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 은 글] 고수로 가는 길(2)-picnic 님 글

작성일
2003-11-27 17:27
조회
7263

먼저 올려드린 글의 일 부분이 잘리고 해서 다시 수정을 해서 너무 큰 파일임을 고려하여 나눠서 올려드리도록 한다. 뒷부분의 내용을 다시 보실 벗님께서는 이 글을 살펴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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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자 막스 쉘러는 그의 서적 "동정의 본질과 형식"에서 사랑은 모든 현존재에 대해 창조적이라고 했으며, 사랑의 창조적 의의는 (플라톤에 의해 이미 잘 인식되었듯이) 사랑이 다름 아닌 "가치의 보다 높은 존재"를 향한 운동이라는 점에 있다고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불쌍하게 생각하여 연민과 자비의 마음을 베푸신 것도 바로 보다 높은 경지에 도달한 고수들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수들이 사랑과 자비를 통해서 고수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 것도 또한 우주의 법칙이라고 봅니다. 자신에게 부여되는 임무와 시험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생명을 사랑하고 자신과 인연이 된 사람들과 화합하고 화목하게 잘 지내고 하수들을 위해서는 연민과 자비의 마음을 내어 그들을 돕는 것이 바로 고수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필자가 알기에 고수에 도달하면 분명히 좋을 것입니다. 필자로서는 까마득한 하수에서 시작해서 어느 정도 하수의 티를 벗을 만큼 되니까 많은 것에 대한 통찰과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확립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아직도 멀었지요. 아직 남보다 잘난체를 하려고 하는 마음이 가끔씩 발동하기도하고 남에 대해서 시기하려는 마음이 가끔씩 들기도 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마음을 끊임없이 제거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올바른 사유를 얻을 수 없으며, 즐거운 사유의 여행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우연성과 필연성의 조화를 헤처나가야 하는 일개의 사람으로 무엇인가 얻은 듯 합니다. 어떻게 사유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심층의식 깊이 그 묘법을 조금씩 얻은 것 같습니다.




 독자제현님들께서도 프로그래머로서의 삶에만 만족하지 마시고 항상 세상 전체에 대해서 통일되고 올바른 시야를 얻도록 학문도야와 함께 자신의 정신과 의식을 견고하고 명료하게 할 수 있도록 마음 수행을 하셨으면 합니다. 과거로부터 성명쌍수(性命雙修)라고 하여 성(性)과 명(命)을 함께 닦는다고 하였습니다. 프로그래머적인 삶을 명이라고 한다면 인생 수행은 성에 해당하겠지요. 프로그래머적인 삶을 통해서 프로그래밍에 대해서 얻은 통찰력을 인생수행의 경험자로서 자아의 탐구를 위한 성찰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고수는 한가지에 머물지 않고 어떤 장소와 어떤 환경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고수는 무수히 많은 리모털(Remortal, 정신의 재생과 환골탈태)을 통해 더 높고 먼 경지로 향해 나아갑니다. 프로그래머적인 삶에 머무르지 마시고 한발자국 더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프로그래밍이라는 행위를 초석으로 자신의 지성과 오성을 깨달아나가도록 하십시오. 하수를 갓 벗어나려고 하는 필자가 14년간 전산학, 프로그래밍 그리고 소프트웨어 개발일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결국 이러한 Remortal 과정의 중요성, 끊임없는 진화 그리고 카르마의 청산 및 변화에 대비하는 유연하고 너그러우며 여유로운 마음이었습니다.




 또한, 고수분들은 책을 읽을 때 책 속에서 많은 것을 얻고자 하지 않습니다. 고수분들은 제목을 통해서 책의 시종일관성을 목도합니다. 즉, 고수분들은 책의 전체내용 중에서 요지를 얻고 책의 요지를 삶을 통해 시뮬레이션해 봅니다. 즉, 자신의 삶과 경험에 비추어 책의 가르침을 비교해 보는 것이지요. 이렇게 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책의 내용을 체험하게 됩니다. 고수분들은 남의 책을 통해서 마치 자신이 그러한 삶을 대신 산 것처럼 실제적인 의미를 증득합니다. 하수의 경우는 실제로 나쁜 짓을 해 본 후 이런 짓을 하면 벌받는다는 것을 알지만은 고수는 나쁜 짓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워서 알거나 선험적으로 알면 결코 나쁜 짓을 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프로그래밍 작업에도 적용되는데, 만약 프로그래밍을 작성할 때 논리적으로 복잡한 부분이 있으면 고수는 생각을 다듬어서 문제가 될 부분을 파악합니다. 그러나, 하수는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문제의 부분을 파악하게 됩니다. 고수일수록 이러한 시행착오는 줄어들게 됩니다. 예를 들어, 익스트림 프로그래밍(Extreme Programming)은 고수들의 견지에서 제시한 것이지만 저와 같은 하수에게도 어느 정도 잘 활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개발 방법입니다. 물론, 익스트림 프로그래밍을 올바르게 활용하는 것은 고수가 하수보다 더 뛰어나겠죠.




 고수들은 최대한 시행착오를 줄여나가며, 한 번 실수한 것은 다시 반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한 고수는 한가지 동일한 상황이나 현상으로부터 어떤 의미와 진리를 증득하게 되면, 그 상황이나 현상에 집착하지 않고 다시 여러 번의 반복적인 실험을 해보며 그를 통해 총체적이고 정합적인 묘법을 얻습니다. 그러나, 반복을 해도 어떠한 의미나 진리를 얻을 수 없다면 그러한 무모한 반복은 자제하거나 피합니다.




 저와 같은 하수는 수학문제를 풀거나 프로그래밍을 할 때도 반복해서 틀리고 또한 반복해서 실수를 하게 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또 다시 틀리거나 실수하게 되는데, 고수들은 한번 틀린 것에 대해서는 깊이있는 자각을 하며 철저하게 뼈와 골수에 각인되도록 깊이 새겨넣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실패하거나 실수하지 않도록 합니다. 이것이 하수와 고수의 차이라면 차이일 것입니다. 사실 고수는 빈틈이 없습니다. 그리고 실수를 잘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실수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것은 하수시절의 이야기지 결코 고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구의 운명과 섭리를 주관하고 있는 신(God)적인 절대 고수가 있다고 할 때, 그 고수분이 만약 실수를 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큰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지구의 환경문제부터 생명체의 운명같은 것을 관할하는데 있어 실수가 일어난다면 인간은 엄청난 재난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고수는 가능한한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하며 만약 실수를 하면 그것에 대해서 철저하게 반성하고 문제를 성찰합니다.




  고수의 행동과 사유는 기기묘묘해서 하수가 이해하기에는 정말 어렵습니다. 정말 쓸모 없는 행동 같은 고수의 행동도 엄청난 의미와 묘법이 숨어 있기도 하니까요. 따라서, 하수는 섣불리 고수의 행동과 사유를 모방하려면 안되고, 차근차근 단계적으로(Step by Step) 고수로의 계단을 밟아 나가셔야 합니다. 괜히 자신보다 고수라고 해서 그 고수의 행동을 무조건 따라해서는 뱁새가 황새를 쫒는 격이 되지요. 즉, 자신에게 위험할 수 있습니다. 고수가 저렇게 한다고 해서 무모하게 나도 저렇게 해야지 해서는 안되고, 과연 저렇게 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으며 효과가 있을지 그 이득의 적합성과 유효성을 충분히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고수나 스승의 지도아래 고수의 행동을 추구해야 하지 혼자서 멋대로 멋부리듯이 추구해서는 안됩니다. 잘못해서 고수를 추구해서는 폐인이 되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왜냐하면 바친 시간과 노력만큼 얻는 것이 없을 때는 폐인이 되기도 합니다. 폐인은 지나친 기대로부터 빚어진다고 봅니다. 즉, 욕심이 과하거나 자신의 주제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자신이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하수시절을 제대로 겪고 올바른 과정을 통해서 고수가 된 사람들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하수의 시절을 겪으면서 자신의 카르마(업)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많은 부작용과 어려움을 잘 극복할 수 있는 자신 나름대로의 인내력과 스승에 대한 강한 믿음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어려움을 돌바줄 스승이 필요한 것이지요.




 하수시절에는 자신의 카르마에 인한 불운한 인연(안 좋은 인연)을 많이 만나게 되어 괴로움을 많이 당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불경의 가르침을 살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금강경(金剛經, The Diamond Sutra)에서 현세에 부지런히 수행을 하고 좋은 일을 하고 열심히 공부를 해도 어려운 운명(Evil Destiny)에 놓이는 것은 전생의 악업에 의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악업의 운명을 겪으면서 부단히 정진할 때, 불가해하고 필적할 수 없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의 금강경에 대한 영문본 일부를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Furthermore, Subhuti, if it be that good men and good women who receive and retain this Discourse are downtrodden, their evil destiny is the inevitable retributive result of sins committed in their past mortal lives. By virtue of their present misfortunes the reacting effects of their past will be thereby worked out, and they will be in a position to attain the Consummation of Incomparable Enlightenment."


              http://community.palouse.net/lotus/diamond16-20.htm




 "더나아가서, 슈부티야, 만약 이 설법(금강경 설법)을 듣고 수지하는 선남자와 선여자가 심하게 유린당한다고 한다면, 선남자와 선여자의 악한 운명은 그들이 과거에 그들의 운명적 삶 속에서 저지른 죄의 피할 수 없는 응보적 결과인 것이다. 현실의 불운을 겪음으로써 그들은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응보가 청산될 것이며, 그리하여 그들은 더할나위없는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는 반열에 서게 될 것이다."




 번역은 제가 했는데, 제대로 됬는지 모르겠습니다. 정확한 것은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금강경 책을 참고하셨으면 합니다. 원래, 금강경은 인도의 팔리어로 되어 있는데, 이 후 한문본이 생겼고 근래에 어느 분이 영문으로 번역한 듯 합니다.




 아뭍튼, 저와 같은 하수에게는 보다 인격적이고 자비로운 스승이 필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프로그래밍에 대한 기술력을 습득한다는 의미에서의 협의적인(협소한) 의미 스승이 아니라, 인생전반을 총체적으로 점검하고 문무(文武)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스승을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인격과 정신을 명료하게 하고 다듬어줄 문무를 겸비한 스승을 찾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찾았다면 유교에서 말하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의 정신에 따라, 스승을 마치 과거의 임금모시듯이 그리고 부모님 대하듯이 깎듯이 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모든 분야를 두루 통달한 스승을 만나기 어렵다면 각각의 분야에 별도로 스승을 두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멀티그루(Multi-Guru)를 두는 것이 필요하지요. 여러 명의 스승을 각 분야에 한 분씩 두는 것입니다. 즉, 인격 수련을 위해서 유교적 가르침을 베푸시는 분 그리고 카르마 정화를 담당하시는 불교나 요가적 가르침을 베푸시는 분 그리고 자신의 직업으로서 프로그래밍과 소프트웨어 개발에 대한 가르침을 베푸시는 분 등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모시고 배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스승은 동호회 등을 통해서 찾을 수도 있으며, 책이나 학원을 통해서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또한, 고수는 끝까지 갈때까지 간 후 거기서 휴식을 합니다. 즉, 모험을 할 때, 한 곳에 깊이 빠져서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거나 거기에 멈추어서 구경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즉, 대강의 의미를 파악한 후 지나칩니다. 고수의 맥을 지닌 하수들에게도 분명 이런 것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교까지 학문을 밟는다고 할 때, 초등학교에서 배웠던 내용에 몰입하여 중등학교 내용을 부실하게 방관하지 않습니다. 즉, 초등학교때는 충실히 초등학교의 과정에 매진하고 그후 중학교에 올라가면 새로운 마음으로 중학교 과정에 매진합니다. 초등학교 과정에서의 자신의 실력이 비록 낮더라도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초탈하여 다음 중학교 과정을 이수하는데 충실을 기합니다. 그리고 중학교 과정을 마치면 미련없이 고등학교 과정을 준비합니다. 비록 중학교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소화하지 못하더라도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다음 과정을 밟습니다. 이렇게 단계별 과정을 스치듯이 지나갑니다. 그리하여, 별볼일 없는 대학을 가거나 아니면 고등학교 과정으로 학업이 끝나더라도,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고수는 인생이라는 무대 속에서 새롭게 전열을 가다듬고 생존의 투쟁을 나섭니다. 그리하여, 인생의 희노애락을 모두 겪으면서 성장합니다. 고수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여러 번에 걸친 ReMortals(또는 Mental Resurrection, 정신적 재생, 절처봉생)를 수행합니다. 이를 통해 확실한 진리를 터득하고 고덕대명(高德大明)하신 선조들과 고수들의 가르침의 의미를 파악합니다. 이 이야기는 달라이라마께서도 말씀하신 것이며, 히말라야 성자들의 요가 가르침에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필자가 알기에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신(God)에 의한 의식의 변형이 요구됩니다. 이러한 의식의 변형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어느 정도 한 분야에서 떨어지지 않는 과업을 얻게 되면 거기서 휴식을 취합니다. 그때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최선을 다해 한 단계 한 단계 매진합니다.




 현대 서양철학의 태두 격인 화이트헤드도 "참된 존재는 자기를 구성하고 있는, 즉 생성(창조)하고 있는 존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끊임없이 그리고 부단히 자신을 재창조시켜 나가는, 즉 환골탈태와 ReMortals를 수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수는 자신이 하는 일을 자신도 모르게 합니다. 그리고, 공덕을 베풀어도 베풀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즉, 고수의 심오한 마음은 헤아리기 어려우며 형언하기 어렵습니다. 고수는 끊임없는 탐구정신과 모험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수는 삿된 도리와 삿된 욕망에 허우적 거리지 않습니다. 고수는 욕망을 볼 줄 알며, 욕망을 제어할 줄 압니다. 그리고 욕망의 근원적 의미를 파악하고 철저하게 욕망의 발생원인을 분석합니다. 고수는 끊임없는 열망의 원천을 욕망에서 찾으나 욕망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하지 않습니다. 고수는 욕망을 매트릭스에서 말한 것처럼 컨트롤할 수 있습니다. 욕망을 제대로 관(觀)하고 이를 제대로 제어(컨트롤)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고수를 구분짓는 황금열쇠가 됩니다. 




 고수는 욕망이 사유공간에 잠식해 들어오기 전에 그것을 관합니다. 미리 예방하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무한히 밝은 마음과 일시적이고 헛된 생각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프로그래머로서 올바른 길을 걷기위해서는 분명 무한히 밝은 마음에 우리를 맞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 속에서 일을 진행해야 할 것입니다. 필자가 비록 하수지만 연구하고 사색한 결과, 프로그래밍을 잘 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명정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것은 몇몇 수행서적들을 보고, 고수들의 삶을 통해서 보고 듣고 느끼면서 여러 번의 사색을 통해서 얻은 결론입니다. 즉, 어떻게 보면 프로그래밍이라는 것도 결국은 자신의 카르마(업)을 청산하기 위한 하나의 인생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인생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자아(깨달음의 진아[眞我, Atman])를 찾아 나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유의 정합성을 찾고 보다 근원적인 나와의 조우를 위해서 우리는 하루 하루 고달픈 프로그래밍 일을 하고 있으며 이러한 정신 노가다적인 일을 해야 하는 당위성과 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당위성이 무너져 내리고 산산히 와해되어 사라질 때 그 사라지는 지평 너머 먼 곳에는 서광이 비추어 여러분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 서광은 바로 타아의 것이 아닌 바로 여러분의 내면에 존재하는 분명 무엇인가 뚜렷한 깨달음의 빛(?)일 것입니다.




  고수는 끊임없는 모험과 도전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수는 매사에 자신의 변화를 통해서 새로움에 도전하고 신선하고 기묘한 것을 즐겨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본원적 근원성과 도덕성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철학에서 윤리학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고수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본원적 의미를 보다 지고한(Supreme) 도덕률에 맞춥니다. 즉, 고수의 모험은 그가 견지하는 최고의 도덕심의 발현과 시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수준에서의 도덕심을 발휘할 수 있을까를 자신에게 물어보고 자신에게 시험해 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필자의 생각이지만 필자가 알고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고수의 맥을 받은 하수들도 그러한 체험을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즉, 인생의 쓴 시험과 운명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어떻게 자신이 보다 잘 슬기롭고 용기있게 그리고 자비와 덕을 함양시키는 방향으로 이끌어 갈 것인가를 탐구해 나갑니다. 즉, 고수의 도덕률은 결국 무한하고 무량한 자비로운 마음에 근원적 근거를 갖고 있다 하겠습니다.




 제가 집필한 세 권의 서적, 수학에 기초한 공부론(수학 공부론), C  프로그래밍의 기초 및 학습론 그리고 프로그래머의 길을 순차대로 모두 마스터했다면 더 이상 프로그래머의 생존게임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라 조심스럽게 생각합니다. 즉, 우리는 프로그래머로서의 삶의 이면에 존재하는 운명적 카테고리와 무려(無慮)한 삶의 이정표 그리고 절묘한 모험과 집요하고 철저한 시험들을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프로그래머라고 해서 프로그래밍만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프로그래머도 한 인간으로서 생존경쟁에 참여하고 있고 어떻게 하면 보다 인간적이고 근원적인 삶의 의미를 깨우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할 것입니다.




  우리가 고수를 찾는 것은 바로 우리의 근원적 고민을 해결하고 우리를 보다 발전된 모습으로 변모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외면에서의 변모가 아닌 내면과 정신 그리고 의식의 변형을 통한 발전이 필요합니다. 이를 이끌어주고 인도해 줄 수 있는 분이 바로 자신보다 더 경험이 많은 고수가 필요한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머리 속에 하수보다 무조건 고수가 좋다는 이원론적인 테두리에 갇혀있다면 본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수로서도 언젠가 고수가 될 수 있는 종자가 심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수가 존재하므로 우리는 고수를 꿈꾸는 것일 지도 모릅니다. 즉, 상대적인 이치로서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주는 고수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수도 존재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또한 고수는 잊어져간 자신의 진실을 찾기 위해 하수를 봅니다. 다시말해서, 하수를 봄으로써 자신의 과거 시절을 돌아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저 자신도 부처님의 떨어지지 않는 경지까지 가보지 않아서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고수분들도 하수들이 있기 때문에 하수들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제 글을 마무리하면서 중요한 말 한 마디하겠습니다. "여러분이 가장 증오하는 사람이 바로 여러분을 고수로 만들어 줄 수 있는 부처(Buddha)라는 사실"을 숙지해 두셨으면 합니다. 이것은 저만이 경험하고 듣고 보고 안 것이 아니라 달라이라마께서도 말씀하신 바입니다. 즉, 자신을 괴롭히고 자신에게 증오심을 가져다 준 사람을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때 자신의 영혼은 정화가 되는 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에 간직된 증오심을 모두 없애고 고통을 멸하게 될 때 이러한 영혼의 정화를 통해 과거, 현재, 미래 모두를 잊고 홀로 유유적적하게 적멸의 상태로 존재할 수 있는 거라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고수는 여러분이 별볼일 없이 생각하고 있는 바로 옆에서 일하는 분이거나 또는 직장 후배 일지도 모릅니다. ^__^; 그리고 잊지마십시오. 하수에게서도 요긴한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물론, 고수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지만 말입니다.




  도고마성이라고 해서 도가 높아지면 마구니들이 날뛴다고 합니다. 즉, 항상 색마, 식마 등 다양한 마구니들(계율을 파계하게 하는 마구니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제가 부록2>에 실은 위빠사나 수행법을 참고하세요. 물론, 저의 미약한 경험으로 정리된 내용이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더 자세한 내용은 불교 경전과 불교 서적 그리고 참고문헌 등을 참고하세요.




  이상으로 제가 느끼고 보고 듣고 경험한 내용을 토대로 고수로 가는 길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비록 적은 경험에 부족한 실력을 지닌 하수인 제가 글을 썼습니다. 다만, 학문을 하고 고수가 되기를 열망하는 분들을 위해서 부족한 글이나마 제 글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뜻에서 붓을 들었습니다. 아뭍튼, 여러분들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글의 오류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양해를 구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오. 




                                                     picnic 올림






부록1> 지금부터는 고수들이 어떻게 학문을 탐구하는지 그 방법에 대해서 정리하고자 합니다. 필자는 고수분들로부터 학문을 배웠기 때문에, 어느 정도 고수가 학문을 탐구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배운 방식이 전형적 학습 모델이라고 할 수는 없고 그냥 필자가 배우고 듣고 보고 경험한 바를 토대로 작성합니다.




  먼저, 고수는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 집중력이 뛰어납니다. 즉,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문제를 풀거나 어떤 구문을 독해하거나 상관없이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서 그 문제 상황을 헤쳐나갑니다. 이러한 집중력은 삶으로부터 쓰라린 고뇌와 세파 속에서 버텨내는 인간적 싸움을 통해서 얻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고수들이 혹독한 시련을 꿋꿋이 버텨내고 그러한 시련 속에서 고도의 지고한 정신을 증득합니다. 이렇게 얻은 정신은 학문을 위한 토양이 됩니다.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모름지기 인고의 세월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고되고 힘들고 어려운 인생살이와 세파를 통해서 고수들의 정신은 더욱 강인해 지는 것이지요.




  제가 말씀드릴 요체는 바로 고도의 집중력은 고도의 강인한 정신으로부터 얻어지며, 이러한 강인한 정신은 바로 고되고 힘든 세상살이와 내면적 고뇌의 응집으로부터 나타납니다. 내면적 고뇌의 응집은 고된 세상살이를 통해서 얻어질 수도 있고 스스로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반성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습니다. 번뇌가 보리라고, 자신의 내면을 강하게 하기 위해 번뇌는 가끔씩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여하튼, 강인한 정신은 고통과 고뇌의 응집으로 이루어지는 되,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고통과 고뇌의 응집을 슬기롭게 해소시키고 융해시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독이 되어 자신의 몸과 정신을 상하게 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사성제로서 고집멸도에 대한 저의 한가지 해석은 바로 이렇습니다. 즉, 고통이 있으면 모이게 되고 모이면 멸하게 되며 멸하게 되면 도에 이르게 된다고 말입니다. 복이 있다면 자신의 운명적 카테고리는 수행의 지고한 완성을 향해 진행될 것입니다. 따라서, 분명히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인생의 어려운 시험과 난관을 잘 극복하고 쓰디쓴 시련으로부터 달콤한 열매를 얻을 것입니다.




  필자가 아는 한, 공부를 잘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며, 말씀한데로 고도의 집중력은 고도의 강인한 정신력에서 나오며 이러한 정신력은 바로 인욕과 지계 그리고 수많은 고통과 고뇌를 슬기롭게 참아냄으로써 얻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고한 학문 탐구를 위해서는 그 이전에 고통과 시련의 세월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또한, 학문 탐구를 하는 자세로서도 인고(忍苦)의 세월이 필요합니다. 즉, 도서관에 앉아 공부를 하던 혼자서 집안에서 공부를 하던 6시간에서 7시간을 앉은 자리에서 꼼짝않고 면학에만 몰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정도의 끈기와 인내를 갖지 않고서는 천재가 아닌 이상 지고한 학문을 탐구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고수들은 이러한 끈기와 인내력이 출중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집중력과 인내력은 병행됨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인내할 수 있는가가 결국 집중력을 좌우합니다. 오래 버티고 앉아서 면학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집중력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앉아만 있고 공부를 하지 않고 몽상에 빠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수는 일분 일초를 아끼기 때문에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즉, 공부를 하기 싫으면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그동안 시간을 내어 머리를 휴식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다시 공부를 합니다.




 그리고 고수는 생활리듬을 철저히 준수합니다. 예를 들어, 칸트와 같은 철학자는 하루 일과 중 산책하는 시간을 철두철미하게 지켰다고 합니다. 그래서 칸트가 산책하는 시간을 보고 사람들이 시계를 맞추었다고도 합니다. 여하튼, 고수들은 철저하게 하루의 일과를 짜임새있게 구성하여 진행시킵니다. 즉,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서 무엇을 하고 어디를 가서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등을 철두철미하게 지킵니다. 공부할 분량이 정해져 있으면 그것을 가능한한 지키도록 합니다. 물론,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 힘들 수 있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고수들은 잘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필자도 처음 하수시절때는(지금도 하수지만요. ^__^;) 어떻게 공부해야할지 몰라 망설이고 주저하고 포기하기도 하였는데, 대학에 들어가서야 몇몇 고수들을 만나고 또 나름대로 공부하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그 공부방법에 대해서 요약하자면 고수는 가장 사소하고 별의미없어 보이는 부분에 대해서도 매우 자세하고 심층적으로 파고들고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합니다.






부록2>  picnic이 아는 위빠사나




 필자가 위빠사나 수행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안다고 자부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위빠사나 수행은 필자가 지금까지 살아가는데 다양하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마음으로 경험한 내용이 현실에도 적용되는 것을 많이 느끼게 되어 정리해 봅니다. 특히, 지운 스님의 원각경 강의가 이 글을 쓰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필자가 아는 위빠사나의 본질을 간단하게 정리한다면 그것은 “알아 차림”입니다. 즉, 마음의 눈으로 현상과 상황 그리고 자신의 본질 주변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을 알아 차리는 것입니다. 만약 마음에 미심적은 생각이 일어난다면 무엇인가 문제의 소지가 발생할 수 있고 발생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필자가 아는 위빠사나 수행의 가장 기본적인 단계에서는 “나 자신”과 “타인”간의 명료한 구분이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즉, 마음 속에서 진체(眞體)로서의 자신의 본질적 마음과 이에 분리되어 있는 타자의 마음을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쉽게 설명하면 만약 무엇인가를 먹고 싶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나”라는 본질의 중심부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즉, 그것은 일 순간적인 욕망으로서 “나 자신”이 아닌 타자의 욕망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먹고 싶다는 욕구가 1초도 중지하지 않고 우리의 삶 전체에 영속적으로 진행된다면 그것은 “나”와 분리되어있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먹고 싶다는 생각은 한 때의 욕구일 뿐 그 욕구가 해소되면 다시 사라집니다. 배가 부르면 더 이상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은 것 처럼 말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자는 여러 번의 경험과 관찰을 하였으며, 지금으로서는 필자가 아는 바, 그리고 불가(佛家)의 경전에서 이야기하는 바에 비추어 볼 때, “나라는 존재”와 그 외 “나그네”의 존재가 구별이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먹고 싶다고 할 때, 그 욕구가 바로 나 자신 존재하고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먹고 싶다는 것은 단지 생각일 뿐이라는 것이죠. 생각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덧없는 것입니다. 생각이 영원하고 불변하다면 그것은 우리의 본질적 “자성(自性)”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은 영원하지도 않고 고정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생각은 변화하고 영원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욕구가 영원하지 못한 것처럼 말입니다. 육체를 통해서 일어나는 욕구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잠을 자고 싶다는 욕구도 일시적일 뿐 영원하지 못합니다. 잠을 잠으로써 욕구를 해소시키면 우리는 당분간 잠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욕구와 사고들은 우리의 본질적 면목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즉, 영원하고 불변하는 우리의 자성(自性)하고는 이러한 욕구와 생각들은 동일하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위빠사나 수행법은 욕구들과 무상한 생각들이 나라는 것이 아니고, 그 것은 외부적이며, 나그네(?)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필자도 부처님이 말씀하신 나그네의 정확한 본질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필자가 아는 바에 근거해서 말씀드리는 것일 뿐입니다. 저두 공부하는 중이라 아직 더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무상한 생각들과 욕구에 정신을 시달리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에 치이고 매일 매일 발생하는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살아간다면 우리의 정신은 지치고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필자가 아는 바, 위빠사나 수행은 우리에게 발생하는 이러한 부질없고 무상한 생각들과 욕구들을 하나 하나 알아차려 총체적인 무지를 타파하는데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팔정도(八正道)의 정견, 정사유 등은 바른 마음을 바탕으로 해서 나오는 생각으로서 일반적으로 미혹되어 일어나는 생각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필자가 알기에 미혹된 생각(또는 어리석은 생각)과 정견, 정사유는 엄연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법은 미혹된 생각을 타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견, 정사유를 구족할 수 있도록 자신을 수양해 나가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필자가 아는 위빠사나 수행법은 “이것은 나의 올바른 생각이구나.” 또는 “이 생각은 나의 미혹된 생각이구나.” 등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필자도 항상 깨어있는 상태로 이러한 주도면밀한 생각의 관찰을 시도하지만 잘 안되다가 불편함을 보거나 괴로움 그리고 더 나아가 손해를 보거나 할 때가 있습니다. 마음에 무엇인가가 미심쩍은 생각이 일어난다면 분명히 이를 잘 살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마음에 나쁜 생각이 들면 그 원인을 자세하게 살피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 내가 나쁜 생각을 하는 것일까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어떤 욕구가 일어나면 그것의 올바름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또한 마음의 눈으로 욕구가 일어남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관찰이 매우 중요합니다. 나는 배고프지 않았는데, 저 음식점을 보고나니 음식이 먹고싶었다. 과연 이러한 욕구는 지금 나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욕구이다 라고 잘 파악하셔야 합니다. 사실, 어떤 면에서 정도(正道)를 걷는 일반인들도 어느 정도 위빠사나 수행법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대로 실제로 모든 사람이 부처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단지 무지에 미혹되어 번뇌망상에 빠지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제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해서 했는데 실수를 하거나 실패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무지함을 바로 관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필자의 경험상 위빠사나 수행은 초긴장 상태를 갖게 만들기도 하는데, 이것은 아마 필자가 위빠사나 수행을 잘 못해서 그런 것 같고, 요즘에는 매우 편안한 상태에서 위빠사나 수행이 진행되지만 간혹 미혹해서 무지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지에 빠졌다고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그 상태에서 빨리 빠져나와 원상태로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깨어있게 되면 도둑 맞을 이도 없고 남의 하인 노릇 할 필요도 없으며 자신의 몸을 괞히 나그네들이 머무는 몸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매트릭스 영화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매트릭스는 어디에도 존재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바로 우리의 현실세계에서 미혹을 일으키고 무지를 일으키는 대상은 어디에도 존재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거대한 무지의 그물, 즉 무지의 매트릭스 속에서 살고 있으며, 우리는 이를 총체적으로 타파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김형효 교수님의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이란 책에서 하이데거가 우리 인류는 유구한 역사를 통해서 무지를 타파해 가는 도정을 걸어왔다고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 도정이 끝나는 시기가 마야 문명에서는 2010년으로 봤는데, 이집트의 왕 무덤의 예언시기도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2010년인가 2020년인가로 본 것 같습니다. 최근 한바다님에 의하면 2010~2012년 정도로 비전 리딩을 통해 예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유 속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들은 우리에게 배움을 주기 위해서 존재하며, 우리는 우리가 얻어야 할 것과 그렇지 않고 버려야할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찾아야 할 것과 그렇지 말아야 할 것을 명확하게 구분해야 할 것입니다. 각종 종교의 경전에서, 각종 명상서와 철학서의 구절에서, 영화 매트릭스 등의 대화 속에서 그리고 우리가 생계를 위해 살아가는 하루 일상 속에서도 진지한 가르침이 존재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그러한 중요한 가르침을 잘 알고 무지에서 벗어나 미혹을 끊고 청정한 자신을 찾아나가는 하나의 수행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단, 수행은 깨달은 분들이나 깨달은 스님들의 지도 하에서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문헌)


1. 지운 스님의 원각경 강의, www.btn.co.kr


2.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 김형효 교수님, 청계 출판사


3. 3천년의 약속, 한바다 구술, 김철호 기획, 강영민 엮음, 아름드리 미디어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