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5] 상대적 빈곤감을 치료하는 도덕경

작성일
2013-02-22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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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5화] 상대적 빈곤감을 치료하는 도덕경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날씨가 완연히 풀린 느낌이 나네요. 밝아오는 아침에 찻물을 얹어놓고서 마당을 거닐어보니까 봄의 내음이 스물스물 배어나오는 것 같은 아침입니다.
 
  지인께 놀러 갔다가 감산덕청 대사의 『도덕경』이 재미있어서 읽고 있으시다기에 어떤 법문이 들어있는가 싶어서 책을 구했습니다. 같이 구입한 것은 감산 대사의 『장자』에 대한 해설서도 있어서 두 권을 구입했습니다만 노자를 읽느라고 장자는 펴 볼 겨를이 없네요. 다시 읽어도 또 새로운 맛이 배어나오는 글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이번에 쓸 한담의 소재로 도덕경을 생각해 봤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아서 계속해서 책만 읽고 있었지요. 머릿가를 맴도는 글자는 공(空)과 허(虛)인데 이 두 글자를 어떻게 요리해서 한담으로 정리를 해야 말이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답이 보이지 않아서 괜히 뒷짐을 지고 마당가를 서성이곤 했습니다.
 
  구태어 이러한 생각들을 글로 쓴다면야 '허공(虛空)처럼 공허(空虛)한 마음으로 무위(無爲)를 하라'고 하면 되겠습니다만 그것이 어디 체감을 하기에 여간 만만치 않으니 말이지요. '비우지 않으면 채울 수 없고, 텅 비어 있는 것이 가장 큰 것이라'고 하는 말도 겹치기로 떠오르곤 합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다가 오늘 아침에서야 약간의 느낌이 있어서 한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2천년 하고도 수백여 년이 지났습니다만 여전히 귀한 말씀들은 생생하게 살아서 귓가를 울리고 심금을 두드리는 것 같네요. 이렇게 오랜 옛날의 이야기가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살아가는 방식도 다르고 환경도 달라졌건만 사람들의 인식세계는 여전히 그대로 존속이 되는 것인가 싶기도 하고 말이지요. 그래서 나름대로 그 이유를 찾아 봤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것은 상대적인 빈곤감을 치유하는 효과가 가장 크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1. 상대적인 빈곤감에 허덕이는 현대인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달라진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지요. 그것은 의식주에 대한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하루 세 끼의 먹거리와 걸치고 다녀야 할 입거리, 그리고 휴식을 취해야 할 잘거리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겠습니다. 모든 인간사의 근본적인 욕망에는 이 세 가지가 자리를 잡고 있다고 봐도 거의 틀림이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요즘에 와서 더욱 강조되는 것이 자존감(自尊感)입니다. 자신을 존중할 줄 모른다면 주변의 파도에 휩쓸려서 어느 순간에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지 모르는 상황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지요.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으로는 노장(老莊)의 이야기보다 더 나은 것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신 벗님이라면 스스로 속박으로부터 벗어 날 기틀을 마련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미 자존감으로 충만된 나날을 살아가시는 벗님들께는 의미없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왠지 밖으로 나가기가 싫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싫고 마음의 한 켠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새로운 봄의 기운이 도무지 느껴지지 않으시는 경우라고 한다면 약간의 참고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2. 비교(比較)하다가 상처를 받는다.
 
  혼자서 살아갈 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말이지요. 이웃이 생기고 서로간에 뭔가 비교를 할 꺼리가 생기면서부터 상처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시대가 될수록 스스로 중심을 잘 잡아야 하는데 그것이 몰아치는 태풍과도 같아서 휘둘리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거든요. 벗님의 주변은 어떠신지요? 그리고 그 중간에서 나의 위치는 또 어떤지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 보셨다면 어떤 형태로든 간에 감상이 있을 것 같습니다.
 
  문득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작은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적이었던 모양입니다만, 동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의 집에 대해서 화제가 올랐던 모양입니다. 한 친구가 자기네는 방이 4개나 된다고 했던 모양이고, 여기 저기에서 방의 갯수가 나오면서 자신의 집이 더 크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평소에 말이 없는 이 녀석에게도 확인이 들어왔던 모양입니다.

"야, 니네 집은 방이 몇 개냐?"
"으응, 몇 개 돼......"
"그러니까 몇 개 냐구! 다섯 개? 여섯 개?"
"세어 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그럼 세어 보면 되지 뭘 얼른 세어 봐라."
"음...... 열네 개 하고, 다섯 개 하고..... 열세 개 하고.... 그러면 서른 개인가.... 잘 모르겠는 걸...."
"악~~!!"

이랬다는 이야기입니다. 하하~ 그 당시에 감로사에 와서 공부하셨던 선생님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조그만 방들을 많이 만들었었는데 낭월도 세어보지 않았습니다만 대략 그 정도 되었던 모양이네요. 하하~ 학교에 다녀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중요한 것은 방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린 이이들도 상대적인 부유함을 즐기고자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아마도 인간의 본성인가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요즘은 뭘로 비교하시는지요? 혹 중년이시라고 하면 수입으로 비교당하고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의식주를 한 방에 해결하는 것은 확실한 수입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기에 해 본 생각입니다. 자본주의 시대에서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은 해결이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세상의 인심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흐름에서 자유롭기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네 떡이 더 커 보인다.'고 했던가요? 아무리 벌어도 목표액이 달성되지 않는다면 또한 빈곤감을 넘어서 박탈감에 사로잡힐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무슨 방법을 찾아서 해결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 궁리하다가 다급한 마음에 주식도 사 보고 사채를 끌어다가 사업도 벌여봅니다만 참으로 여간해서는 쉽사리 목적지에 도달하기는 어렵지요. 그렇게 하던 사람들이 해답을 얻을까 해서 낭월을 찾아 오기도 합니다만 낭월인들 무슨 재주가 있겠느냔 말이지요. 그래서 이러한 벗님들께는 언제 큰 돈을 벌 수가 있을 것인지를 묻지말고 도덕경을 읽어 보시라고 권하고 싶어집니다. 물론 그것을 읽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뒤로 자빠져버리실 것 같긴 합니다만.
 
 
3. 사업하는 노인의 모습에서
 
  직원을 80여명 거느리고 제품을 개발하여 생산하는 중소기업의 대표가 있습니다. 수출도 하고 정부의 지원도 받아가면서 나름대로는 잘 하고 있는 우량한 기업인 것 같습니다만 상담을 하러 와서 이야기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그것도 겉보기만 그러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수익이 발생하지 않으면 직원들의 월급을 줄 수가 없으니 항상 바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어둠이 내린 다음에도 찾아오도록 예외 규정(?)을 적용시키는 고객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살아가는 소용돌이가 긴급하다고 해야 할까 싶기도 합니다. 그의 나이는 이미 80세를 넘었습니다. 처음에는 일이 잘 되는 방향으로 조언을 했습니다만 세월이 자꾸 흘러가면서 그의 욕망은 끝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0년 전에 비해서 발전을 했습니다만 정작 본인은 더욱 어려워졌다고만 하네요. 아마도 그렇게게 느끼는 것은 최상의 절정을 누리던 시절에 기준점이 맞춰져 있어서가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여기에다가 운세는 하향곡선을 긋고 있습니다. 쉽게 풀린다는 말을 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상황인데 찾아와서 물어 볼 적에는 어떻게 하면 마음을 잘 다스리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큰 돈을 벌어서 공장을 크게 지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만 묻고 있다는 것이 항상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마치 일의 노예와 같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쯤에서 일을 정리하고 휴식을 취하는 것은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해 보기도 했었습니다만 그야말로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마치 '그만 살고 죽으세요'라는 말로 들리는 것 같아서 다시는 그 말을 꺼내지 못했습니다. 위로를 받으러 왔는데 상처만 안겨서 보낼 수도 없는 일이니까 말이지요. 그렇지만 이미 일락서산(日落西山)입니다. 운을 떠나서 그 정도의 연륜이면 쉬어야 하는 것이 춘하추동을 보내면서 살아가는 인생에게는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자신의 자산이 수백억은 되는 모양입니다만 낭월이 보기에는 하루하루를 500원 구걸해서 살아가는 모습보다 조금도 더 나아보이지 않는 것은 그 노인의 삶에서 누려야만 할 기쁨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 있는 까닭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면에서 충만된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면 산처럼 쌓아놓은 재물도 사실은 하루 아침의 티끌에 불과하다는 것을 도덕경에서는 누누히 수백 번을 강조합니다만 사람들은 짐짓 귀를 막고 딴청을 피우지요. 오죽이나 말귀를 못알아 들었으면 노자도 그렇게 반복적으로 같은 말을 되풀이 하고 있었겠느냐는 생각도 듭니다. 그 양반도 참 딱하긴 하네요. 하하~
 
 
4. 공부를 한다는 것은 얼마든지 좋은 것이건만.....
 
  나이 60에 대학원을 가겠다고 하는 방문자도 있습니다. 물론 배움이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환영을 하겠습니다만 이야기를 조금만 더 들어보면 호학(好學)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게 되는 경우가 더 많아서 또한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공부하러 대학원에 가는 것은 박사를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남들은 모두 박사인데 자신만 박사가 되지 못해서라고 할 적에는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누군가에게는 열심히 공부를 한 댓가로 주어졌을 뿐인 호칭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 호칭이 또 하나의 목적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아마 이것도 상대적인 빈곤감의 일종이 아닐까요? 스스로 한 평생을 살아 온 자신을 당당하고 떳떳하게 생각하지 못하고서 그러한 것에 마음이 휘둘려서는 어떻게 해야 타이틀을 얻어서 자신도 박사의 대열에 합류시킬 것인지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뭔가 잘못 살아온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더구나 박사학위를 공부만 잘 하면 주는 것인가 싶었는데 또 그것만은 아닌가 보더군요. 말하자면 뒷거래가 필수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낭월만 그 속의 사정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 보기도 합니다. 방문하시는 손님들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알려줘서 비로소 알게 되는 것도 종종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사는 곳은 모두가 다 같다고 하는 공식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거듭 생각해 보곤 합니다.
 
  이렇게 공부가 아닌, 이름에 연연한 사람에게는 도덕경 제1장을 읽으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바로 그 유명한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 말이지요. 이름은 이름일 뿐인데도 카드를 긁고, 노후를 안락하게 보내야 할 집을 잡혀서 박사학위를 얻기 위한 자금으로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이름이 뭐관대?'라고 하는 가르침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박사'라는 이름도 30대나 40대에 얻어서 먹고 사는데 큰 도움이라도 될 수 있다면 자격증을 따는 의미로라도 봐 줄 수가 있겠습니다만 이건 좀 다른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손님에게는 운이 나빠서 노력을 해도 통과하기가 어렵겠다는 이야기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얼른 이름의 늪에 빠져있는 꿈에서 깨어나서 현실을 즐기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이지요. 그렇지만 이미 치닫고 있는 마음에는 그러한 조언은 귀에 들어가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만 늘 하고 있습니다. 일러줘도 듣지 않는 것이야 뭐 어쩌겠어요. 그 또한 자신의 업(業)이라고 할 밖에는......
 
  문득 창 밖을 보니 눈이 소리없이 내리네요. 새벽의 기온이 그렇게 포근하더니만 눈을 만들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올 봄에는 눈을 다 본 것이 아닐까 싶었는데 다시 보니 반갑기는 하네요. 겨우 내내 눈 치우느라고 힘들었던 것은 잠시 잊게 되는가 봅니다. 그래서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하하~
 
 
5. 지식의 빈곤감은 또 어떨까......
 
  학위의 빈곤감은 어떻게라도 해서 채워본다고 하겠지만 지식의 빈곤감은 돈을 준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면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더욱 어렵다고 해야 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내 손이 닿는 곳에 놓여진 한 권의 책일 것입니다. 물론 귀한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 계신다면 더욱 좋겠지요. 여하튼 책은 언제든 그 자리에 있다가 펼치기만 하면 장광설(長廣說)을 풀어놓으니 이보다 더 고마운 것이 없지 싶네요.
 
  다른 것은 돈으로 다 해결이 된다고 하더라도 지식에 대해서만큼은 스스로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해 봤습니다. 그야말로 '하루 아침에 이룰 수는 없는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낭월이 안연(顔淵)을 존경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참으로 배움을 즐겼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즐거워서 하는 공부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는 만큼 비워가는 즐거움은 자신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고 봐도 되겠고요.
 
  도덕경이 돋보이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지약우(大智若愚)'와 같은 말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실감나게 느껴지곤 합니다.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의 차이도 생각해 보게 되고 말이지요. 아는 만큼 즐겁다면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지만 아는만큼 머리가 아프다고한다면, 아마도 학문을 즐기는 것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자 그렇다면 , 사주공부는 어떤가요? 공부를 하면 할수록 오묘한 맛으로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나실까요? 아니면 점점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고통으로 책을 던져버리고 싶어지실까요? 아마도 이 두 가지가 계속해서 번갈아 들어오는 것이 맞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점차로 머리는 가벼워지고 생각은 민첩해지며 판단은 단순해지는 단계에서 본다면 끓는 물에 냉수를 뿌린 것처럼 고요해지는 경지가 분명히 있는 것 같기는 합니다.
 
  무엇이나 다 그렇겠습니다만 철학의 공부도 즐거운 마음으로 하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 큰 비극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명리학의 공부가 어렵다고 생각이 되셨다면 서두르지 말고 다시 뒤로 돌아가서 기본적인 내공을 연마하시라는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진리란 그렇게 서둔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깨달으시는 것만으로도 이미 두통약은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니까 말입니다. 하하~
 
  물론, 학문을 하는 것도 어느 정도의 목적의식은 필요합니다. 다만 너무 목적지에만 마음이 가 있다면 여행 도중에 얻어지는 즐거움은 모두 포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지요. 이러한 증세가 보인다면 잠시 사주공부를 덮어놓고 도덕경을 읽어 보시라고 권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다시 오행을 생각하게 되면 막혔던 장애들이 술술 풀려나가는 쾌감을 얻게 될 가능성도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학문을 적으로 생각하고 공격의 대상으로 삼아서 점령하려고 한다면 영원히 즐거운 공부는 하기 어려울 뿐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6. 자신을 사랑할 필요는 반드시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말하면 자칫, 이기심에 대한 말이 아닌가 싶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의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끝없는 소용돌이에서 자신을 지킬 방법이 없을 수도 있겠네요. 시험점수로 인해서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아이에게 자존감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고 그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만이라도 있었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자신을 믿어야지 남을 믿고 재물을 믿고 명예를 믿는 것은 공허(空虛)한 메아리가 되돌아 올 뿐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어서 오행공부를 하시는 벗님은 그런 말씀도 합니다. '늙어서 머리가 나빠졌으니 공부를 할 수가 있겠는가?'라는 말이지요. 물론 할 수 있습니다. 철학은 머리로도 하고 가슴으로도 하기 때문에 기억력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깨달음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어쩌면 오히려 기억력때문에 깨달음의 기회가 그냥 스쳐지나가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지요. 팔만대장경을 외우고 피를 내어서 경을 쓴다고 하더라도 마음 밖에서 구한다면 이미 깨달음을 얻기는 다 글렀다는 말도 있고 보면 과연 자신을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까 봅니다.
 
  다만,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신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이 몸을 비단으로 감싸고 산해진미로 살찌우라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은 노자도 원하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마음은 비우고 배는 든든히 하라고 했던가요? 아침부터 온갖 계교로 하루를 시작하기 보다는 무심하게 차를 한 잔 마시면서 창 밖의 눈을 바라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눈을 열고 진리를 바라본다면 나이가 들어갈 수록 그윽한 오행의 변화와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 아침에 감산덕청 대사의 이야기로 들어보는 노자의 이야기를 통해서 상대적인 빈곤감에 힘들어하는 많은 벗님들에게 시원한 한 줄기의 솔바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잠시 눈을 맞아보고 싶어지네요.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모쪼록 상대를 여윈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신뢰하는 나날이 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고맙습니다.
 
 
                       2013년 2월 22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