다가 보니까 서로의 길이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낭월선생은 운명은 어떻게 연구(硏究)하고 적용(適用)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낭월: 그렇게 말씀하시니 다시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낭월이 생각하기에 운명학(運命學)은 많은 시간의 누적(累積)을 통해서 삶의 여정(旅程)을 객관화(客觀化)하여 삶의 모습을 그려내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통계학(統計學)이라고도 합니다만 그것도 적합(適合)한 이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현상학(現象學)이라는 말은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길손: 현상학이란 어떤 것입니까?


낭월: 어떤 현상(現象)에 대해서 왜 그러한 현상이 생기는지를 연구하는 학문(學問)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갑일(甲日)에 태어난 사람에게는 공통적(共通的)으로 어떤 특이성(特異性)이 나타났다고 가정(假定)을 했을 적에 그 이유는 모르지만 갑(甲)이라는 글자를 하나의 현상이 고정적(固定的)으로 일어나는 부호(符號)로 대입을 하는 것은 가능할 것입니다.


길손: 그것은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낭월: 과학적이려면 모델이 있어야 하고 그 모델은 반드시 그러한 결과가 나오고 그 이유가 명백(明白)해야 하며 다시 그러한 상태가 재연(再演)되어야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현상학은 그렇지 않으므로 과학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길손: 그렇다면 그것을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낭월: 믿을 수도 있고 믿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믿고, 믿지 못하는 사람은 안 믿으면 그만입니다. 다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분명(分明)한데 그러한 이유가 어떤 인과(因果)로 인해서 발생(發生)되는 것인지를 증명(證明)할 방법(方法)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름도 현상학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길손: 그렇다면 낭월선생은 운명학(運命學)이 있다고 믿으며 그것은 전생(前生)에서 왔을 가능성(可能性)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믿습니까?


낭월: 그렇습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길손: 그러니까 객관적(客觀的)으로 증명(證明)을 하여 보여줄 수는 없지만 운명(運命)의 작용(作用)이 일어나는 것을 간지(干支)의 팔자(八字)를 통해서 읽을 수는 있다는 이야기군요? 그렇다면 그것이 곧 증명(證明)이 아닙니까? 왜 그렇게 자신이 없는 듯 한 말씀을 하시면서 또한 믿는다고 하는 것입니까?


낭월: 그것은 절대적(絶對的)이 아닌 것 같기 때문입니다. 대부분(大部分)은 여기에서 적용(適用)을 받는 것 같지만 또 더러는 다른 시스템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확언(確言)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길손: 그것은 낭월선생의 학문(學問)의 깊이가 부족(不足)해서 그렇거나 접근(接近)하는 학문적(學問的)인 관점(觀點)의 오류(誤謬)로 인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까?


낭월: 그렇게도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렇지만 천성(天性)이 아둔한 탓도 있겠으나 여러 가지로 접근을 해 봤지만 그렇게 100%의 정확성(正確性)을 갖고 있는 운명학(運命學)은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법칙(法則)이 개입(介入)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길손: 그렇다면 생각하시기에 어떤 방법이 개입하고 있는 것으로 추론(推論)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낭월: 예를 든다면, 환경(環境)입니다. 또 지식(知識)과 부모(父母)도 영향(影響)을 미칠 것입니다. 또 보이지 않는 영적(靈的)인 영향력(影響力)도 개입(介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이에서 복합적(複合的)으로 운명(運命)의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고 봅니다.


길손: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을 다 배워서 통달(通達)을 한다면 100%의 예언(豫言)이 가능하겠습니까?


낭월: 이론적(理論的)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모두 한 줄에 엮어서 염주(念珠)처럼 목에 걸 천재(天才)는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길손: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낭월선생은 사주학(四柱學)만을 고집하고 있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일평생(一平生)을 연구(硏究)하는 것으로 한 가지만 집착(執着)하는 것은 너무 협소(狹小)하지 않습니까?


낭월: 미리 말씀드렸듯이 천성이 아둔한 것이 가장 큰 원인(原因)입니다. 그 외에 변명(辨明)을 조금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이 사주학의 영역(領域)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임상(臨床)으로 경험(經驗)하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널어 벌여놓고 고민하는 것보다는 한 가지라도 제대로 사용하는 길이 최선(最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길손: 그 점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評價)하겠습니다. 예로부터 그렇게 한 분야에서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면서 끝없이 궁리하고 추적하는 것을 학자(學者)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시야(視野)를 좁혀서 몇 가지 여쭙겠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귀찮다고 생각지 말고 의견(意見)을 주시기 바랍니다.


낭월: 힘써 의견 드리겠습니다. 무엇이든 물어 주시기 바랍니다.


길손: 낭월선생이 연구하고 적용(適用)하는 것은 어떤 학문(學問)입니까?


낭월: 자평명리학(子平命理學)입니다.


길손: 그것은 무엇으로 특징(特徵)을 삼습니까?


낭월: 태어난 날의 천간(天干)을 그 사람의 주체(主體)로 삼고 주변(周邊)에 있는 일곱 글자의 간지(干支)를 놓고 판단(判斷)하는 것이 특징(特徵)입니다.


길손: 그렇게 단순한 논리를 갖고서 어떻게 대입(代入)을 하게 됩니까?


낭월: 우선은 오행(五行)의 비율(比率)을 봐서 어느 오행이 왕성(旺盛)하고 어느 오행(五行)이 쇠약(衰弱)한지를 판단(判斷)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향(影響)에 의해서 일간(日干)의 왕쇠(旺衰)는 어떻게 되는지를 판가름하게 됩니다.


길손: 그렇다면 일간(日干)이 왕성(旺盛)하면 어떻게 되고 또 쇠약(衰弱)한 오행(五行)에 해당하면 어떻게 판단을 합니까?


낭월: 그렇게 해서 일간(日干)의 오행(五行)이 왕성(旺盛)하다고 판단이 되면 그 오행을 극제(剋制)하거나 설기(洩氣)하는 오행(五行)이 도움을 주는 것이 되고 허약(虛弱)한 것으로 나타나게 되면 이번에는 반대로 일간(日干)의 오행(五行)을 생조(生助)를 해 주는 오행(五行)이 도움을 주는 것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길손: 그렇다면 자평명리학은 오행론(五行論)을 근간(根幹)으로 삼고 대입(代入)하게 되는 것입니까? 음양(陰陽)에 대해서는 언급(言及)을 하지 않으시니 말입니다. 원래 들은 바로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이라고 들었는데 의외(意外)네요.


낭월: 그렇지 않습니다. 오행(五行)은 주체(主體)가 되고 음양(陰陽)은 변화(變化)가 되어서 작용(作用)이 됩니다. 그래서 기본적(基本的)인 관점(觀點)으로는 오행(五行)을 논하지만 세부적(細部的)인 분석(分析)을 하게 되면 음양(陰陽)도 고려(考慮)하여 판단을 합니다.


길손: 그것을 통해서 길흉(吉凶)을 어떻게 읽어 내게 됩니까?


낭월: 자평명리학은 조화(調和)와 균형(均衡)을 이상(理想)으로 삼고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일간(日干)일 경우에는 도움을 주는 시기(時期)에 좋은 일이 생기거나 원하는 일이 성취(成就)되는 것으로 판단을 합니다. 그리고 원하지 않는 오행이나 심지어는 꺼리는 오행(五行)이 작용하는 시기에는 흉(凶)한 일이 많거나 길(吉)한 일이 적다고 판단을 하게 됩니다.


길손: 도움을 주는 시기나 해로움을 주는 시기는 무엇을 기준으로 보게 됩니까?


낭월: 그렇게 되는 포인트를 용신(用神)이라는 말로 나타냅니다. 그래서 자평명리학의 가장 중요한 중심(中心)에는 용신(用神)의 역할을 맡게 되는 글자를 읽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길손: 이름이 왜 그렇게 생겼습니까? 혹시 신비(神秘)롭게 보이기 위해서입니까?


낭월: 그 이름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오행의 균형을 이루는 한 글자가 작용(作)하는 것이 신기(奇)하게도 인간의 길흉화복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물론 귀신(鬼神)과는 아무런 관계(關係)가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부르는 이름일 뿐입니다.


길손: 사주학(四柱學)을 통해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낭월: 저마다 타고 난 적성(適性)과 성패(成敗)의 시기(時期)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부모(父母)와 형제자매(兄弟姉妹)의 인연(因緣)에 대한 길흉(吉凶)을 읽을 수 있고, 배우자(配偶者)의 길흉(吉凶)과 자녀(子女)에 대해서도 판단을 할 수 있으며 대인관계(對人關係)에서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과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판단(判斷)을 할 수 있습니다.


길손: 그러한 것이 모두 태어나면서 결정(決定)되는 것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까?


낭월: 그렇습니다.


길손: 사회적(社會的)으로 성공(成功)하거나 부부(夫婦)의 인연(因緣)이야 운명(運命)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심리적(心理的)인 적성(適性)도 사주(四柱)를 통해서 알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낭월: 그렇습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사주학(四柱學)의 탁월(卓越)한 장점(長點)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길손: 심리를 어떤 방식으로 읽을 수가 있습니까? 그것을 읽을 수가 있다면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 상당히 다양(多樣)한 참고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낭월: 우선 사주(四柱)를 봐서 내성적(內省的)인지 아니면 외향적(外向的)인지를 구분(區分)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간(中間)인지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성적인 사람은 내무(內務)에 어울리는 적성(適性)이 되고 외향적인 사람은 외무(外務)에 맞는 것을 찾아서 대입을 하게 됩니다. 내무란 사무직(事務職)이나 제한(制限)된 공간(空間)에서 일을 처리하는 것을 말하고 외무란 영업직(營業職)이나 넓은 공간에서 활동적(活動的)인 일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대입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그 중간에 있는 사람은 안의 일과 밖의 일을 모두 처리 할 수가 있다고 봅니다.


길손: 사주학(四柱學)으로 그러한 것을 유추(類推)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매력적(魅力的)인 부분(部分)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 외에는 또 무엇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낭월: 보수적(保守的)인지 개방적(開放的)인지도 알 수가 있습니다. 보수적인 사람은 공무원(公務員)이나 교육자(敎育者)와 같은 분야(分野)에 종사(從事)를 하면 잘 어울릴 것이고 개방적(開放的)인 사람은 예능(藝能)이나 기술(技術)의 연구(硏究)와 같은 분야에서 능력(能力)을 발휘(發揮)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보수적인 사람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어 놓으라고 하는 것은 일을 그만두라는 의미도 되겠습니다.


길손: 그것은 응용(應用)을 할 분야(分野)가 많을 것으로 보겠습니다. 특히 중고등학교(中高等學校)에서 진로적성(進路適性)을 상담(相談)할 경우에 참고(參考)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또 무엇을 이야기 해 줄 수 있겠습니까?


낭월: 가령 개방적(開放的)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다시 그것의 음양(陰陽)에 대한 작용(作用)으로 제조업(製造業)에 적합(適合)한지와 유통업(流通業)에 적합한지를 구분하여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하는 말로 ‘장사나 해 볼까?’라는 말을 하더라도 그 장사의 스타일에 대해서는 슈퍼마켓을 할 것인지 아니면 전문적(專門的)인 의류점(衣類店)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분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커피숍을 하더라도 체인점을 할 것인지 자신의 브랜드를 개발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조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길손: 그렇다면 상당히 세부적(細部的)으로 조언(助言)이 가능하겠습니다. 그것이 사주(四柱)에 의해서 구분(區分)이 된다는 말씀입니까?


낭월: 그렇습니다.


길손: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교육자(敎育者)가 된다고 하더라도 국어선생과 수학선생이 구분되고 과학선생과 도덕선생도 나눠질 수가 있겠습니까?


낭월: 가능합니다.


길손: 철학자(哲學者)와 종교인(宗敎人)의 적성(適性)에 대해서도 구분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낭월: 그렇습니다. 오랫동안 연구와 임상을 하다가 보면 길손선생과 같이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에서도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보이지 않는 세상의 이치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구나! 그렇다면 사주에 식신(食神)과 편인(偏印)이 있는가 보다.’라고 유추(類推)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철학적(哲學的)인 분야(分野)에 적성(適性)이 있는 것으로 판단(判斷)을 하게 되지요.


길손: 아니, 그것은 저의 사주를 본 다음에서야 비로소 판단이 가능한 것이 아닙니까? 단지 언사(言辭)를 놓고서도 추론(推論)이 가능하다는 것입니까?


낭월: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그렇게 말을 하는 것에는 그러한 사주를 갖고서 생각한 바에 대해서 말을 하기 때문에 역으로 추산을 하면 사주의 그림을 그릴 수가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짐작에 불과하므로 본인이 구체적으로 조언을 원할 경우에는 사주를 보고 확인을 하게 되는 절차(節次)가 필요(必要)할 뿐입니다.


길손: 이것은 좀 실례(失禮)가 되는 말씀입니다만, 혹 그 사람의 외모(外貌)만 보고서도 어떤 분야에 적성을 타고 났는지 짐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낭월: 그것은 사주학(四柱學)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삶의 여정(旅程)을 한 50년 보내게 되면 자연 느낄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이야기를 해 보지도 않고서 판단하는 것은 조심성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분야에 관심이 있을 경우에는 사주학보다는 인상학(人相學)으로 공부를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길손: 인상학은 무엇입니까?


낭월: 보통 관상(觀相)이라고 합니다. 얼굴을 보면 면상(面相)이고 손을 보면 수상(手相)이며 발을 보면 족상(足相)이고 골격을 보면 골상(骨相)이 됩니다만 그 모두를 통 털어서 인상학(人相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낭월은 그쪽에는 조예(造詣)가 부족하므로 뭐라고 답을 할 주변이 되지 못함을 양해 바랍니다.


길손: 하나를 알면 모든 분야에 두루 통달(通達)하는 것이 아닙니까?


낭월: 그렇지 않습니다. 운명학(運命學)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병원(病院)에서 각과(各科)의 분야(分野)가 다양한 것과 마찬가지로 저마다의 특수(特殊)한 영역(領域)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것저것을 닥치는 대로 배우지만 결국은 한두 가지로 자신의 전문적(專門的)인 영역을 확보하게 됩니다. 만약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핵심(核心)을 얻지 못하고 언저리를 배회(徘徊)하는 아마추어에 불과(不過)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길손: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상학에 대해서 관심(關心)을 갖지 못한 특별(特別)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낭월: 어쩌면, 모양은 모양일 뿐이라는 불교적(佛敎的)인 사상(思想)이 개입한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항상 겉모습만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가르침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지요. 주인공(主人公)은 속에 감춰져 있는데 외관(外觀)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에 대한 한계(限界)를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상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급이 떨어진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냥 매력(魅力)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일 뿐입니다.


길손: 그렇다면,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인상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사주학을 하지 않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시는지 말씀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낭월: 예전에 어느 인상가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생일도 정확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는 간지(干支)만으로 운명을 논하는 것에 대해서 허황(虛荒)되다는 느낌을 갖게 되어서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것도 일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길손: 그렇다면 혹 그러한 적성에 대해서도 사주에서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낭월: 참고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상계(現象界)에 대해서 체감(體感)을 할 수 있는 성향(性向)은 재성(財星)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보이지 않는 추상(推想)적인 세계(世界)에 대해서는 공감(共感)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운명학(運命學)의 분야(分野)를 연구하더라도 눈에 보이는 인상(人相)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길손: 그러한 이야기를 듣고서 생각해 보니까, 이제야 어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 잘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한날 한 시각에 태어난 사람의 경우에도 같은 운명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까? 아마도 이론적(理論的)으로라면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만 과연 그럴지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낭월: 이론적으로는 그렇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대부분의 쌍태(雙胎)로 태어난 쌍둥이는 살아가는 형태도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길손: 그렇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경우는 어떤 이유라고 봐야 합니까?


낭월: 그러한 부분에서 일일이 완전(完全)한 해답(解答)을 마련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100%의 적용(適用)은 불가능(不可能)하다는 것을 이야기 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방향(方向)을 찾아 봤지만 아직은 확실한 방법을 얻지 못한 것 같습니다.


길손: 용신이라고 했습니까? 그 균형(均衡)을 잡게 되는 글자를 잘 못 결정(決定) 하게 되면 해석(解釋)은 어떻게 됩니까?


낭월: 만약에 상반(相反)되는 글자로 용신(用神)을 판단했을 경우에는 적용시켜서 이야기를 나눠보면 명료(明瞭)하게 맞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그러한 경우에는 오류(誤謬)를 바로 잡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오류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는 항상 연구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리고 경험이 쌓이게 되면 점차로 오류는 줄여가게 되니 이것은 생활(生活)의 달인(達人)과도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경험(經驗)이 많을수록 오류(誤謬)의 가능성(可能性)도 줄어든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길손: 갑자기 궁금한 점이 생각났습니다. 로또와 같은 복권이 당첨될 수 있는지 그야말로 횡재(橫財)를 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아 볼 수가 있습니까?


낭월: 그러한 방법은 없습니다.


길손: 왜 그렇습니까? 재물(財物)의 복(福)이 많은 사주라면 그러한 돈벼락을 맞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낭월: 그것은 사행심(射倖心)이라고 합니다. 온당한 노력을 한 다음에 그 결과에 대해서 판단을 할 적에는 해석(解釋)을 할 방법이 있지만 요행(僥倖)을 바라고서 재물을 쏟아 붓는 것은 어리석음으로 보게 됩니다. 비록 그것이 1천원이라고 할지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길손: 그렇다면 소유(所有)하고 있는 부동산(不動産)이 제 값을 받고 팔릴 수 있을 것인지를 묻는 것도 마찬가지입니까?


낭월: 아닙니다. 그것은 가격이 정해졌고 노력도 하였기 때문에 예측(豫測)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봅니다. 다만 판단을 할 적에 참고를 해야 할 것은 시세(市勢)가 됩니다. 시세를 감안하여 결과(結果)를 알고자 한다면 가능할 수 있습니다.


길손: 그것이 사주(四柱)에 나온단 말입니까?


낭월: 그것은 사주(四柱)라기 보다는 점술(占術)의 영역(領域)으로 대입(代入)을 하게 됩니다. 조금 다른 관점(觀點)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길손: 그렇다면 점쟁이라는 이야기입니까?


낭월: 질문에 따라서 점괘(占卦)로 풀이를 할 것은 점괘로 풀고, 사주(四柱)로 풀이를 할 것은 사주로 풀이하는 것입니다. 물론 점쟁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듣기 좋은 말은 점술가(占術家)라고 하면 더 좋겠습니다. 이 분야의 형태에 따라서 사주(四柱)만 풀이하는 경우도 있고 점술(占術)로만 풀이하는 경우도 있으며 두 가지를 모두 하는 것이 대부분의 전문가(專門家)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길손: 이야기의 내용(內容)을 생각해 보면 운명(運命)은 정해져 있다는 쪽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낭월: 그렇습니다.


길손: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사고로 모두 사망하게 되는 경우에도 역시 죽을 사람들이 그 비행기를 타게 되는 것입니까?


낭월: 아닙니다.


길손: 예? 아니라뇨?


낭월: 그러한 경우는 운명학(運命學)으로 논하지 않습니다.


길손: 아니? 왜 그렇습니까?


낭월: 왜냐하면 그것은 비명횡사(非命橫死)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살(自殺)도 여기에 포함(包含)이 됩니다.


길손: 비명횡사는 맞습니다만 그것이 운명과 상관이 없다는 것은 금시초문(今始初聞)이고 의외(意外)입니다. 회피(回避)하는 것은 아닙니까?


낭월: 글자를 보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비명(非命)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길손: 비(非)는 아니라는 뜻이고 명(命)은 운명(運命)이라는 뜻이라면, ‘운명이 아니다.’라고 해석(解釋)을 해야 하나요? 횡사(橫死)는 갑자기 죽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고요.


낭월: 그렇습니다. 명리학(命理學)을 연구하는 학자가 이러한 것에 대해서도 운명적(運命的)으로 읽을 수가 있으려나 싶어서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만 아마도 고리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길손: 그렇다면 그러한 것을 예언(豫言)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낭월: 아마도 접신자(接神者)들이거나 운명학(運命學)이 아닌 예지력(叡智力)으로 판단(判斷)을 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하튼 낭월은 그러한 부분에 대해서 논외(論外)로 합니다.


길손: 그렇지만 자살자(自殺者)는 운명(運命)에 포함되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자신이 선택(選擇)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낭월: 그렇게 본다면 일리가 없다고는 못 하겠지만 환경(環境)에 의한 자신의 포기라고 밖에 볼 수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의지력(意志力)이 원인(原因)이라고 한다면 심리적(心理的)인 면에서는 사주(四柱)와 연관(聯關)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의지력이 약한 사주라서 자살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豫測)은 불가능(不可能)하다고 봅니다.


길손: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여쭙겠습니다. 운명(運命)은 고치거나 바꿀 수 있습니까?


낭월: 바꿀 수는 없지만 고칠 수는 있을 것으로 봅니다. 다만 정도(程度)에 대한 문제(問題)는 개인차(個人差)가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妥當)할 것입니다.


길손: 그것을 몇%로 말 할 수 있겠습니까?


낭월: 구태여 그렇게 말을 해야 한다면 웬만큼 노력을 한다면 30%정도는 개선(改善)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초인적(超人的)인 수행자(修行者)라고 한다면 70%라도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일반적(一般的)으로는 불가능(不可能)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길손: 운명을 바꾼다고 하는 것은 어떤 경우를 예로 들어서 이해를 할 수 있겠습니까? 뭔가 막연(漠然)한 것 같아서 느낌이 잡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낭월: 가령, 곤궁(困窮)하게 살아갈 운명이라고 하는 판단을 했을 적에 그 사람이 운명을 개선하려면 열심히 노력하고 근면(勤勉)하며 성실(誠實)하다면 곤궁은 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운명적으로 본다면 그는 게으르고 일확천금(一攫千金)에 대한 꿈만 꾸고 있으며 설혹 돈벼락을 맞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다시 1천배의 뻥튀기를 하려고 허둥대다가 다시 빈 털털이로 돌아가게 될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운명을 개선한다는 것은 본성(本性)을 바꾼다는 것과 비슷한 개념(槪念)입니다.


길손: 운명을 바꿀 수가 있다면 가장 큰 영향력(影響力)을 미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낭월: 학문(學問)과 지혜(智慧)입니다. 스스로만 능히 자신을 변화시킬 기회를 포착(捕捉)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남이 고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不可能)하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길손: 그래서 성현(聖賢)들께서는 근면(勤勉)과 성실(誠實)을 추구(追求)한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낭월: 맞습니다. 열심히 올바른 방향으로 노력을 하는 사람에게는 그만큼의 변화를 할 수 있는 기회(機會)가 주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길손: 이것은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입니다만, 언제 운명연구가 혹은 상담가로써의 보람이 있으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낭월: 그러한 경우는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던 사람이 상담을 통해서 자신의 길에 대한 확신을 갖고 힘차게 달려가게 되었을 적에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비단 사주를 통한 상담 뿐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의 상담가나 조언가는 같이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길손: 혹시라도 그렇게 조언을 한 것이 과연 그 사람에게 올바른 길인지, 아니면 잘 못된 안내일 수도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이야기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낭월: 물론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서로의 생각을 나누면서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질문을 한 사람은 자신이 무엇때문에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상담의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미 그 마음에서 목적지를 향해서 노력을 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성공을 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졌을 것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자평명리학의 이론은 그러한 조언을 하는 과정에서 큰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길손: 그렇다면 반대로 가장 마음에 상처를 받을 때가 있다면 어떤 경우가 되겠습니까?


낭월: 그러한 경우도 가끔 있습니다. 특히 노력은 하지 않고 큰 소원이 이뤄질 때가 언제인지 알고 싶어하는 사람을 만났을 경우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상담가가 아닌 예언가(豫言家)로 생각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지요.


길손: 상담가(相談家)와 예언가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낭월: 상담가는 자신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면서 오류를 찾아서 바로잡아 가는 것에 대해서 조언을 해 주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예언가는 미래에 대해서 어떤 비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낭월은 상담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문제점을 스스로 인식하고 고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더 잘 살아 갈 기회가 많을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언을 통해서 자신의 미래가 장밋빛이라는 말만을 듣고자 하는 사람과는 대화를 하면서도 상처를 받곤 합니다.


길손: 원래 사주를 풀이하는 사람은 예언가라고 생각을 했었지 그러한 구분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듣고보니까 사주를 봐주는 선생의 경우에도 예언가의 스타일과 상담가의 스타일이 있을 수 있겠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낭월: 그렇습니다. 예언을 하는 경우에는 방문자가 입을 열기 전에 말하는 것을 즐기고, 상담을 하는 경우에는 방문자의 이야를 듣고 나서 해결책을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큰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똑 같이 사주학을 갖고 조언을 하더라도 그 스타일에 따라서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게 된다고 보면 될 것이고 그것도 각자의 개성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제각기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겠습니다만 그것에 대해서는 길손님께서 생각을 해 보실 수 있을 것으로 봐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길손: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찾아가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서 예언가의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과 상담가의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나뉠 것이고 제각기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가이드를 만나서 조언을 청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낭월: 그렇습니다. 잘 이해하셨습니다.


길손: 이렇게 긴 말씀과 자세한 뜻에 대한 설명으로 많은 이해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시간을 내서 공부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낭월: 고맙습니다. 좋은 인연 되셨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