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2화] 눈(眼)

작성일
2003-09-10 16:37
조회
6467
[제202화] 눈(眼)



내일이 추석(秋夕)이다. 가을의 저녁이라는 뜻일까? 저문 가을이라니 아무래도

어색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아직도 여름의 잔 여운이 남

아있는 계절을 두고 가을의 저녁이라니 말이다. 뭔가 좀 어색하다. 그냥 그렇게

써 온 것이니까 그렇게 알고 있으면 되지 뭘 그러느냐고 하실 수도 있겠다. 그렇

게 말씀을 하시는 것은 자유지만 낭월의 생각이라면, ‘그건 아니올시다’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생각과 관찰력으로는 아무래도 진보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해

야 하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는 말이다. 뭘 그렇게 호들갑을 떠느냐고 하셔도 그

만이지만, 잘 생각해 보시면 사소한 것에서 늘 자연과 우주의 이치를 발견할 수

가 있다고 한다면 어딘가에 붙여진 이름 하나에도 그만한 의미가 있어야 하고,

그 의미가 이치에 부합되지 않으면 수정을 하거나 없애버려야 한다는 것도 고려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어를 배워보니 추석을 일러서 중추절(仲秋節)이라고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엇 저녁 강의를 마친 위총총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즁츄지에 콰일러~! 짜이찌앤(中秋节快乐 再见).”



중국인은 추석을 중추절이라고 한다는 정도의 상식은 아마 알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그 뜻을 보면 과연 자연에 훨씬 더 근접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면 가을의 중간이라는 말이 가을의 저녁보다 얼마나 잘 어울리

냐는 점을 생각해 보신다면 구태여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겠다. 더구나 어제

가 백로(白露)였던 것을 생각한다면 더구나 유월(酉月)이니 참말로 잘 어울리

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중국의 선조들도 결코 우리의 조상들 생각에 못지않다

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역시 많이 알지 않으면 지혜는 자랄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1. 눈도 각각, 보는 것도 각각.



눈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고양이의 눈, 들개의 눈, 사냥꾼의 눈, 사기꾼의 눈,

도인의 눈, 초목의 눈, 그리고 마음의 눈까지......



사람은 늘 눈의 정보에 많은 비중을 두게 되고 그래서 눈으로 보지 않은 것은 믿

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사실 눈으로 본 정보조차도 뭔가 석연치

않을 경우에는 어쩌지......? 가령 추석과 중추절에 대한 명칭의 사용만 봐도 그

렇다는 이야기이다. 일본은 뭐라고 하나? 추석을 말이다. 사전을 좀 봐야 하겠

다. 참, 말이 나와서 이야긴데, 가능하면 사전은 많이 갖춰놓고 있으시면 아주

필요한 때에 요긴하게 사용을 할 수가 있다는 점을 말씀해 드린다. 그러니까 혹

쓰고 싶어서 안달이 난 돈이 몇 만원 있는데,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를 경우에는

사전을 사 놓으시라고 권해 드린다. 한중사전, 한영사전(아마 대부분 있으실 것

같기도 하고.....), 한일사전, 한러사전, 한스사전, 한프사전 등등 각각의 지구촌

에 있는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투자하는 비용 치고는 그리 많다고 하지 않아

도 될 것이다. 잠깐......(뒤적뒤적.)



음, 일본도 그냥 추석인 모양이다. 글자가 그대로인 것을 보면 일본도 마찬가지

인 모양이다. 그런데 듣자니 일본은 양력으로 추석을 보낸다는 말이 있다. 이렇

게 되면 이것은 더 웃기는 이야기가 되어버리고 말게 된다. 음력으로 보름날을

해도 가을저녁이라고 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데, 하물며 양력으로 가을의 저녁

이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형식적인 행사에 불과하지 않은가 싶으니 참 어색하기

만 한 이름일 밖에....



그래도 그냥 이름에 의미를 두지 않고, 행사에 의미를 두는 것을 보면 참으로 편

리하게 살아가는 사고방식이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실로 양력위주로 모두를

처리하여 음력 설날도 없던 얼마 전의 우리나라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그래도

추석만은 음력으로 지낸 우리 위정자들의 안목이 그래도 나은 것이 아닌가 싶

은 생각도 문득 든다. 옛 이름에는 한가위라는 것도 있었던 모양인데, 달이 큰

것을 의미한 이름이라면 그래도 훨씬 나은 것이라고 생각을 해 본다.



이렇게 같은 날을 보는 눈이 서로 다른데, 실은 이러한 것뿐이 아닐게다. 하나

의 사건을 보는 것에도 서로의 눈이 각기 다르게 보이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라고 해야 하겠다. 가령 호주제폐지라는 일로 요즘 토론을 한다고 시끌벅적

한데, 이것도 참 보기에 따라서는 재미있는 장면이라고 생각이 된다. 물론 더러

는 아주 밤늦은 시간에 방송을 해서 좀 아쉽기는 한데, 그래도 가능하면 살펴보

려고 하는 편이다. 재미가 있는 것은 정말 서로의 의견이 팽팽하다는 것이고 그

것의 의미는 공통된 하나의 상황을 놓고 바라다보는 눈이 서로 완전히 상반된다

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데, 각자의 말을 들어보면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고 나

름대로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 더 재미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감로사의 공

부시간에 사주 하나를 놓고 용신에 대한 관점을 답하는 것에서도 그렇게 상반

된 견해를 내게 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사람의 의견(의견도 뜻으로 보는 것일

까?)도 각자각색이라는 것이 흥미롭다. 그래서 심리구조의 의미를 분석하는 일

이 또 즐겁겠지만 말이다.



2. 같은 마음으로 본다면 같은 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만약에 사물의 삼라만상을 보는 눈이 각기 다르기

에 그 상황을 읽는 것이 다 각각이라고 한다면 과연 같은 마음이 된 다음에 사물

을 바라보게 되면 모두가 같이 보이겠느냐는 점인데, 아마도 미리 판단을 하기

에는 보는 마음이 같을 진대, 그 결과도 같아야 이치적으로 부합이 되지 않겠느

냐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가능하다고 싶은 것은 도인의 눈은 모두 같을 것이

고, 중생의 눈도 모두 같을 것이라는 전제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싶다 그러니까

장사꾼의 눈이나 사기꾼의 눈이 모두 닮을 수가 있다는 것은 일종의 직업눈이라

고 할 눈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까지 확대를 해보게 된다.



그러다보니 사주쟁이의 눈과 점쟁이의 눈이 서로 다를 것이고 선생님의 눈과 시

험보는 학생의 눈도 같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급기야는 상담실을 찾아와서

자신의 길을 묻는 사람의 눈도 갖겠느냐는 의문이 든다. 물론 같을 리가 없다.

왜냐면 각양각종의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눈에 낭월의 설명이 과연 바르게 보일 것인지를 늘 고민하게 되기도 한다.



오늘도 한 방문자가 찾아와서 이야기를 한다. 앞으로 운이 좋다고 하니까 50이

넘어서 운이 약해질 떼에는 뭘 해야 하겠느냐고 한다. 그래서 뭘 할까를 생각하

지 말고 뭘 하지 않아도 될지를 생각해봐야 할 운이라고 해줬다. 과연 각자의 안

목은 그렇게 뭔가 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으로 입력이 되어서일까? 늘

허둥대면서 휴식을 취할 줄은 모르고 오로지 돈에 대해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

면서 최대의 목적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논다는 것은 경제의 최대 적이라고 하는 생각을 한

다고 해도 그를 탓할 수는 없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재성이 기신인 사람이 나이

60십이 다 되어서 뭔가 조바심으로 일을 벌여서 십중팔구는 실패를 할 암시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쉬는 것이 돈 버는 것이라고 알려주는 것은 당연

하겠는데, 이렇게 말을 하면 도무지 그 눈에는 믿으려고 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

이다. 참으로 정재가 합이 된 사람의 관심을, 돈이 아닌 수양으로 돌린다는 것

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하는 벽을 느끼게 된다.



요즘에 와서 드는 생각은 정말로 사람의 눈 개수 만큼의 각기 다른 해석이 존재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그만큼 사람의 생각이 각각이니 그에 대한 해석의

관점도 당연히 다른 것이 정상이겠지만, 이렇게 바라다보는 눈이 많은 상황에

서 일을 하는 사람일수록 그만큼 고통이 많지 않을까 싶은 것도 미뤄서 짐작이

된다. 가령 대통령의 일은 여하튼 절반의 반발은 예고된 것이라고 봐도 될 것이

다. 요즘 부안의 위도 문제도 그렇고 이런저런 법도 그렇고 여간 고역이 아닐 것

이라는 생각이 든다. 참 딱한 일이다.



3. 차라리 눈을 없애버린다면?



하하~ 진짜 현실성이 없는 뚱딴지같은 이야기이다. 애초에 말도 되지 않는 이야

기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될 수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눈

이 없어지게 되면 볼 수가 없으니 결국 평등하게 보는 셈이 되지 않을까? 물론

결과는 되어 봐야 알 일이다. 그렇지만 부처님도 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신 것

을 보면 아무래도 눈을 없애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셨음이 분명하

지 않은가 싶다. 믿어지지 않으신다면 다음 대목을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사리불아, 이 세상의 모든 이치는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

며, 더러울 것도 없고 깨끗할 것도 없으며, 증가할 것도 없으니 줄어들지도 않는

단다. 그래서 모두 비어버린 허공과 같으니 볼 수도 없어서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지라, 눈알도 귀구멍도 콧구멍도 혓바닥도 몸뚱아리도 생각할 건덕지

도 없느니라”



그래서 이런저런 분별심으로 생각하고 궁리할 것도 없다는 말씀인가 싶은데, 정

말 씹을수록 맛이 더하는 묘미가 있는 말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야

말로 평등하고 자유로운 상태에 도달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인가 싶기도 한데, 이

노무 눈깔이 장애가 되어서 늘 보는대로 분별심을 일으키게 되니, 학자의 견해,

농부의 견해, 학생의 견해가 어우러져서는 참말로 혼란의 구렁텅이를 만드는지

도 모르겠다.



그런데 상당히 머리가 좋은 일부 위정자(爲政者)들이 이러한 것을 지상에 이뤄

보고자 해서 공산주의를 만들어서 공평하고 불평이 없게 살아보려고 시도를 했

던 모양인데, 그게 맘대로 되지 않아서 결국은 국민의 문명만 뒤지게 만들어서

따라 잡느라고 허겁지겁하는 모양인데, 참 맘대로 되지 않음을 지하에서 안타까

워할 것이라는 생각이 짐짓 든다. 자연스럽게 되어야 할 상황을 인위적으로 해

보려고 했으니 잘 될 리가 없었을 게다. 다만 노력을 했다는 것은 중요하다고 하

겠다.



그래도 뭔가 비교적 공평한 눈을 얻기 위해서 노력을 할 필요는 있다고 하겠는

데, 그 중에서도 비교적 변화가 적은 눈을 얻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면, 자연을

이해하는 것이 그 중에는 비교적 안전하다고 생각이 된다고 말하면 벗님은 또

한 사주쟁이의 눈깔이라고 하실 가능성이 크겠다. 하하하~



우짜던둥 벗님의 눈이 보다 큰 눈이 되어서 자연을 이해하시고 늘 편안하신 관

점으로 세상을 받아들이시라는 기원을 드리면서 추석이든 중추절이든 상관이

없는 것은 언제나 오늘이 중요한 까닭이라, 즐거운 추석 되셔서 가족들과 행복

하신 이야기 나누시고 보다 나은 내일이 되시기를 기원드린다.



추석전날에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