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오행생극론(五行生剋論)

작성일
2007-09-10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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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인 오행의 독립된 상태에서는 간단하지만, 서로 만나는 과정에서는 또 별개의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서로 좋아하는 관계가 있는가 하면, 혹은 서로 싫어하는 관계도 성립하게 된다. 이름하여 五行生克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 생하고 극하는 관계를 음미하면서 사회라는 구조도 짐작을 할 수 있게 된다.




 

















相生


水가 생함


木이 생함


火가 생함


土가 생함


金이 생함


火를 생함


土를 생함


金을 생함


水를 생함


木을 생함


木生火


火生土


土生金


金生水


水生木


相剋


金이 극함


水가 극함


木이 극함


火가 극함


土가 극함


土를 극함


金을 극함


水를 극함


木을 극함


火를 극함


木剋土


火剋金


土剋水


金剋木


水剋火

 




相生 : 관계에 있어서의 양(陽) - 가정의 분위기를 갖는다. 서로 보호하고 생해주는 의미인데, 대개는 좋은 의미를 나타낸다. 좋은 것이 좋다는 의미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생이 오히려 병이 되는 수도 있으므로 한가지로 집착을 하는 것은 금물이다.




相剋 : 관계에 있어서의 음(陰) - 보통 상생을 좋아하는 사람은 상극을 싫어한다. 생의 반대개념으로 극이 쓰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또 경우에 따라서는 극도 묘약이 될 수가 있다. 비상을 잘 써야 명의가 될 수 있는것인지도 모른다. 이 극은 비상과도 통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다시 음양론을 보게 된다. 생극(生剋)은 바로 관계에서의 음양이기 때문이다. 생은 긍정적인 관계를 의미하고, 극은 부정적인 관계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가 있겠다. 그리고 이 생극은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므로 어느 한쪽은 좋다고 하고, 어느 한쪽은 싫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알아둬야 하겠다. 내자식만 이쁘다고 하는 어머니가 자식이 남들에게 두들겨 맞거나, 시달림을 받는 것이 싫어서 일평생 동안 치마속에다가 넣어놓고 기른다면, 그 자식은 장차 스스로 밥도 떠넣지 못하는 불구자(?)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사회에서 부딧쳐서 깨어지기도 해보고, 또 당해보기도 하면서 그렇게 살아가야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에도 능히 스스로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강인함이 생기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생(生)만을 좋아하고 극(剋)을 싫어한다고 하면 이런 사람은 틀림없이 위에서 말한 어머니와 동일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다.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쳐진 사람이 살아가기에는 이 사회의 구조가 너무나 복잡하게 생겨먹었다.




달콤한 행복만을 추구한다는 것이 희망사항이 될 수는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대개는 알고 있다. 행복한 삶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정진이 필수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선 안정된 가정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일터에서 쉬임없이 일을 해야 한다. 그러면 한꺼번에 돈을 왕창 벌어놓으면 될 것이 아니가? 하는 꾀를 생각해 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한꺼번에 왕창 떼돈을 벌기 위해서도 남들보다 더 많은 궁리를 해야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결론이다. 물론 그 방법의 선악(善惡)은 생각하지 않겠다. 어떻게 하던지 행복만을 추구한다는 것이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기를 치던지, 강도를 하던지, 그 문제는 간섭하지 말자는 것이다. 다만 재물의 풍요가 행복에 상당한 기준이 되는 것이 사실이므로 그 재물을 모으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어느 벗님은 명리학은 윤리감이 없다는 말을 하였는데,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도둑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운이 좋다는 말은 그만큼 많은 물건을 훔칠 수가 있다는 말을 한다는 것에서 윤리감이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는데, 윤리의 분야는 종교가 맡아야 할 것이다. 만약에 우리 명리학이 윤리에 대한 것조차 언급을 한다면 이것이야 어디 학문이라고 하겠는가? 그야말로 전천후 종교가 될 것이 아닌가 말이다.

학문은 어디까지나 학문이다. 학문이 그 이상의 월권을 한다면 자연히 혼란이 발생을 하게 된다. 학문은 학문인 것이다. 그리고 그 이상의 영역은 또 다른 분야에서 담당을 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영역으로 남겨주자는 것이 낭월이의 생각이다. 그리고 이 학문에서는 길흉에 대해서만 논한다. 물론 깊이 들어가면 청탁이든 심리문제든 모두 언급을 하게 되겠지만, 크게 나눠서 본다면 길흉에 대해서 논한다고 해서 틀리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도둑놈의 길함과, 사업가나 교육가의 길함이 서로 원천적으로는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도둑도 도둑나름대로의 최선이 있기 때문에 그 최선에 대해서 좋은가 나쁜가 하는 것에는 명리학적인 해석이 따르기 마련이다. 어떠한 경우든지, 도둑질은 나쁘므로 좋은 운이 와도 작용을 하지 않는다는 등의 공자님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은 명리학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렇게 공자님의 잣대로써 조언을 한다고 하면, 참다운 카운셀러가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가정에서 부인이 남편을 두고서 또 애인을 갖은 경우에도 상담을 의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한 경우에도 공자님의 답변을 해준다면 그 사람은 명리가를 찾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명리가에게 질문을 하는 것은 오로지 운명적으로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고 싶은 것이니 만큼 자신의 사주에 따른 답을 들려주는 것이 올바른 상담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윤리적인 문제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차원에서 이야기를 하면 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사회에서 전개되는 음양이라고 본다. 음이 있고, 양이 있는 것이 사회의 현실인데, 그 모두를 다 인정하고 중립적인 마음으로 해석을 해야 올바른 명리가의 안목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이러한 말씀을 첨가하는 것이다. 이 모두는 사회살이를 이끌어 가는데서 모두 필요한 구조들이라고 생각하자는 것이다. 그들 자체의 선악은 생각할 것이 없이...