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 금강경에 가라사대~

작성일
2009-06-24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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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0화] 금강경(金剛經)에 가라사대~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나날이 편안하신지요? 언제나 행복한 충만감이 넘치는 오늘 이 순간이 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물론 이것은 낭월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의식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러한 것이 다 이뤄진다면 이러한 것이 희망이 되지 않겠지요. 마음은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에 의해서 이러한 희망을 품고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노라면 실제로도 그렇게 되지 않겠느냐는 소망의 결과라고 봐도 좋지 싶습니다.


  오늘은 지혜로운 이의 말씀이나 좀 해볼까 생각을 했습니다. 그 동안 미련한 낭월의 어줍잖은 소견머리나 전해드렸는데, 오늘은 모처럼 밝은이의 생각이 담긴 이야기를 생각해 봄으로써 삶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해 볼 점이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함께 생각을 해 보시는 것도 좋지 싶습니다.


  금강경(金剛經)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의 줄임말입니다. 풀이를 하면 ‘큰 지혜로 가는 길에 대한 말씀’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금강경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지혜에 대해서 가치평가를 두는 경우에 상당히 매력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할 것으로 봅니다. 물론 낭월도 가끔 보면서 나름대로 해석을 붙이면서 생각해보곤 합니다.


  어제는 윤5월 초하루여서 감로사에서 법회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공부꺼리로 삼고 있는 것이 마침 금강경이기도 합니다. 몇 년을 하다가 보니까 ‘방물물이 바위를 뚫는다’고, 어느 사이에 뒷부분을 서성이고 있기도 하네요. 어제 법회를 하면서 문득 이러한 대목은 낭월한담으로 찾아주시는 벗님들과 함께 나눠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정리를 해 봅니다.



  제26장의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에는 게송이 하나 있습니다. 게송이란 글자를 맞춰서 노래 형식으로 되어있는 것을 말합니다만 기왕 시작했으니까 원문을 담아보도록 하겠습니다.



若以色見我(약이색견아)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려거나
以音聲求我(이음성구아) 소리로써 나를 보려고 한다면
是人行邪道(시인행사도) 이런 사람은 사도를 행하는 것이니
不能見如來(불능견여래) 부처를 보기가 불가능하리라


  직역하니 이렇게 되네요. 물론 이러한 구절이 등장하게 되기 위해서 수보리라고 하는 제자와 문답을 나누는 과정이 있습니다만 너무 길게 한문을 나열하면 멀미가 나실까 염려하여 생략하고 사구게에 나오는 의미를 낭월의 어줍잖은 소견으로 풀어봄으로 해서 함께 생각을 하는 것에 참고나 하시라는 의미로 헤아려 주시면 되겠습니다.


  제목에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법신(法身)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법신은 무엇이냐면 불성(佛性)이니 부처이니 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이해를 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으시면서 이것이 무슨 내용인지를 생각하시는 벗님의 그 핵심도 바로 법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마음의 신(身)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법신(法身)은 모양-형상이 없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모양이 있는 것은 무엇이냐는 것이 낭월이 생각해보려고 하는 목적이기도 합니다. 형상이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적어도 육신(肉身)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는 것이 시야를 좁혀서 관찰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법신(法身)과 인신(人身)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면 되겠습니다.


인신(人身)이든 육신(肉身)이든 같은 말이라고 봅니다만 특히 신체적(身體的)인 부분에 대해서 비중을 맞춰서 생각해 보면 더 정확하겠습니다.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무엇이거나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몸을 놓고 생각을 해 보면 시작이 있지요. 언제인가 잉태가 되었을 것이고 그래서 출생을 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시작이라고 하면 되겠습니다. 이것이 육신의 시작입니다.


육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언젠가 소멸(消滅)하게 된다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정해진 결과입니다. 사주팔자를 잘 타고 나서 부귀(富貴)를 겸전(兼全)하면서 영화(榮華)를 누린 사람이거나, 빈천(貧賤)을 면치 못하고 곤궁(困窮)하게 살아가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살아간 사람이거나간에 구분이 없이 공통적으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육체의 소멸이라는 것이지요.


권력을 잡고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면서 사람의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고 자신의 영달을 꾀하면서 교활하게 살아간 사람이나, 진실을 추구하면서 온갖 고문으로 몸이 망가진 사람이라도 모두 결과는 같습니다. 물론 육신의 결과를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공식적인 흐름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잘 아시는 이야기를 중언부언 했습니다.


이렇게 육신은 나이를 먹어가고 있습니다. 몸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는 말을 하는 노인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그리고 낭월도 세월을 겪어가면서 그렇게 느끼고 있으니 벗님들도 어느 사이에 50의 고개를 넘으셨다면 같은 생각이실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동의하지 않으시는 벗님들은 아직도 원기팔팔한 20~30대라고 생각을 할랍니다. 그리고 그 젊음에 대해서 축하를 드리고 싶습니다.


어느 순간에 어깨가 굳어서 앞뒤로 움직임이 불편해지고, 무엇인가 들다가 그 통증에 깜짝 놀란다면 비로소 세월이 많이 흘러갔음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지요. 오십견이라는 것이 그렇다는 것을 겪어보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세월이 알려주는 것이 분명히 있는 모양이네요.


이것이 어찌 사람에게만 해당이 될까 싶습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겠네요. 처음에 공장에서 출고가 되었으면 탄생이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언젠가는 사망으로 이르게 될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폐차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변의 모든 사물에 대해서 하나하나가 다 이와 같다는 것을 생각하기에는 별로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자동차와의 연관점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좀 생각을 해 볼 요량입니다.


그런데 마음몸은 어떨까요? 이제 법신(法身)에 대해서 이해를 해 봐야 하겠으니 말이지요. 마음몸을 그냥 마음이라고 해도 문제가 없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은 나이를 먹을까요? 마음은 도대체 어떻게 나이를 먹을 것인지에 대해서 좀 생각을 해 본다면 해롭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법회를 하다가, 70노인에게 물었습니다. 마음도 몸을 따라서 나이를 먹느냐고 말이지요. 그랬더니 마음은 16세라고 하네요. 나이를 16세까지만 먹고 그 이후로는 먹지 않는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실제의 신체나이와는 무관하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낭월도 그 나이가 되면 또 어떻게 생각을 하게 될 것인가를 지금 생각하기가 어려워서 그만큼 살아 본 사람에게 물어서 참고를 하려고 한 것인데 이러한 답이 나왔네요.


이제 대략 짐작이 되시겠습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가도 나이를 먹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법신(法身)’이라는 것이라고 짐작을 해 보자는 것이지요. 만약 벗님의 마음도 이와 같다면 바로 법신은 그것이라고 하는 것을 헤아리시면 큰 문제가 없으리라고 봅니다. 부처는 이것을 일러서 ‘불성(佛性)’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왠지 좀 딱딱하게 느껴져서 별로 인용을 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불쑥 들었습니다.


한이 맺혀서 죽은 처녀귀신은 천년이 되어도 그냥 처녀귀신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귀신도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겠습니다. 물론 어려서 죽은 동자귀신도 결과는 모두 같습니다. 살아서 육신을 따라다닌 그대로 죽어서도 유지가 되는 모양입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노라면 참으로 세상의 구조는 복잡하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것을 알고 살아야 하는지도 때로는 잘 모르겠고 말이지요.


마음이 나이를 먹지 않는 것 같다면 그것은 법신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이해가 되셨기 바랍니다. 이제 다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자동차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의미는 간단합니다. 쉬운 것을 괜히 어렵게 이야기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이것은 순전히 낭월이 우둔함이 원인이 되는 것으로 봐도 되겠습니다. 각설하고~


자동차가 처음에는 신나게 돌아다니지만, 세월이 흘러서 십년을 넘기게 되면 점차로 여기저기에서 세월의 흔적들이 나타나기 마련이지요. 그러다가 도저히 움직이지 않을 때가 되면 가야 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폐차장이지요. 그 곳은 자동차의 공동묘지라고 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여하튼 그렇게 폐차장에 갔습니다. 혹 가보셨는지 모르겠네요. 기왕이면 직접 차를 끌고 폐차를 시키러 가 보셨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더욱 더 생생할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무엇보다도 생생한 것은 직접 경험을 해 보는 것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나, ‘겪어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이나 모두가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경험을 하면서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고도 하겠습니다. 막연하게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직접 현장에서 체험을 한 것은 오래도록 생생한 느낌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인가 싶습니다. 가령 가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굶어본 세대라면 방송에서 끼니가 없어서 굶는 장면을 보면서 ‘쌀이 없으면 라면을 먹으면 되지~’라는 말은 할 턱이 없으니까요.


여하튼 폐차장에서 차를 넘겨주고 약간의 폐차비를 받습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합니까? 새로운 차를 구입하러 가지요? 아마도 그래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그 이전에 다른 차를 구입해 놓았을지도 모르겠네요. 헌차를 버리고 새차를 마련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한다면 낭월의 이야기는 다 끝났습니다. 이 몸을 차로 바꿔서 대입하면 만사는 해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 사고가 나서 중간에 폐차가 되는 것은 뭘까요? 그것은 자기가 사고를 냈으면 자살이 될 것이고, 남이 와서 박았으면 타살이라고 하면 될 일입니다. 고장이 나서 수리센터로 들어가는 것은 병원에 입원을 한 셈이겠네요. 벌금을 내지 않아서 압류가 된다면 이것은 구속이 되어서 징역살이를 하는 것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이것을 인간의 모습과 대비해봐도 조금도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차를 처분하고 내려서 떠나는 사람은 일종의 유체이탈과 같은 관점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차에 대해서 전혀 아쉬움이 없이 여운을 남기지 않고, 아니 어쩌면 오랫동안 애지중지했던 마음이 얼만큼은 남아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대부분은 새로운 차량을 구입하게 될 즐거움으로 과거의 일은 다 잊어버리기 쉽지요. 이것을 인생의 죽음에서 바라다 본다면 완전히 일치가 된다고 하는 점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차를 구입하는데에는 뭐가 필요하지요? 돈? 당연히 돈이 필요하지요. 물론 낭월이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나름대로 설정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속내를 드러내 보이겠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몸을 얻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하지요?”


돈이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은 알고 계실 것이고, 눈치가 빠른 벗님은 ‘선행(善行)’ 정도는 생각을 하실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리고 틀린 답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떠올릴 수가 있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논한다면 그것이 맞습니다.


흔히 노잣돈이라는 말을 하는데, 그것이 노잣돈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후세(後世)의 신차(新車), 즉 새 몸을 구입할 자금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돈이라는 것이 한국은행의 화폐로 대신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후 굿을 할 적에 노잣돈이 없어서 못간다고 궁시렁거리는 접신자의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믿어서는 좀 무리가 있겠네요. 왜냐하면 그 돈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왜 그런 요구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볼 수가 있겠는데, 그것은 노잣돈을 많이 내면 축원하는 무녀의 기가 살아서 도움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 외에 또 무슨 깊은 뜻이 있다면 누가 좀 알려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낭월의 소견머리로는 여기까지밖에 생각이 미치지 못하겠네요.


실제로 노잣돈이라는 것은 음덕(陰德)을 말하는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생전에 좋은 일을 많이 하면 다음 생에 좋은 곳에 태어난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라고 봅니다. 어쩌면 내가 음덕을 쌓는 과정에서 원한이 생기면 안 되는 것이라고 단서를 붙여야 할 수도 있겠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는데 그것을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물론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인간의 뛰어난 이성으로 판단을 할 수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렇게 해서 죽음에 이르러서 계산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 계산서에는 생전의 공과가 그대로 나타나 있을 것이라는 짐작만 해 봅니다. 그리고 그 가치에 의해서 다음 생에 타고 다닐 자동차를 배정받게 되는 것이지요. 가령 1억이 된다면 독일제 승용차를 받게 될 것이고, 3천만원이 된다면 국산의 웬만한 자동차를 받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수백만 원 밖에 되지 않는다면 아마도 오토바이를 받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수천 원 밖에 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허접한 준비가 되겠습니다만 그나마도 없고 마이너스 통장만 받게 된다면 이번에는 그야말로 따분한 삶이 예고된다고 해도 되겠네요. 물론 불교적인 윤회관점이므로 사실적인 우주관에서는 다소 차이가 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은 해 봅니다. 이점은 현명하신 벗님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드리는 설명은 비유적이 되겠네요. 이것을 현실적으로 대입을 하게 되면 매우 귀하고 높은 사람의 지혜를 갖춘 관상을 갖고 태어나거나, 아니면 빈천한 사람의 가정에 태어나서 일생을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재연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해 봤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그래도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다행이라고 할 정도로 버러지나 하루살이로 태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참으로 다양한 형태가 존재하게 되겠네요. 그렇게 다시 한 바퀴의 삶을 마친 다음에는 다시 삶의 궤적과 형태에 따라서 계산서는 여지없이 날아온다고 하겠습니다.


여기까지는 육체와 정신체의 차이를 설명드리는 것입니다. 육신이 죽고 정신이 남아서 다른 몸으로 갈아타는 것은 폐차를 시키고 새 차로 바꾸는 사람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생각해 보는 방법으로 이해를 하면 크게 틀리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기왕이면 이전에 타던 차보다 좀 더 나은 차로 바꿔타기를 바라는 것은 인간의 소박한 소망이듯이 영혼도 그럴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럼 다시 금강경으로 돌아갑니다.
[若以色見我] 법신(法身)은 형체가 없으므로 형체로 보고자 한다면 오류를 범한다는 이야깁니다. 그러므로 겉모습으로 봐서는 알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사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웬만한 것이야 관상으로 나타난다고 하겠습니다만 그것도 일정 수준을 넘어가는 단계의 사람에게는 대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특히 대각(大覺)을 이룬 부처의 수준이 된다면 그렇다는 이야기로 봐도 되겠습니다.


[以音聲求我] 소리만 들어서 부처를 찾는다면, 자신이 모두 부처라고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참으로 깨달음을 얻은 자를 확인하겠느냐는 이야기가 되겠네요. 모두가 나라를 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 속을 들여다 보기 전에는 과연 누가 나를 위해서 걱정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는 것으로 이해를 해도 되겠습니다.


[是人行邪道] 이 사람은 삿된 길을 가는 사람과 같으니, 삿된 길이란 깨달음으로 다가간다고 노력은 하지만 점점 더 멀어지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즉 밥을 얻겠다고 하면서도 계속해서 모래를 찌고 있으며, 물을 찾아간다고 하면서도 계속해서 사막으로 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不能見如來] 부처를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정도(正道)를 행해야 할 것인데 형체와 소리로만 구한다고 하면 영원히 답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이니 우상을 숭배하는 것조차도 틀렸다는 의미가 그 속에서는 추상같이 번득이고 있음을 생각해 봅니다.


결국은 밖으로 구하지 말라는 이야기겠네요. 안으로 자신의 현재 모습을 관조하고 순간순간에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으로 봐도 되겠습니다. 물론 금강경의 전편에 흐르고 있는 내용들이 모두 이와 같이 겉으로 구하지 말라는 의미로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본론은 이것인데, 낭월은 본론은 잊어버린 채로 지엽적인 문제인 육신과 법신에 대한 차이를 이해시켜드리느라고 아등바등하고 있었네요. 물론 이해를 잘 하지 못하셨던 벗님이라면 다행히 약간의 도움이 되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내일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냥 오늘 이 순간의 모든 것이 그대로 내일로 이어질 것이므로 오늘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만 알면 내일은 자동으로 알게 된다는 인과법(因果法)을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오늘 지혜를 갈구하면서 자연을 사색하고 있다면 적어도 내일은 강아지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면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벗님의 오늘은 어떠셨는지요? 법신과 육신의 차이를 생각해 보시고, 또 자동차를 생각하면서 잠시 먼 미래를 상상해 보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문득 해 봅니다. 그리고 자신도 지혜를 찾아서 정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좀 해 볼랍니다. 감로사의 불자님들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해 드렸더니 더러는 알아듣고 더러는 못 알아 듣는 것 같았습니다만 나름대로의 얻음은 있었셨던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함께 나누게 되어서 즐거운 낭월입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글자로나마 좋은 뜻의 글을 쓰면 다음 생에도 글자를 쓰면 남들이 읽으면서 즐거워하지 않겠느냐는 인과관계가 문득 떠오르면서 한 생각이 스쳐지나갑니다.


‘낭월도 전생에 경전을 쓰다가 죽은 것은 아닐까? 그래서 글을 쓰면 몇몇 분들은 읽으면서 즐거워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금강경의 본래 뜻은 뭘까요? 그것은 바로 품값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를 하면 되지 싶습니다.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그것조차도 없어야 지혜의 큰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차원의 이야기들은 각자의 인연에 맡길랍니다. 자칫 불교나 믿으라는 이야기로 이해를 하시는 것은 원치 않기 때문이기도 하네요. 마지막으로 이런 글귀가 떠오르는데 한 말씀만 더 드리고 줄입니다. 행복하시고요.


 


"모든 집착을 떠난 그 곳에서 찬란한 연꽃이 피어나리라~"


 


           2009년 6월 24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