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토(戊土)

작성일
2007-08-29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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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토(戊土)는 토의 기(氣)에 해당하고 양토(陽土)가 된다. 이러한 성분은 중력(重力)으로 대입을 하게 되는데, 만물이 지표(地表)에서 생명을 유지하면서 진화를 해 가도록 해 주는 역할이 된다. 그리고 무토의 기운에 의해서 생명력(生命力)이 활동을 하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는 것은 그것이 공간(空間)으로 존재하고, 만물은 공간에서 존재를 하는 까닭이다.

 

【하건충설(何建忠說)】

본원(本原)의 생(生)이 되므로 〔생원(生原)〕이다.

 

-해석-

생원(生原)이란 생명(生命)의 근원(根源), 혹은 원류(原流)라고도 하는 의미이다. 다른 성분(成分)과 사뭇 다른 느낌으로 대입을 하였는데, 그것은 무토(戊土)는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땅을 떠받치고 있는 성분으로 관찰이 되며, 우리가 존재하게 된 최초의 출발점으로 대입을 하고자 하는 노력이 보인다. 본원은 지구의 시작이 되기도 하는데, 그렇다는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과학자들이 나름대로 분석을 한 내용을 참고해 본다.

지구생성설(地球生成說)에 의하면 우주에는 먼지의 소용돌이가 있었다. 이러한 것이 점차로 중심을 이루면서 소용돌이로 뭉쳐지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공을 이루는 것은 인력(引力), 즉 끌어당기는 힘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세월을 두고 쌓아가는 과정에서 비로소 땅이 마련되고 여기에서 다시 생명체가 잉태하게 되었다. 결국 그 무토는 여전히 지구를 감싸고 있는데 최초의 먼지에 의한 소용돌이가 있었다고 한다면 혼돈(混沌)이라고 하고, 그 혼돈에서 무거운 것은 가라앉아서 땅이 되고, 가벼운 것은 떠있어서 허공(虛空)이 되었다고 해석을 할 수도 있겠다. 이러한 의미로 생명의 근원이 마련되었다고 봐서 생원(生原)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이야기들은 나름대로 땅에 남겨진 흔적들을 찾아서 꿰어 맞추는 것일 뿐이고 어느 것이 사실이라고 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다만 추정하여 그렇게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 외 여러 가지의 이야기는 그러한 것에 관심을 두는 학자의 몫으로 남겨 두기로 하고, 우리가 관찰을 할 것은 무토(戊土)의 모습은 중력(重力)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를 하면 된다.

 

【滴天髓-戊土論】

무토고중(戊土固重)하며 기중차정(旣中且正)하고,

정흡동벽(靜翕動闢)하여 만물사명(萬物司命)이니라.

수윤물생(水潤物生)이요 화조물병(火燥物病)하며,

여재간곤(如在艮坤)이면 파충의정(怕冲宜靜)이니라.

 

【뜻풀이】

무토는 단단하고도 무거운 성분이며,

이미 중심을 잡고서 반듯하기도 하다.

고요하면 닫히고 움직이면 열려서

만물의 생명을 관장하게 된다.

수분이 있어 윤택하면 만물이 창성(昌盛)하고,

화기가 많아서 조열하면 만물은 병이 든다.

북동향이나 남서향에 있을 것 같으면,

충이 두려우니 안정(安靜)함이 마땅하다.

 

【풀이】

지구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 무토(戊土)이다. 물론 지구는 허공이 받치고 있는 것이니 편의상 인력(引力), 혹은 중력(重力)이라고 하게 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막강한 실력자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무토인데 이를 일러서 허공(虛空)이라고 해도 되고, 무극(無極)이라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 무토의 영역이다.

‘단단하고도 무겁다’는 것은 중력의 흡인력(吸引力)이 얼마나 단단한지를 말하는 것이고, 모든 물질이 그 테두리를 벗어 날 수가 없으니 그보다 더 단단할 수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영혼조차도 그냥은 빠져 나가기가 어려운 정도이니 무겁기로 든다면 그보다 더 무거울 수가 없다.

이미 고인은 지구의 중력을 알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인가? 아마도 그렇게 봐야 하겠다. 고중(固重)과 중력(重力)은 완전히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놀라움으로 때로는 진저리가 쳐지기도 한다. 이것이 적천수의 십간론을 음미하고 되새기는 맛이기도 하다.

‘이미 중심을 이루고, 다시 올바르다’는 것은 뭘 의미하는가 하면, 중심이란 모든 중력은 한 곳으로 집중되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적중(的中)이라는 말로 가능한 지구의 핵심(核心)이 되는 것이다. 중(中)이란 그러한 의미로 쓰였다고 해석을 하게 된다. 그래서 지구의 중심으로 꽂혀있는 에너지의 힘을 느끼는 것으로 중정(中正)이라는 말을 하는데, 여기에서 바르다는 것은 어느 방향에서도 같은 힘으로 작용을 하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를 하면 되겠다.

이미 거미줄과도 같은 이러한 에너지로 뭉쳐진 상태에서 삼라만상이 존재하게 되므로 무엇이라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요하면 닫혀서 만물이 죽게 되고, 움직이면 열려서 만물이 살아나게 되는데, 이것도 다시 살펴보게 되면 호흡(呼吸)에 포인트를 맞출 수가 있는 것이다.

호흡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호흡은 들숨과 날숨에 불과하지만 생사(生死)의 경계(境界)도 바로 여기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있는 것이니, 이 들숨과 날숨이야말로 삼라만상의 생명력인 것이다. 동물이야 당연히 그렇다고 하겠지만 식물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리고 무토의 동정(動靜)운동을 부여받은 것은 생명력을 얻었다고 하고, 잃은 것은 죽었다고 하게 된다. 이러한 것을‘정흡동벽(靜翕動闢)’으로 관찰을 하게 된다. 그래서 뒤의 구절인‘만물사명(萬物司命)’이 말이 되도록 연결시켜놓고 보면 무토는 생각을 할수록 그 묘미가 더욱 깊어진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십간(十干)의 특성 중에서 만물의 생명을 관리한다는 구절은 무토에서만 보이고 다른 십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기토의 부분에서도 비슷한 말은 있지만 무토에 비할 바는 아니다. 이와 같은 소식에서 호흡간(呼吸間)에 있는 무토의 생명에너지와 역동성을 느끼게 된다. 과연 적천수의 글이 사람이 쓴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신(神)의 경지(境地)가 아니고서는 이러한 관찰을 600년 전에 했을 수가 있겠느냐는 경외심(敬畏心)으로 인해서이다.

정흡동벽(靜翕動闢)에 대해서 부연설명을 하면, 동물이든 식물이든 모두가 생명의 시작과 끝이 있고 응당 그래야 한다. 동물에서는 정자와 난자가 될 것이고, 식물에서는 씨앗과 발아가 될 것이다. 즉 한 알의 씨앗이 정(靜)할 적에는 그대로 닫혀 있다가, 싹을 틔우게 되는 환경이 조성되면 되면 비로소 동(動)하게 되어서 열린다고 하면 그대로 연결이 되는 것이다.

예전에 호두나무 아래에서 호두를 한 알 발견했는데 때는 따스한 봄날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딱딱한 껍질이 벌어지면서 속에서 싹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단단한 껍질에서 자연스럽게 싹이 밀고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 놀라웠던 기억이 퍼뜩 떠오른다. 이것도‘동흡정벽하여 만물사명하는 것’과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이 된다. 이와 같이 하나의 물상(物象)에서 여러 가지를 읽을 수가 있음이 곧 글의 공덕이며 선현의 지혜라고 하겠다.

다음에는 무토의 물질적(物質的)인 관점으로 살펴본다. 수분이 있어 윤택하게 해 준다면 만물이 살아난다고 했으니 이 말은 공기 중에 습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아무리 건조해도 그 속에는 일정 분량의 습도(濕度)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러한 습도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무토가 아무리 살리려고 해도 건조한 공간에서는 식물의 잎이 말라버리고 자궁에서의 태아도 유산이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수윤(水潤)이라는 것이 물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쉽게 생각하면 밭에 물을 뿌리는 것으로 생각을 할 수가 있겠는데, 그것이 아니고 습기를 말하는 것이며, 습기가 많아지면 비가 되는 것이니 이것까지를 포함해서 수윤(水潤)으로 보면 되겠다.

그렇다면‘화조물병(火燥物病)’의 의미도 같은 맥락에서 풀어보면 될 일이다. 즉 대기 중에 습기가 없고 건조하게 되면 만물은 병들어서 이내 죽고 만다는 것으로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경우를 놓고 본다면 화재의 현장을 생각해 볼 수가 있겠다. 화재의 현장에서 몸이 불에 타지 않았음에도 화기(火氣)를 흡수하게 되어서 폐(肺)가 망가져 생명이 위태롭게 되는 경우가 있음을 두고 드리는 말씀이다. 그래서 물에 젖은 담요를 둘둘 말고 탈출해야 하는 이유가 이러한 부분에서도 고려되어야 하겠다. 불 속에서 수분이 부족할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도 풀리지 않는 것이 간곤(艮坤)이다.‘간곤에 있을 것 같으면 충이 두려우니 고요하게 해주라’는 말은 뭘 의미하는지 아직도 요령부득(要領不得)이다. 천상 뒷날을 기다려서 다시 답을 얻어야 하겠다. 그런데 혹 임신한 상태라고 한다면 충하는 것이 두려우니 안정시켜야 한다는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하겠는지 생각을 해보게 된다. 어차피 앞에서 자궁 속의 소식을 생각해 본 것과 연계해서 살펴볼 수가 있는 내용이라고 하겠다.

 

【心理的인 해석-고독(孤獨)과 신비(神秘)】

무토의 심리적인 구조는 고독한 성분과 신비성(神秘性)을 갖고 있는 것으로 대입한다. 원래 고독과 신비는 서로 통한다. 그리고 고독하게 되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분명히 자신의 역할이 중요하고 자신의 역할이 없이는 잠시도 존재를 할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만물은 무토(戊土)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서이다. 우리가 순간순간을 호흡이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으면서도 공기의 의미는 잊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무토는 외롭다고 하겠으니 남들이 필요할 적에만 찾고 인정해 주지 않음으로 인해서 고독하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고독한 존재가 되면 현실적으로 자신을 알리고자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현실적인 사람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므로 초현실적(超現實的)인 영역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의 작용으로 인해서 다시 추가되는 상징은‘신비(神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토는 신비한 것에 대해서도 인연이 가장 많은 성분인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것을 연계하게 되면 무토는 종교(宗敎)도 되고, 수행자(修行者)도 되며 초현실적인 영역도 되는데, 이 모두가 무토의 확장된 의미로 서로 통하는 코드가 된다.

사람의 심리에서도 이러한 영향을 받아서 무토로 태어난 사람은 현실에 적응하는 면이 약하고 신비한 영역에 배회하다가 도인을 만나서 한 소식을 얻기도 하고, 또 영원히 사회의 방랑자로 떠돌아다니다가 삶을 마감하기도 하니 자연의 모습과 사람의 모습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무토(戊土)의 성분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이해하기에도 가장 난해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러한 성분을 십성(十星)에서는‘편인(偏印)’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이름을 얻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십성의 항목에서 설명을 하겠지만, 우선은 현실적이지 못한 특성으로만 이해를 해도 무방하다는 점만 알아두고 또 다음 기회에 더욱 깊은 관찰을 하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