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2] 자존감과 자존심의 사이

작성일
2014-01-26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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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2화] 자존감과 자존심의 사이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사주공부를 하시는 벗님들께서 식상이나 관살은 중요한 줄을 알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비겁의 존재에 대해서는 의미를 부여하기가 다소 미흡한 존재가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고 계실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찌 생각을 해 보면 비겁은 존재감(存在感)이 좀 약하다고 해야 할까요? 그럴 수도 있지 싶습니다. 그런데 곰곰 생각을 해 보면 그야말로 자신의 주체에 해당하는 성분인데 이렇게 허술한 대접을 한다는 것이 옳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의미를 부여해 보곤 합니다. 그러다가 이렇게 정리를 해 봤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생각을 말씀드려 봅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비견과 겁재는 서로 비슷하다고 생각되시진 않는지요? 만약에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 드릴 말씀이 약간은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뭔가 비슷한 듯 하면서도 또 분명히 다른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비견과 겁재의 차이가 과연 무엇일까요? 낭월의 생각을 보시기 전에 먼저 그 차이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부터 정리를 해 본 다음에 살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1. 비견(比肩)은 자존감(自存感)

  우선 주체와 같은 음양과 같은 오행을 갖고 있으면서 일간(日干)의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고 있는 존재입니다. '일간과 같은 오행의 음양'이 비견이기 때문에 필시 어떤 사주로 태어났든 간에 일간에 있는 자리는 반드시 비견이어야 하고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일간에 자리를 잡을 글자는 열 가지가 있겠네요. 甲, 乙, 丙, 丁, 戊, 己, 庚, 辛, 壬, 癸가 그것입니다. 아마도 이 정도의 한자는 이해하고 계실 것으로 봐서 그대로 표기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존재감을 갖고 있다면 그것을 자존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나다' 뭐 그 정도 일까요? 여하튼 자신의 존재감을 인식하고 있는 것은 일반적인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누구에게나 내재되어 있는 성분이 사람마다 그 정도는 다를 수가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비견의 존재가 얼마나 강력한 세력을 형성할 수가 있느냐는 것에 의해서 하나의 기준을 삼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간지가 같은 육갑의 경우에 특히 이러한 자존감이 강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테면, 甲寅이나 乙卯가 그러한 경우가 되지 않겠나 싶습니다. 이렇게 구성이 되어 있는 간지그룹을 일러서 8대고집이라고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만 이러한 구조로 되어 있으면 아무래도 자존감이 남에게 밀리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좋게 말하면 자존감이지만 조금 비틀어서 말하면 옹고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생각하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렇게 자존감이 강한 사람은 남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을 것입니다. 독자적으로 자신의 길을 간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외길의 인생이 될 가능성도 많겠군요. 물론 그로 인해서 성공을 할 가능성과 실패를 할 가능성은 반반이 될 것입니다.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해서 남 탓을 하지 않고 잘 되어도 내덕이고 못되어도 내탓이라고 생각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속이 편한 사람이고 또 달리 보면 답답하고 융통성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자존감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문득 든 생각입니다. 자존감이 강한 사람은 정신질환은 걸리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우뚝하게 버티고 서서 자신의 존재감을 믿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외부의 요인에 따라서 질환으로도 이어 질 수 있는 정신장애는 발생할 여지가 매우 좁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사회생활을 잘 할 것이라는 의미는 절대로 아닙니다. 그냥 독립적으로 자신의 주체성이 강화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에 불과한 까닭입니다.

  가끔 교육방송 등에서 정신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을 보면 이러한 이야기들이 자주 등장을 하더군요. 자존감이 없어서 정신적으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게 된다는 이야기지요. 그러한 문제로 인해서 힘들어 한다면 이것은 자존감의 존재가 충분히 그 의미를 갖고 있다고 봐도 되겠다는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능력을 발휘하는 것과는 별개로 자신을 믿고 있는 사람에게는 기본적인 에너지는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되지 않을까 싶은 것이고 그러한 성향을 사주에서는 비견으로 바꿔서 대입하면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른바, 목에 힘이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지요. 물론 목에 힘주는 사람은 돈이 많은 사람에게 사용하는 어휘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비견은 돈이 땡전한푼이 없더라도 목의 힘을 빼지 않습니다. 그것은 죽기보다 더 싫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하튼 목에 힘을 주고 버티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쥐뿔도 없으면서도 굽히는 것은 싫다는 이야기가 되겠네요. 그러니까 사회성으로 본다면 아무래도 꽝에 가깝다고 봐야 하겠지요. 그렇지만 그렇게 생겼으니 달리 방법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혹시라도 자신의 사주에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비견만 수두룩하다고 너무 구박을 하진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왜냐하면 그러한 글자들의 힘으로 어려운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버티고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말이지요. 이러한 에너지는 나중에 어떤 일을 하더라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역할을 맡게 되기만 한다면 즉시로 큰 공덕을 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서 자신의 자존감에 대해서도 너무 과소평가를 하지 말라는 말씀도 드려 봅니다. 그러니까 아무 것에나 적응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혹 불만을 가졌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이미 적성이 아니므로 포기를 하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삼라만상은 생긴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행복하니까 말이지요.


2. 겁재(劫財)는 자존심(自存心)

  이번에는 자존감과 비슷하면서도 뭔가 같지 않은 것으로 작용하는 자존심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봅니다. 사실 자존심과 한 짝을 이루는 말이 있다면 '상한다'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자존심은 상하기 쉬운 존재인가 싶은 생각을 해 볼 수도 있겠군요. 반면에 자존감이 상했다는 말은 없지요? 이렇게 하나의 주어를 수식하는 말들을 통해서 원래의 의미가 더 잘 살아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자존감이 상했다.' 자존심이 상했다.' 어떤가요? 입에 착착 붙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다는 말이지요? 참 재미있습니다.

  왜 자존심은 상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자존감은 왜 상하는 것이 아닐까요? 알단 자존심이 왜 상할 수 밖에 없는지를 알게 되면 자존감이 상하지 않는 것도 자연스럽게 정리가 될 것 같습니다. 도대체 자존심이 뭐기에 상하는 것인지를 곰곰 생각해 봤습니다. 그리고 또 생각이 날 때마다 생각하곤 하지요. 물론 아직도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고 봐야지요. 심리를 연구하고 분석하는 것이 완료되는 법은 없는 것으로 생각되어서 말이지요. 항상 현재진행형으로 바라보고 생각할 때마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하튼, 자존심은 손상을 받기 쉬운 구조로 되어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니까 화살표 방향이 달라서 그렇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러니까 자존감은 화살표의 방향이 안에서 밖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를 해 봅니다. 그렇게 되면 자존심은 화살표가 반대로 밖에서 안으로 향하고 있다는 의미로 대입을 해 볼 수가 있는 것이겠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자존심은 필시 상할 수 밖에 없다고 봐야 하겠다는 이유가 명명백백하게 드러나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존심은 남이 손상(損傷)을 주는 것일까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얼른 생각을 하기에는 그런 것도 같습니다만 왜 같은 말을 들었는데 어떤 사람은 자존심이 상했다고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전혀 개의치 않는 것일까를 생각해 보면 바로 정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반응을 보이면 상하는 것이고 무감각하면 안 상하는 것이라고 정리를 할 수 있겠습니다. 벗님은 외부에서 나를 평가하는 것에 대해서 민감하신가요? 아니면 둔감하신가요? 민감하다면 겁재가 작용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셔도 좋겠습니다.

  자존심은 상처를 받기 쉬운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비교(比較)하는 마음이 묻어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봤습니다. 그것은 의식의 중심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 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외부에서 흔들면 쉽게 흔들려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상처를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부처가 말씀하시기를, '나를 헐뜯었다.' '나를 비웃었다.' '나를 깐봤다.'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 내면의 번뇌는 결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물론 부처는 일생 하신 말씀이 '자아(自我)'지요. 그러니까 자아는 자존심보다는 자존감에 비중을 두고 있다고 보면 적절할 것 같습니다. 물론 자존감이 절대적으로 부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비교적 가까운 것을 찾으라고 한다면 그렇다는 것이지요. 여하튼 하루 종일 남들의 평가에 대해서 신경을 쓰다가 지친 마음으로 하루를 마치게 된다는 이야기를 어딘가에서 읽었던 것 같습니다.

  혹 기억력이 괜찮은 50대의 연령층에 계신 벗님이시라면 초등학교에서 배운 이야기 중에 '팔러가는 당나귀'라는 이야기가 떠오르실 수도 있겠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당나귀를 팔러 가는데 어느 행인이 왜 나귀를 타고 가지 그냥 끌고 가냐고 하니까 그 말을 듣고서는 '참 그렇구먼...'하고서 아들을 태웠다지요. 그런데 조금 더 가니까 지나가던 영감님이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인 것 같다는 겁니다. 그래서 또 아버지가 당나귀를 탔지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빨래하던 아낙네들이 친 아버지가 아닌 모양이라고 하였다지요. 그러니까 다시 고민을 하다가는 둘이 같이 타고 갔다는 것입니다. 당나귀가 힘들어서 비척거리니까 어떤 사람이 차라리 둘이 당나귀를 둘러메고 가라고 했는데 그대로 따랐다는........ 참 어이없는 이야기였습니다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자존심이 상처를 받지 않으려고 남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던 아버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중요한 것은 쉽게 상처를 받을 수가 있는 자존심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을 해 봐야 하겠습니다만 결국 해결책은 자존감으로 버티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싶은 결론을 내려 봅니다. 자존감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세상의 어느 누구도 감히 흔들 수가 없는 일일테니 말이지요. 반대로 자존감이 지탱하지 못한다면 그 무엇으로도 자존심의 상처를 막을 방법이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존심을 꺾어야 할 상황에서 죽기보다 싫다면 오히려 자존심은 잊어버리고 자존감을 키우는 방향으로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은 해결책이 될 것 같습니다.


3. 다만 어느 것이라도 치우치지 않아야 할 것

  자존감이든 자존심이든 다 좋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너무 과중하면 결국은 자신의 길을 힘들게 할 수도 있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겁이 태왕하면 독불장군처럼 되어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고 그로 인해서 주어지는 고통도 고스란히 스스로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유효하다고 하겠습니다. 자존감이 중요하기는 합니다만 너무 지나치지 않아야 하겠고, 자존심도 어느 정도는 있어야 인간미가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 봅니다. 완전히 초월을 해 버린 사람은 그야말로 신선이거나 도인일테니 인간적인 면으로는 또한 함께 할 수가 없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식상이 중요하다고 이야기를 하고 또 관살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중요하다고 했더니 공부하러 왔던 한 선생님이 비겁의 존재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직업의 적성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답을 해 놓고 생각해 보니까 그렇게 간단히 쓸모가 없는 것에 대해서만 강조를 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곰곰 생각해 보게 되었던 것이 이렇게 한담으로 한 말씀 드리게 되었네요. 

  혹, 공부가 좀 되신 벗님께서는 겁재의 자존심과 상관의 형태가 뭔가 닮았다는 생각을 하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정도의 생각을 할 수 있다면 당연히 비견은 식신을 닮았다는 생각도 하실 수 있겠지요. 그리고 아마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이러한 형태는 십성으로 대입을 한다면 음간(陰干)은 음간끼리 통하고, 양간(陽干)은 또 양간끼리 통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甲丙戊庚壬은 乙丁己辛癸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그래서 조금 더 깊이 파고 들어가다가 보면 식신과 상관이 닮은 것이 아니라 식신은 편재와 통하고 상관은 정재와 통한다는 생각도 들면서 뭔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끈끈하게 연결이 되어 있는 음기와 양기의 관계를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 보곤 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즉 상관과 정관이 서로 닮아있고, 정인과 정재도 어딘가 닮아있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에 대해서도 가끔 생각해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하찮게 생각했던 비겁의 존재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벗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모쪼록 십성과 십간의 관계에서 미묘하게 흐르고 있는 파장을 느껴 보시는 것도 보이지 않는 세계가 모두 끈으로 이어져 있다는 이론과도 뭔가 닮아있지 않은가 싶은 힌트를 얻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오늘도 기웃거리고 있는 낭월입니다. 고맙습니다.




                  2014년 1월 26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