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木

작성일
2007-09-10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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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목이다. 나무라고 하는 것이 뭐냐고 묻는 사람은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적어도 한국 사람이라면 말이다. 이 한글자를 음미하면서 오행의 20%를 알게되는 것이다.

우선 보기에 가장 변화가 분명하다. 나무의 종류를 보면서 목을 이해한다. 물론 물질적인 것이 모두 다는 아니지만, 일단 기본적으로 가장 물질적인 것으로 이해하기에 용이한 성분이기도 한 까닭이다. 목은 그 본성이 仁이라는 것으로 꾸며져 있다. 그래서 목의 성분이 강한 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질다고 한다. 그러나 목이 지나치면 불인(不仁)이 되는 것은 같은 木의 陰陽에 불과하다.




혼돈→양→양중의 음→다시 음양으로 분리→십간의 갑을(甲乙)

陽(甲) : 소나무, 은행나무, 대들보, 추진력, 벋어나가는 기운,

陰(乙) : 잔디, 곡식, 잡초, 넝쿨식물, 지구력, 적응성




이러한 기본적인 성분을 갖고 있는 목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어린 시절을 나타낸다. 맹모삼천(孟母三遷)이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어려서는 환경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뜻이 여실하다. 그런데 과연 나무라는 구조를 볼적에 환경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나게 느낀다. 바위주변에 떨어진 도토리와 기름진 토양에 떨어진 도토리는 그 성장하는 환경에서 얻는 차이점을 여실하게 느낄 수가 있겠기 때문이다. 물론 木이라는 것이 완전히 나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자연계에서 가장 목을 닮은 것은 나무라고 하는데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리라고 본다.

자평진전(子平眞詮)에서는 양목을 일러서 목의 기운(氣運)이라고 하고, 음목을 일러서는 목의 질(質)이라고 표현했다. 음양을 기와 질로써 구분한듯 한데 일리가 있는 이야기라고 본다. 음양이 원칙적으로는 물질과 기운으로 분별을 할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구분을 시도하는 것은 음과 양을 어떻게하면 좀더 가까이서 이해를 해볼것인가 하는 생각이 된다.

목은 기본이 발산하는 성분이다. 그 성분이 주변에서는 식물성(植物性)에 가장 많은가 보다. 식물은 자란다는 의미가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다른 것들과 비교해서 볼적에 木이라고 하는 것은 이점이 특별하다고 본다. 이렇게 성장하는 성분은 사람에게도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 중에서도 어린 사람에게 많아고 봐서 사람에게는 어린 시절을 청춘기(靑春期)라고 한다. 청춘에서는 木이라는 이미지가 상당히 강하다. 푸를 청은 목의 색깔을 의미한다. 봄 춘도 목의 계절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람의 木인 청년기에는 항상 미래를 생각하고 기분에 좌우되고 꿈이 많고 육체도 하루가 다르게 성장을 하고 있다. 사소한 억압에도 견디기 힘들어하고, 하고 싶은 것을 자제하는 힘도 부족하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너무나도 木을 닮았다. 그래서 이러한 주변을 보면서 목을 이해하는 것이다.

목은 인내심이 부족한 반면에 순수하기도 하다. 젊은 사람들이 모여서 토론을 할적에 참가해보면 사회와 타협하지 않는 순수함이 배어있다는 것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순수한 것도 또한 목이라고 한다.

그리고 목은 또 욕심이 많다. 청년들은 뭔가 자신의 목적달성이 이뤄질거라고 생각하는듯 하다. 그래선지 몰라도 항상 일에 집착을 한다. 그러한 점은 일단은 바람직하지만 역시 적당한 것이 보기에도 좋다. 뭐던지 자신의 뜻대로 하려고 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또한 좌절을 하기도 하는 청춘은 아무래도 좀 덜자란듯 하다. 목의 기본성분이 희망(希望)이기 때문일 것이다.

목의 양은 앞으로만 나아가려고 한다. 앞으로만 나가려고 하는 것은 용수철과도 같은 의미가 있다. 어린 아이들은 항상 미래에만 관심이 있다. 과거라는 것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직 미래에만 마음이 가는 것은 목의 시기라서 그렇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몇 살 더 먹으면 학교에 가느냐?

몇 밤 더 자면 생일이 되느냐?

항상 이와같은 질문을 입에 달고 있다. 이것도 역시 목의 성분으로 이해를 한다. 목은 언제나 이와 같이 희망을 포함한다. 희망과 욕심이 비례한다는 것도 재미있다. 욕심이 없으면 목숨을 달아놓고 일을 추진하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젊음이란 그렇게 한가지 일을 향해서 돌진을 할 적에는 좌우를 돌아보지 않는다. 좌우를 살피기 시작했다면 이미 木의 성분을 벗어났다고 해야 할런지도 모른다.

학생들이 사회가 부패했다고 시위를 하는 것을 보면서 앞만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부패를 한 이유라던지 사람이 살아가는 여러가지 이유 등을 생각하다 보면, 모든 부조리도 이해를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부조리가 진리라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에는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렇게 허구헌날 길거리에서 최루탄을 마시면서 시위에 가담을 하지 않을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사회가 공평해지지 않으면 굶어 죽어도 좋다는 식으로 일을 삼아서 떠들고 다니던 친구도 군대를 다녀 와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위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아직 철이 덜 들었군.’하면서 혀를 찬다. 정말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생각하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목의 기운이 어느듯 火의 기운으로 변해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