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화] 길 닦기 (감로사 터와의 인연담)

작성일
2002-03-22 05:02
조회
6742

[제154화] 길 닦기 (감로사 터와의 인연담)


 

봄날이 좋기는 좋다. 버들이 눈트고 개나리는 노릇노릇한데 산골 화상은 일없이 먼 산을 바라보면서 졸고 있구나.

에구~ 그렇게 말하면 누가 믿을까. 다른 화상이라면 또 몰라, 천하에 분주하기가 이루 말을 할 수가 없을 정도의 낭월이면서 말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마음은 늘 한가롭다고 하고 싶은 것은 아마도 믿으실지 모르겠다. 물론 믿어도 좋고 믿지 않아도 상관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오늘은 길 닦는 이야기를 해드릴 참이다.

 

1. 남의 길, 내 길


길에 내 길과 남의 길이 있겠느냐만 그래도 현실적으로는 남의 길이 있는 모양이다. 하긴.... 그러니까 어떤 길을 가려면 돈을 내고 가기도 하는 것을 보면 분명 남의 길이 있다고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산고랑에 밭 때기를 구입해서 터를 닦을 적에도 그랬다. 그러고 보니 을해년이던가....

길이 없어서 어떻게 절을 지을 것이냐고 했더니 그때 터를 잡아 준 故(라는 글자를 쓴다는 것이 참 아쉽지만....) 김경보 선생이 이렇게 말을 했다.

“어허~! 스님도 참 걱정이 와 그리 많노.”
“아,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있능교. 길이 없는데....”
“길이 본래 있는 데가 어데 있더노.”
“그럼요....?”
“길은 사람이 살면 다 생기는기라.”
“그것도 옛날 말이지요. 요새야 어디 그래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뭐가 있겠노 다 같은기라.”
“그래도 길이 있어야 허가를 얻지요. 에구 참 답답네요.”
“참말로 누가 답답은지 모르겠데이.”
“그냥 집만 지어 놓으란 말이지요.....?”
“그렇다키이. 그래 놓으마 부처님이 길을 다 만들어 주시는기라.”
“부처가 무슨 길을 만들어 주능교.”
“스님은 뭐하는 사람고?”
“도 닦는 사람 아닝교.”
“그 도는 누가 만들었는데?
“그야 부처님이 만들었지만.... 그 도가 이도하고 같남....”
“글자가 다르나 발음이 다르나, 뭐가 다르노?”
“그야 같네요. 하하하~”
“그라모, 길은 스스로 닦아야지 길이 없다고 걱정을 하다니 그기 무슨 스님고 수~운 땡땡이지 하하하~”
“하하하~ 참말로 그렇네요. 할말 없심니더.”

해서 우선 움막을 지어서 살기 시작한 지가 벌써 6년째이다. 세월은 참으로 잘도 흘러가는 모양이다. 그리고 길에는 자갈도 깔고 평탄작업도 하고 해서 5톤 트럭이 들랑거릴 정도는 만들어 뒀다. 그렇지만 늘 남의 길이라는 부담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은 감로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무속인 집 마당을 거쳐서 들랑거려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욱 부담이 되는 것은 어떤 방문자들이 그 앞을 살살 지나지 않고 먼지를 일으키면서 달리면 바로 그 집 아주머니가 쫓아 오셔서는 ‘누가 남의 집 앞을 그렇게 달리느냐고 하면서 길을 막아버리던지 해야지’ 어쩌고 하게 되면 영락없는 남의 길을 다닌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곤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길에도 내 길과 남의 길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온 몇 년이기도 하다.

집을 지으면 길이 생긴다는 말만 했지 내 길이 생긴다는 말에 대해서 다짐을 하지 않은 것이 후회되기도 했다. 그 길도 길은 길이지만 속이 편하지 않은 길이라는 점이 정관(正官)과 합이 된 낭월의 부담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길을 내려고 이리저리 둘러봤지만 모두 돈을 한 보따리 들지 않고서는 꿈도 꾸지 못할 형편이었으니 그야말로 궁여지책으로 남의 길을 고개 숙이고 지나다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속도 모르는 방문자들은 그런다.

“스님, 들어오는 길이 참 좋네요.”
“그렇지요....(그래도 그게 남의 길인기라....)”
“소나무 숲도 일품이더군요.”
“예, 그렇지요.(소나무 숲이 없더라도 내 길이라야 하는데..)”

대략 그렇게 겉과 속이 다른 말을 하곤 했다. 그래도 달리 방법은 없었다. 외출을 할 일로 차가 나갈 적에는 낭월은 지름길로 걸어서 내려가 중간에서 차를 탄다. 특별히 비가 오거나 밤에는 그렇지 않지만, 보통은 그렇게 다닌다. 그 이유는 그 집 앞을 지나가기가 미안스러워서이다. 누가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답변은 그렇다.

“운동도 좀 해야지요. 운동하는 겁니다.”

그런데 눈치가 빠른 일광선생은 감을 잡고 묻는다.

“스님, 그 길로 다니면서 염력을 넣고 있는 줄 다 압니다.”
“염력은 무슨 염력을요.”
“그 땅을 사고 싶어서 그러시는 거지요. 맞지요?”
“땅을 무슨 돈으로 사요. 그냥 운동하는 것이라니까요.”
“그캐도 알고 안그캐도 압니다. 하하~”

2. 땅을 구입하게 되었다


참말로 집을 지으면 길이 생긴다는 말을 임오년 3월이 되어서야 실감이 나게 되었으니 땅을 계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늘 다니던 그 지름길을 얻어서 길을 만들 계획을 이제야 세우게 되었으니 시간은 비록 흘러갔지만, 결국은 길이 되기는 되는 모양이다. 적금도 찾고 보험 융자도 받고 부산을 피웠지만 결국은 땅은 구입을 하게 되었으니 그래서 이제 길을 닦고 있는 중이다. 진짜 중인 모양이다. 도를 닦으니 말이다. 하하~

며칠 전에는 감로사 수강생들과 길을 닦았다. 감로사를 아시는 분은 생각이 나시겠지만 바로 아래로 내려가는 지름길에 솔밭이 있다. 그 부분의 길을 우선 넓히는 것이 1단계였다.

덤으로 붙은 논이 몇 마지기 생겨서 당장 나무라도 심어야 하겠기에 포크레인 불러서 논두렁을 까뭉갰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도중에 소나무 몇 그루를 잡았다. 적어도 레미콘이 올라올 정도의 폭은 필요했다. 3.5미터의 대막대기를 들고 지나가면서 걸리는 것은 모두 사형선고를 내렸다.

테이프로 표시를 했던 것이다. 그래서 가르쳐 준 대로 밀어버린 나무들을 학생들과 잡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일이라고는 생전 해보지 않은 여천선생이나, 일이라면 이골이 난 김선생이나 다들 열심히 잘랐고 또 운반을 했다. 그렇게 한나절을 해서 길을 닦았다. 다만 위험한 전기톱은 배선생이 달라고 했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낭월이 들고 다녔다. 아무래도 주인이 위험물을 다뤄야지 학생에게 맡겼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노동력을 빌린 다음에는 몸보신(?)을 시켜 드리는데, 이날은 메기매운탕으로 했다.

3. 도를 닦는 다는 것


그리고는 저녁에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잠이 와야지.... 뒤척거리다가는 손전등을 들고 내려가서 거닐어 봤다. 새로 길이 날, 그야말로 내 길이 날 산속을 거닐면서 여러 생각들이 교차하였다. 또 길을 닦는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길을 닦는 것은 길을 비우는 것이란 것을 배웠다.
도를 닦는 다는 것은 나를 비우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길에 나무나 돌이 있으면 길이 되지 못한다.
마음공부에 자기가 버티고 있으면 공부가 되지 않는다.
나무나 돌이 있으면 치워야 길이 된다.
도를 닦으면서 분별심이 있으면 공부가 되지 않는다.
나무를 잡으니 고통이 따르겠지만 피할 수가 없다.
도를 위해서 자신을 버려야 하지만 또한 피할 수는 없겠다.
그렇게 작업을 하는 과정은 수고롭고 힘 든다.
수행의 길이 힘든 것도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그러나 마침내 길이 휑~하니 열렸다.
어느 순간에 문득 마음에 그렇게 텅~ 빔을 느낀다.
이제 그 길을 다지기만 하면 된다.
수행자들은 이 과정을 ‘보림을 한다’고 하더라.

이런저런 생각들로 서성이면서 길이 도와 다르지 않음을 비로소 느끼고 실감했던 모양이다. 다음 날에 강의를 하면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봤다. 학생들도 직접 그 노동에 동참을 했기에 더욱 실감이 나는 모양이다. 그래서 사주공부방이 일순 도를 닦는 방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이 날은 사주를 하나 밖에 풀지 못했지만 아무도 아쉬워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우리 공부방은 늘 이렇다. 하하하~

4. 나무도 심고


어제는 옥천에 가서 묘목을 한 차 사왔다. 마침 트럭을 끌고 공부하러 오신 스님이 계셔서 그 차를 대동하고 갔다. 그렇게 나무를 한 차 사와서는 밭에도 심고 길이 나면 길가에 아름답게 장식하려고 가식을 해뒀다. 토에는 목이 있어야 위엄이 산다고 해야 할 모양이다. 나무가 있는 길과 없는 길의 차이점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나무가 있는 곳이 멋지다고 느끼니 말이다. 여하튼 이렇게 해서 길을 만들 준비는 다 되었고, 그래서 낭월이 설계를 한대로 작업만 하면 된다. 나무는 또 도를 닦는 학생들이 잘도 심을 것이니까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겠다.

그러느라고 얼마나 바빴겠느냐는 말씀을 드려야 하겠다. 그 와중에 서버를 옮긴다고 부산을 피운 것은 153화에서 알려드린 대로이다. 이렇게 분주한 임오년의 3월은 하순으로 접어들었다. 이달이 다 가기 전에 새길로, 아니 내길로 차를 달리게 하고 싶다. 그렇게 하면 그 동안에 쌓인 도로고통살(?)은 말끔히 풀이가 되어서 마음이 개운할 것 같다. 그야말로 살풀이가 되는 것이다.

5. 길 닦는 즐거움


이렇게 도를 닦는 다는 것이 즐거운 것은 일을 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수년 전에 김경보 선생이 말을 해준 의미도 이렇게 해서 시간이 걸린 다음에야 비로소 알게 되니 참 둔한 것은 낭월이라고 해야 하겠다. 길을 비우고 마음도 비우고 방문자가 오거나, 거렁뱅이가 오거나, 열성팬이 오거나 나쁜 감정을 가진 방문자가 오거나 마음에 동요가 없이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야 하겠다는 생각도 겸해서 든다. 그것이 혹 자유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이쯤에서 기원을 드리고 싶은 것은, 벗님의 길에도 이렇게 많은 발전이 있으시기를 빌고자 하는 것이다.

“부디 많은 성취가 있으셔서 더욱 자유로우신 나날이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