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편관의 단독성분(單獨成分)

작성일
2007-08-29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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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관의 별명은 공포심(恐怖心)이다. 그만큼 십성 중에서 최악의 무서운 성분이다. 최악이라고는 하지만 또한 피할 수 없는 성분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편관의 성분은 나를 꼼짝 못하게 묶어놓는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상황이 무섭다고 해서 모두가 공포심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주에 편관이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공포심을 느끼게 반면, 편관이 없는 사람은 공포심을 느끼지 않는 것으로 이해를 하면 될 것이다. 같은 상황에서의 다른 소감은 이와 같은 연유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편관은 열등감(劣等感)이기도 하다. 남들은 모두 무엇이든 잘 하는 것 같은데, 자신은 아무것도 잘 하는 것이 없는 것처럼 생각이 되는 것도 편관이 느끼는 자괴감(自愧感)이다. 그래서 조그만 실수에 대해서도 자책(自責)하게 되고, 비참하게 생각하는 면도 나타나고 있으니 이러한 것도 편관의 작용이다. 그러다보니 모든 일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게 되고, 무슨 일이거나 자신감이 없어져 세상에서 적응을 잘 못하게 되는 현상도 발생하게 된다. 자폐증(自閉症)도 여기에서 기인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는 데에는 능동적(能動的)인 태도를 갖기 어려운 성분으로 작용한다.

편관이 있는 사람에게는 독립심을 키우라고 강요하게 되면 날이 갈수록 더욱 무력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렇잖아도 자신이 없는데, 웅변을 잘 하여 자신감을 갖게 되도록 강요하게 된다면 아마도 이 사람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서 점점 의기소침(意氣銷沈)하게 되어서 결국은 학원에 나가지 않으려고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부모가 자신의 아이는 자신감이 필요하다고 강요하게 된다면 결과는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진행이 될 수가 있음을 미리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자평명리학에 의한 심리 분석이 되는 것이다.

편관은 자신이 잘못한 것 없이 공격을 당하는 것으로, 강제로 폭행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만약에 어린 여자 아이가 사주에 편관이 있다면 밤길에 특별히 주의를 해야 하는 것은 언제라도 폭행을 당할 암시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이는 항상 뭔가 알지 못하는 두려움을 갖게 되고, 그러한 일을 당하지 않으려고 위험한 곳을 피하려고 하는데, 부모는 담력을 키운답시고 밤길을 강요하게 되는데, 그러다가는 돌이킬 수가 없는 상처를 입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주에 편관이 없는 아이는 폭행을 당할 암시가 없겠느냐는 반론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왜냐면 편관이 없다면 그것을 무슨 대단한 상처로 생각하지 않고, 그냥 길가다가 뱀에게 물렸다는 정도로 생각을 하고 깊이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상황이라도 사람에 따라서 그 정도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에 이 아이에게 편재가 작용한다면 오히려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이렇게 사람에 따른 차이는 극심(極甚)한 것이다. 물론 실제로 그러한 일이 발생한다면 좋은 일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그러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의 정신적인 상태는 다르다는 것으로 이해를 해도 좋다. 다만 편관의 두려움은 자신으로 하여금 위험한 곳에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보호본능으로 작용하게 되어 위태로운 지경을 피하는 좋은 작용이 되기도 하는 것으로, 이것은 편관의 양면성(兩面性)에 해당된다.

편관은 희생적(犧牲的)인 성분과 봉사적(奉仕的)인 성분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으므로 공익성(公益性)의 일에 헌신하게 되는 면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는 남들이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자신이 그 일을 하도록 강요받는다고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자원(自願)하게 되는 것으로도 볼 수가 있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고 하는 말은 편관이 가장 보람되게 생각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편관은 이기적(利己的)이 없다는 것도 한 면이다. 따라서 공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작게는 남들이 웃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이 스스로 망가질 수도 있고, 크게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폭탄을 짊어지고 적진으로 돌파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라크의 자살폭탄 테러라는 것도 알고 보면 편관의 성분에서 일어난 일이다. 애초에 편관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교육을 시키면 그대로 수용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학교 교육이라는 것은 서로 필요에 의해서 기준을 잡는 것으로, 그러한 교육을 받은 편관은 그대로 모두를 믿어버린다. 그래서 상식이 있는 사람이 생각을 하기에는 납득이 되지 않지만 그대로 자신에게는 그것이 진리이며 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대로 실행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좋은 작용을 하게 될 경우에는 자신은 돌보지 않고 남을 위해서 대의(大義)를 베풀게 되어 영웅으로 대우를 받을 수도 있는 것은 사욕(私慾)보다는 공욕(公慾)에 뜻을 두기 때문이다. 자신의 집안에 대한 일은 작은 일로 생각하고 국가(國家)나 민족(民族)을 위해서 하는 일은 대업(大業)이라고 생각해서, 자신의 가족은 돌보지 않고 일을 하는 경우에는 관살(官殺) 성분이 있을 적에 가능하다고 본다. 예를 들면 계백장군이 자신의 처자를 베어버리고 싸움터로 나아가는 형태나, 요(堯)임금이나 순(舜)임금과 같이 자신의 자식에게 나라를 물려주지 않고 능력이 되는 사람에게 물러줬던 것도 모두 관살의 관점이라고 이해를 할 수가 있다. 그 중에서도 객관성이 있다면 정관(正官)으로 분류를 하는 것도 타당하다.

편관은 세뇌(洗腦)되는 성분이기도 하다. 한번 입력되면 지울 수가 없다. 마치 쇳물을 주물 틀에 부으면 그대로 틀에 따라 굳어버리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일편단심(一片丹心)은 편관을 두고 하는 말이며, 초지일관(初志一貫)도 편관에게는 항상 있는 일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떤 성분이 초지일관이 가장 어려울까? 아마도 상관(傷官)이 그럴 것이다. 상황에 따라서 능소능대(能小能大)를 해야 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상관이 초지일관하고 있는 편관을 보면 조롱을 할 것이다. 물론 각자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이다.

편관은 위대하다. 그 위대한 이유는 개인적인 이익을 돌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교육받은 대로 실행하는 성분이기 때문에 편관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당연한 것이 위대한 사회라고 한다면 그 사회는 병이 깊은 사회일 수도 있다. 모두가 이기심으로 자신의 소유를 잃을까봐 전전긍긍하고, 남의 것을 조금이라도 더 취하고자 이익집단(利益集團)을 결성하게 되는 상황을 보면 편관(偏官)이 실종(失踪)되었다고 해도 되겠다. 사실 전 국민을 구한 사람에게 어떻게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고 물어보면 대체로 당연한 일을 갖고 왜 그러느냐고 하게 된다. 네덜란드에서 어린 소년이 둑에 물이 새는 것을 자신의 몸으로 막았다는 이야기도 이러한 편관의 행위로 간주하게 된다.

편관은 의지력(意志力)이 강하다. 왜냐면 처음 세운 계획을 그대로 진행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겁(比劫)이 갖고 있는 주체성(主體性)과는 다른 것으로 이해를 하게 된다. 주체성은 중간에 변경이 되어도 주체성이지만 의지력으로 추진하는 것은 변경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이해를 하게 된다. 가령 예술품을 만드는데 일생을 걸려서 완성했다면 이것은 주체성이라고 하기 보다는 의지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주체성은 중간에 변경사항이 발생하게 되면 적당한 이유를 대고 변경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생살이에서 일평생을 한 가지만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편관이 있다면 가능하다.

편관은 근검절약(勤儉節約)이 몸에 배어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편안하기도 하다. 그래서 자신의 안락함을 추구하지 못하는 면도 있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는 두려움으로 하지 못한다. 그리고 없이 살아도 마음만 떳떳하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식사시간을 대하더라도 시장기만 때우면 되지 호화스럽게 비싼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호화판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보게 되면 경멸할 수도 있다. 왜냐면 그렇게 누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수고를 했겠느냐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시정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다만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자신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일생을 누더기 한 벌로 살았다고 하는 백결선생(百結先生)은 그야말로 편관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거문고로 방아타령을 만들어서 아내를 위로했다는 것을 보면 없는 것을 한탄하지 않고 편안하게 생각했을 법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