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 제34장. 인연처(因緣處)/ 2.맹자(孟子)의 고향(故鄕)
작성일
2022-07-05 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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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 제34장. 인연처(因緣處)
2. 맹자(孟子)의 고향(故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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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염재가 아무리 생각해도 지광이 말하는 뜻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는지 다시 질문했다.
“정 사부께서 말씀하신 바위를 보고서도 합장하는 고승의 의미는 무엇인지 궁금해서 여쭙습니다. 개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있을 수가 있다손 치더라도 바위에조차 공경하는 의미가 있습니까? 그냥 제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닐까요?”
염재의 말에 지광이 다시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 염재는 엄숙하게 조성(造成)이 된 불상(佛像)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합장하지 않나?”
“그야 당연하지요. 물론 합장하고 절도 합니다. 그렇지만 바위는 다르지 않습니까?”
“다르긴 뭐가 다를까? 다른 것이 있다면 염재의 분별심이겠지. 하하하~!”
“예? 그건…… 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바위와 부처님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어허~! 이렇게 바보 같은 생각을 염재가 하다니. 생각해 보게 석불(石佛)은 어디에서 나왔겠나?”
“석불은 재료가 바위이니 석공(石工)의 공력(功力)으로 태어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것을 보게, 석공이 바위를 보는 순간 그 바위 속에 관음보살이 계신다는 것을 알아내고서 3년, 4년, 혹은 10년을 정과 망치를 들고서 속에 든 관세음보살을 찾아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겠네만, 하하하~!”
지광의 말을 듣고서야 염재는 그 의미를 어렴풋하게나마 이해가 되었다. 그러니까 불상을 만들기 전의 바위와 불상을 조각한 다음의 바위가 서로 다를 것이 없다는 것으로 이해하자 비로소 고개가 끄덕여졌다.
“정말이지 제자의 아둔함은 깜깜한 칠통(漆桶)인가 싶습니다. 이제야 무슨 의미인지 약간이나마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제 언젠가 불경에서 읽었던 내용이 이해되었습니다. 가르침을 들으면 이해가 하나 더하게 되는 것이 참으로 신기합니다.”
우창이 염재가 신기하다는 말에 물었다.
“신기하다니, 무엇을 깨달았구나. 그것이 뭐지? 설명해 보게.”
“예, 불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진리를 찾는답시고 불경을 읽다가 『화엄경(華嚴經)』을 보게 되었는데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이라’고 한 구절을 보고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두두물물이라고 하면 일체 만물(萬物)을 의미하는데 그 모든 것이 부처라는 것은 납득(納得)되지 않았으니까요. 아마 어쩌면 그때도 ‘만물(萬物) 중에 오직 인간이 최귀(最貴)하다’는 유가(儒家)의 가르침으로 머리를 채우고 있어서였을 것으로 생각은 됩니다만, 비록 그렇다고는 해도 아무리 납득(納得)하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에야 정 사부께서 말씀해 주신 바위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뭔가 눈앞의 가림막이 하나 벗겨지는 듯한 기분입니다.”
염재의 말을 듣고서 우창도 공감이 되어서 말했다.
“오호~! 그랬구나. 듣고 보니 나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해가 많이 편협(偏狹)했었다는 것을 깨닫겠네. 오행의 이치를 온전하게 타고난 것은 인간뿐이라는 생각도 없지 않았으니 말이네. 그런데 자연의 삼라만상이 모두 동등(同等)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다니 참으로 공부의 길은 무한(無限)하지 뭔가. 하하하~!”
우창도 저절로 통쾌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어려서 어머니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나서 지광에게 말했다.
“형님, 우제도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실로 모든 것이 서로 교감한다는 것을 생각하다가 문득 어려서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심심풀이 삼아 말씀을 드려 보겠습니다.”
우창이 이렇게 지광에게 말하자 지광도 환영했다.
“어서 말해보게. 아우님의 경험은 또 어떤 것이 들어있었는지 나도 무척이나 궁금하군. 하하하~!”
“실은 우제도 그 이야기를 듣고서 과연 이치적으로 타당한 것인지 믿을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늘 있었습니다. 과연 인간의 생명에 대해서 말도 하지 못하는 짐승이 개입할 수가 있겠느냐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지요.”
“그래? 아우님이 들었다는 이야기는 뭔지 해 보게. 궁금하군.”
“물론 앞의 이야기들과 서로 연관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거산을 위해서 들려주고 싶습니다. 하하~!”
그러자 거산은 물론이고 진명까지도 눈을 반짝이면서 우창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대중의 표정에서 이야기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자 비로소 말을 꺼냈다.
“어려서 들었던 이야기는 호랑이에 대한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그 옛날에는 호랑이가 흔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개를 넘어가게 되면 홀로 가지 못하고 주막에서 기다렸다가 여러 명이 모여서 길을 가곤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맞아, 지금도 그렇잖은가. 물론 화적떼나 산적도 무섭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무지막지한 호랑이에 비하겠냔 말이지. 하하~!”
“맞습니다. 그때도 산길을 가게 되었는데, 마침 큰 마차가 있었던가 봅니다. 그래서 십여 명의 사람을 마치에 태우고 산길을 가던 중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며 산중에서 호랑이를 만났단 말이겠군.”
이야기의 흐름을 듣던 지광이 미리 장단을 쳤다. 우창의 설명을 이끌어주려는 마음도 들어있었기 때문에 장단을 쳐준 것이다.
“그렇습니다. 마차가 산마루에 다다랐을 무렵에 얼룩얼룩한 대호(大虎)가 앞을 가로막았는데 일행 중에는 호랑이를 잡을 만큼 신체가 우람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다들 얼굴색만 파랗게 질려서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답니다. 그런데 호랑이가 달려들어서 사람이든 말이든 해코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길을 막고는 으르릉거리기만 하는 것이 좀 이상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참 이상하군. 무슨 요구사항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목에 걸린 뼈를 빼 달라거나 말이지.”
“아, 그런 말도 들어봤던 적이 있었던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 경우에는 그것도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길을 비키지도 않고, 그렇다고 달려들지도 않자 그중의 한 사람이 의견을 꺼냈더랍니다. ‘아마도 호랑이가 찾는 사람이 우리 중에 있는 모양이오. 안 되었지만 각자 입고 있던 옷을 차례로 호랑이에게 던져 봅시다. 뭔가 반응이 있지 싶습니다. 만약에 호랑이가 특정한 옷에 반응을 보인다면 그 사람은 안타깝지만 내려주는 것으로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이지요. 그 말에 모두 반박을 할 말이 없자 동의하고는 저마다 덜덜 떨면서 입고 있던 옷을 하나씩 던져줬답니다. 그런데 날아온 옷을 본체하지 않던 호랑이가 어린아이의 옷을 보고서는 달려들어서 발톱으로 움켜잡고 물어뜯어서 걸레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차마 말은 하지 못하고 아이를 내려놓고 가자는 눈빛을 보였고, 아이는 나이가 겨우 다섯 살쯤 되었고, 엄마랑 같이 있었기 때문에 엄마도 무서웠지만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이 떠밀어서 내리기 전에 아이와 같이 스스로 마차에서 내렸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혀를 찼다. 그다음의 장면이 상상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창도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놀랍게도 마차가 고개를 넘어가자 호랑이도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답니다. 엄마와 아이는 어쩔 수 없이 터덜터덜 고개를 넘어서 가파른 벼랑길을 지나가다가 보니까 앞에 떠났던 마차가 벼랑 아래로 떨어져서 사람들이 모두 죽고 마차를 이끌던 말도 죽은 것을 보게 되었더랍니다. 그제야 아기 엄마는 항상 산신령께 기도했더니 산신님이 살렸다는 것을 알고는 그 자리에 서서 죽은 사람들의 명복을 빌어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천지자연의 조화는 사람과 동물을 가리지 않는 것으로 생각이 되기도 합니다.”
우창의 말에 모두 숙연해졌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초목조차도 모두 정령(精靈)의 영향을 받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을 정리하던 염재가 말했다.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사람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초자연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까 요 며칠 동안 겪은 지맥이나 버드나무로 만든 지맥봉의 이치도 결국은 하나의 흐름을 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으로 오묘한 세상의 이치라고밖에 할 말이 없겠습니다.”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지광이 말했다.
“실로 산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은 호랑이를 산군(山君)이라고 하거나, 산중군자(山中君子)라고 말하고 직접적으로 호랑이라는 말도 사용하지 않는다네. 그만큼 수호신으로 생각한다는 의미도 그 안에 깃들어 있는 셈이지. 그리고 특히 기감(氣感)을 수련하는 사람을 지켜준다는 믿음은 의외로 깊다고 할 수가 있다네.”
지광이 이렇게 말하자 염재가 궁금해서 물었다.
“정 사부께서는 혹 호랑이를 직접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제자는 아직 그러한 경험이 없어서 궁금합니다.”
“보기만 했겠는가, 깊은 산에 있을 적에는 멀찌감치에서 지켜주기도 했다네. 참으로 영물(靈物)이라고 해야 할 것이네. 하하하~!”
지광의 말에 염재가 감탄하면서 말했다.
“아니, 그런 일도 있는 것입니까? 듣기에 호랑이를 타고 다니기도 한다는 말은 있었습니다만 말이 그렇겠거니 했는데, 실제로 호랑이가 산에 사는 사람을 지켜준다는 말은 처음 듣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산을 집 삼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호랑이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집을 지키는 개와 같이 본다네. 물론 그 신비한 존재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겠네. 호랑이라고 다 그런 것이 아니고, 특별히 영감이 있는 호랑이도 있다고 해야 맞을 것이네.”
“참 신기합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만나게 된다면 아무래도 심장이 쪼그라들 것만 같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이야 당연히 그렇긴 하겠지만, 산에서 공부하면서 가끔 늦게 귀가할 때는 눈에 불을 켰듯이 밤길을 밝혀주기도 하는데 보통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하면 아무도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네. 하하하~!”
“정말이군요. 스승님의 성품을 믿기 때문에 그 말씀조차도 믿겠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해코지하는 호랑이도 있고, 수행자를 외호(外護)하는 호랑이도 있다고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물론이네. 개도 사람을 무는 것이 있는 반면에 사람을 지키는 것도 있으니 같은 맥락(脈絡)에서 이해한다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네. 하하하~!”
“아하~! 이해가 됩니다. 보통 사람들은 해코지하는 호랑이만 생각할 따름이고 실제로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보호하는 호랑이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 관점의 차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 외에 다른 동물에서는 그러한 이야기가 없는지도 궁금합니다.”
“어쩌다 보니까 이야기가 봉신방(封神榜)처럼 되었네만, 실제로 다 믿어지지는 않더라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정도만 생각해도 해롭지 않을 것이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염재가 다시 말했다.
“어쩌면 봉신방의 배경도 어느 정도의 사실적인 이야기가 바탕에 있었을 것이라고도 생각해 봅니다. 짧은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도 분명히 있겠다는 생각을 이제야 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러자 지광이 말을 이었다.
“나는 그런 쪽에 관심이 많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내게 이야기해 주면 주로 그러한 이야기들이 많았다네. 한번은 아들이 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풍랑으로 배가 난파되었으니 살아날 방법이 없이 물에서 죽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으로 물 위를 허우적거리며 떠다니는데 눈앞에 바위가 하나 나타났다네. 그래서 안 죽고 살려고 그 바위를 잡고 올라탔더니 실은 커다란 거북이었다더군. 아무리 거북이가 크다고 한들 바위 같기야 했겠나만 물에 빠진 사람에게는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더군. 그런데 바위를 움켜잡았더니 그것은 거북의 등이었는데 놀랍게도 거북은 헤엄을 치더라네.”
“이제 죽는 것은 면했다고 생각했겠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염재가 말했다.
“그 사람도 죽음은 면하겠다는 마음으로 여유가 생겨서 주변을 둘러보니까 거북은 자신을 바닷가로 데려다줬는데 문득 거북의 등에 글씨가 보여서 희미하지만 읽어보니까 자기 이름이 쓰여있었다는 거야. 이 사람은 너무나 놀랍고 신기했지. 그 이야기를 집에 돌아가서 부모님께 말하니까. 죽은 줄만 알았던 자식이 돌아온 것이 놀랍고도 감사해서 합장하고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어머니께서 아들에게 말해 주셨다네. 귀중한 아들이 입신출세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무병장수를 바라는 마음으로 20여 년 전에 어디에서 물어보고는 아들이 명이 짧다면서 명을 이어주려면 용왕님께 기도하고 거북이를 방생하라는 처방을 듣고서 그대로 하셨다는 거야. 그러니까 어머니가 옛날에 기도하면서 거북을 구입한 다음에 등에 아들의 이름을 써서 방생했다고 말씀하셨다는 거야. 그 사람은 풍수지리를 공부할 적에 같은 인연이 되어서 만났는데 자신은 어머니로 인해서 두 번을 살고 있다고 하면서 참으로 믿기 어려운 경험을 했더군.”
“아니, 그러한 일도 있습니까?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네요.”
염재가 이렇게 말하자 지광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네. 믿으면 믿고 믿지 않으면 꾸며낸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실로 그가 겪었다고 했으니 나는 그 말도 믿는다네. 왜냐면 자연의 무궁한 변화의 인연법에는 무슨 일이든 다 생길 수가 있기 때문이라네.”
“참으로 스승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인과(因果)는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싶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훌륭하신 스승님들과 지혜로운 도반과 동행하는 것이 더욱 행복에 겹습니다.”
염재가 이렇게 말하자 거산도 한마디 했다.
“형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그 말씀에 거산의 마음도 보태고자 합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다시 듣기 어려운 이야기를 들으면서 동행하는 인연은 아무나 누릴 수가 있는 것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정말 고맙고도 감사합니다.”
지광과 우창은 그들의 마음을 짐작하지 못할 바도 아니었던지라 흐뭇한 마음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진명이 말했다.
“아우님들의 말을 듣고 보니 나야말로 감사를 제대로 드리지도 못한 것 같아. 두 분 스승님의 인연으로 해묵은 번뇌의 끈을 잘라버리고 이렇게도 날아갈 듯한 마음으로 공부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 마치 꿈만 같단 말이야.”
이렇게 말한 진명이 뒤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어디까지라도 동행하면서 하나도 놓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도록 하겠어요. 그리고 혹 허물이 보이면 언제라도 채찍질해 주시기만 바라면서 정진하도록 하겠습니다.”
진명이 이렇게 말하자 우창이 지광에게 말했다.
“진명은 아무래도 형님의 제자인연인가 싶습니다. 영감으로 인연이 되었으니 더욱 연마해서 천지(天地)의 조화(造化)를 깨달아서 멋진 공덕을 많이 쌓게 되지 싶습니다. 물론 우제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다면 아낌없이 가르치겠지만 말입니다.”
우창이 이렇게 말하자 지광이 답했다.
“내일의 일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네. 오늘 이렇게 함께 가는 것이 즐거울 따름이고 내일은 또 내일의 일이 있을 테니 무엇을 걱정하겠느냔 말이네. 서로 즐겁고 흥겨운 마음으로 동행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나? 하하하~!”
“맞습니다. 형님. 괜히 앞의 일을 염려했나 봅니다. 인연이 있어서 만났으니 열심히 가르치고 또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산길을 벗어난 마차는 제법 규모가 큰 마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장하던 일행은 깨끗해 보이는 식당 앞에 마차를 세우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곡부(曲阜)에서 남행하다가 다시 방향을 서북으로 틀어서 가던 중에 만난 성읍(城邑)은 추성(推聲)이라는 곳이었다. 주인이 안내하는 대로 식탁에 자리를 잡으면서 우창과 염재는 지광의 표정을 살펴봤다. 혹시 화맥이 흐르는 위로 자리를 잡자는 말을 하려나 싶어서였는데 아무런 말도 없이 주인이 이끄는 대로 식탁에 앉자 모두 싱거워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 먹을만한 요리를 좀 준비해 주시오~!”
지광이 주인에게 알아서 좀 챙겨 오라는 말을 던지고는 우창에게 말을 건넸다.
“아우님은 아직도 식탁의 화맥과 수맥의 생각을 잊지 않았던 모양인데, 그러한 것을 초월했다는 이야기는 잊어버렸나보군. 하하하~!”
지광이 이렇게 말하면서 조금 전에 우창 등이 신경을 썼던 것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우창도 웃으며 말했다.
“과연, 형님은 잊어버렸는데 우리는 마음에서 내려놓지도 못하고 여기까지 끌고 다녔습니다. 하하하~!”
우창의 말에는 답하지 않고서 도리어 물었다.
“추성은 어떤 곳인지 혹 들어본 적이 있나?”
“아닙니다. 초행이라서 잘 모르겠습니다. 형님의 말씀으로 봐서는 유서(由緖)가 깊은 고을인가 싶습니다. 말씀을 들려주시지요.”
“아, 염재는 알겠구나. 어디 아는 대로 말을 해 보게.”
지광이 염재에게 말하자 염재가 말했다.
“제자가 듣기로 추성은 아성(亞聖)의 고향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 아성이 누군가? 금시초문(今始初聞)인걸?”
우창이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다시 염재에게 물었다.
“아성은 맹자(孟子)를 존경하여 부르는 이름입니다. 공자(孔子)께서 성인인데 그에 버금간다는 의미로 맹자를 아성이라고도 하거든요. 그러니까 여기는 맹자의 고향이라서 곡부와 함께 유림(儒林)에서는 큰 성지로 꼽는 곳으로 알고 있는데 오늘 처음으로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아, 그런가? 그렇다면 요기하고는 맹자묘(孟子廟)를 들러서 참배(參拜)라도 하고 가야 하겠네. 또 혹시 모르잖는가 맹자께서 학문의 지혜를 쏟아부어 주실는지 말이네. 하하하~!”
“그렇게 하지요. 제자도 기회가 되면 맹자묘를 보고 싶었습니다.”
염재도 우창의 말에 동의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볶은 돼지고기와 삶은 만두가 나와서 시장하던 차에 든든하게 먹고는 맹자묘를 찾아 나섰다.
잠시 마차를 몰던 염재가 멈춘 곳은 맹자묘의 입구였다. 일행은 모두 옷매무새를 정돈하고는 안으로 들어서자 입구에 「승성문(承聖門)」이라고 쓴 편액이 붙어있었다. 승성(承聖)이란 성인(聖人)인 공자(孔子)의 뒤를 이었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었다. 우창도 맹자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는 못해도 대략적인 것은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맹가(孟軻)의 모친은 매우 적극적으로 아들의 미래를 만들어 주려고 했다는 것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안으로 들어가는데 한쪽에 석비(石碑)가 있었고, 「맹모삼천(孟母三遷)」이라고 쓴 글이 보였다. 그것을 보면서 진명이 염재에게 물었다.
“어 무슨 뜻이지? 이건 염재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겠구나. 맹자의 모친은 아마도 재혼을 세 번 했다는 뜻인가? 여기에 대한 고사가 있으면 들려줘 봐. 명색이 맹자의 사당에 왔는데 이런 것 정도는 배워야 하지 않겠어? 호호~!”
진명이 살짝 달뜬 표정으로 염재를 향해서 물었다. 아마도 그동안 마음을 짓누르든 자신의 처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자 기분도 더욱 상승했을 것으로 이해가 된 우창도 미소를 짓고 염재를 바라봤다. 염재도 진명이 자기를 신뢰하고 편안하게 말을 건네주는 것이 좋아서 얼른 대답했다.
“누나가 궁금하시다니 당연히 염재가 아는 만큼은 말씀해 드려보겠습니다. 맹자의 모친께서 세 번 이사했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홀로 아들을 키우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사람이 많이 사는 곳에서 자라는 것이 세상을 배우는 기회가 될 것이므로 좋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저잣거리에서 살았는데 하루는 맹자가 하는 행동을 보니까 ‘싸구려~’라고 외치고 다니거나, ‘골라골라~’라고 하는 것을 보면서 기가 막혔다고 합니다.”
“오호~! 무슨 뜻인지 알겠네. 아이들은 보는 대로 흉내를 내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상인들이 고객을 부르느라고 외치는 소리를 외워서 따라 했구나. 그렇게 되었다면 실망도 크셨겠네?”
“예, 그래서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이번에는 산골로 이사를 했더니 눈만 뜨면 보는 것이 죽은 사람들을 장사지내는 상여(喪輿)를 보면서 ‘어이~ 이제 가면 언제 오나~~’라고 그들의 소리를 따라서 흉내 내면서 다니는 것을 보고는 다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생각하셨지요.”
“에고~ 그게 무슨 청승이야. 호호호~!”
“맞습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글을 공부하는 서당 옆으로 이사를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어린 맹자가 학동(學童)들이 글 읽는 소리를 흉내 내며 다니는 것을 보고는 학당에서 공부시켰다는 이야기입니다.”
“아하~! 그래서 세 번 이사하셨다는 말이지? 정말 그 의미를 모르면 무슨 뜻인가 하겠네. 고마워~!”
“또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시지요. 힘이 자라는 데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하~!”
염재도 기분이 좋아졌는지 웃으면서 말하고는 계속 안으로 들어가자 또 비석이 나타났고, 글씨도 큼직하게 「맹모단기처(孟母斷機處)」라고 쓴 것이었다. ‘맹자 어머니가 베틀을 끊은 곳’이라는 뜻이었다. 진명이 다시 염재를 바라봤다. 무슨 뜻이냐는 뜻이었다. 그러자 염재도 그 의미를 설명했다. 우창도 이러한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서 염재의 옆으로 다가서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공부하러 보냈던 맹자가 하루는 집에 돌아왔더랍니다. 그래서 공부를 다 했느냐고 물으니까, 공부는 다 하지 못했으나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하는 말에 부엌에서 칼을 가져와서는 짜고 있던 베틀에서 베를 잘라버렸답니다. 그리고는 ‘네가 공부하다가 그만두는 것은 내가 베틀에서 짜고 있던 베를 잘라버리는 것과 같다. 이제 이것을 어디에 쓰겠느냐?’라고 했답니다. 그 말을 듣고는 맹자는 그길로 다시 공부하러 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베틀에서 베를 잘랐던 곳이 바로 이 자리라는 뜻입니다.”
염재가 이렇게 말하자 우창도 갑자기 마음이 숙연해졌다. 참으로 자식을 기른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신고(辛苦)를 감내해야만 하는 것인지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다만 지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일행이 다시 안으로 들어가자 비로소 사당의 입구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