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사주와 대형사고의 관계

작성일
1999-08-24 00:00
조회
7972

 [1] 사주팔자와 사망사고에 대해서


 

 

사주공부를 하는 명리학자의 생각을 가끔은 복잡하게 만드는 일이 있으니 대형사고가 발생하게 되는 경우에도 한 예가 되겠다. 보통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에 대해서 연구를 하는 학문이다 보니까 사람의 운명에 대해서 모두 해석이 가능하다고 큰 소리를 치는 경우가 왕왕 있고 또 대개는 이러한 주장이 크게 부끄럽지 않게 맞아주기도 하는데, 실은 대형사고가 발생한 공간에 있는 사람들의 상당 수는 해석이 불가하다는 결론을 얻으셨다면 스스소 설명의 딜레마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과연 어떤 연결고리가 숨어있기에 명리학자로 하여금 설명을 할 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일까? 이러한 상황에서 대개의 학자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해야 정답일 것이다. 물론 낭월이도 정확하게 답변을 드릴 형편이 되지 못하여 난감했던 적이 있다. 지난 이야기이다.


pung34



삼풍백화점 붕괴사건과 연관해서-


예전에 모 대학교의 교수님과 명리학에 대해서 열심히 토론하던때가 있었다. 삼풍사건 이전이었다. 그러다가 이 교수님께서 전화를 해서는 사주를 하나 봐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사주의 구조와 운의 흐름을 봐서는 충분히 교수님을 하고도 남을 사주였다.


그래서 본대로 이야기를 했더니 금년의 상황을 봐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다각적으로 생각을 해보니까 운이 매우 좋아서 특별히 문제가 있다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금년에 특별한 일이 있음을 판단하지 못하겠다고 했는데, 이 분의 말씀이 바로 삼풍사고에서 희생된 벗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다시 살펴보고 아무리 연결을 지어보려고 했지만 결국 답을 찾지 못하고 난감해했는데, 이 교수님도 자신이 명색이 명리학을 공부하면서 절친한 친구의 운명에 대해서 전혀 예측을 하지 못했으니 사주공부를 하면 뭘 하겠느냐고 하는 말을 하면서 회의심이 든다고 하는 말을 했다.


Screenshot_2017-10-21-18-05-12-1



보통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야 인내심이 부족하여 그렇다고 치부를 할 수도 있겠지만, 낭월이가 봐도 충분히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경우에 이런 말을 들었으니 상당히 고민스럽게 생각됨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로 곰곰 생각에 잠겨봤다. 과연 무슨 작용이 있어서 자평명리의 레이더를
벗어났을까... 곰곰 생각을 한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잠정적으로) 내리게 되었다. 다만 낭월이의 생각일 뿐이기 때문에 잠정적이라고 하는 꼬리를 달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아마도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낭월이의 결론이다.



1. 사주팔자의 오류


항상 생각하는 문제이지만 사주가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논의를 할 필요가 없는 문제이다. 그러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사주가 모두 잘못되었다고 보는 것은 너무 극단적인 편견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교수 분의 동료는 사주의 구조가 정확하다고 하는 말을 재삼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이러한 경우에는 해당이 없겠지만 여하튼 아무리 자평명리로 접근이 어렵다고 할지라도 정확하게 작성되지 않은 자료에 대해서는 고려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점을 전제해야 하겠다.



2. 팔자 위에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곰곰 생각을 하고 또 되씹어 본 다음에 내린 결론이다. 사주팔자는 여하튼 개인적인 문제에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예언력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특히 심리적인 구조를 읽어 내는데 있어서는 과히 세계적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싶을 정도인데 그래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용이라고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점이다. 즉 개인용이라고 하는 이면에서는 사회용이라고 하는 말을 덧붙일 수가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그렇게 개인용으로 설명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하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 예로 삼풍백화점의 경우에는 백화점의 수명이 있었다고 생각을 해보자는 것이다. 물론 건물에 대해서 사주로 해석하는 것은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 즉 사주 이면에 다른 영향이 있다고 해야 하겠는데 개인적인 영향을 넘어서 있는 건물의 수명이 다하게 되어 쓰러지니까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운이 좋던 말던 상관없이 모두 같은 운명에 속해버리는 결과가 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시면 되겠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니까 사주의 영역이 점차로 좁아지게 되는 것 같은 생각도 들게 된다.


또 다른 경우도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즉 그 사고가 나고 나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은 또 어떤 힘이 있어서 살아났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죽은 사람이 상당히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중에서도 구사일생이라는 말을 해야 설명이 될 지경으로 살아나는 사람도 있다는 점은 아무래도 개인적인 운명이 도움을 줬는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해야 하겠는데 물론 자신이 없는 대목이라는 점은 당연하다. 왜냐면 그렇게 된다면 앞의 교수의 경우에는 기적적으로 살아났어야 한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용히 생각을 해보면서 전부를 다 알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이 된다. 그래서 사주로써 대형사고의 희생자를 모두(아마 상당수는 운이 나쁠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싶은 생각을 하는 낭월이다.



또 다른 예로는 타이타닉 승객들도 마찬가지겠고, 일본 원폭사망자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근래의 상황을 보면 터어키의 지진도 들 수 있겠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적인 운명은 종이장처럼 밟혀버릴 수도 있다고 하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씨랜드의 어린아이들은 또 어떤가... 역시 그 모두는 개인적인 운과는 상관없이 어떤 외부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고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기 전에는 그렇게 단체사고가 나는 곳에는 운이 나쁜 사람만 참석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점을 보면서 약간은 겸손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가면서 명리공부를 하고 있는 낭월이다.



3. 그럼 해결방법은 없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러한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가 있을까? 또는 어떻게 하면 천재지변이라고 할 수가 있는 절대절명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를 생각해봐야 하겠다.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은 항상 불안하기 짝이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뚜렷한 해결책은 없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다만 다시 생각을 해본다면 역시 보이지 않는 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움을 요청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즉 보이지 않는 힘이라고 하는 것이 영적인 파워가 될 수도 있겠다. 가령 종교의 힘이나 조상의 위력으로 자신의 위기상황을 넘어갈 수가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러한 근거는 다음의 일화에서 찾고자 한다. 함께 생각 해보도록 하자.



예전에 낭월이 12~3세 되었을 적의 이야기이다. 당시에 살았던 곳은 지금의 태안군 안면읍 창기리의 어느 바닷가였는데, 북쪽지역이어서 수애라고 하는 곳에서 육지의 창리라고 하는 곳으로 건너다니는 나룻배가 운영되고 있었다. 요즘 보면 현대간척공사의 중심이 되는 곳이 창리이다. 그해 겨울의 섣달 대목장을 보러 간다고 어머님께도 같이 갈 것을 제안받고 그렇게 하기로 작정을 하고 아침밥을 해먹고는 설걷이를 하다가 문득 가시 싫은 생각이 들더란다. 그래서 부친께 말씀드리니까 그러면 가지 말고 그냥 밥이나 해먹자고 하시더란다. 그래서 찹쌀을 찾아서 떡좀 하려고 담근 다음에 이웃마을로 방아를 찧으러 가셨다. 말이 이웃마을이지 거리로는 약 2키로 정도 되는 거리라고 해야 하겠는데, 다녀오셔서는 하시는 말씀이


"야야! 조상님이 날 살렸구나~!"
    "뭔 말씀이유?"


"나룻배가 엎어졌단다. 살아난 사람이 별로 없고 모두 죽었다고 하니 내가 그 배를 탔으면 그대로 죽을 것이 아니냐 그런데 마음이 싫어서 타지 않았더니 그 배가 엎어질 줄이야 생각인들 했겠느냐. 그러니 조상님이 살린 것이 아니고 뭐겠니."


물론 자신의 육감으로 살아났을 수도 있고, 그야말로 어머님의 말씀대로 조상님이 영감의 계시를 줘서 살렸을 수도 있다. 이것은 확인을 할 길이 없 므로 구태여 따지지 말기로 하자. 중요한 것은 그렇게 시시각각으로 시간이 전개되면서 죽을 사람은 죽고 살 사람은 살기도 하더라는 말을 드리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인간의 삶과 죽음은 굉장히 복잡한 구조를 하고 있는 가운데에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는 것이 낭월이의 생각이다. 벗님께서는 이러한 장면을 어떻게 생각하실 것인가?


낭월이 생각에는 기왕이면 신앙의 대상이나 조상님이 도움을 주신 것으로 생각하는게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잘되면 조상덕이라고 생각하고 못되면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는 사람이 이와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보다 훨씬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일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이 되기 때문이다.



4. 생사는 인연에 맡기자는 결론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싶다. 살고 죽는 것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물론 여기에서 자살을 하여 '자귀모'의 동지가 된 귀신들은 동의를 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자살을 하면 자신의 의지로 죽은 경우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면에서도 자살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막바지로 몰아가는 여건이 불가항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결과는 자신이 죽은 것이겠지만 실은 이미 그 이전에 죽음으로 몰아간 여건이 있었을 것이고, 자신이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도 역시 인연이라고 하는 생각으로 결론을 지어보고 싶어진다.


즉 사주팔자의 구조를 갖고서 많은 부분에서 설명이 가능하지만 생사의 부분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책임을 지지 못하겠더라는 생각을 전해드리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책임회피라고 생각을 하실 수도 있겠지만 곰곰 생각해보시면 과연 책임회피만은 아니라고 생각을 하실 수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 어디까지 자평명리로써 접근을 하는 것이 이치에 합당하겠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문득 가을의 문턱에서 터키의 사건이 뉴스로 통해서 나오는 것을 보면서 지난날의 생각들을 말씀드려본 이야기이다. 벗님의 생각은 어떠실까...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