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화] 죽음과 진실-소크라테스와 경봉 스...

작성일
2001-04-03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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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0화] 죽음과 진실-소크라테스와 경봉 스님

우리는 늘 성스럽게 일생을 살고 떠난 사람과 보잘 것 없는 삶을 살다가 죽은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렇게 믿기도 한다. 그리고 늘 그러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입에 침을 튀기기도 하는 것도 일상 반복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과연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은 다음의 어느 것에 해당하는 것일까 한번 생각을 해봐 주시기 바란다.

진실일까?
거짓일까?
적당히 각색된 진실일까?

이렇게 질문을 해보는 것은 정확한 답을 얻고자 함은 아니다. 그냥 한번 주의를 환기시켜보려고 하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왜 주의를 환기시키려고 하느냐면 실제로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거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전혀 다른 사실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다음의 이야기를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자. 아마도 벗님도 이미 알고 계신 내용이리라고 생각을 한다.

1.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해서

전해지는 책에서 본다면 그는 감옥에서 사약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고, 그러한 장면을 묘사하는 내용은 언제나 멈춤이 없는 구도자의 모습을 띠고 있다. 그렇게 조용히 발이 차거워짐을 느끼면서 약간은 흥분된 듯한 어조를 말하기도 하고, 무릎위로 차가운 기운이 감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점차로 손발이 마비되는 장면을 주변의 제자들에게 이야기하는 모습들이 나타난다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벗님의 생각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플라톤이 기록한 것으로 되어있다는 것으로 기억하는 것도 아마 크게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연관된 부분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과연 어떤 일이 있어났을까? 그런 의문을 가져보지 않았다면 지금 한번 생각을 해보시기 바란다. 물론 낭월도 미쳐 이러한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그리고 그렇게 죽음을 받아드리는 초인적인 정신력의 소유자였다는 것에만 감탄을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어제 서점에 가서 묘한 제목의 책을 한 권 발견하고는 얼른 사들고 왔다. 그 책의 제목은 『전설, 거짓말, 날조된 신화들』이라는 긴 제목이었다. 그리고 그 제목만으로도 이미 흥미를 돋우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리고 들고 와서 여러 이야기들을 편인적(의심스러운)인 관점에서 쓰여진 것에 대해서 흥미롭게 읽어 봤다. 그리고 다른 이야기들은 다 접어두겠는데, 여기에는 종교적인 날조라고 의심이 되는 대목도 있음을 참고하실 수는 있겠다. 여하튼 지금 생각을 해보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부분이었다. 왜냐면 낭월도 여러 차례 그의 죽음에 대한 플라톤의 이야기를 남들에게도 했던 기억이 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일부를 인용하도록 한다. 참고로 지은이는 '리쳐드 셍크먼'이라는 사람이고, 번역을 한 사람은 '임웅'이라는 사람이다.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죽었는가? 우리가 흔히 접했던 묘사에 의하면, 그는 아주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는 끔찍하고 역겹고 고통스럽게 죽어 갔다. 그는 독약을 한 컵 마신 뒤 경련을 일으키고는, 구역질을 하고 오물을 토했다. 그러고 나서 온몸이 마비되어 갔다.
사람들로 하여금 소크라테스가 조용하고 우아하게 죽어 갔다고 생각하게 만든 사람은 플라톤이었다. 그러나 플라톤은 거짓말을 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그것은, 2500년 동안이나 소크라테스의 모든 행적에 대해 낱낱이 연구한 끝에 어느 날 마침내 누군가가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 의문을 품었기 때문이다. 즉, 치사량의 독약을 마신 사람은 누구든지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죽어 갔는데, 어떻게 소크라테스만이 조용히 죽을 수가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플라톤만 해도, 그가 어떻게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야기를 쓸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는 스승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맞이했던 현장에 나타나지 조차 않았던 것이다. 다른 14명의 제자들은 그 현장에 있었지만 친애하는 늙은 플라톤은 그곳에 없었다.

그는 아팠기 때문이라고 변명했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없다. 많이 알려진 이야기는 아니지만, 역사가들은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와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기 위해 그의 죽음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당시 아테네 시 당국으로부터 평판이 좋지 않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상이 책의 내용이다. 내용 중에서 특별히 합리적이지 않은 부분을 발견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대체로 냉철하게 관찰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렇게 간단하게 독약을 마시면 격심한 고통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위대한 성인의 죽음이라고 생각해서, 의심을 하지 않도록 한 플라톤의 글재주가 대단했다고 생각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혹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그 고통을 극복했다고 이해를 해도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고통을 참느라고 얼굴의 근육이 일그러졌다는 말이 한 두 줄 있었더라면 더욱 인간적이지 않았을까를 생각해본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알아서 무슨 큰 이익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냥 아름답게 꾸며진 거룩한 장면으로 기억을 하는 것이 어쩌면 더욱 유익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언젠가 그렇게 알아왔던 내용들이 이렇게 허무하게 '와르르~' 무너지게 될 적에 결코 즐겁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역시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믿지 않는 것이 현명하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대로 철저하게 의심을 해야 한다는 말이 될지도 모르겠는데, 독약을 먹고 고통스러워하는 스승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본다고 기록을 했더라도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왜냐면 인간의 육신은 생리학적으로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어갈 수밖에 없다는 자연의 법칙을 따랐다고 적으면 충분하겠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조작을 했을까? 아마도 스승의 죽음을 조작함으로 해서 이익을 취할 목적이 있는 사람이 그렇게 했다고 봐서 무리가 없을 것이다. 왜냐면 뭔가 조작을 가하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고 이것도 자연의 법칙이라고 하겠다. 자연의 법칙이 아니라면 그냥 인간의 심리라고 해둬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여하튼 그렇게 해서 이익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그렇게 자신의 각본에 쓰여진 대로 목적을 이룰 것이다. 그리고 한 동안(적어도 그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은 이익을 볼 수가 있을 것이라는 점은 가능하다. 그러나 언젠가 그 거짓된 행동이 밝혀졌을 적에 나타나는 후유증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을 해보는 것이 좋겠다. 왜냐면 플라톤도 대단한 학자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러한 조작이 밝혀지게 되면 또한 상당히 멋쩍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늘 있는 그대로만 알려주면 되겠는데 그러한 행동도 결코 쉬운 것은 아닌 모양이다. 더구나 성현이라고 하는 이름을 앞에 놓고서는 말이다.

2. 경봉 스님의 입적

낭월이 이번 생에서 맨 처음으로 만났고 여전히 존경하는 분으로 경봉 스님을 꼽기에 주저함이 없다. 그는 늘 활발하셨고, 지혜로우셨으며 또한 인간적이었다. 그래서 오래도록 낭월의 머리 속에는 그 분의 가르침이 폭포처럼 울림을 주고 있다고 말씀을 드린다. 항상 생생하게 깨어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과 행동에서 늘 감명을 받았고,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의 가르침은 생생하게 기억 속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이다. 스스로 직접 보고 들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분의 죽음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과연 그의 사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렇게 해서 이익을 보는 자는 누구일까? 낭월은 오로지 사실 그대로만 적혀서 후대에 전달을 해 줘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사실 그 자체가 진실이며 진실이 아닌 것은 오히려 그를 욕되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실은 이미 욕을 먹고 있다는 말이 들린다. 안타까운 일이다.

(1) 『바보가 되거라』에 기록된 내용

여기에서 특정한 책을 거론하는 것에 대해서는 좀 미안하다. 왜냐면 이 책의 저자는 또한 경봉 스님과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기록했을 뿐이겠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용을 하게 되는 것은 그 이야기가 활자로 되어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사실이 아닌 내용으로 인해서 잘못 기록을 했다면 스스로 그에 대한 책임 정도는 질 것이라고 생각이 되어서이다. 경봉스님의 죽음에 대한 부분을 인용한다.

'1982년 7월 17일(음력 윤5월 27일), 91세의 스님은 미질(微疾-가벼운 병세:낭월주)을 보여 문도(門徒)들을 불렀다. 큰 스님의 임종이 가까워졌음을 느낀 효행상좌 명정(明正) 선사는 말할 수 없는 슬픔 속에서 여쭈었다.

"스님 가신 뒤에도 스님을 뵙고 싶습니다. 어떤 것이 스님의 참모습입니까?"

스님은 조용히 미소를 머금고 주위를 둘러보신 뒤 말씀하셨다.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

그리고는 4시 25분에 진여무애(眞如無碍)한 열반의 세계로 입적(入寂)하셨다. (이하 줄임)

(2) 실제와 내용의 차이

책의 내용으로 봐서는 참 멋진 도인의 마지막 떠나는 모습이라고 해야 하겠다. 그리고 이 글에 대해서 대다수의 벗님들은 원래 도인은 그렇게 돌아가시는 것이니까 당연하다고 하는 생각으로 역시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하고 넘겼음직한 페이지이기도 하다. 그리고는 아무런 일도 없다고 해서 그만이겠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면, 이렇게 사소해 보이는 오류가 또 다른 부담을 불러오겠기 때문이다. 도인은 그렇게 죽어야 한다고 누가 각본을 짜 놓은 것도 아니고, 그냥 생전의 인연에 따라서 그렇게 노닐다가 또 자신의 인연을 따라서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인데, 어느 각본에 따라서 그렇게 말을 하고 숨을 거둬야 한다는 스타일이 당연하다고 한다면 아마도 많은 도인(?)들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부담을 느낄 것이다. 그러니까 죽기 전에 똥을 벽에 발라도 곤란하겠고, 정신이 없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도 곤란하겠다는 생각으로 아마도 적지 않은 '죽음의 부담'을 받게 될 가능성이 많다고 하겠다. 하기야 이미 죽음의 부담을 느낀다는 자체는 덜 도인이라는 말도 되겠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수행을 하신 도인들이 죽음에 이르러서는 마음대로 되지 않음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부담이 되겠느냐는 생각이 든다.

경봉 스님은 몇 해를 병석에서 보내셨다. 그리고 임종이 다가올 무렵의 몇 달간은 말도 하지 못할 정도로 육신의 상태는 나빴다고 전해진다. 바로 옆에서 시중을 들었던 사람에게 전해들은 이야기이므로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부담스러운 시간을 보낸 것은 아마도 신도님들이 마련해준 보약들로 인해서일 거라는 말도 많이 했었다. 이 말은 보통 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니까 '늙어서 보약을 많이 먹으면 죽을 적에 고생한다'는 말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보약으로 치면 아마도 많이 드셨을 것이다. 극성스러운 부산과 대구의 신도들이 그냥 두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신체는 수명이 다 했지만 또한 숨을 거두지 못하고 그래서 큰스님은 육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은 극히 속물인 낭월의 상상이다. 다만 생물학적으로 봐서 크게 무리가 없다고 하는 생각으로 해보는 결론이다.

그렇게 말을 한 마디도 남기지 못한 상태로 임종을 하셨다. 그리고 그 장면을 지켜본 가까이의 사람들은 너무 황당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적어도 임종게를 멋지게 한번 읊고 그렇게 '내 인자 간데이~!' 하는 말로 마무리를 해야 더욱 멋진 도인의 죽음이라고 남들이 할텐데, 이게 뭐냔 말이다. 아무런 말도 한 마디 못하고 그렇게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 나중에 남들이 이 일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 대해서 먼저 걱정을 해야 한다면 참 딱한 일이라고 해야 하겠다. 그렇다면 늦기 전에 뭔가 작전이 필요하게 된 것은 당연하겠다. 그리고 그 작전에서 등장을 하는 것이 임종게이다. 앞의 글에서 마지막 시중을 들었다는 스님의 이름이 있으니 그 스님에게 질문을 해 본다면 어떤 명확한 답을 얻을 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낭월은 그 내용에 대해서 확인을 하고 싶지 않음은 한때의 인연으로 인해서이다. 이상은 낭월이 어느 가까이에서 경봉 스님을 모셨던 사람으로부터 들었던 사실적인 이야기이다.

(3)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

그렇다면 이 말은 어디서 나왔을까? 이미 말을 할 기력이 없어진 사람으로부터 이렇게 또렷한 말이 나왔다고 하는 것을 믿으라고 한다면 또한 의문투성이라고 밖에 달리 말을 할 수가 없겠다. 우선 '야반삼경'은 왜 나왔을까?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이라고 한다면 경봉스님의 일화에 대해서 관심이 많으신 벗님이라고 해도 되겠다. 왜냐면 그의 깨달음과 연관된 부분에서 그러한 말이 등장을 했기 때문이다.

"야반삼경에 촛불이 춤추는 것을 봐라"

이 말은 화두를 타파할 적에 촛불에서 '파파파~!' 하는 소리가 나면서 춤을 추는 장면을 보고서는 큰 깨달음을 얻고 나서 그 장면을 전달해 주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함께 전하는 깨달음에 대한 장면은 사실이라고 주변의 사람들이 전해주는 이야기이다. 다음은 동네에서 가끔 절에 일이 있을 적에 파출부로 일을 해주던 동네 아주머니들과 아저씨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믿어도 좋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아따 말도 마소. 참말로 대단했십니더. 그 날 새벽에 보니까네 극락암 자리에 불이 났는지 온통 훤한 기라요. 그래서 불이 났다꼬 우리는 몽땅 삽이나 괭이를 들고 산으로 달려가지 않았덩교. 그런데 불꽃은 보이지 않고 극락암 전체가 불을 켜 놓은 것처럼 훤한 깁니다. 그런데 이미 큰절(통도사를 하는 말)에서 시님들이 올라오셨덩기라요. 우리보고 불 난 것이 아니고 도인이 뭔가 하는 기라꼬 그냥 내려 가라꼬 않카능교. 그래서 그냥 내려왔십니더. 정말 대단했지예."

낭월이 극락암에서 공양주를 할 적에 직접 들었던 이야기이다. 그래서 사실일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가끔 경봉 스님께서 법문을 하실 적에도 깨달음을 이루면 스스로 말을 하기도 전에 천지가 먼저 알고 방광(放光)을 한다고 하신 말씀과도 연결이 된다. 물론 동네 사람들이 뇌물을 먹고 그렇게 말을 하도록 교육을 받았으리라고 하는 것까지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영악하지 않은 산골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등장을 한 야반삼경이 다시 임종게로 리바이블이 된 셈인가? 여하튼 낭월이 얼핏 생각을 해도 그(임종게) 야반삼경과 이(오도시의) 야반삼경이 같은 말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데 대문 빗장은 어디에서 나왔는지 도무지 선지(禪智)가 어두운 낭월로써는 짐작도 하지 못하겠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단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번 오도송과 임종게라고 전해진 말을 비교해보도록 하자.

오도송은 밝고도 밝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임종게는 어둡고 침침하다. '야반삼경에 촛불'은 그대로 명확하고 뚜렷해서 속이고 말고 할 것도 없다는 것으로 대입을 해서 무리가 없겠다. 그런데 야반 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보는 것은 뭔가? 그 이야기에는 밝은 장면이 하나도 없다. 그렇게 깜깜하기만 하다. 이것이 좀 찜찜한 여운을 남긴다. 왜냐면 생전의 경봉 스님은 그렇게 밝고 투명하게 늘 다가왔기 때문이다. 깊은 한 밤중에 촛불이 퍼덕이는 장면에서는 뭔가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은 느낌도 드는데 대문의 빗장은 전혀 그러한 긴장감이 없다. 차라리 그냥 오도송을 그대로 재탕했다면 더욱 좋을 것을 그랬다는 생각도 든다. 일생 전광석화나 목격도존(目擊道存)을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는데,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말은 그런 기분이 들지 않는 말이라는 생각을 해봤다. 선입견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여하튼 그렇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4) "선방 스님을 참 무섭데예~!"

이 말은 앞의 실제 상황을 전해 준 사람이 낭월에게 해준 말이다. 그래서 뭐가 그렇게 무섭더냐고 묻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노스님이 열반에 드시고 나서 불국사 객실에 들렸던 적이 있었는데요. 저녁에 다른 객 스님이 오셨고 이미 와있던 객 스님들과 서로 인사를 나누니 선원에서 참선을 하는 스님들이었던가 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화제는 경봉스님에 대한 이야기로 전달이 되었고 나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가만히 한쪽 구석에서 귀만 활짝 열고 있었지요. 한 스님이 경봉 스님이 남기셨다는 임종게를 이야기하더군요. 긴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늦게 오신 객 스님이 코웃음을 치더군요. 이어서 나오는 말

'웃기고들 자빠졌제~!'

모두 그 스님을 향해서 눈을 모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 스님이 다시 말을 하는 겁니다.

'나도 노스님 아래에서 여러 철을 참선도 하고 법문도 들었으니 그 스님의 성품과 깊이를 약간은 짐작하고만 있는데, 언제나 그 노장의 말은 뼈가 있었다구요. 근데 뭐야? 어떤 미친놈이 그 따위 말을 떠벌려서 큰스님의 뒤를 구정물로 만드는지 참 기가 막힙니다.'

이 말을 듣고 등줄기가 쫄아 붙는 줄만 알았습니다. 이야~! 정말 대단합디다. 어떻게, 노스님께서 남겼다는 말을 듣고서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알아내는지 정말 선방 스님들을 다시 봤다니까요. 참말로 대단하데요. 그게 사실이거든요."

(5) 잘 한다고 했겠지만 지혜가 없으니.....

낭월이 뭘 안다고 누굴 탓하랴만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절도 든다. 깨달음의 경지를 어디 조작으로 소설가가 글을 쓰듯이 그렇게 해서 될 일이라면 불교는 진작에 망가지고 말았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했던 장면은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된다. 그러나 누굴 속이겠는가 말이다. 제방의 선지식을 속이기에는 너무도 허술했던 모양이다. 결국은 도움을 준다고 한 일이 도리어 욕이 되었으니 이제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느냔 말이다. 참으로 안타깝기만 하다.

(6) 늘 사실 그대로가 중요하다

가장 허물이 없으려면 사실 그대로를 전달하는 것이 상책이다. 하다 못해 장관을 임명받아도 과거의 학력을 속였다는 이유로 그 자리를 물러 나와야 하는 것이 현실인데 도인이 남긴 말을 조작하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적었더라면 누가 그 후를 탓하겠는가 말이다. 사실 그의 정신력은 도인이었지만 육신이야 무슨 도를 알겠는가 말이다. 그냥 그렇게 이용하고는 버리는 것이 육신이라면 죽음을 앞에 두고서 마음대로 이용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크게 허물이 될 일도 아니라고 생각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진실을 이야기했더라면 그 후에 왈가왈부를 하더라도 사실대로만 전달이 될 것이고 그러한 이야기로 무지한 사람들이야 '도인이 아무래도 가짜였던가 보다'는 말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지혜로운 선지식들은 다 알았을 것이다. 참으로 흉내를 낸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닌 것이 도인이요 깨달음의 경지가 아닌가 싶은 생각을 늘 하고 있는 낭월이다. 대번에 눈치를 채어 버리는 선지식들의 마음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랬는지 모르겠다.

이 말에서 얻을 수가 있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1)그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말은 가짜이다. 그는 도인이라 그런 (유치한) 말은 하지 않는다.
2) 그가 그렇게 말을 했다면 그는 속인이다. 고로 경봉 스님은 도인이 아니다.

이렇게 결론이 나오니 참 딱한 일이라고 해야 하겠다. 당장 경봉 스님에게 지도를 받았던 선객들이야 그래도 그를 알기에 그 말이 가짜라고 하는 것을 알았겠지만 후에 몇 백년이 흐른 다음에는 또 어떻게 할까? 잠깐만 생각을 해봐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3. 어디 조작이 한 둘이랴.....

하기야 일일이 거론을 할 수도 없을 정도의 조작은 있을 것이다. 그러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겠지만, 그래도 늘 존경하는 분이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차라리 부처님의 열반에 드시는 장면이 그래도 인간적이다.

"아난아 배가 몹시도 아프구나. 더 못 걷겠다. 여기에 자리를 깔아라. 그만 쉬어야겠다. 여래는 여기에서 열반에 들 것이니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